鳳尾山 神勒寺
神勒寺는 驪州市 川松洞 남쪽 鳳尾山 자락 南漢江가에 있는 大韓佛敎 曹溪宗 제2敎區 龍珠寺의 末寺로, 대부분의 절이 山에 있는 山寺인데 반하여 신륵사는 古刹로는 유일하게 江가에 위치한 江寺 名刹이다.
新羅 眞平王 때 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高麗 末 禑王 때 懶翁 惠勤(1320~1376)이 王命으로 楊州 檜巖寺에서 密城(현 密陽) 瑩源寺로 가는 도중 이 절에서 入寂하고 난 후부터 크게 증축하여 200여 칸에 달하는 大刹이었다고 한다. (*懶: 게으를 나 *檜: 전나무 회 *瑩: 밝을 영 *寂: 고요할 적)
조선시대에는 排佛政策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으나 睿宗 1년(1469) 英陵을 驪州로 移葬한 후 成宗 3년(1472) 補修∙增築하고 英陵의 願刹로 삼아 報恩寺라고 불렀다. (*睿: 슬기 예)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境內의 東臺 위에 있는 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며, 절 이름을 ‘神勒寺’라고 한 것은 彌勒 또는 王師 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甓: 벽돌 벽 *塼: 벽돌 전)
壬辰倭亂(1592)과 丙子胡亂(1636) 때 대부분 불타고, 1671년 再建, 1800년 增築∙補修, 1858년에 크게 보수하고 절 이름을 다시 神勒寺라 하고, 이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境內에는 金堂인 極樂寶殿을 중심으로 祖師堂·冥府殿·尋劍堂·寂默堂·奉香閣·七星閣·鐘閣· 九龍樓 등의 堂宇와 多層石塔을 비롯한 많은 寶物들이 있다.
*驪州지역 문화유산 답사는 明成皇后生家-寧陵-英陵-江漢祠-여주시내에서 午餐-神勒寺 순서로 답사하였으나 편의상 오찬보다 神勒寺를 먼저 올린다.
鳳尾山 神勒寺 사진
(01) 神勒寺 一柱門
(02) [鳳尾山 神勒寺] 一柱門 扁額
(03) [潮浦나루터]와 [위령비] 표석
신륵사 입구 강둑 아래에 있는 潮浦나루는 麻浦나루, 광나루, 梨浦나루와 함께 조선시대 4대 나루로, 완만한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 무거운 물자를 많이 운송하였다. 현재 인근에서 유람선이 운행되며 下流 쪽에 普濟尊者 懶翁 惠勤의 이름을 딴 普濟院이 있었다고 한다. (*潮: 밀물 조)
1963.10.25 安養 흥안국민학교(현 안양남초등학교) 학생이 神勒寺 수학여행 차, 이 나루를 건너다 渡船이 침몰하는 참변으로 49명이 溺死한 후 1964년 현재의 驪州大橋가 개통되고, 유서 깊은 조포나루는 폐쇄되었다.
(04) 神勒寺 普濟樓
*普濟樓는 절에 따라 萬歲樓·九光樓라고도 하며, 두루 모든 衆生을 濟度한다는 뜻에서 普濟樓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사찰 중심 佛殿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대체로 모든 法要式은 이곳에서 행하고 있다. (*濟: 건널 제)
이 누각이 있는 절은 대부분 不二門이 없어 불이문의 기능을 함께 하고 있으며, 이 누각 옆에는 法會 등을 알리는 儀式用具를 보관하는 鐘閣이 있다.
(05) 江 건너에 보이는 황포돛배
(06) 甘露水槽
水槽에는 물은 없고 흙이 가득하다. (*槽: 구유 조_
(07) 江月軒, 南漢江가 東臺 절벽 위에 있는 亭子
江月軒은 본래 懶翁禪師가 入寂한 후 화장터의 석탑 가까이에 세웠었으나 1972년 大洪水로 流失되어 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다. ‘江月軒’이라는 이름은 懶翁의 堂號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누각을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軒: 집 헌)
(08) 江月軒에서 驪江을 굽어보며 한숨 돌린다.
*조선시대 文人 四佳亭 徐居正은 ‘驪江물은 月岳에서 根源하여 달천(獺川)과 합하여 金灘이 되고, 仰巖을 거쳐 蟾水와 만나 달려 흐르며 점점 넓어져 驪江이 되었다. 물결이 맴돌아 세차며 맑고 환하여 사랑할 만하다.’고 평가하였다. (*獺: 수달 달 *灘: 여울 탄 *仰: 우러를 앙 *蟾: 두꺼비 삼 *驪: 검은 말 여)
*驪江: 驪州를 貫通하는 南漢江을 일러 驪江이라고 한다.
(09) 江月軒에서 보이는 南漢江(驪江)
*고려 말의 文臣·學者이며 三隱의 한 사람으로 驪江 근처에서 生을 마감한 牧隱 李穡(1328~1396)은 詩를 통해 이렇게 읊었다. (*穡: 거둘 색)
天地無涯生有涯(천지무애생유애) / 끝 없는 천지에 끝 있는 인생이로고
浩然歸志欲何之(호연귀지욕하지) / 浩然한 뜻 어디로 돌아가려는가
驪江一曲山如畵(여강릴곡산여화) / 驪江 한 구비 산은 그림 같은데
半似丹靑半似詩(반사단청반사시) / 반은 단청 같고 반은 詩 같구려 (*涯: 물가 애)
(10)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륵황포 1호]
(11) 驪州 神勒寺 三層石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東臺 巖盤 위 江月軒 옆에 있는 平面 方形의 3층석탑으로, 石塔樣式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건립되었으며, <神勒寺東臺塔修理碑>에 의하면 현재 탑이 있는 장소에서 고려 말의 高僧 懶翁 惠勤을 茶毘한 후 그 德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3층 塔身石과 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茶毘: 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시체를 火葬하는 일을 이르는 말.
*相輪部: 佛塔의 꼭대기에 세워 놓은 장식 부분.
(12) 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아래로 南漢江이 굽어 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건립된 塼塔(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京畿道와 慶北 安東지역에 몇 基가 남아 있다.(*塼: 벽돌 전)
탑은 2단의 基壇과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塔身을 올렸으며, 기단과 계단은 花崗巖으로, 塔身部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아 7층같이 보이기도 하는 구조이다.
*탑의 북쪽에 수리할 때 세운 비에는 ‘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는 年代가 있어 조선 英祖 2년(1726)에 다시 세운 것으로, 현재의 탑은 건립 당시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긴 무늬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처음 건립 이후 여러 차례 수리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13) 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閣
(14) 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있던 大藏閣(佛經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造成에 관한 기록을 새긴 碑로, 牧隱 李穡이 恭愍王과 父母의 冥福을 빌기 위하여 普濟尊者 懶翁의 제자들과 함께 發願하여 <高麗大藏經>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2층의 大藏閣을 건립하였다.
碑文은 藝文館 提學 陶隱 李崇仁이 짓고, 글씨는 進賢館 提學 春睡堂 權鑄가 썼으며,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僧侶와 信徒들의 명단을 적었다. (*陶: 질그릇 도 *睡: 졸음 수 *鑄: 불릴 주)
양 옆에 있는 돌기둥이 碑身을 지탱하고 있는데 이런 형식은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양식이다.
碑를 건립한 시기는 고려 禑王 9년(1383)으로 통일신라시대 이래 유행했던 龜趺와 螭首는 고려 後期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모양의 머릿돌로 簡略化 되었는데 이 碑가 그러한 變化樣相을 보여주고 있어 高麗 末 비석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龜: 거북 귀 *趺: 책상다리 할 부 *螭: 교룡 이)
*龜趺: 거북 모양으로 만든 碑石의 받침돌.
*螭首: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비석의 머리.
(15) 判敦寧 金公 炳冀 頌德碑 (*冀: 바랄 기)
*조선 후기 權臣 金炳冀의 頌德碑로, 哲宗 11년(1860)에 건립되었다
碑身 앞면에는 큰 楷書體로 ‘判敦寧金公炳冀頌德碑(판돈령김공병기송덕비), 그 옆에 작은 해서체로‘看役 五衛將 延安金智澤(간역 오위장 연안김지택) 이라고 새겼다.
뒷면에는 金炳冀가 神勒寺에 施主하여 法堂과 九龍樓를 보수했다는 내용이 楷書體로 13행을 새겼으나 碑題와 撰書者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撰: 지을 찬)
(16) 은행나무 -보호수 여주 66호 –수령 약 600년 -나무높이 22m
(17) 神勒寺의 주법당 極樂寶殿 지역
(18) 驪州 神勒寺 多層石塔 -보물 제225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