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제막급(噬臍莫及)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닿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이 그릇된 뒤에는 후회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噬 : 씹을 서(口/13)
臍 : 배꼽 제(月/14)
莫 : 말 막(艹/7)
及 : 미칠 급(又/2)
(유의어)
서제무급(噬臍無及)
서제하급(噬臍何及)
추회막급(追悔莫及)
회지막급(悔之莫及)
회지무급(悔之無及)
후회막급(後悔莫及)
후회막심(後悔莫甚)
출전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이 성어는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곧 기회를 잃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음의 비유한 말한다. 또는 사람에게 붙잡히게 된 사향 노루가 그 배꼽 향내 때문이라고 해서, 배꼽을 물어뜯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장공6년조(莊公六年條)에 나오는 말이다. 기원전 7세기 말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영토를 넓히기 위해 신(申)나라를 공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신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등(鄧)나라를 지나야만 하는데, 이때 등나라의 왕 기후(祁侯)는 문왕의 삼촌이었다. 문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등나라에 도착하자 기후는 문왕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이때 기후(祁侯)의 신하 추생, 담생(聃甥), 양생(養甥)이 기후에게 “문왕은 머지않아 우리 등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지금 없애지 않으면 배꼽을 물려고 하여도 입이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늦기 전에 계획을 세우십시오”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기후는 조카를 죽이면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욕할 것이라고 하면서 간언을 묵살하였다. 결국 10년 후 기후는 조카 문왕에 의해 멸망되었다.
서제막급(噬臍莫及)은 등나라 기후의 신하가 기후에게 앞날을 예측하고 간언한 데서 유래하며, 일이 끝난 뒤에는 아무리 후회하여도 소용없다는 뜻으로, 후회하기 전에 현명하게 대처하라는 말이다.
서제막급(噬臍莫及)의 유래에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옛날 사향(麝香) 노루가 사냥꾼에게 붙잡혔다. 사향 노루는 배 쪽에 사향(麝香) 샘이 있어 사람들은 이를 사용해 향약(鄕藥)과 분향(焚香)으로 사용하는 귀한 원료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붙잡힌 사향노루가 자신의 배꼽에서 나는 사향 냄새 때문에 붙잡힌 줄로 여겨 자신의 배꼽을 물어 뜯었다는 것이다.
사향노루는 이미 붙잡힌 다음에 배꼽을 물어뜯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줄도 모른 채 배꼽을 물어뜯는 모습에서 서제막급(噬臍莫及)이란 말이 유래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원말은 서제(噬臍)이며, 동의어(同義語)는 후회막급(後悔莫及)이다. 그래서 서제막급(噬臍莫及)은 ‘일이 끝난 뒤에는 아무리 후회하여도 소용없다’는 뜻으로, 후회하기 전에 현명하게 대처하라는 말로 널리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서제(噬臍)란 배꼽을 씹는다는 뜻이고 여기서 배꼽이란 수컷 사향노루의 사향주머니를 말한다.
그러면 사향노루는 왜 제 배꼽을 씹게 된 걸까?
사향노루가 있다. 이 놈은 코를 찌르는(射) 듯한 향내를 가진 사슴(鹿)이라 하여 한자로는 麝(사)라고 한다. 수컷의 배꼽 뒤쪽 피하(皮下)에 있는 사향낭(麝香囊) 속에 사향선(麝香腺)이 있는데 여기서 향료 성분이 분비된다.
사향낭은 무게 약 30g정도의 피낭(皮囊; 가죽주머니)으로 크기가 계란 만하다. 이 놈을 잘라 건조시키면 분비물이 다소 축축한 자갈색의 가루상태로 굳어진다.
옛 여인들은 이것을 물에 타거나 비단 자루에 담아 향주머니로 사용했다. 지금의 식물성 향료와는 달리 보기 드문 동물성 향료였던 셈이다. 물론 고가(高價)여서 일반 부녀자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궁중이나 호족 부인네들 사이에서 애용되었을 뿐이다.
사향은 또한 예로부터 강심제, 흥분, 경련을 억제해 주는 진경제로 쓰이고, 각성제로도 사용되었으며 기응환(奇應丸)이나 구명환(救命丸)과 같은 처방제로도 사용되었다. 주로 티베트나 중국 북서부의 고산지대, 우리나라에 서식하는데 우리는 천연기념물 제21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중국 명(明)나라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보자. 사향은 크게 3종류로 나뉘는데 첫째가 생향(生香; 일명 유향)으로 최상품이다. 저절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산삼 만큼이나 귀해 부르는 게 값이다.
두번째가 제향(臍香)으로 사냥한 사향노루에서 떼어낸 것이며 세번째가 심결향(心結香)으로 쫓겨 달아나다 떨어져 죽은 사향노루의 피투성이가 된 배꼽을 말린 것이다. 이놈은 약(藥)으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장자(莊子)에 의하면 나무가 잘리는 것은 곧기 때문이다. 다 같은 나무라도 제멋대로 구불구불 자란다면 땔감으로야 쓰임새가 있겠지만 목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잔꾀 많은 원숭이를 잡는 데는 역으로 녀석의 잔꾀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제 딴에는 방비를 다했다고 여기지만 결국 제 꾀에 넘어가 덫에 걸리고 만다.
또 호랑이가 잡히는 것은 아름다운 가죽이 있기 때문이며, 곰은 웅담(熊膽) 때문에 제 명에 죽지 못한다. 고금의 역사를 보면 총명(聰明)이 지나쳐 화를 자초한 경우가 많다.
서제(噬臍)란 ‘배꼽을 물어뜯는다’는 뜻이다. 포수에게 쫓긴 사향노루, 궁지에 몰린 나머지 자신의 배꼽을 원망하면서 물어 뜯어보지만 때는 늦었다. 이처럼 일이 벌어진 뒤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서제막급(筮臍莫及)이라고도 한다. 후회막급(後悔莫及)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데는 많은 순간의 선택이 따른다. 삶의 선택을 한 후에는 언제나 그 선택이 옳은 것인가를 걱정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달리 선택 할 것에 대한 염려로 후회를 하는 것이다. 최고의 선택이 있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바로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도산사숙록(到山私淑錄)을 보면 천하에 가르쳐서는 안 될 두 글자의 못된 말이 있다고 한다. 소일(消日)이라는 말로 별로 할 일이 없이 세월을 보낸다는 말이다.
청년 시기의 황금같은 시간을 탕진하다가 오랜 시간을 소일(消日)로 허무하게 보낸 노년을 두고 매일을 아껴 뜻있게 살아가라는 말인 것이다. 촌음(寸陰)을 아껴 사람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일상의 소일(消日)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결코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행복한 삶, 후회없는 삶, 이 모든 것은 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버나드 쇼(Bernard Shaw)의 말을 챙겨 본다. "모든 일을 용서받는 청년기는 아무것도 스스로 용서치 않으며, 스스로 모든 일을 용서하는 노년기는 아무것도 용서받지 못한다"의 말을 챙긴다.
노인은 아무것도 용서 받을 수 없는 노년기를 향해 가고 있다. 노년기에 들어선 사람들은 스스로 모든 일을 용서하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후회없는 삶을 선택하고 그 뜻을 실현해 가는 사람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노년의 시기에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것처럼 달관하고 너그럽게 자비로우려고 하지만 그것조차 세상의 눈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주접스러운 마음을 가지면서 좋은 노년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최고의 선택은 무엇일가? 하고 생각해 본다. 여기에 용서의 사랑을 권해 보려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단편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책이 있다. 내용인즉 구두 제조업자인 남자가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서 세상에 온 천사 미하일을 돌보는 사건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 톨스토이가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담아 그의 신앙작품으로 쓴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단편에서 하나님의 벌을 받고 세 가지 질문의 해답을 찾으러 이 세상에 내려온 천사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사랑임을 알게 하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위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제시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살고 있음을 알게 하고 앞날을 보는 미래 지향적인 지혜의 선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지적함을 알게 한다. 그것은 사람의 삶은 사랑의 삶이요 그 사랑의 극치는 용서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랑의 삶을 다한 노년기에는 반드시 노년은 모두를 용서하는 시기임을 알게 한다. 그럼으로 사람의 삶은 사랑으로 살고 노년기에서는 그 실천이 용서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노년이 되면 외모의 우리 모습은 형편이 없다. 이러한 모습은 노년을 자꾸만 초라하게 한다. 그럼으로 노년에 있어 사랑의 실제적인 행위인 용서하는 일은 노인으로 하여금 돋보이게 한다. 용서는 회개와 배려가 따른다.
이러한 용서는 노년에 아주 값비싼 대가이며 귀한 시기임을 알게 한다. 그럼으로 지금까지 살았던 기억들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부족함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완고함이 있으되 타인의 처지를 시샘치 않으며 아무에게도 비굴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의 모든 것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늙으면서 얻는 것은 자유이다. 이것은 여유롭게 늙어가는 편안함의 아름다움이다. 그럼으로 긴장, 흥분, 집착이 사라지고 여유있는 마음이 생긴다.
사람과의 갈등을 져버리면 모든 관계가 가볍고 진정으로 용서 할 수가 있게 된다. 타인을 용서하면 내가 진 짐이 가벼워진다.
인간이 인간을 추하게 하는 것은 자기 갈등 때문이다. 서로의 소통을 가지면 자연히 그 사람은 아름답게 보이고 인간 또한 귀하게 보인다. 갈등의 해소는 소통이요 그것은 곧 회개를 갖는 사랑의 용서이다.
이렇게 노년은 용서하는 시기이다. 노년은 모두를 용서한다. 그래서 좋은 노년은 용서하는 것이다. 그래야 노인의 만용(蠻勇)은 둥글둥글해지고 사람을 보는 눈은 따스해진다.
사랑은 용서할 줄 알아야 사랑 할 줄도 안다. 용서는 내면의 평화를 열어주는 열쇠이다. 먼저 용서하라.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용서받는 사람보다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말한다. "그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그때에 그대는 용서하는 행복을 알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남을 책망할 권리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말이 사랑과 용서의 삶을 알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나 그 전통을 극복한 종교이다. 그 전통 극복의 중요한 요지는 사랑에 대한 해석의 차이이다.
유대인들의 사랑은 이웃에 대한 국한된 사랑이었다. 그들 스스로는 선택받은 민족의 자존심만으로 이방인들을 야만시하고 멸시하며 멀리한다.
그러나 그 같은 사랑의 개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웃의 한계를 넘어서서 보편적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강조함에 주목하게 한다.
여기에 준하여 기독교의 사랑의 윤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로 놓인 장벽인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그 장벽을 허물고 화해와 평화를 촉진한다.
인간들 사이에 있는 질투, 미움, 의심 등을 예수가 보여준 희생적 사랑, 용서의 사랑으로 용해시켜 평화의 사회를 만든다.
그것의 실천으로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라는 윤리를 배격하고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까지 대주며 십리를 가자고 하면 이 십리를 동행해 주는 절대 희생의 윤리임을 알게 한다.
예수는 자기를 모함하여 죽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용서의 사랑을 보여준다. 기독교의 생활윤리에서 강조하는 것은 용서이다.
용서는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이며 끝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노년에 이르러 어른다움의 성숙한 사랑의 증거로서 그 노년은 사랑의 행위자로서의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기도문(마태 6:9~13)에서도 알게 된다. 이것은 인류의 영원한 공존윤리(共存倫理)로서 용서의 윤리를 알게 한다.
예컨대 민주국가의 한 나라의 국가원수는 그만이 갖는 특권이 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케 하는 사면(赦免)이 있다.
형(刑)의 선고에 대한 효과의 전부 또는 일부를 소멸시키거나 형(刑)의 선고를 받지 않은 자에 대하여 공소권을 소멸시키는 일로 우리 헌법 79조에 사면법 1, 3, 5조의 조항은 국가원수의 사랑의 배려로 용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용서가 민주국가의 행세를 가름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한 나라의 최고의 국가원수만이 갖는 권한일진데 사람으로서의 성숙한 노년은 이를 수용하여 이해함이 좋은 줄로 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갈등은 얼마나 큰 고통이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TV에서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TV프로그램을 보게 된다.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의 그늘에서 살아 온 이들이 용서함으로 애한(哀恨)을 담은 슬픈 이야기들이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로 바꿔보는 것을 보는 것이다.
아프리카 숲속 어떤 부족 원주민들에게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용서 주간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 주간은 날씨가 좋은 날을 택해 실시하는 풍습이 있는데 그 부족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축제를 하고 친구나 이웃들에게 어떤 잘못이라도 있으면 용서해 주기로 서약하는 한 용서의 주간이 있다고 한다.
그 주간은 오해든 사실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을 모두 털어 내고 다 용서해 주는 것이라 한다.
노년기에 처한 노인들에게 권하는 것은 노년을 맞는 이들은 얼굴도 서로 모른 채 부모님이 맺어준 대로 한 평생을 살아온 분들로 부부관계가 좋은 분 또는 소 닭 보듯 좋지 않게 살아온 분 그리고 혼자 외로이 살아 온 분으로 여러 층이 시대적인 문화, 풍습의 문제를 안고 노년기를 맞는다.
노년기에 해결할 우리들의 마음의 과제는 용서와 관용이다. 이것이 해결 되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 한다.
여기에 한(恨)이 풀리지 않으면 행복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저 나라로 갈 때 하나님을 기쁘게 만날 수가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말은 용서와 사랑의 삶을 넌지시 보여주는 것이다.
성서(聖書)의 한 구절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 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 : 14,15)”
행복한 좋은 노년은 용서하는 것이다.
단미서제(斷尾噬臍)
주(周)나라 때 빈맹(賓孟)이 교외를 지나다 잘생긴 수탉이 꼬리를 제 부리로 물어뜯는 것을 보았다. "하는 짓이 해괴하구나."
시종이 대답했다. "다 저 살자고 하는 짓입니다. 고운 깃털을 지니고 있으면 잡아서 종묘 제사에 희생으로 쓸 것입니다. 미리 제 꼬리를 헐어 위험을 벗어나려는 것입지요."
빈맹이 탄식했다. 단미웅계(斷尾雄鷄), 이른바 위험을 미연에 차단코자 제 잘난 꼬리를 미리 자른 수탉의 이야기다. '춘추좌전'에 나온다.
고려가 망해갈 무렵 시승(詩僧) 선탄(禪坦)이 새벽에 개성 동문 밖을 지나다가 닭울음 소리를 듣고 시를 썼다. 그 끝 연이 이랬다. "천촌만락 모두다 어둔 꿈에 잠겼는데, 꼬리 자른 수탉만이 때를 잃지 않는구나(千村萬落同昏夢, 斷尾雄鷄不失時)."
파망이 바로 코앞에 닥쳤는데도 사람들은 그저 혼곤한 잠에 빠져있다. 꼬리 자른 수탉만이 홀로 잠을 깨어 어서 일어나 정신을 차리라고, 부디 때를 놓치지 말라고 울고 있다는 이야기다. 앞서의 고사를 활용했다. 이기(李塈·1522~1600)의 '간옹우묵(艮翁尤墨)'에 나온다.
'춘추좌전'에는 서제막급(噬臍莫及)의 고사도 보인다. 사향노루는 죽을 때 사향주머니 때문에 죽는다고 여겨 제 배꼽을 물어뜯는다고 한다. 사향은 고급 향료이자 약재여서 사냥꾼은 향주머니가 든 그의 배꼽만 노린다. 하지만 사냥꾼에게 잡히고 나서 배꼽을 물어뜯은들 때는 이미 늦었다. 제 입은 또 제 배꼽에 가 닿지도 못한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이 데생 모음집 '사제첩(麝臍帖)'을 남겼다. 그의 그림 실력을 높이 평가한 임금이 1748년 숙종의 어진(御眞)을 마련하면서 감동관(監董官)으로 참여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자신은 선비인데 천한 재주로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명을 거부하다 결국 파직당했다.
그림 재주로 인해 욕을 당한 후회의 마음을 화첩 제목에 담았다.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남에게 보이지 말라. 어기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勿示人, 犯者非吾子孫)."
수탉은 꼬리를 끊어 화를 면했고, 사향노루는 배꼽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재주 재(才)자는 삐침이 안쪽으로 향해있다. 밖으로 드러내기보다 안으로 감추는 것이 화를 멀리하는 길이다.
웅계단미(雄鷄斷尾)
수탉이 제 꼬리를 자른다는 뜻의 이 말은 공자(孔子)가 편찬한 역사서(歷史書) 춘추(春秋)의 주석서(註釋書)인 춘추삼전(春秋三傳) 중 좌씨전(左氏傳 또는 左傳)에 나오는 말로 기원전 520년 소공(昭公) 22년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동주(東周) 경왕(景王)의 총신(寵臣)이며 왕의 아들인 자조(子朝)의 사부(師父)인 빈맹(賓孟)은 당시 왕위계승 문제로 권력다툼이 격렬하던 때라 왕에게 아들인 자조를 빨리 태자(太子)로 세울 것을 권하였다.
그는 "소신(小臣)이 교외(郊外)에 갔다가 수탉이 스스로 꼬리를 쪼아 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곁에 있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묻자 '꽁지가 화려한 수탉이 제사 제물에 적합하다'고 사람들이 의논하는 말을 들은 수탉이 자기 자신이 희생물이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자기 꼬리를 자르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라고 왕에게 말했다.
수탉에게 있어 꽁지는 자존심과 화려함의 상징이지만 목숨이 달린 문제 앞에서는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비유의 요지였다.
이처럼 화(禍)가 닥쳐올 때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기회가 왔을 때 즉각 결단하여야 하는데 경왕(景王)이 국가 안위가 걸린 일에 결정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결단을 촉구하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왕은 빈맹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단목공(單穆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고사에서 유래한 웅계단미(雄鷄斷尾)라는 말은 이후 가장 중요한 일을 위해서는 아깝더라도 덜 중요한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게 되었는데 선비가 화(禍)를 피하여 스스로 자신의 재주를 감추고 은둔하거나, 왕의 신임을 크게 받던 노(老)신하가 관직을 버리고 조정(朝廷)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산이나 향리(鄕里)에서 은거(隱居)하는 모습을 비유 할 때도 사용되었다.
옛날 중국에서는 너무 재주가 많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면 주위의 시기와 모함 등으로 졸지에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기 때문이었다.
이 고사와 관련된 것으로 사향 노루가 '배꼽을 물어 씹으려 해도 입이 닿지 않는다'는 서제막급(噬臍莫及)이라는 말이 있다. 사향노루는 사냥꾼에게 잡히면 제 배꼽을 물어뜯으려 하는데 사냥꾼들이 사향이 들어있는 노루의 배꼽만 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슴이 배꼽을 물어뜯으려 해도 배꼽에 입이 닿지도 않고 이미 때는 늦었다는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평범한 골퍼들의 예를 들어보자. 파5의 긴 홀. 드라이버 샷을 멋지게 날렸는데, 가보니 공이 약간 아래쪽으로 경사진 페어웨이에 놓여 있고 앞에 있는 커다란 호수까지는 80야드 정도의 거리. 제2타는 180야드 이상을 쳐야 호수를 넘길 수 있는 상황. 마음을 비우고 호수 앞으로 두 번째 샷을 안전하게 날린 다음 여유 있게 제3타로 호수를 넘기면 파나 보기가 가능하다.
그러나 무리하게 페어웨이 우드를 잡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치니 공은 물에 빠져버리고 이를 만회하려다 오히려 실수를 연발, 트리플 보기나 더블 파를 하고 만다.
우리 아마추어 골퍼들이 웅계단미의 고사를 생각하고, 이럴 때 과감하게 욕심을 버린다면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니 이 고사성어가 주는 교훈은 옛날 이야기로만 듣거나 남의 일에만 해당한다고 그냥 흘리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하겠다.
▶️ 噬(씹을 서)는 형성문자로 唑(서)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筮(서)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噬(서)는 ①씹다, 먹다 ②깨물다 ③삼키다, 빼앗다 ④미치다(공간적 거리나 수준 따위가 일정한 선에 닿다), 다다르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물어 죽임을 서살(噬殺), 움켜다가 뜯어 먹음을 확서(攫噬), 개가 으르렁거리며 물어 뜯는다는 뜻으로 남을 괴롭히거나 못 살게 굶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은서(狺噬), 남을 업신여기어 침노함을 능서(陵噬),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닿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이 그릇된 뒤에는 후회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비유한 말을 서제막급(噬臍莫及), 무는 호랑이는 뿔이 없다는 속담으로 무엇이든지 완전히 다 갖출 수는 없다는 말을 서호무각(噬虎無角), 기르던 개에게 발꿈치를 물렸다는 뜻으로 제가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도리어 해를 입는 경우를 이르는 말을 양구서종(養狗噬踵), 용이 삼키고 범이 문다는 뜻으로 군웅이 서로 싸움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용담호서(龍啖虎噬) 등에 쓰인다.
▶️ 臍(배꼽 제)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육달월(月=肉; 살, 몸)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齊(제)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臍(제)는 ①배꼽(배의 중앙에 있는 탯줄의 자국) ②오이가 달린 꼭지(과실이 달린 줄기)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배꼽 밑을 제하(臍下), 배의 배꼽이 있는 부위를 제두(臍肚), 탯줄을 제대(臍帶), 탯줄로 태아와 태반을 연결하는 교질의 흰 육관을 제서(臍緖), 배꼽과 그 언저리가 염증으로 곪아서 생기는 갓난아이의 병을 제염(臍炎), 어린아이의 배꼽에 부스럼이 생기는 병을 제종(臍腫), 아이를 낳은 뒤에 탯줄을 끊음을 절제(截臍), 뜸을 뜨는 방법의 하나로 증제(蒸臍), 탯줄을 잘못 자르거나 자른 뒤에 바로 거두지 못하여 배꼽 언저리에 생기는 염증을 제대염(臍帶炎), 탯줄을 통하여 타아와 태반을 잇댄 핏줄을 제동맥(臍動脈), 신기腎氣로 말미암아 생기는 배꼽 아래가 아픈 병을 제축증(臍縮症), 종기부리의 한가운데가 움푹 들어가고 터지면 누르스름한 물이 흐르고 가장자리가 붓는 병을 어제정(魚臍疔),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닿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이 그릇된 뒤에는 후회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비유한 말을 서제막급(噬臍莫及) 등에 쓰인다.
▶️ 莫(없을 막, 저물 모, 덮을 멱)은 ❶회의문자로 暮(모)와 동자(同字)이다. 삼림(森林) 혹은 초원(草原)에 해가 지는 모양을 나타내고 해질녘의 뜻이다. 나중에 음(音) 빌어 없다, 말다의 뜻(無, 毋)으로 전용(專用)되고 해질녘의 뜻으로는 暮(모)자를 만들었다. ❷회의문자로 莫자는 ‘없다’나 ‘저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莫자는 茻(잡풀 우거질 망)자와 日(해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갑골문에 나온 莫자를 보면 풀숲 사이로 해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날이 저물었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해서에서는 아래에 있던 艹(풀 초)자가 大(큰 대)자로 바뀌게 되어 지금의 莫자가 되었다. 그러니 莫자에 쓰인 大자는 艹자가 잘못 바뀐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莫자는 이렇게 날이 저물은 것을 표현한 글자지만 지금은 주로 ‘없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해가 사라졌다는 뜻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다시 日자를 더한 暮(저물 모)자가 ‘저물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莫(막, 모, 멱)은 ①없다 ②말다, ~하지 말라 ③불가하다 ④꾀하다(=謨) ⑤편안하다, 안정되다 ⑥조용하다 ⑦드넓다 ⑧아득하다 ⑨막(=膜) ⑩장막(帳幕)(=幕) 그리고 ⓐ저물다(모) ⓑ날이 어둡다(모) ⓒ나물(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 이것을 양념하여 무친 음식)(모) 그리고 ⓓ덮다(멱) ⓔ봉하다(열지 못하게 꼭 붙이거나 싸서 막다)(멱)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몹시 크거나 많음을 막대(莫大), 힘이 더 할 수 없이 셈을 막강(莫强), 매우 중요함을 막중(莫重), ~만 같은 것이 없음을 막여(莫如), 또는 막약(莫若), 벗으로서 뜻이 맞아 허물없이 친함을 막역(莫逆), 매우 심함이나 더할 나위 없음을 막심(莫甚), 매우 심함을 막급(莫及), 가장 좋음을 막상(莫上), 아닌게 아니라를 막비(莫非), 깊은 밤이나 이슥한 밤을 막야(莫夜), 몹시 엄함을 막엄(莫嚴), 말을 그만둠이나 하던 일을 그만둠을 막설(莫說), 더할 수 없이 매우 강함을 막강(莫強), 황폐하여 쓸쓸함을 삭막(索莫), 고요하고 쓸쓸함을 적막(適莫), 어느 것이 위고 아래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말을 막상막하(莫上莫下), 도무지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을 막무가내(莫無可奈), 마음이 맞아 서로 거스르는 일이 없는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친밀한 벗이라는 말을 막역지우(莫逆之友), 아주 허물없는 사귐이라는 말을 막역지교(莫逆之交), 더할 수 없이 매우 강한 나라라는 말을 막강지국(莫強之國),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막불감동(莫不感動), 더할 나위 없이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말을 막중지지(莫重之地), 동서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을 막지동서(莫知東西), 자식을 가르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을 막여교자(莫如敎子), 매우 무지하고 우악스럽다는 말을 무지막지(無知莫知), 가는 사람은 붙잡지 말라는 말을 거자막추(去者莫追), 피할 곳 없는 도적을 쫓지 말라는 뜻으로 궁지에 몰린 적을 모질게 다루면 해를 입기 쉬우니 지나치게 다그치지 말라는 말을 궁구막추(窮寇莫追) 등에 쓰인다.
▶️ 及(미칠 급)은 회의문자로 사람의 뒤에 손이 닿음을 나타내며, 앞지른 사람을 따라 붙는 뜻으로 사물이 미침을 나타낸다. 전(轉)하여 도달하다의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及(급)은 ①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닿다 ②미치게 하다, 끼치게 하다 ③이르다, 도달하다 ④함께 하다, 더불어 하다 ⑤함께, 더불어 ⑥및, 와 ⑦급제(及第)의 준말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떨어질 락/낙(落)이다. 용례로는 과거에 합격함을 급제(及第), 임기가 다 되었음을 급과(及瓜), 뒤쫓아서 잡음을 급포(及捕), 마침내나 드디어라는 급기(及其), 배우려고 문하생이 됨을 급문(及門), 어떤 일과 관련하여 말함을 언급(言及), 지나간 일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미치게 하는 것을 소급(遡及), 널리 펴서 골고루 미치게 함을 보급(普及), 마침내나 마지막이라는 급기야(及其也), 어떤한 일의 여파나 영향이 미치는 범위가 차차 넓어짐을 파급(波及),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 네 마리 말이 끄는 빠른 수레도 사람의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불급설(駟不及舌), 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족탈불급(足脫不及), 학문은 미치지 못함과 같으니 쉬지 말고 노력해야 함을 학여불급(學如不及), 자기 마음을 미루어 보아 남에게도 그렇게 대하거나 행동한다는 추기급인(推己及人), 아무리 후회하여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다는 후회막급(後悔莫及), 형세가 급박하여 아침에 저녁일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는 조불급석(朝不及夕)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