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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형제여행 (兄弟旅行)
1.출발 (出發)
조자건의 하루 일과는 매우 단순했다.
우선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차가운 물로 냉수욕을
한다. 이어 산세(山勢)가 험악하기로 유명한
환원산(環轅山)으로 가서 나무를 가득 해 온다.
아침식사를 한 후 이 나무들을 땔감으로 쓰기 위해
천 번의 도끼질을 한다.
저녁에는 간단한 육합권(六合拳)을 정확한 동작으로
백 번 반복해서 연습을 하는 것으로 하루의
무공수련을 마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싱겁기조차 한 이 방법은 그의 형인
조립산(趙立山)이 계획한 것이었다.
조립산은 조자건의 유일한 혈육(血肉)이었다.
조자건의 나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들 형제는
고아가 되었다. 그때 형인 조립산은 조자건에게
물었다.
"너는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
조자건은 어린 나이에도 당돌하게 대답했다.
"나는 천하(天下)에서 제일(第一)가는 고수(高手)가
되고 싶어요."
조립산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다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좋다. 너를 천하제일고수로 만들어 주겠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그대신 너는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조자건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립산이 가장 먼저 조자건에게 시킨 일은 하루에
열 번씩 다른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라는
것이었다.
무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홉 살 때부터 조자건은
형을 따라 무림인들이 싸우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그들의 결전을 구경했다. 아무리 멀고 험한 곳이라
하더라도 무림인들의 결전이 있는 곳이면 그들 형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자건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조립산은 더
이상 그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그 대신 조자건은
스스로 싸움터를 찾아다녀야만 했다. 조자건은
무림인들의 결전이 벌어진다는 소문이 들리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가 그들의 결전을 자세히 관찰했다.
십 년(十年) 동안 그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싸움을 보아 왔다.
그리고 육 개월 전에 그의 열아홉 번째 생일날
조립산은 다시 그에게 말했다.
"더 이상 싸움구경을 하지 않아도 좋다. 이제부터는
무공을 익히기 시작해라."
조립산이 지시한 것은 아침에 천 번의 도끼질을
하고, 저녁에는 무림의 삼류무사(三流武士)들조차도
배우기를 꺼려하는 시시한 육합권을 반복해서 백 번씩
연습하는 것이었다. 조자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저녁마다 볼품없는 육합권을 정성 들여 연마하는
것을 보고 모두 비웃었다.
하나 조자건은 단 한번도 싫어하는 빛이 없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조립산의 지시대로 행동을
했다.
진표는 전에 이런 조자건이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자네의 재질은 내가 알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네. 그런데 왜 이런 시시한 무공에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나? 자네는 설마 이런
방법으로 천하제일고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그때 조자건은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믿지 않소. 내가 믿는 건 나의 형님이오."
조자건은 자신의 형이 결코 쓸데없이 자신에게 이런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립산은 한 달에 한번,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아무
예고도 없이 집에 들러 그의 진도(進度)를 살펴보고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하루나 이틀 있다가
다시 아무런 말도 없이 훌쩍 어디론가로 떠나 버리곤
했다.
조자건은 형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한번도 물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형을 진정한 사나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사나이라면 일단 자기가 하겠다고
결심한 일이 있으면 누가 뭐라 해도 하고야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늘 형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왔다.
다음날 아침.
조자건은 아침 일찍 나무를 하기 위해 환원산으로
갔다.
환원산은 천하에서 가장 험준한 산 중의 하나였다.
산세가 워낙 험악하여 길이 수레바퀴처럼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환원산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나무를 한 짐 가득 지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상처가 다시 터져서
동여맨 붕대에 피가 잔뜩 배어 나왔다.
그가 나무를 가득 짊어지고 내려오자 마침 그의
집으로 오던 진표가 입을 쩍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자네 정신 있나?"
그는 급히 다가오며 강제적으로 조자건의 어깨에서
나뭇짐을 건네 받았다.
조자건은 별일 아니라는 듯 빙긋 웃었다.
"오늘은 약간 힘이 드는군."
진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멀거니 그를
쳐다보았다.
"약간 힘이 든다고? 침상에 꼼짝 않고 한 달을
있어도 나을까 말까 한 사람이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 오다니...... 자네 미쳤나?"
"나는 귀가 먹지 않았으니 그렇게 고래고래 악을
쓰지 않아도 되오. 그리고 내 뼈다귀는 그런 대로 쓸
만해서 하룻밤 자고 났더니 제법 견딜 만하오."
"견딜 만하다니....... 그러다 상처가 덧나기라도
한다면 자네는 한 평생을 침상에 누워서 지내야 될
걸세."
조자건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갔다.
진표는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조자건의
모옥은 허름했지만 정갈하고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어
우아한 풍취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진표는 조자건이 세수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말없이 그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조자건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요즘 들어 부쩍 잔소리가 심해진
것 같소. 하지만 내 몸의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소. 나무를 해 오는 것이 무리였다면 나는 산에
올라가지 않았을 거요."
진표는 퉁명스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래도 자네는 갔을 거야. 자네는 천하에서
제일 가는 멍텅구리에다 고집쟁이거든."
"그런 줄 알면서 왜 나와 사귀고 있는 거요?"
"그거야 나도 자네와 똑같은 멍텅구리에
고집쟁이니까 그렇지."
조자건은 피식 웃었다.
"그 말은 맞는 것 같소. 그런데 나는 지금 몹시
시장한데 당신의 음식솜씨는 아직 녹슬지 않았소?"
진표는 버럭 화를 냈다.
"나보고 자네 아침상을 차려 오라는 건가? 이
철혈객 진표가 기껏 남의 음식시중이나 들고 있을
사람 같은가?"
하나 잠시 후, 밖으로 나간 진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자, 어서 들게."
뚜껑을 여니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그것은 인삼(人蔘)과 대추에 제비꼬리를 넣어 끓인
연자탕(燕子湯)이었다.
조자건의 집에는 인삼은커녕 대추도 없으니
그것들은 필시 진표가 미리 준비해 온 게 분명했다.
조자건은 사양하지 않고 맛있게 연자탕을 먹었다.
진표는 묵묵히 옆에 지켜 서서 조자건이 식사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수염을 기르고 체구가 우람한
흑삼인이었다.
흑삼인의 나이는 대략 삼십 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남자답게 생긴 용모에 눈빛이 아주 강렬했다.
그를 보자 진표는 곧 자리를 비켜 주기 위해 빈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흑삼인은 조자건의
유일한 친형인 조립산이었던 것이다.
언제나처럼 조립산은 이번에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돌아왔다. 하나 조자건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조립산은 묵묵히 상처투성이인 조자건의 전신을
쓸어 보았다.
한동안 그는 쏘는 듯한 시선으로 조자건의 상세를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 상처들은 어떻게 된 거냐?"
조자건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제 한 사람과 결투를 했습니다."
"상대는 누구였느냐?"
"섬전도 서귀였습니다."
조립산의 눈빛이 조금 더 강렬해졌다.
"서귀의 칼은 제법 빠르지. 그는 어떻게 되었느냐?"
"다시는 빠른 칼솜씨를 자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립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걸을 수 있겠느냐?"
조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길을 떠날 준비를 해라."
조자건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조립산에게 그런 걸 묻는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다.
조립산이 알려 주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어디로
간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알려 주고 싶지
않다면 어느 누가 물어 보아도 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조립산은 그런 사람이었다.
조자건은 곧 행낭(行囊)을 꾸렸다.
행낭이래 보았자 간단한 옷가지 몇 벌과 약간의
은자가 전부였다. 그는 부유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물건들은 아무리 가난한
도둑이라도 훔쳐 갈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조립산은 묵묵히 조자건이 행낭을 꾸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이 집을 맡기도록 해라."
그 말에 조자건은 몸을 움찔했다.
전에도 그는 조립산을 따라 여행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나 그 기간은 보통 십 일 안팎이었고, 길어야 한
달 정도였다. 한데 다른 사람에게 집을 부탁하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번의 여행은 다른 때와는 약간
틀린 모양이었다. 행낭을 다 꾸린 후 조자건은 밖으로
나왔다.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진표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또 여행을 떠나려고?"
조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집을 좀 맡아 주시오. 훔쳐 갈 물건은 없으니
가끔 먼지나 청소해 주면 될 거요.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내버려두고."
"이번에는 좀 오래 걸릴 것 같은가 보군. 어디로
가려는가?"
"그건 아직 모르겠소."
"올해 안으로는 돌아오겠지?"
진표는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조자건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모르겠소."
진표의 얼굴에도 아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지만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친구와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기가 싫었던 것이었다.
하나 그는 마음속의 서운함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밝게 웃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네.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조심하게."
"자당(慈堂)께는 못 뵙고 간다고 말씀 전해
주시오."
"알겠네."
두 사람은 뚫어지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진표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조자건은
조립산과 함께 길을 떠났다.
하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들이 다시 만나기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리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2.괴인 (怪人)
평강(平江).
평강은 하남성의 중부, 복우산(伏牛山)의 초입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은 복우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요로(要路)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주루와 객잔이
성행했다.
사방이 땅거미로 어둑어둑해질 무렵, 평강에서 가장
큰 영빈루(迎賓樓)로 들어서는 두 인영이 있었다.
그들은 흑의와 백의를 걸친 대조적인 인상의
인물들이었다.
흑의인은 얼굴에 수염이 가득했고, 체구가
우람했으며 당당한 기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에 비해
백의인은 이목구비가 남달리 수려했고, 눈빛이
별빛처럼 반짝이는 준수한 청년이었다.
그들은 바로 길을 떠난 조립산과 조자건 형제였다.
하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형제라는
사실을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외모나 풍기는 인상이 너무도 판이하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진표도 이것이 궁금해서 조자건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자네의 형님과 자네는 정말로 친형제가 분명한가?"
조자건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우리는 같은 부모 밑에서 한 핏줄을
이어받은 형제요."
"나도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두 사람이 너무 닮은 곳이 없어서 말일세."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소. 형님은 아버지를
닮았고, 나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기 때문에 그런
거요."
"그랬었군. 하지만 한 가지만은 두 사람이 똑같네."
"그게 무엇이오?"
진표는 메마른 얼굴에 피식 웃음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모두 엄청난 고집불통이라는 것일세."
"하하...... 그건 아마도 우리 조씨 문중의 혈통
때문일 것이오. 선친(先親)께서도 세상에 둘도 없는
고집쟁이이셨소."
조립산과 조자건은 주루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는
음식을 주문했다.
그들이 간단한 음식을 시키고 몇 젓가락 먹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등뒤로부터 극히 나직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구려. 무림 역사상 그
자와 같이 단시일 내에 이름을 떨친 자를 나는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소."
"이형의 말이 맞소. 그는 진정 무서운 자요."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뒤이어 말했다.
"뭐가 진정 무섭다는 거요?"
"그 무적초자(無敵超子) 화군악의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의 손속 또한 매우 잔인해서 아직까지
그와 겨루어 살아 남은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정말 그와 겨룬 사람들이 모두 죽었단 말이오?"
"그렇다네. 벌써 수라마검 손우곤을 시초로 해서
무영마장 전무극, 혈화도 진궁, 철필선생(鐵筆先生)
노자량(路子良), 태행일괴(太行一怪),
통비신수(通臂神手) 황무(黃戊), 독목염라(獨目閻羅)
여궁회(余宮會), 음조(陰爪) 혁상(赫喪) 등
흑백양도의 절정 고수들뿐 아니라 얼마 전에는
천하최강의 고수라는 우내십대고수 중의 섬전창이
꺾였다지 않나?"
조자건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등뒤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탁자에 세 사람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모두 청의를 입었는데
하나같이 이목이 청수하여 신태비범한 모습들이었다.
조자건은 조립산에게 나직이 소곤거렸다.
"저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조립산은 세 중년인을 흘끗 보고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들은 이 일대에서 제법 명망(名望)이 높은
고수들인 하남삼수(河南三秀)이다. 왼쪽부터
산수재(算秀才) 고경명(古卿明), 삼절서생(三絶書生)
마종기(馬宗綺), 신기수사(神機秀士)
이환(李桓)이라고 부른다. 저들 중에서 신기수사
이환은 제법 재주가 많은 사람이지."
그때 마침 이환이 말을 잇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건 내가 얼핏 들은 이야기이지만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말인데...... 사절(四絶) 중의
홍황도마저 얼마 전에 무적초자에게 꺾였다는 소문이
있소."
그 말에 고경명과 마종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게 정말이오?"
"믿을 수 없군. 홍황도라면 사절 중 최고의 고수가
아니오?"
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소곤거렸다.
"그렇소. 홍황도 우문황은 비록 사절에 속해 있지만
삼기(三奇)보다 오히려 강한 고수요. 그의 무공은
거의 쌍마(雙魔)에 필적하는데 그마저 패했다는
소문이 있으니 무적초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지 않소?"
"아...... 정말 놀라운 일이오. 우문황은 백 년 내
제일도객(第一刀客)으로 불린 고수였는데......."
마종기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무적초자 화군악의 무공은 과연
천하무적이란 말이오?"
이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이르오. 무학(武學)의
길이란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듯이 그 층계가
부지기수요. 따라서 각기 남이 흉내내지 못하는
절예들을 모두 한두 가지씩은 가지고 있어
현금(現今)의 무림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천하무적이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오."
"하지만 그가 홍황도마저 꺾었다면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니겠소?"
"홍황도가 비록 도(刀)의 일면에서는
천하무적이라고 불렸지만 무학이 어찌 도법뿐이겠소.
더구나 아직 당금 무림의 최고 고수라는 일협(一俠)과
쌍마가 있으니 속단하기 어렵소."
"아아- 그렇군!"
마종기가 다시 탄성을 터뜨렸다.
이환은 더욱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일협부터 사절까지 뭉뚱그려
우내십대고수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무공은 서로
상당한 격차가 있소. 예를 들어 사절 중의 홍황도는
삼기보다 오히려 고강하다고 알려져 있고, 삼기 중의
제일인자(第一人者)인 천기노인(天機老人)은 같은
삼기 중의 다른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한
인물이오."
이환은 갈증이 나는 듯 술을 한잔 들이킨 후 말을
이었다.
"특히 이것이 일협과 쌍마에 가서는 더욱 심해
천기노인과 홍황도를 뺀 다른 고수들은 쌍마와 상당한
차이가 있고, 쌍마 또한 일협에는 모두 한참 뒤진다고
하니 아무리 무적초자라도 쉽사리 승세를 장담하기는
어려울 거요."
"아! 그렇다면 일협의 무공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요?"
"글쎄...... 나도 직접 그를 본 적은 없지만 그의
무공은 거의 천인합일(天人合一)에 이르러 있다고
하오."
"만일 그와 무적초자가 싸운다면 이형은 누구에게
더 점수를 주고 싶소?"
마종기의 질문에 이환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척 어려운 질문이구려. 그들은 각기 두번
다시 나오기 힘든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인물들이니
우리 같은 사람들로서는 쉽게 승산을 가늠하기가
어렵지 않겠소? 아마, 만에 하나 그들이 격돌한다면
그거야말로 경천동지할 무림사(武林史) 이래 최고의
격투가 될 거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고경명이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되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말했다.
"만일 그들이 결투를 벌이게 된다면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공전절후(空前絶後)의 결투를 구경하고
말 테요."
"그거야 이를 말이오? 그런 일생일대의 구경거리를
놓칠 바보가 어디 있겠소?"
마종기가 껄껄 웃으면서 술잔을 쳐들었다.
"자, 그런 꿈 같은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술이나
듭시다."
조자건은 묵묵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조립산을 돌아보았다.
"그 일이 과연 꿈 같은 일일까요?"
조립산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조자건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를 마치고 주루를 나오자 어느덧 밖은
어두워졌다.
하나 그들은 객잔에 머무르지 않고 어두운 밤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 동안에도 조립산은 그들의 목적지가 어딘가에
대해 조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조자건은
어림짐작으로 자신들이 복우산중(伏牛山中)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들이 복우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조립산은 걸음을 멈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조자건은 말없이 조립산의 뒤를 따라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올라갔다.
주루를 나올 때부터 그들은 한마디로 입을 열지
않았으나 조자건은 조금도 어색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조립산은 평소에도 반드시 필요한 말만 하는
성격이었고, 조자건 자신도 별로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 형제는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 형제가 서로 서먹서먹하다거나
거리가 먼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의 다른 어떤
형제들보다 우애(友愛)가 돈독했고, 서로를 끔찍이
아끼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형제에 대한 정을
나타냈다.
구 년 전, 조자건이 겨우 열 살의 철모를
어린아이였을 때 하루는 조립산이 지시한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놀이에 열중한 적이 있었다. 조립산은
그에게 매일 당시(唐詩)를 열 개씩 암기하라고 했는데
그때 그는 마을 어린이들과 들불놀이를 하다가 그만
당시를 외우지 못했던 것이다.
조립산은 그에 대한 벌로 그에게 커다란 물동이를
지운 채 하루종일 마을 밖을 돌게 했다. 그 일은 열
살의 어린아이에게는 너무나 힘에 겨운 일로,
조자건은 꼬박 열흘 동안 몸져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때 조립산은 열흘 만에 간신히 침상에서 일어난
조자건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는 나에게 매일 당시(唐詩)를 외우겠다고
약속을 했다.
도둑질을 했을지라도 네가 당시를 외웠다면 나는
너를 꾸짖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무릇 자신이 한번 내뱉은 말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 조자건은 단 한번도 자신이 내뱉은 말을
어겨 본 일이 없었다.
삼 년 전, 조립산이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불쑥
조자건을 찾아왔을 때 조자건은 그를 방 안에 남겨
두고 한참 동안 밖으로 나갔었다.
다시 돌아온 그는 자그마한 술상을 들고 들어왔다.
술상 위에는 칠색향병(七色香倂)과
오향장육(五香漿肉), 녹두활어(綠豆活魚)의 요리와
소도자(燒刀子)라는 술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조립산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과
술이었다. 또한 일반인들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가장 비싼 음식이기도 했다.
조립산은 돈도 없는 빈털터리인 조자건이 무슨 수로
이런 값비싼 음식들을 장만할 수 있었는지 조금도
묻지 않았다. 조자건 또한 자신이 음식값 대신
근처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수강관(水江館)에서 한 달
동안 막일을 해주기로 했다는 것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그날은 조립산의 서른한 번째 생일날이었고,
그는 형에게 생일상을 대접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실 이런 일들은 너무도 사소한 것이라 구태여
떠들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하나 이런 사소한 일들은 그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말보다는 보이지 않는 행동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했다.
복우산은 진령(秦嶺)의 동부산맥으로, 일명
천식산(天息山)이라고도 한다.
복우산이라 이름 붙은 것은 산의 형태가 꼭
소(牛)가 엎드려 있는 (伏) 형상이기 때문이었고,
천식산은 산이 너무 높고 가팔라서 하늘도 이곳을
보고 한숨을 내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초경이 가까워 올 무렵.
조립산과 조자건은 복우산의 어느 험준한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골짜기는 형세가 몹시 기이하여 흡사 하늘의
천신(天神)이 예리한 도끼날로 찍어 놓은 듯 가파른
절벽 사이에 협소하게 위치해 있었다. 골짜기의
입구로 들어서자 양쪽으로 깎아지를 듯한 절벽이 하늘
끝까지 뻗쳐올라 있어 아찔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골짜기로 들어갈수록 길은 조금씩 넓어졌으나
지형은 오히려 더욱 험준해져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제대로 걸어가기도 힘이
벅찰 지경이었다.
조자건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 암석군(岩石群)과
수림(樹林)들이 그냥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이한 진식(陣式)을 이루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오행진(五行陣) 같기도 했고
팔괘진(八卦陣) 같기도 했으나 오행진도 아니고
팔괘진도 아니었다.
그것을 알려준 사람은 조립산이었다.
"이것은 무극연환미혼진(無極連環迷魂陣)이라는
것이다. 통과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정신없이
헤매다가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가 버린다. 너는 내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따라오너라."
조립산은 연환보법(連環步法)을 밟으며 앞으로
전진해 갔다.
조자건은 신중한 동작으로 조립산의 뒤를 바싹
따라갔다. 일각쯤 지나자 그들은 무극연환미혼진을
통과할 수 있었다. 암석군과 울창했던 수림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들의 눈앞에는 높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절벽이 우뚝 서 있었다.
절벽의 한쪽 끝에는 시커먼 동굴이 입을 쩍 벌린 채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조립산은 서슴없이 동굴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동굴 안에서 괴이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귀하는 누구요?"
조립산은 짤막하게 말했다.
"나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동굴
속의 인물은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조대협(趙大俠)......."
조립산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조자건도 묵묵히
그를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너무도 어두워 바로 앞에서 걸어가는
조립산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이 아니라 밝은
대낮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외지고 깊숙한 동굴
속이라면 칠흑같이 어두울 것이다.
한데 이런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기거하는 사람이
있다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쿵!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조자건은 조립산의 등에
부딪쳤다.
조립산이 걸음을 멈추었던 것이다.
조자건은 앞을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 동굴은
어느새 끝나 있었다.
동굴의 끝에 한 명의 괴이한 인물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자건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 인물을
알아본 것은 그가 어렸을 적부터 특수한 훈련을 해서
안력(眼力)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괴인은 전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였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괴인은 좀처럼
햇살을 받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안색이 창백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상한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그의 눈동자도 흰색이었다. 신비스러울 만큼 흰
눈동자. 검은 부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랍게도 동굴 속의 괴인은 장님이었던 것이다.
3.심등 (心燈)
괴인은 조립산이 서 있는 쪽으로 얼굴을 쳐들었다.
"조대협의 신태(神態)는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구려."
이 말을 듣자 조자건은 괴이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괴인은 분명 앞이 안 보이는 장님인데도 마치
정상적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조립산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도 여전하오. 그 동안 잘 있었소?"
"이곳은 물을 구하기가 좀 힘들 뿐 나머지는 모두
괜찮소. 나는 지금 아주 만족하게 지내고 있소."
조자건은 괴인의 얼굴에 진정으로 안락하고 만족한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라도 이런 어둡고 후미진 동굴에서 생활하라고
한다면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 것이다.
하나 괴인은 이런 동굴에서 지내는 것에 커다란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만족이란 원래 상대적인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부족함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안락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곳이
차디찬 동굴 속이든, 호화로운 궁궐이든 마찬가지인
것이다.
괴인은 다시 물었다.
"조대협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요?"
조자건은 내심 흠칫 놀랐다.
그는 원래 동굴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단 한마디도
입을 열거나 기척을 내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었다.
장님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없으니 장님은 물론
들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괴인은 동굴 속에 들어온 사람이 몇
명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립산은 짤막하게 말했다.
"내 동생이오."
괴인은 다시 물었다.
"조대협이 이곳에 온 것은 과거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요?"
조립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처음으로 무표정하던 괴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어찌 보면 격동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희열 같기도 한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야릇한
표정이었다. 괴인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해졌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조립산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직이
되물었다.
"당신의 심등대법(心燈大法)은 완성되었소?"
"그렇소."
"내 동생에게 심등대법을 전수해 주시오."
괴인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탄식을 했다.
"지난 십일 년 동안 이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소. 조대협은 한 달 후에 다시 와서
그를 데려가시오."
조립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는 조자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동굴을 벗어났다.
조립산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서야 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이름은?"
"조자건이오."
"좋은 이름이군. 몹시 젊은 것 같은데 몇 살인가?"
"스물이오."
조자건은 대답을 하면서도 내심 자신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정말 장님일까, 아니면 가짜일까? 정확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조자건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자 조자건은 비로소 눈앞의 괴인이
틀림없는 장님이라고 단정했다. 괴인의 눈동자가
완전히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눈동자를 지니고 있을 리 없다.
설사 흉내를 내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괴인은 홀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 눈동자를 보고 싶나?"
조자건은 깜짝 놀랄 뻔했다.
이 사람은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한 쌍의
신비스럽고 이상한 눈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몸
어딘가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 눈으로 어느 누구의
일거일동도 놓치지 않고 보는 것 같았다.
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좀더 자세히 보고 싶나?"
사실 조자건은 좀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괴인은
그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모양이었다.
"자, 갖고 가서 자세히 살펴보게."
그는 손가락으로 한쪽 눈을 뽑았다. 그러자 그의
눈은 즉시 검은 구멍으로 변했다.
잿빛 눈동자.
유리로 만들었는지 수정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손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눈동자는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설사 그것이 가짜 눈이라는
것을 빤히 안다 해도 상대방은 역시 가슴이 철렁할
것이다.
괴인은 넌지시 물었다.
"이젠 똑똑히 보았나?"
조자건은 끝내 길게 숨을 불어 냈다.
"그렇소."
"될 수 있는 한 자세히 보게. 이것은 내가 한 가지
실수를 범한 대가이기 때문일세."
괴인의 창백한 얼굴에 홀연 한 줄기 비통한 기색이
떠올랐다.
"십일 년 전에 한 사람을 잘못 본 탓으로 비록 눈을
잃었지만 그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네. 잘못을 범하면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하며, 그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예외일 수는 없기 때문이지."
조자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라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자건은 괴인이 어떻게
해서 두 눈을 잃었는지 알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그 일이 괴인으로서는 두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쓰라린 기억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인의 음성은 눈동자와 같이 죽어 있었다.
"눈이 먼 후에 나는 내 눈을 대신할 무언가가
필요했지.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심등대법일세.
이것을 익힌 후 나는 내가 두 눈을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더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네."
"그건 무엇 때문이오?"
괴인은 계속 손바닥에 있는 눈동자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눈은 비록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반면에 더 많은
것을 보지 못하네. 하지만 심등대법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도 볼 수
있네. 지금 나는 눈을 잃기 전보다 훨씬 더 모든
사물을 객관적으로 주시할 수 있게 되었네. 내가 두
눈을 잃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오묘한 세계를 알 수
있었겠나?"
조자건은 내심 그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인간의 눈이란 사물의 겉을 보여 줄 수는
있어도 그 내면의 진실한 모습은 보여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괴인은 천천히 들고 있던 눈동자를 눈에 박았다. 한
쌍의 잿빛 눈동자는 조자건을 응시하는 것만 같았다.
한 쌍의 가짜 눈동자.
그것은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조자건은 잠시 그의 죽어 있는 눈동자를 주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두 눈이 멀쩡한데 그것을 익힐 수
있겠소?"
"한 가지 방법을 쓰면 가능하네."
"그게 무엇이오?"
"바로 이것일세."
돌연 괴인은 번개같이 조자건을 향해 양손을
휘둘렀다.
파파파파팍!
그 속도와 역량은 너무도 가공스러워서 조자건이
아니라 천하의 어느 누구라 해도 피해 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조자건은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괴인의 양손이 번뜩인 순간, 조자건의 발끝
소양혈(少陽穴)부터 찍히기 시작해 눈 깜박할 사이에
정면 예순네 군데의 크고 작은 혈도가 전부 찍혔다.
그러더니 괴인은 오른손을 살짝 떨쳐 조자건을 가볍게
허공으로 날렸다. 그리고 이번엔 그의 등뒤 예순네
군데의 혈도를 전광석화처럼 찍었다.
그 수법의 기묘함과 속도의 빠름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괴인이 눈이 안 보이는 장님인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 몸에는 서른여섯 군데의 대혈과 일흔두 군데의
소혈이 있으며 절반 이상이 치명적인 급소였다.
그런데 조자건은 모든 혈도를 찍히고 만 것이다.
그러나 조자건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몸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뿐 정신은
도리어 더욱 맑아졌다.
순식간에 조자건의 전신혈도를 찍고 난 후에야
비로소 괴인은 손을 멈추었다. 괴인은 숨결조차
가빠지지 않은 채로 바닥에 쓰러진 조자건에게 얼굴을
돌렸다.
"기분이 어떤가?"
놀랍게도 조자건은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나쁘지는 않소."
괴인은 그런 상황을 예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더욱 좋아질 걸세."
조자건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어 동굴천장을
응시한 채 다시 물었다.
"나는 언제쯤 움직일 수 있소?"
"하루, 혹은 며칠이 걸릴 지도 모르지. 자네의
체질이 어떠냐에 달려 있네."
"이게 심등대법이오?"
괴인은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익숙해지면 그 기간이 더 단축될 수도 있네.
그래서 모든 혈도를 찍히고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자네는 이곳을 나갈 수 있네."
"몹시 이상한 방법이구려."
"앞으로 자네는 더욱 이상한 일들을 경험하게 될
걸세."
괴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조자건은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꼬박 반나절 동안이나 그는 혈도가 찍힌
채 석상처럼 차디찬 동굴바닥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조자건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괴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배 이상 빠른 시간이었다. 괴인은 그의 재질이
제아무리 좋다 해도 몸을 움직이려면 적어도 이틀은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굳어진 몸을 주물며 바닥에서 일어나려 하자
괴인은 그가 피할 사이도 없이 다시 백스물네 군데의
혈도를 모두 짚어 버렸다. 조자건은 다시 반나절
동안을 꼼짝도 않고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가 다시 움직일 기미를 보이자 어떻게 알았는지
괴인은 재차 그의 혈도를 찍었다. 이러기를 몇 차례나
거듭했는지 모른다.
식사는커녕 물도 마시지 못한 채로 조자건은 계속
괴인에게 혈도를 찍힌 채 차가운 동굴바닥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칠 일이 흘렀다.
그 동안에 조자건이 먹은 것이라고는 이삼 일에
한번씩 괴인이 복용해 주는 우유같이 뿌연 액체가
전부였다. 그 액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먹으면 며칠을 굶어도 별다른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조자건은 문득 자신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 코, 입을 비롯한 칠공과 전신의 모공으로
체내의 배설물들이 모조리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전신은 마치 땀 같기도 하고 진흙 같기도 한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오물들이 배출되어 악취를
풍겼다. 한데 그 배설물들이 몸 밖으로 빠져나감에
따라 그는 전신이 날아갈 듯 개운해지고 신비한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말로만 듣던 전설상의
환골탈태(換骨脫胎)나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현상은 보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다음 벌어진 변화는 조자건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체내의 혼탁한 기운들이 체외로 배출되자 그의
신경조직과 피부세포는 더할 나위 없이 민감해져서
주위의 공기가 파동치는 것까지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머리 속이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맑아지며 칠흑같이 어두웠던 동굴의 내부가
구석구석까지 아주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동굴 벽에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조차
천둥치듯 귓속으로 세세하게 들려 왔다. 그제서야
비로소 조자건은 괴인이 말한 오묘한 세계가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등대법은 하늘을 가르고 바다를 뒤엎는
신공절학(神功絶學)은 아니었으나, 천하의 그 어떤
무공심법도 따를 수 없는 절묘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심등대법은 괴인이 천축(天竺) 황교(黃敎)의
비전(秘傳)인 마등심법(魔燈心法)과 마교(魔敎)의
유마환영대법(幽魔幻影大法)을 융합하여 십여 년의
각고 끝에 완성해 낸 초상승의
내가심법(內家心法)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감각
등을 개발해서 극대화(極大化)하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인간의 감각능력이란 원래 무한(無限)한 것이다.
하나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해서 점차로
능력이 쇠퇴해지고 결국에는 단순히 보고, 듣고,
느끼는 지극히 원초(原初)적인 감각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 퇴보해 버린 감각능력에 자극을 주어
격발시킴으로써 사물을 감지하는 능력을 최고한도로
끌어올리는 것이 심등대법의 요체(要諦)였다.
그것은 불문(佛門)에서 말하는 천이통(天耳通)이나
천안통(天眼通) 등, 소위 불가육통(佛家六通)을 훨씬
뛰어넘는 경지이다.
심등이란 이름 그대로 마음[心] 속에 등불[燈]을 켠
듯 주위의 모든 사물을 환하게 통찰할 수 있다고 한
데서 붙여진 것이었다.
이 심등대법을 만들기 위해서 괴인은 무려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인간세계와 완전히 격리된 채 지내야만
했다.
무림인이란 원래 자신의 절기를 목숨보다도 아끼는
부류들이었다. 그런데 괴인은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고심참담한 끝에 완성한 심등대법을 선뜻 조자건에게
전수해 주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물론 괴인이 조자건의 형인 조립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대체 괴인과 조립산 사이에는 어떤 은원이 있는
것일까?
첫댓글 ㅈㄷㄱ~~~~~````````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즐독입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즐독해여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글구 잘 봅니다~~~~
즐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즐독입니다
즐독 ㄳ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