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스가 아멜리아를 방문한지 이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건 아니지만 그래도 진전은 있었다.
아멜리아는 이제 그를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었다. 천성이 원래 밝고 명랑한 아이라서 그런지 재밌는 농담을 던질 때마다 웃었다. 정원에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며 게임을 하기도 했다. 물론 단 둘이서만 그런건 아니다.(리나도 함께 했다.)
처음에 있었던 그 불미스러운 일은 애초에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커다란 장애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득이 되었다. 그 아이는 제로스를 만나기 전부터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얘기니까. 그게 좋든 나쁘든간에.
그 아이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그에게 그 일로 열성적인 설교를 자주 하곤했다. 제로스는 들어줄만 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아이의 커다란 눈이 온통 그에게로 쏠려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가끔 그것을 이용해 먹기도 했다.
첫인상은 확실히 좋은것보다 나쁜게 더 낫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적어도 자주 만남을 갖는, 특히나 연애관계에선 말이다. 인간은 원래 좋은 말보다 나쁜 말에 더 주위가 쏠리게 되는 법이니까. 제로스는 이 시도를 통해서 그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나중에 참고가 될 만한 사항이었다.
연애란 고난도의 심리게임이다. 상대방의 심리를 속속들이 파악하여 그 반응을 예상하고 거기에 상대방과 자신이 만족할 만한 적절한 해답을 내놓는것. 그는 그 게임 자체를 즐겨왔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뚫고나면 그 끝엔 언제나 합당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승자만이 그 쾌락을 즐길 자격이 있는 것이다.
아멜리아는 커다란 창을 통해 숲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저택자체가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있지만 리나의 배려 덕분으로 아멜리아는 숲속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방에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침엽수림. 그 주위를 새하얀 안개가 유령처럼 둘러싸고 있어 침범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었다. 이 숲에 어떤 말못할 사연이 있는 걸까. 마치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다가오는 방문객을 허락하지 않을듯이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아멜리아는 시선을 위로 들어 하늘을 보았다. 보랏빛.....보랏빛이다. 그녀는 본디 흐린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구름 한점없이 맑고 푸른 하늘. 대지를 향해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 밝고 따스한 그것은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녀 자체라고 보는 것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실내에서 지내야 겠어."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번 하늘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책상서랍에서 깨끗한 종이를 꺼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피리아 언니에게
처음 언니를 보았을때 얼마나 가슴떨렸는지요.
제가 있었던 익숙한 세일룬을 떠나 낯선 제피리아에서 지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전 새로운 곳을 찾는다는 흥분감과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어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다시 새로운 출발은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털어내지 못했었지요.
그러한 상황에서 언니를 만난건 정말 제 인생에서 커다란 행운이에요. 언니는 난생 처음 보는 장소에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던 저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죠. 그 때 언니는 얼마나 제게 커다란 의지가 되어주셨는지 모르실거에요.
언니는 제가 아주 맘에 든다며 좀더 친해지고 싶다고 하셨지요. 언니같은 사람과 친하게 된다면 그건 제게 영광이에요. 언니는 정말 얼굴도 아름다우시지만 심성이 더 고우세요.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하잖아요. 언니는 제 우상이에요. (칭찬이 과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이건 솔직한 제 심정이니 너무 화내지는 말아주세요.)
그래서 언니가 제게 편지를 보내주셨을때 얼마나 기뻣는지 모릅니다. 언니가 제게 학교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보내주신 편지 정말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그 때 언니는 제게 제로스씨를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저는 지금 그와 자주 만나고 있어요. 절 너무 원망하지는 말아주세요. 언니도 속내이야기를 듣다보면 절 이해하실수 있을거에요.
제가 리나언니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들어서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런데 그 이유 때문에 저는 그와 자주 만나고 있어요.
놀랍게도 제로스씨는 리나언니의 조카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저는 그와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리나언니 댁에 자주 놀러오거든요.
사실 그와 만날 때마다 저는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언니의 말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언니가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전 정말 슬플거에요.) 그는 예의가 바르고 아주 재치가 있어요. 그래서 그가 방문할 때마다 무척 즐거워요.
그러나 전 언니가 편지에서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때마다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그를 설득했어요. 처음엔 제가 한 말에 반박을 하거나 재치있게 맞받아 치며 다른 화제로 돌렸어요.
그러나 그를 만날때마다 끈질기게 설득하자 그는 결국 내 설득에 굴복했는지 우울한 목소리로 자신도 과거에 대해 종종 후회하고 있다고 시인하더군요.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았지만요.
저는 그에게 우리에겐 아직 남아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다신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고 위로했어요.
그러자 그는 내 말이 위안이 된다며 흔들리는 자신을 잡아줄수 있느냐고 물어보더군요. 저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했어요.
내 주위에 사람이 옳지 않는 길을 가고 있다면 그를 그냥 내버려 두기 보다는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정의의 사도로써 당연히 해야할 의무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를 변화시킬수 있을지도 몰라요. 물론 이건 함부로 속단해선 안되는 거지만 그래도 저는 열심히 시도를 해볼 작정이에요.
언니도 만약 그가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기뻐하시겠지요. 만약 제가 성공한다면 이건 언니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언니가 제게 용기를 주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거에요.
언니에게 감사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언니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아멜리아가.'
아멜리아는 편지를 다 쓴 후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았다. 편지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편지봉투에 넣기 위해 편지지를 곱게 접었다.
첫댓글 젠가 하고싶어요;ㅂ;[딴소리]
잘 읽었어요~ 4편 읽으러 ㅇ_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