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祝 聖 誕
“온 누리에 사랑을 ...”
22일 오후 서울 도봉구 무수골 마을 골목에서 서울광염교회 합창단이 캐럴을 부르며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아직 연탄을 때는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 합창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려운 이웃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마을 골목에서 공연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송은석 기자)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목동들의 경배(Adoration of the Shepherds)’,
644년, Oil on canvas, 107x131cm, Musee du Louvre, Paris.
성탄절을 앞두고 크리스마스카드 같은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크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의 ‘목동들의 경배(Adoration of the Shepherds)’다. 그림 한가운데 아기 예수가 누워 평화롭게 잠자고 있고, 그 주변을 다섯 명의 인물들이 빙 둘러싸고 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캐럴을 연상시킨다고 할 만큼 차분한 밤 풍경이 인상적이다.
라투르는 약 400년 전 프랑스 로렌 지방에서 주로 활동했다. 밤의 효과를 잘 그린 화가로 알려졌는데 이같이 성탄 장면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주제의 종교화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중앙에 놓인 촛불 하나가 빛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이 촛불을 오른쪽에서 조심스럽게 들고 있는 노인은 성 요셉이고, 맞은편에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성모 마리아로 보인다. 가운데 세 명은 밤새 양 떼를 지키다 천사로부터 구세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목동들이다. 신 스틸러는 아기 예수 옆에 앙증맞게 머리를 내미는 어린 양이다. 천진난만하게 풀을 뜯고 있는 귀여운 양 덕분에 우리는 여기가 마구간이라는 걸 잊지 않게 되고, 동시에 제단에 바쳐질 양처럼 구세주가 앞으로 겪을 희생을 묵상하게 된다. 예수의 수난은 양의 바로 옆에 성모가 입고 있는 붉은 옷으로 더욱 강조된다.
이런 주제 해석과 촛불 광선 효과는 라투르보다 한 세대 앞서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카라바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라투르는 좌우 대칭적인 구도뿐 아니라 면을 넓게 사용해 형태를 단순화시켰다. 결과적으로 화면 속에 매우 고요하고 명상적인 느낌을 불어넣는다.
당시 사람들도 바로 이 점을 높이 평가한 것 같다. 루이 13세는 누구보다 라투르 그림을 너무 좋아해, 방에 있던 여러 그림을 다 치우고 그의 그림 한 점만 걸게 했다고 한다. 라투르의 그림이 주는 침묵의 분위기에 필적할 만한 그림은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라투르는 재산을 불리거나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자식이 10명이었지만, 단 세 아이만이 이른 나이에 죽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을 다시 보면 성 요셉이 눈에 들어온다. 한 손으로 촛불을 들고 다른 손으로 행여 촛불이 바람에 꺼질까 주변을 감싸고 있다.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그림들 속에서 아버지 요셉은 언제나 주변적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요셉은 유일한 광원인 촛불을 들고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어 그림을 주도하는 듯하다. 라투르는 요셉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지 않았을까? 새로운 생명을 지키려는 듯 촛불이 꺼지지 않게 노심초사 보호하는 요셉의 모습을 통해 여러 자식을 잃었던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려 하진 않았을까?
라투르의 명상적인 그림은 성탄의 의미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희생과 구원 등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화려하거나 크지 않아도 얼마든지 호소력 있는 힘 있는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제대로 보여준다.
✵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화가는 주로 촛불 비치는 장면을 그렸으며, 그가 살던 당시에는 꽤 유명했으나 그후 20세기까지 거의 잊혀져 있었다. 전에 그의 것으로 잘못 알려졌던 많은 작품들에 대한 사실이 밝혀지자 오늘날 프랑스 회화의 거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라 투르는 화가로서 성공한 뒤 뤼네빌에 정착했다. 루이 13세, 로렌의 앙리 2세, 라 페르테 공작 등이 라 투르 작품의 수집가들이었다. 라 투르 작품의 연대 추정은 불확실하지만 처음에는 사실주의적인 방법으로 그리다가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년) 그 후계자들의 극적인 명암 대조법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완숙기의 그림들은 인간 형체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시키고 촛불이나 횃불만이 빛나는 실내 정경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1915년 이후 독일의 미술사가 헤르만 포스와 다른 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라 투르의 작품은 또 색채와 구성에서 매우 독창적이며, 형체를 단순화시키는 특징으로 많은 작품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현대적으로 보인다.
촛불에 비친 정경들을 그린 가장 인상적인 작품들로는 〈신생아(The Newborn)〉·〈성 세바스치아누스에 대한 애도(The Lamentation over St. Sebastian)〉 등이 있으며 밝은 대낮을 배경으로 그린 몇 안 되는 작품들로는 〈풍금 연주자(The Hurdy-gurdy Player)〉·〈사기꾼(The Cheat with the Ace of Diamonds)(1635)〉·〈점쟁이(The Fortune Teller)(1633~1639)〉·〈목수 성 요셉(St Joseph charpentier)(c. 1640)〉·〈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The Penitent Magdalen with Night-light)(1640~1645)〉 등이 있다.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목수 성 요셉(St. Joseph the Carpenter)’,
Oil on canvas, 137x101cm, 1645년, Musee du Louvre, Paris.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향해 이렇게 묻는다,“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그는 요셉의 아들이었다. 목공장이 요셉. 하루 종일 톱밥 속에서 땀 흘려야 먹고 사는 , 별로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요셉, 주님은 그의 아들이었다. 캄캄한 목공소, 어린 예수님이 비춰주는 촛불 앞. 그는 십자가를 만든다. 그는 미리 보았을까? 거기 매달려 고통으로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인생만큼이나 깊은 주름 밑, 촛불에 비친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하다. 그 눈물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어머니의 얼굴을 보다.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촛불앞에서 참회하는 막달라마리아
(Magdalen with the Smoking Flame)’, Oil on canvas, 117x91,8cm, 1640년, County Museum of Art, Los Angeles.
ㆍ무상의 표상, 백골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왜 악한 사람들이 잘살죠? 잘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주변에서 보면 악착같이 돈만 아는 집요한 사람들이 잘사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런 사람이 돈도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니? 그건 잘사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기를 쓰고 이악스럽게 사는 거잖아. 각박해지기 위해서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다쳐야 해. 그게 좋니?
문화철학 시간에 한 학생과의 대화입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악착같이 살지 않으면 악착 같은 세상 견디기 힘들 거라는 마음에 힘이 붙을 때는 어떡할까요? 그런 마음이 찾아들 때 들여다보고 싶은 그림이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저 그림을 처음 보면 촛불이 가르는 명암 때문에 왼손을 턱에 괸 채 작은 촛불을 응시하는 마리아의 시선이 먼저 들어옵니다.
그러나 저 그림에 사로잡히면 곧 저 그림의 정신적 힘은 해골에 대한 마리아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저 그림의 매력은 마리아의 오른손에서 옵니다. 해골을 만지고 있는 오른손에 한 치의 두려움도 없지요? 해골이 끔찍하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처럼 그녀의 손은 자연스럽게 해골로 흐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해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촛불에 씻긴 눈으로 내면을 응시하면서 홀연한 지혜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해골로 상징되는 무상(無常)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무상의 표상인 해골이 무섭지 않은 마음을,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촛불로 정화의 의식을 올리는 영혼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을!
막달라 마리아는 열정적으로 예수를 사랑한 여인입니다.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긴 여자이고,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보고 처음으로 경험한 여자이기도 합니다. 부활한 예수가 마리아야, 하고 불렀던 그때 그 순간을 경험한 여자지요.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충분한, 충만한 사랑의 힘을 알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그 교감의 경험이 마리아에게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촛불을 응시할 수 있는 내공을 길러준 게 아닐까요? 그나저나 그녀는 무엇을 참회하고 있지요?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으나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해 또 진정한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늘 열정이 빗나가기만 했던 시간들일 겁니다. 예수를 만나 깊은 사랑에 감동받은 그녀는 이제 열정이 고통이 되고 있는 그녀 같았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깊은 사랑에 이르는 지혜의 향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사실 그녀의 사랑은 하릴없이 짧았습니다. 부활한 예수가 어디에도 없으니 무상한 사랑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무상을 인지하고는 있으나 무상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고통이 생기지요? 젊음은 왜 이리 짧고 사랑은 왜 그렇게 빠르게 가냐고 탄식하게 되는 겁니다. 마리아는 다릅니다. 짧은 순간에 평생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한 마리아는 무상을 받아들이고 있어 무상에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지혜라고 하지요. 책상 위에 십자가가 있고, 예수를 사랑한 여자 막달라 마리아가 나와도 저 그림은 불교적입니다. 내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실제로 남방불교에서는 해골을 앞에 두고 관(觀)을 합니다. 관(觀)이란 보는 것입니다. 보긴 보는 건데,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는 것을 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무시무시한 백골을 앞에 두고 관을 하지요? 백골이 무서운 것은 백골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백골은 나의 미래이고, 나는 백골의 전생입니다. 살아보면 산 게 없는 백골 같은 인생, 백골 위에 손을 얹고 기원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최고의 학벌일까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경제력일까요? 혹 무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지혜인 것은 아닐까요?
슬픔이 밀려들 때는 해골을 만지고 있는 저 그림을 보십시오. 그러면 영혼의 촛불이 지금 내가 고민하는 문제가 얼마나 시시한 것인지를 밝혀주면서 문제를 객관화시켜줄 것입니다.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The Penitent Magdalen)’,
1638-43년, Oil on canvas, 133,4x102,2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성 이레네의 간호를 받 성 세바스티안
(St Sebastien Attended by St Irene)’, 1649년, Oil on canvas, 167x130cm, Musee du Louvre, Paris.
로마 군인이면서 굳은 신앙을 간직했던 성 세바스티안은 박해자들에 의해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나 죽지 않았다. 부상당한 성인을 이레네와 여인들이 횃불을 들고 찾아가 간호하고 있다.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베드로의 눈물(The Tears of St. Peter),
1645-50년, Oil on canvas. The Cleveland Museum of Art, Cleveland, USA.
촛불의 미학과 신앙 세계 :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라 투르의 작품들은 그리 많지 않고 특히 그가 사인한 작품은 두 점에 불과하다. 따라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30여 점이나 되는 그의 작품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라 투르의 모든 작품들은 초기작과 후기작으로 대별할 수 있다. 스탕달이 그의 그림을 ‘빈자층 예술’(Arme-Leute- Kunst)이라고 치부한 것처럼, 초기에는 카라바조에서 보이는 거리의 사람들이 중심 인물로 등장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앙적 주제들 특히 회개와 반성에 관련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성경적 소재에 의한 그의 작품들은 중세의 교권주의적이고 가톨릭적인 색채를 완전히 탈피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의 변화를 정적이고 차분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후기의 주제들 중에 백미에 해당하는 작품은 <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의 눈물>이다. 베드로나 막달라 마리아를 그린 그림들에는 복음 안에서 회개하고 거듭난 인생들의 숙연함과 아름다움이 배어나온다.
<베드로의 눈물>은 초기의 ‘낮 그림’(day pieces)이 아닌 후기의 ‘밤 그림’(night pieces)에 해당한다. 라 투르는 후기에 이르러 밤의 흑암을 배경으로 그 가운데 촛불을 밝혀줌으로써 명암의 대조를 도입한 구도를 잡는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 조용한 실내, 탁자에 앉아 회한이나 명상에 잠긴 고독한 사람들 - 이것이 라 투르가 연출하는 장면이다 - 의 장면 구성이나 묘사를 통해 그는 당시 프랑스 바로크적 회화의 전형적 특성과 판이한 자기 나름의 독특성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웅장한 배경 설정이나 풍부한 장식, 과장된 표현이나 운동감이 없는 대신에 있는 그대로 깔끔하고 진솔하며 차분한 장면이 주를 이룬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동(動)의 세계가 아니라 정(靜)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촛불이 놓이게 된다.
‘촛불의 미학’에서 촛불이 발하는 빛은 어둠 속에 잠긴 사람들과 물상들을 밝히고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어쩌면 250년 뒤에 나온 인상파 화가들의 햇빛과 같은 기능일지도 모른다. 조용한 실내 공간에서 어둠을 밝히는 촛불은 베드로의 발, 다리, 얼굴, 그의 어둔 영혼까지 밝히는 역할을 한다.
베드로의 눈물과 회개 : 그림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앉아 있는 베드로 앞으로 위에서부터 담쟁이 넝쿨, 수탉, 등(燈)이 놓여 있다. 구도상 다소 어색해 보이지만 맨 위에 있는 담쟁이 넝쿨은 본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보통 마르지 않는 속성으로 인해 영생이나 장수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기독교적 맥락에서 그것은 질기고 튼튼한 성질로 인해 견고한 신앙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담쟁이 넝쿨은 말라비틀어지고 매달려 있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어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약해진 신앙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 아래에 있는 수탉은 울음소리를 통해 가야바의 법정에서 베드로의 배도를 일깨우는 것으로서 기독교 회화사에서 줄곧 베드로를 상징하는 것으로 등장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는데, 바로 이 그림에서 베드로의 동그랗게 떠진 눈은 그 기억으로 인해 소스라침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수탉은 자신의 일을 다 한 듯이 베드로와 달리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게 앉아 있다.
수탉이 앉아 있는 밑으로 촛불이 켜진 등이 놓여 있다. 라 투르의 다른 작품들에서 촛불이 노출돼 있는데 비해, 여기서 촛불은 가려져 있고 또 등 안에 들어 있다. 촛불이 등경 위에 놓여 세상을 비추지 못하고 등 안에 가려져 놓여 있는 것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붙잡히심을 의미한다. 이 등은 중세의 성화들에서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손에 들려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는데, 이는 그의 배신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셨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빛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촛불은 여전히 어둔 밤을 밝히는 빛이 되는데, 여기서는 무엇보다 베드로의 발과 다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베드로의 발은 맑고 깨끗하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요 13:10). 발만 씻으면 온몸이 깨끗하다는 주님의 말씀에서 이제 그의 전부가 정결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용서하신다는 의미이고, 그가 변화되어 세상에 나가 주님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전도의 발이 될 것을 뜻한다.
베드로의 왼쪽에 그의 어깨에서부터 바닥까지 재를 치우는 긴 삽이 놓여 있다. 그것은 회개 이후 베드로가 해야 할 과제를 말해 준다. 청소 삽은 촛불이신 주님께서 세상을 밝히고 복음으로 불태우고 나면 베드로가 그 남은 재들을 쓸어 담는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서 주님의 사역에 대한 베드로의 보조적 역할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역할이 미미하다는 것보다 복음 전도에서 주님의 역할이 주도적임을 보여준다. 삽이 두 개 있는 것은 다른 사도들보다 베드로의 몫이 배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그림에 묘사된 베드로의 모습은 중세 천주교회가 흔히 그려온 황금으로 된 천국 문의 열쇠를 손에 쥔 위풍당당한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 여기서 베드로는 한낱 배신자요 죄인이며, 회개자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하지만 그런 베드로의 모습은 권위로 포장된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귀하게 보인다.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이제 회개와 눈물로 복음 전도자와 순교자의 길을 걷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된 것이다.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베드로의 눈물(Tears of St. Peter),
1646-1648년,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부인에게 조롱 받는 욥(Job Mocked by his Wife)’,
1630년, Oil on canvas, 145x97cm, Musee Departemental des Vosges, Epinal.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신생아(The New-born)’,
1640년, Oil on canvas, 76x91cm, Musee des Beaux-Arts, Rennes.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요셉의 꿈(The Dream of St Joseph),
1640년, Oil on canvas, 93x81cm, Musee des Beaux-Arts, Nantes.
드 라 투르는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화가이다. 그는 이탈리아 바로크 예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년)의 영향을 받아 키아로스쿠로라는 강렬한 빛의 대비효과를 화폭에 실현한 사람이다. 특히 그는 이 명암법을 위해 항상 촛불을 이용하였기에, 일명 ‘촛불의 화가’라고 불리고 있다. 드 라 투르는 은은하게 펼쳐진 빛을 통해 우리를 고요한 수면과도 같은 내면의 깊은 곳으로 침잠하여 진지한 명상을 하도록 유도하는 서정적 빛의 화가인 것이다. 이런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음영의 효과를 통해 종교적 신비의 체험을 그린 그림이 바로 ‘요셉의 꿈’이다.
그림을 보면 오른편의 요셉은 곤한 잠에 취해있는데, 그의 무릎 위에 놓인 성경이 펼쳐진 것으로 보아 하느님의 말씀에 심취해 있다가 잠이 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것이 마치 명상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깊은 명상 속에서인지 아니면 실제의 꿈결에서인지 모르지만, 요셉에게 나타난 것은 그림 왼편에 있는 가브리엘 천사이다. 드 라 투르는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말씀을 요셉에게 전하는 순간을 포착해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 꿈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많은 상상을 하게 하는 그 궁금증이 이 그림의 진정한 주제일 것이다.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요셉의 꿈에 나타난 것은 마태오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세 번이다. 첫 번째는 약혼 후, 아내가 될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창피하여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했을 때이다. 이때 나타난 천사는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임신했다는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주며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인데, 동방박사들이 돌아간 뒤 새로운 왕의 출현을 두려워한 헤로데가 갓 태어난 아기들을 모두 없애려 했을 때이다. 이때 주님의 천사는 요셉의 꿈에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알려준다. 세 번째는 성가족이 피난하여 이집트에 머물고 있을 때 헤로데가 죽자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일러주었다.
요셉은 이 세 번의 꿈에서 천사가 말한 하느님의 말씀, 불합리하기도 하고 참으로 믿기 난감한 그 말씀에 순명하였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캄캄한 밤에 이집트를 향해 피신을 감행하였고, 이스라엘로 돌아와 나자렛이라는 마을에 정착을 했던 것이다. 이 모두 한 남자로서 그리고 한 가장으로서 결코 따르기 쉬운 명령이 아님에도, 요셉은 그 말씀에 순응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 그림에 나타난 천사는 잠든 요셉에게 하느님의 어떤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드 라 투르 회화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촛불과 허리를 두른 요셉의 붉은 색 끈 그리고 촛대 하단에 놓인 가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촛불은 세속적으로는 쉽게 사라져 버리는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뜻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세상을 밝히는 하느님의 빛이며 영적인 기쁨이다. 하늘거리는 그 나약함에 꺼지기 쉬운 신앙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다르게는 고난과 죽음에서 되살아난 그리스도이며, 또한 사랑의 빛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경건한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이중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촛불은 예수의 탄생과 연관된 오브제이자, 예수의 아버지로서 의로운 요셉을 암시한다. 더욱이 생명에 대해 따스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의 모습이 가슴에 두른 붉은 띠에 서려있는데, 이 붉은 띠가 생명의 탯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촛대에 놓인 가위는 생명과 죽음의 기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두 개의 날이 하나를 이룬다는 점에서 통합을 나타내기도 하고, 생명의 실, 곧 탯줄을 자르는 도구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위는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로 엮는 도구이자, 예수의 탄생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 이런 그림 속 오브제가 알리는 바에 따라, 이 작품 속 꿈은 요셉의 첫 번째 꿈, 곧 요셉의 결혼과 예수의 탄생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지금 요셉은 그 정직한 마음에 임신한 마리아를 어찌할 것인지 마음을 정할 수 없어 성경에 의지하다 잠이 든 것이며, 영적 존재이기에 그림자도 없이 묘사된 꿈속의 천사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0-24).
이런 꿈의 계시를 받아들인 요셉의 순명은 결국 빛과 어둠이 하나가 되는 기적과 같은 것이다. 천사가 오른손을 뻗어 요셉의 오른손을 잡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는 천사의 왼손에 드리운 빛과 어둠의 하나 됨이 또한 그것이다. 물론 천사의 왼손에 깃든 빛과 어둠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길은 따르기 전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따르고 돌아보면 환한 빛이요 생명의 길이다. 요셉에게도 천사의 명령은 어둠이요 암흑이었으나, 순명한 뒤의 결과는 결국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빛으로 가득한 하느님의 계시였던 것이다. 요셉의 탁한 빛을 띤 얼굴은 아직 의심의 갈등에 휩싸인 것을 의미하며, 환하게 빛나는 천사의 얼굴은 믿음의 광명이라는 하느님 세상을 암시하는데, 계시를 듣는 바로 그 순간, 꿈속에서나마 요셉이 천사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는 것에서 의롭고 정직한 요셉의 깊은 신앙과 그로 말미암은 순명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요셉은 예수 탄생의 환경을 빼면 복음서에 나타난 것이 단 한 번뿐이다. 이처럼 요셉은 사도들 가운데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지만, 예수 탄생의 가장 훌륭한 조력자이다. 파혼을 결심했음에도 임신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예수의 탄생을 지켜보았으며, 두 모자를 정성껏 돌본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인간을 구원하는 역사의 여정을 함께한 진정한 증인이었던 것이다. 의로우면서도 강한 믿음으로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였기에 하느님의 뜻이 가능했던 것을 보면, 우리 마음 속 신앙의 빛이 바로 하느님 섭리의 한 갈래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이 그림의 메시지로 읽어볼 수 있다.
[출처 및 참고문헌: 동아일보 2023년 12월 22일(금)(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미술사학자), ( 문학박사. 한국디지털대학교).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 ∙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