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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4년 5월 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불확실한 세상에 살면서
1970년대 영국의 BBC 방송에서 하버드 대학교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어려운 경제학을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강의로 아주 쉽게 설명하였고, 그 때문에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는 그 당시에 아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사회의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는 20세기의 경제를 불확실한 상황에서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적합한 해결 모델을 찾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경제학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에서 아무도 최적해를 구할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전에도 그랬지만 변화의 가속도가 붙어 있는 현재는 최적해 모델을 더욱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사실 앞날을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하느님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정보와 여러 가지 상황을 토대로 예측하거나 전망하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사실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예측과 전망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우리는 예측과 전망을 통해서 우리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그 예측과 전망에 대하여 예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표징을 보고 하느님을 깨닫고,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알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지금을 보면 앞을 훤히 알아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이러한 불확실한 현세에서 우리는 예측과 전망만으로 살아가려니 걱정되고 근심이 떠나질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무엇을 근심하고 걱정하나요? 우선 다가올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오늘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사실로 미래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고, 불안해서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우리는 내일을 걱정하면서 오늘을 삽니다. 아무도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접하면서 미래를 예측하거나 전망해보면 더 걱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여건, 환경에 대하여 확신이 없기 때문에 두렵고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고 근심과 걱정이 많은 것입니다. 돈이나 건강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병을 앓고 있으면 그 병에 대하여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걱정하고 불안합니다. 그리고 당장 돈이 없기 때문에 돌아오는 카드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비관하고, 초라하게 느껴져 불안과 근심 걱정에 가속도가 붙는 것입니다.
셋째로, 관계에서 오는 근심 걱정이 있습니다. 인간관계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불안하고 걱정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신앙 안에서 걱정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걱정되고 전적(全的)으로 의탁(依託)이 없기 때문에 불안이 가중되고, 신뢰가 없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관계로 걱정이 태산과 같고 돈 문제도 근심과 걱정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사랑과 우정도 배신과 무관심으로 근심과 걱정을 만듭니다.
넷째로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해서 불안이 불안을 만들고, 위협이나 폭력에 대하여 공포감이 생겨서 두려움이 근심과 걱정을 만듭니다. 학대를 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특정 사람이나 환경에 강한 불안감을 갖고 근심과 걱정을 하게 됩니다. 나무도 송곳으로 한 곳을 계속해서 찔러서 상처를 주면 송곳을 가지고 나무에 접근하는 사람만 보아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는 신체적인 병을 만들기도 하고 강박관념이나 정신병을 만들기도 합니다. 우울증은 심한 정신병으로 몰고 가기도 하고 대인기피증을 유발하기도 하고 불면증은 저녁시간만 되면 괴롭혀서 습관적으로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통해서 불안을 유발하고 근심과 걱정을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잃을까봐서 불안하고 근심 걱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근심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부활하시면 그 근심은 기쁨이 되고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다시 희망을 두고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은 암담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밤을 지새며 지금 봉착되어 있는 이 어려움을 어쩌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노심초사(勞心焦思)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주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당신의 거룩하신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근심 걱정을 모두 없애 주십니다. 비록 지금 처참하게 죽을지라도 다시 당신처럼 부활하리라는 그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바로 희망의 부활시기이이고 따지고 보면 일 년 내내 부활시기를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약한 인간이어서 자꾸만 걱정하고 근심할 때 성령께 온전히 의탁하고 그냥 하느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야 할 것 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래야 하고 제아무리 근심하고 걱정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고, 그 한계에 미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고, 회당에서 토론을 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1-8
그 무렵 1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2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3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4 바오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5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7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다. 그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8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축일5월 9일 성 제오르지오 프레카 (George Preca)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 연도 : 1880-1962년
같은 이름 : 게오르그, 게오르기오, 게오르기우스, 쁘레까, 제오르지우스, 조지, 호르헤
성 게오르기우스 프레카(Georgius Preca, 또는 제오르지오 프레카)는 1880년 2월 12일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몰타(Malta)의 수도인 발레타(Valletta)에서 빈첸조 프레카(Vincenzo Preca)와 나탈리나 체라볼로(Natalina Ceravolo)의 아홉 자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열심한 부모에 의해 그는 그 해 2월 17일 발레타의 포르토 살보(Porto Salvo)에 있는 동정 마리아 본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1888년 프레카 가족은 발레타에서 멀지 않고 빠르게 성장하는 항구도시인 함룬(Hamrun)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의 성 카예타누스(Cajetanus) 본당에서 게오르기우스는 견진성사를 받고 첫영성체를 했다.
17살이 된 어느 날 그는 플로리아나(Floriana)에 있는 마글리오(Maglio) 정원을 따라 걷던 중 그가 다니던 리케움(Lyceum) 학원의 교수인 에르콜레 몸팔라오(Ercole Mompalao) 신부를 만났다. 에르콜레 신부는 그에게 “네가 어른이 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의 친구가 되고, 너도 그들의 친구가 될 것이다. 너는 그들을 통해 너의 좋은 운명을 찾을 것이고, 그들도 너를 통해서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리케움 학원에서 공부를 마친 게오르기우스는 사제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몰타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에서 그의 고해사제였던 알로이시우스 갈레아(Aloysius Galea) 신부가 1905년 4월 8일에 선종했는데 며칠 뒤 게오르기우스에게 발현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가르치도록 너를 선택하셨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이에 감동한 게오르기우스는 라틴어로 규칙서를 작성하여 교황 비오 10세(Pius X)의 승인을 받고자 했다. 그는 모든 본당에서 평신도 보조자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양성할 책임을 맡을 7명의 종신 부제들의 모임을 마음속에 그렸다. 1905-1906년 사이에 그는 함룬에서 남성으로 구성된 한 청년 모임을 알게 되어 그들을 자신의 영성 모임에 초대하였다. 여기서 그는 청년 모임의 지도자였던 에우게니오 보르그(Eugenio Borg)를 주목하였고, 그에게 요한 복음에 대해 설명하였다. 에우게니오 보르그는 후에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첫 번째 총장이 되었다.
게오르기우스는 사제 서품을 몇 달 앞두고 매우 심각한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성 요셉(Josephus)에게 전구하여 호된 시련에서 살아났지만 그 질병의 결과로 왼쪽 허파가 영구적으로 손상되었다. 그는 1906년 12월 22일 피에트로 파체(Pietro Pace)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예수 성탄 대축일에 함룬의 성 카에타누스 본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서품식 이후 여러 주간 동안 그는 미사를 봉헌할 때를 제외하고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작은 다락방에 칩거하여 하루 종일 묵상과 관상 생활에 전념하였다. 1907년 1월 말경 그는 예전에 보았던 청년 모임을 불렀고, 2월 2일 함룬의 타누초(Ta’Nuzzo) 성당에서 열린 영성 모임에 그들을 초대하였다. 그 후 이 작은 모임은 함룬의 프라 디에구(Fra Diegu) 거리에 작은 공간을 빌려 같은 해 3월 7일 첫 모임을 가졌다. 이 두 날이 그리스도교 교리회(the Society of Christian Doctrine)의 시작으로 기록되었다.
이 평신도 모임의 회원들은 모범적 생활과 가톨릭 신앙의 원리로 충실히 양성되어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파견되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처음에 이 모임을 ‘교황의 아들과 딸회’(Societas Papidum et Papidissarum)로 불렀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들이 모임을 갖던 낡고 허름한 공간 때문에 농담 삼아 ‘박물관’(Museum)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별명은 곧 그들 모임의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한편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박물관’ 철자에 라틴어의 첫 글자를 따서 ‘M.U.S.E.U.M’(Magister Utinam Sequatur Evangelium Universus Mundus!)이라는 이름을 고안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선생님, 전 세계가 복음을 따라가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1910년에는 지안니나 쿠타자르(Giannina Cutajar)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여성 모임이 시작되었고, 그녀는 후에 첫 번째 총장이 되었다.
1910년경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스스로 늘 ‘아기 예수님의 놀라운 발현’이라고 부른 매우 강한 신비 체험을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마르사 크로스(Marsa Cross) 근처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거름 자루를 실은 손수레를 밀고 있는 12살 소년을 보게 되었다. 그 소년은 그를 바라보며 급히 도와달라고 청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손수레에 손을 얹는 순간 너무도 큰 영적 감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를 갔는지 또 그 소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결코 기억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이 체험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그 소년이 예수님이었고, 주님께서는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정통한 교리와 양성으로써 주님의 들판과 포도밭을 재배하기 위해 자신들의 도움을 요청하고 계신다고 이해하였다.
이 교리교사들의 모임(M.U.S.E.U.M.)이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 교리회로 발전하였다. 교리교육 사도직에 헌신하는 이 평신도 모임은 자신들을 단순한 복음적 생활양식으로 인도했고, 그들 스스로 짧은 기도나 규칙적인 묵상을 통해 기도 생활에 전념했다. 매일 한 시간 동안 교리교육을 받고 이어서 그룹 모임을 가졌다. 1909년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센터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상심하였지만 주저함 없이 이 명령을 따랐다. 그 후 교구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교구청에 이의를 제기해 이 금령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14년과 1915년 사이에 여러 일간지들이 새로운 그리스도교 교리회를 모욕하는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회원들에게 온유함의 서약 또는 약속을 하도록 명했고, 장난삼아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기꺼이 용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모욕까지 사랑하도록 가르치며 모든 고통을 참아내었다. 1916년 마우로 카루아나(Mauro Caruana) 주교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에 대한 조사를 명했고, 우여곡절 끝에 호의적인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비록 몇 가지 변경 요구는 있었지만 그리스도교 교리회에 대한 교회의 최종적 승인을 위한 길이 열렸고, 그 결과 1932년 4월 12일 카루아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 승인을 받았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몰타 제도(諸島)에 복음의 가치와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다. 그는 몰타 사람들을 위해 교리 · 윤리 · 영성에 관한 많은 책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회원들의 개인적 사용을 위한 기도나 대중적인 신심을 위한 기도를 담은 수많은 소책자들도 출판하였다. 그는 분명히 하느님의 말씀, 특히 ‘사랑 받은 이의 목소리’라고 부른 복음의 위대한 사도였다. 그는 회원들과 대중들에게 복음서의 문장과 구절들을 기억하도록 고무하였고, 카리스마에 충만한 그의 강론은 항상 성경의 비유나 이야기 그리고 성인들의 생애를 참조하였다. 그는 열정적으로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야할 영광을 지켰고, 어떤 것이 추악한 죄악인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또한 죽음과 심판, 지옥과 천국에 대해 공공연히 설교하는데 주저하지도 않았다.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철저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감동적으로 선포하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조언이나 격려의 말씀을 듣고자 몰려왔고, 그의 전구로 이루어진 치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사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초자연적 은총을 받았다. 사제로서 겸손과 친절, 온유와 관대함을 지닌 그는 진정 하느님 백성의 거룩한 목자였다.
몰타 사람들에게 있어서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강생(降生)의 신비에 대한 신심을 장려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917년부터 그는 요한 복음 1장 14절의 말씀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Verbum Dei caro factum est!”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회원들이 이 말씀의 배지(badge)를 두르기를 원했다. 1921년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에 그리스도교 교리회는 몰타와 고조(Gozo) 섬의 도시와 촌락에서 처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구유 예식을 준비했는데, 이는 그 이후 몰타 제도에서 성탄절을 경축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되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모든 어린이들이 교리반에 참석하여 성탄절을 위해 준비한 작은 구유나 아기 예수상을 만져보기를 원했다.
이 거룩한 사제는 특별히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어려운 순간마다 동정 마리아의 모성적 보호하심에 의탁하도록 배웠다. 그는 1918년 7월 21일 카르멜회의 3회원이 되어 이듬해 9월에 서원을 하면서 프란코(Franco)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회 센터에 모인 어린이들에게 동정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스카풀라(Scapulars)와 기적의 메달 사용을 장려했고, 그리스도교 교리회 본원 성당을 기적의 메달 성모님께 봉헌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개인적으로 묵주기도를 암송하기 위해 ‘빛의 신비’ 5단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1951년 5월 19일에는 산타 베네라(Santa Venera)에 성 미카엘(Michael) 학교 주춧돌 축복식을 가졌고, 1952년에는 호주에서 그리스도교 교리회를 시작하기 위해 회원들을 파견하였다. 이후 영국, 알바니아, 수단, 케냐, 페루에도 진출하였다.
복음에 대한 봉사와 하느님 백성의 그리스도교적 양성을 위한 길고도 활동적인 삶을 산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1962년 7월 26일 목요일 저녁에 산타 베네라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몰타의 모든 주민들로부터 깊은 애도를 받았다. 생전에 그는 매우 검소한 장례식을 원했지만 시 당국과 교회의 고위층을 포함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몰려왔다. 그의 유해는 함룬 인근에 있는 기적의 메달 동정 마리아 성당에 안치되었고, 이곳은 곧 지속적인 순례의 장소가 되었다. 그는 2001년 5월 9일 몰타의 플로리아나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7년 6월 3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축일은 전례적으로 5월 9일에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제오르지오 프레카 (George Preca)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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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