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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눈 높은 한국인들, 그들에게 귀 기울였더니 매년 두 자릿수씩 성장
■ 오디오 명가 뱅앤올룹슨 헨리크 클라우센 CEO
"우리는 애자일(agile) 방식으로 일합니다. 30~40명의 개발자가 고객 반응을 빠르게 반영해 제품을 개선하고 `개별 주문에 따른 생산(customization)`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 압구정에 위치한 뱅앤올룹슨(Bang & Olufsen) 플래그십스토어에서 만난 헨리크 클라우센(Henrik Clausen) 최고경영자(CEO·55)의 말은 뜻밖이었다. 영단어 `agile`은 사전적으로 민첩한, 날렵한, 재빠른 등의 의미다.
철저한 계획에 따르기보다 먼저 제품을 출시하고 이후 고객과 시장의 반응을 보면서 개선한다는 뜻의 업무 방식을 설명하며 나온 단어였다. 이런 표현은 당초 정보기술(IT) 산업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더욱 주목받고 있다. 뱅앤올룹슨은 음향기기로 전 세계적 명성을 얻은 기업이다. 창립한 지 93년이나 된 전통의 기업으로 애자일 방식과는 거리가 멀 것 같다. 하지만 뱅앤올룹슨은 IT 기업이나 스타트업에서 보듯 이처럼 속도감을 중시하는 기업문화를 채택했다. 또 사물인터넷(IoT) 등 가치와 중요도가 커지는 시장에 진출하고 구글과 애플 등 유수의 IT 공룡 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머지않아 100년을 살아남은 기업이 될 뱅앤올룹슨. 한 세기를 돌파할 오래된 기업이 디지털 시대에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매일경제 비즈타임스는 클라우센 CEO와 인터뷰하고 기업 전략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뱅앤올룹슨의 제품은 세련되면서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베오플레이A9`은 동그란 디자인으로 일명 `UFO 스피커`로 불린다. `베오사운드 셰이프`는 스피커라기보다는 벽을 장식하는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회사는 1925년 덴마크의 청년 공학도 피터 뱅(Bang)과 스벤 올룹슨(Olufsen)이 세웠다. 라디오, 오디오 녹음 기기, 스피커, TV 등을 만들어 왔는데, 주력은 수천만 원대에 이르는 고가 제품이다. 한국에만 특별판으로 나온 `베오랩50`의 가격도 4230만원이다. 초고가이지만 원음을 최대한 재현하는 기술에 전 세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국에도 고객층이 두터워 1998년 갤러리아백화점에 첫 공식 매장을 연 뒤 현재 압구정 플래그십스토어를 포함해 전국에 7개 공식 매장과 34개 판매처를 갖고 있다.
클라우센 CEO는 끊임없이 혁신하려는 이유에 대해 "시대가 변하고 소비자들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뱅앤올룹슨은 명실상부한 음향기기 명가(名家)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오래도록 위기를 겪는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음악을 저장해서 듣기보다는 바로 재생하는 스트리밍 서비스 수요가 커지면서 실적이 급격히 악화됐다.
이때 회사는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헤드폰, 이어폰, 블루투스 등으로 스마트폰에 연결되는 소형 스피커 등 완전히 새로운 사업 분야로 진출하며 돌파구를 찾기 시작한 것도 이런 뼈아픈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렇게 탄생한 게 20만~60만원대의 베오플레이(B&O플레이) 제품군이다. 베오플레이는 청년층 등으로 고객층을 넓히며 전사적인 재도약의 발판이 됐다. 2014년 매출은 전년 대비 24% 감소했다. 하지만 2015년 8% 증가하며 반등했다. 2016년부터는 전년 대비 약 12%의 성장률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지난해 베오플레이 제품군 매출이 27% 정도 급증하는 등 전체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이 같은 실적이 뒷받침되자 뱅앤올룹슨 주가는 올 초 지난 10년래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클라우센 CEO는 성장세를 키우고자 AI 스피커 시장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우선은 구글 어시스턴트, 아마존 알렉사, 애플 시리 등을 탑재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클라우센 CEO는 "뱅앤올룹슨의 제품이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다른 전자제품과 연결될 수 있는 기회"라며 이 같은 의사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클라우센 CEO는 "유명 기술 기업이 스피커를 만드는 것은 기쁜 일"이라며 "고품질의 세련된 제품을 원하면 뱅앤올룹슨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 및 트렌드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미래 먹거리로 삼겠다는 의지다.
다른 기업과의 파트너십은 뱅앤올룹슨이 단행한 조직 혁신의 핵심이다. 뱅앤올룹슨은 수익성을 회복하기 위해 아웃소싱을 확대하는 등 조직을 가볍게 만들었다. 수천 명에 이르던 직원은 800여 명으로 줄였다. 클라우센 CEO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많은 결정을 했다"며 "음향과 공예(crafts), 디자인 등에서의 강점은 유지하면서 이외의 것들은 모두 외주를 주면서 파트너십을 이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런 경영 방침의 전환으로 제품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클라우센 CEO는 "TV 1만여 대를 자체 생산하는 기업은 2200만대를 생산하는 제조사와 경쟁이 안 된다"며 "이제는 LG전자 등 다양한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어 경쟁력 있는 제품을 출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뱅앤올룹슨은 지난해 말 LG전자의 올레드(OLED) 기술을 바탕으로 프리미엄 TV `베오비전 이클립스`를 선보였다. 휼렛패커드(HP)와는 PC, 하만(Harman)·포드(Ford) 등과 자동차 분야에서 파트너십을 맺었다. 삼성이나 현대자동차 등 한국 다른 기업과의 파트너십 가능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면서도 "폭넓은 파트너를 찾기보다는 같은 목표를 갖고 있는 파트너를 찾아 깊게 협력하는 편"이라고 했다. 다음은 클라우센 CEO와의 인터뷰와 문답이다.
―뱅앤올룹슨이 다시 성장 동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 사업, 제품 등 측면에서 어떤 분야로 진출할지 결정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TV 부문은 성장 기회가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헤드폰, 이어폰, 소형 스피커 등 다른 전자·가전 제품과 연결될 수 있는 오디오 분야는 더 큰 성장 기회가 었었다. 이 분야로 진출하는 작업을 지난 4~5년 동안 해 왔다. 현재는 이 제품들이 전체 포트폴리오 중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조직 정비는 어떻게 했나.
▷뱅앤올룹슨은 역사적으로 모든 것을 인하우스(in―house) 방식으a로 자체 해결해 왔다. 하지만 TV 1만대를 직접 생산하는 기업이 2200만대를 만드는 기업과 경쟁하는 것은 가격은 물론 제품 경쟁력에서도 어불성설이다. 무엇을 포기하고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많은 결정을 했다. 음향과 공예(crafts), 디자인에서의 강점은 유지하기로 했다. 이 밖에 것은 모두 외주를 주고 파트너십을 적극 이용했다. LG전자 등 다양한 분야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어 TV 등 경쟁력 있는 제품을 출시할 수 있게 됐다. 몇 년 전에는 3000명, 5000명, 1만명의 직원이 있었다. 현재는 800여 명까지 줄였다. 200여 명은 생산 부문에서 일하고 600여 명은 공급망을 운영·관리한다.
―뱅앤올룹슨 제품은 비싼 가격으로 유명한데.
▷과거 포트폴리오는 최고급 제품 중심이었다. 최근에는 이어폰, 헤드폰 등 제품을 잇따라 출시하며 젊은 소비자를 새로 확보했다. 하지만 여전히 모두를 위한 제품은 아니다. 목표는 헤드폰과 이어폰도 뱅앤올룹슨의 다른 오디오 제품처럼 특별한 제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뱅앤올룹슨의 핵심 역량은 음향과 디자인, 공예의 특별한 결합이다. 이를 헤드폰, 이어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싼 제품을 만드는 게 아니다. 학생과 직장인 등 젊은 소비자 중에서도 뱅앤올룹슨의 가치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단순히 오디오 산업에 한정되는 게 아니다. 명품 브랜드로서 추구하는 바다. 단순한 명품를 넘어 성능,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구글 어시스턴트를 시작으로 애플 시리, 아마존 알렉사 등을 탑재한 AI 스피커를 출시할 계획이다. 이들과 손잡은 이유는.
▷사물인터넷(IoT) 기술 등이 발전하면서 세상이 변하고 있다.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전략을 변경했다. 어떤 기업 플랫폼에 연결될지는 개인 선택이다. 뱅앤올룹슨은 그 선택을 존중해 구글, 애플, 아마존 등 어떤 기업의 인공지능(AI) 플랫폼에도 연결할 수 있게 하려 한다. 과거 뱅앤올룹슨이 폐쇄형이었다면 이제는 개방형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애플 같은 기술 기업은 경쟁자가 아닌가.
▷기술 기업들 제품이 집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플랫폼과 생태계를 형성하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협이자 기회인데, 우리는 기회로 보고 싶다. 우리 제품 역시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뱅앤올룹슨만의 차별화와 경쟁력도 있다. 먼저 플랫폼 기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제품은 음향, 디자인, 공예의 특별한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기술 기업이 경쟁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기본적인 제품을 만든다. 우리와 카테고리가 다르다. 오히려 그들이 스피커를 만드는 게 기쁘다. 매우 멋지고 뛰어난 제품을 원하면 뱅앤올룹슨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LG전자와 주로 스마트폰, TV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삼성 등 다른 한국 기업과 협력할 계획도 있나.
▷LG전자와 협력한 것은 매우 만족스럽다. 양사가 모두 `특별한 제품을 만들자`는 동일한 목표로 움직였다. 영상과 TV는 뱅앤올룹슨의 강점이 없는 완전히 다른 사업 분야다. LG전자와 협력하면서 OLED 기술을 접목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특별한 영상 경험을 제공하면서 뛰어난 오디오 경험도 제공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도 많은 사업 기회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긴 어렵다. 뱅앤올룹슨은 폭넓은 파트너를 찾기보다는 같은 목표를 갖고 있는 파트너를 찾고 있다.
―자동차 등 다른 산업 분야 기업들과 협력할 계획은 없나.
▷PC부문에서는 휴렛패커드(HP)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HP PC의 사운드 튜닝 작업을 같이하고 있다. 자동차 쪽에서는 하만과 함께 포드, 폭스바겐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폭스바겐은 아우디, 람보르기니, 벤틀리 차량과 관련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이외에 슈프림(Supreme), 입생로랑(Yves Saint Laurent)과 한정판 제품을 출시하는 등 작게 협업하는 부분이 있다.
―연구개발(R&D)에 얼마나 투자하나.
▷전체 예산의 10% 정도다. R&D 관련 직원은 150~200명이다. 전체 4분의 1에 해당하는 인력이 R&D에 집중하고 있다.
―아날로그 감성 디자인으로 유명한데, 트렌드는 디지털이다.
▷뱅앤올룹슨 역시 디지털로 가고 있다. 음향에 대해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부터 모든 요소와 단계를 시험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제품이 소프트웨어에 집중되고 있다. 음질 역시 알고리즘으로 결정된다. 소프트웨어 작업이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돼야 한다. 이 작업을 중시하고 있다. 우리 제품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는 건 우리가 제품의 `물리적인 구현(physical manifestation)`에 신경 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무를 포함해 다양한 진짜 재료를 쓴다. 하지만 제품의 다른 모든 측면은 디지털 기술이다. 그렇게 돼야 한다. 우리 목표이자 정체성이다. 뱅앤올룹슨은 디지털 측면에서도 최고다. 이 위에 음향과 디자인, 공예를 제품으로 구현함으로써 특별함을 더한다.
―뱅앤올룹슨은 꼼꼼한 제품 검증으로 유명하다. 애자일(agile)과 같은 새로운 생산 방식도 도입하고 있나.
▷제품의 물리적인 구현 측면에서 애자일을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 애자일은 소프트웨어에 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가 문제점을 보완하고 빠르게 변화할 수 있는 발전 과정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소프트웨어와 관련된 고객의 피드백을 빠르게 반영해 제품을 개선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현재 엔지니어 30~40명이 자체 플랫폼상에서 제품 개선과 개별 주문에 따른 생산(customization)을 책임지고 있다. 애자일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애자일은 필요하다. 소비자가 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국 특별판 제품을 출시한 이유가 있나.
▷한국 진출 2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두 제품의 스페셜 에디션을 선보이게 됐다. 1998년 서울에 첫 뱅앤올룹슨 매장 연 이후로 한국 사업은 상당히 성장했다. 한국은 아주 중요한 시장이다. 7개 공식매장과 34개 판매처가 있다. 뱅앤올룹슨은 연간 10~12%의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에서의 성장률은 글로벌 평균보다 높다. 압구정 플래그십스토어는 매출 기준 세계 상위 5위 매장 중 한 곳이다. 한국 소비자는 공예미와 디자인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
―중국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중국도 명품에 대한 준비가 됐다고 보나.
▷초기에 뱅앤올룹슨은 몇몇 국가와 대도시에서 강했다. 뉴욕, 싱가포르가 대표적이다. 중국 시장은 지난 1~2년간 가장 많이 성장했다. 여전히 중국에서 모두가 뱅앤올룹슨 제품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큰 소비자층이 있다. 초기에 디지털 채널이 소비자층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됐다. 현재는 오프라인 매장과 유통망도 강화하고 있다.
▶▶ 헨리크 클라우센 최고경영자(CEO)는…
2016년 7월부터 최고경영자(CEO)로 뱅앤올룹슨을 이끌고 있다.
2014~2016년 노르웨이 통신사 `텔레노어(Telenor ASA)`에서 최고디지털·전략책임자 및 부사장을 지냈다. 말레이시아 통신사 `디지커뮤니케이션(Digi Telecommunications)`에서 CEO로 일하며 전문 경영인으로서 경력을 쌓았다. 덴마크 코펜하겐 경영대에서 국제경영을 전공하고 덴마크 공과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