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할일은 막중하고 갈 길은 아주 멉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어떤 업무나 일의 방향을 생각하고 내리는 의사결정입니다. 교구의 교구장님이나, 나라의 대통령 또 회사의 최고 경영자나, 집안의 가장, 본당의 신부님이나 회장님 또 단체의 장은 모든 일에 의사를 결정해야합니다. 이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순간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의사결정자가 결정한 것으로 그 일이 종결지어지기 때문입니다.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정보를 통해서 닥쳐올 위험과 변수에 대비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수많은 정보와 경험이나 사례의 경우 중에 가장 최고의 해답을 얻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고 경영자의 의사결정을 더욱 존중하고 그 결정에 믿고 따르는 것은 경솔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합당하고 좋은 정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결정하는 것에 최고의 정답은 있을 수 없으니 그래서 최적 해(最適 解)를 구한다고 합니다. 그 최적 해는 정답이 될 수 없지만 정답에 가장 접근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그 최적 해에 의지해서 목표달성 수준을 정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 사람은 그 맡은 일에 대하여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자나 위임을 받은 사람들은 일이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일을 잘 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흔히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책임은 막중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데 어렵고 아득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금 제자들을 떠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답답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을 수행하는 데 책임은 막중하고 갈 길은 멀게 느껴지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대하여 도무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이제 당신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과 같이 40일 간을 계시다가 승천하시고,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손에 모든 것을 쥐어 주시듯 말씀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건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정답을 말씀하시면 제자들은 믿지 않을 것이고, 또 믿으면 게으름을 피울 것이고, 그 어려움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방해할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참 어려운 일을 계속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이시기 때문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모든 결정을 진리로 완벽하게 맺으십니다. 그것은 당신의 희생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심으로써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너무 답답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위임하시는 일을 해낼 재간이 없고 너무 막중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런 순간을 날마다 맞이하고 있습니다. 책임은 막중하고 해야 할 일은 너무 많기만 합니다. 집안을 일으키기도 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도 해야 하고, 사회생활도 잘해야 하고, 정치에 참여하기도 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하고 지금처럼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잘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결정할 때도 하느님처럼 명쾌하게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할일은 막중하고 갈 길은 아주 멀고 힘겹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보내서 너희가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참 세상의 일은 그렇게 대치되어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울며 애통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였으니 이제 자신들을 방해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아가 된 제자들은 그 책임감과 주님을 잃은 애통함으로 가슴을 찧으며 아파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이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면서 애통해야 하나요? 아니면 기뻐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측면에서 기뻐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면 기쁜 일이지만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신 주님을 기뻐해야 하다니요?' 하고 부정하고 침통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사순절도 보내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고 기도드리고 피정도 하고 또 미사에 참례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할일이 많다고 걱정하느냐? 너희를 두고 내가 아주 떠나갈까 봐 걱정하고 근심하느냐? 내가 네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애통해 하느냐? 그러지 말려므나. 내 죽음이 네게는 아픈 상처로 있겠지만 근심하고 걱정하고 괴로워하지 말아라, 이제 그 모든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사랑임을 알고 기쁨으로 변해야 한다. 나는 너희의 기쁨을 위해서 지금 다시 십자가에 달린다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란다. 내 사랑하는 친구야!"
하고 상상하면 안 되나요? 이런 상상이 성경의 말씀에 위배되나요? 이런 마음이 주님을 잘못 모시는 것인가요?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정말 기뻐하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그 일을 정성을 다해서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임중도원(任重道遠)의 길이지만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따라가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을 주님께 모두 맡기고 근심하지 말고 그분을 사랑하면서 따라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짊어지시고 죽기까지 우리의 슬픔과 근심을 큰 기쁨으로 바꿔주신 주님! 아직도 당신의 그 아픔과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주어진 짐 때문에 당신을 보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시는 저희에게 당신의 성령을 보내시어 주님의 사랑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당신의 그 깊은 사랑을 가슴 가득히 담고서 할 일이 아무리 많고 힘들어도 아니 아무리 더디고 험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따라가게 하소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축일5월 10일 성 욥 (Job)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 +연대미상
성 욥은 구약성서의 시서(詩書)에 속하는 욥기의 저자로 흔히 불린다. 욥기의 목적은 불의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것이나,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혼란에 빠진 한 인간이 거룩하고 전능한 하느님께 대하여 자리 매김하려는 시도에 대한 것이다. 욥기는 크게 산문과 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문 부분의 바탕을 이루는 본래의 욥 이야기는 이미 기원전 2천년대 말기부터 근동 지방의 현인들 사이에 일종의 민간 설화로 두루 퍼져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기원전 1천 년 이후에 이스라엘에도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에제 14,14 참조). 바빌론 유배 이후, 곧 6세기 말엽 이후, 그리고 3세기 전반 이전에(집회 49,9 참조) 팔레스티나에 살던 어떤 유대인 저자가, 성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욥 이야기를 자기의 의도에 맞게 각색하고 윤색하여 거기에 독창적인 운문 부분을 지어 붙였다. 그러나 이 문문 부분은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다. 저자가 대화 부분의 욥을 통해서 토로하는 말은,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직접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욥기는 욥이라는 특수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보편성이 이 책의 큰 특징을 이룬다. 욥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선택, 시나이 산 계약, 메시아 사상 등 선택된 민족의 특유한 사항이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아울러 유배 이후에 저술 되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성서에서 일대 전환점을 이루는 “예루살렘 함락 - 성전파괴 - 유배”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공통 현상을 바탕으로 자기의 관심사를 이야기하겠다는 저자의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욥기는 출발점에서부터 보편성을 뚜렷이 드러낸다. 주인공 욥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그의 거주지도 이스라엘 땅이 아니다. ‘욥’이라는 이름 자체도 당시 여러 나라에서 쓰이던 이름이라고 생각된다(1,1). 욥의 세 친구 역시 모두 외국 이름을 가진 이방인이다(2,11). 욥은 또한 대화를 시작하는 독백에서부터 이미 자기의 고통을 일반화한다. 고통에 처한 자신을 ‘고생하는 이들, 영혼이 쓰라린 이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을 대변하여 하느님에게 질문을 던진다(3,20-21). 물론 대화 중에 욥은 주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도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다른 이들과의 연대성 안에서 펼쳐 간다. 욥기의 저자는 자기의 직접적인 체험을 토대로 처음부터 보편성을 염두에 두면서 자기의 생각을 일반적으로 전개시킨다.
성 욥에 대한 전례적인 공경은 동방 교회에서부터 인정되었지만, 단순하고 곧으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욥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한 (John), 욥 (Job)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