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청년 이야기.
마19장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 이야기는 해석상 논란이 많은 장에 속한다.
성경에 수많은 사건과 내용, 또 종말론까지 해석이 서로 천차 만별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쓰여져 있지만 역사책이 아니다.
복음을 증거할때 성경 구절만 나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세히 설명하고 증거해야 한다.
주님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눅 24장
27 이에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성령은 분별의 영이시며 말씀과 함께 역사 하신다.
본문 말씀을 보자.
말씀에 나오는 부자청년은 어릴때 부터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온 청년이다.
그리고 스스로 이 정도면 영생 얻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늘 이 정도면 영생 얻을수 있을까?하는 의문속에서 살아 왔을수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질문을 하였으며 율법을 철저히 지켰느냐? 그러면 영생을 얻는다라는 당연한 답변을 기대하고, 다 지켰습니다!
나는 선하게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 왔기 때문에 영생 얻을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자신을 내 세우며 말한다.
그렇게 철저히 율법을 준수한 자신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니까 근심하며 떠나게 된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 소문을 듣고 찾아 왔지만 구원자 하나님 아들이 아닌 선한 선지자 선생님으로 알았을 것이다.
부자청년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으로 부족하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21절에 "온전하자고 할진대" 의미를 잘 생각해보자.
이 말씀은 완전하다. 완벽하다의 뜻이다.
그러니까 천국과 영생은 죄가 하나도 없이 완벽한 사람만이 들어가고 소유할수 있다는 말씀이다.
"소유를 팔아" 이 말씀도 재산 일부분이 아니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인다.
왜냐하면 그 뒤에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좆았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므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도 제자들처럼 모든 소유를 버리고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영생 얻을수 있다라는 말씀이다.
자, 그러면 예수께서 왜 부자 청년에게 그런 답변을 하셨을까?
여기에 대해 몇가지 생각을 해 봐야 한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지 않고 선한 분이라 생각 하였다.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나는 너희들이 선하게 살아야 구원 얻는다 전하려고 온 선지자가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서 온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희들은 다 죄인 들이다.
내가 너희들이 기다린 구원자 메시야다,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부자 청년은 율법을 열심히 지컸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같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지만 그 속에 사랑이 없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새 계명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율법의 계명을 폐하시고 율법의 완성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에서 해방 되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처절한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깨닫게 된다.
물론 부자 청년이야기는 흔히 해석하는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살아라는 교훈적인 말씀으로도 적용이 된다.
그러나 구원론적으로 말씀을 이해하면 율법의 정죄와 복음이 담겨져 있다.
율법을 지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대부분 다 아실 것이다.
부자청년은 예수님을 믿은 상태가 아니다.
선한 선생님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아직 믿지도 않은 부자 청년에게 가난한자에게 소유를 다 팔아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면 영생을 얻을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전 재산 다 팔아 나누어 주고 모든 것 버리고 예수님 따라 감으로 구원 얻는 것이라면 구원얻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는가?
이웃은 커녕 내 아내, 내 가족, 육신의 형제, 교회 형제 자매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사람은 간사해서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
구원받은 자도 날씨처럼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믿는 자는 당연히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선행을 해야 한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선한 행위를 보고 불신자들이 복음을 들을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믿는 자도 서로 성향이 다르고 은사도 다르다.
구제하는 걸 기쁨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구원받았어도 쉽게 못할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도 다 다르지 않은가?
우러나와 열심인 사람.
뺀질 뺀질한 사람.
그렇다고 그런 사람을 손가락질해서도 안된다.
겉만보고 비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분별과 비판은 다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구원받았고 현재 미래도 구원받은 상태이며 은혜를 붙들고 방향성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기위하여 나아가고 있다.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으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가 하나도 없는 거룩한 자로 여겨주신다는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이제 구원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구원받았으니까 막 살아도 되겠네 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도 못했고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부자 청년에게, 가난한 자에게 소유를 팔아 도와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율법의 조문을 철저히 지켰어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껍데기 뿐이다, 사랑을 실천할때 율법이 살아 움직인다라는 말씀이며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가 처절한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된다.
또 영적인 의미로는 모든 소유, 내가 부자라고 움켜지고 있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 맘몬 우상이 되어버린 물질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고 중심에서 주님만을 소유하라.
예수님만이 영생이시고 최고의 보물이시다.
이 보물을 가진자가 모든 것을 소유한 자이며 천하를 다 가진 자이다!
주님은 어디로 가시며 따라오라 하시는가?
나는 지금 십자가로 가고 있다.
너도 나를 따라오라.
십자가에서 네가 나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면 하늘에 함께 앉아 있을 것이다.
하늘의 보화 영생을 얻을 것이다!
요6장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들 다시 살리리니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