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기저귀가 참 귀하던 시절 우리의 어머니들은 참 고생이 많았습니다. 세탁기도 없었던 그 때는 매일 소창을 빨아야 하고 세제도 귀하고 고무장갑도 없이 손으로 매일 빨아대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삐 일하면서도 자식들의 대 소변을 아주 적절하게 알아차리시고 기저귀를 젖지 않도록 정성으로 키웠습니다. 흔히 어머니는 자기 자식의 작은 행동 속에서 크고 작은 것을 이미 모두를 알고 계신 것이지요. 그래서 아기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엄마를 부르기만 하여도 모든 것을 금새 알아차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엎디어서 소리 내어 운다면, 주님은 금방내 알아차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주님!"하고 부리기만해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부르듯이 청함은 곧 주님을 정성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이나 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는 데 이 '청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도움을 구하는 것을 청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많이 부족하고 항상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자체적으로 충족하지 못하는 것은 도움을 청해서 보완하고 보충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 달라'는 것도 전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며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하는 경우도 그런 경우입니다. 그리고 힘이 부쳐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지만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이상한 일처럼 보입니다. 유권자들은 올바로 정치할 수 있는 사람을 뽑으려 하지만,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어려움을 도와주는 정치인으로 다가오지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하느님의 도움의 은총을 간절히 바랄 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부어주실 때 비로소 우리는 청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정중한 부탁'을 할 때 청한다고 합니다. 이 청(請)함은 존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청좌'(請坐 Please sit down, 앉으십시오.)와 같이 존경과 공경을 나타내는 완곡한 부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청탁(請託)이라고 말하지 부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부탁한다고 말하고, 아래 사람은 윗사람에게 '청탁'한다 혹은 '청촉'(請囑)이라고도 합니다. 내가 부탁하기에는 감히 엄두도 못내는 분에게 우리는 부탁할 때 곧 청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떼를 쓰며 부탁하고 싶을 때 우리는 불경스럽지 않게 간청(懇請)한다고 합니다. 기도로써 청할 때 우리는 간구(懇求)라고 말하고 이 의미를 '정성을 다하여 구한다.'라고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셋째는 '바람'을 나타냅니다. 곧 희망을 표현하는 말이고 청을 넣는다고 하는데 희망사항이지요. 부탁은 거절 받을 수도 있지만 실현가능성의 확률이 높을 때 우리는 부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전혀 이룰 수 없는 것도 하느님께서는 이루어 주신다는 희망으로 정말 터무니없는 것도 청하고 삽니다. 호스피스 병동에는 많은 사람들은 간청하고 있습니다. 정말 희망뿐이지만 얼마나 간절하고 얼마나 진실 된지 하느님과 기도하는 당사자만의 약속입니다.
넷째는 '부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부르기만 해도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무얼 도와달라고 부르기만 해도 불림을 받은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불러 준 것만 보아도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청한다는 것은 부른다는 의미로 상통합니다.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정성되게 부르기만 해도 그 분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기도할 때 중언부언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사족(蛇足)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1대 1로 각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각 사람의 학력과 지적 수준, 말씀을 알아듣는 자세, 가치관이나 기타 여러 사정을 참작하시어 직접 말씀하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의 참 의미와 율법의 참된 의미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또한 사랑에 관하여 수준과 눈높이에 맞추어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각자에게 꼭 알맞도록 오시어 드러내 놓고 알려주시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열심 하지 않아서 유치원생의 수준이라면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께서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대학생이라면 대학교수님처럼 오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전에 '미사 통상문'에서나 '식사 전 후 기도' 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라고 기도하였지만 지금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님을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직접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갈 수 없다.'(요한 14,6)는 말씀에 합당하게 기도문을 고친 것입니다. 우리는 감히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기도할 만큼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가려고 기를 쓰고 기도하여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느님의 본성으로 복귀하십니다. 인성을 접으시고 당신의 천주성 본성으로 복귀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시는 주님! 저희도 아버지의 집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부족한 저희가 당신을 통하여 당신께 나아갈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소서. 진리의 성령으로 저희가 주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께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저희에게 슬기와 통달과 의견과 지식, 지혜와 효경과 두려워함의 특은을 베풀어 주시어 주님께 청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사랑의 주님!
<아폴로는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23-28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23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24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25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27 그 뒤에 아폴로가 아카이아로 건너가고 싶어 하자,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그곳의 제자들에게 그를 영접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아폴로는 그곳에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28 그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축일5월 11일 성 프란치스코(성 예로니모의) (Francis of St. Jerome)
신분 : 신부
활동 지역 : 나폴리(Napoli)
활동 연도 : 1642-1716년
같은 이름 : 방지거, 예로니무스, 제로니모, 제롬, 지롤라모,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히에로니모, 히에로니무스
프란치스코 디 지롤라마(Franciscus di Girolama)로도 불리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de Hieronym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타란토(Taranto) 근방 아풀리아(Apulia)의 그로타글리에(Grottaglie)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란토의 예수회 대학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베키오(Vecchio)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수학한 후 1666년 나폴리에서 교구사제로 서품되었으나 28세 때에 스스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정식으로 서원을 발하고 죽을 때까지 농촌 선교사로서 나폴리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뛰어난 설교는 단순하고도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할 때는 양 같고 설교할 때는 사자 같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만큼 그의 설교로 감화를 받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자를 얻기 위하여 감옥과 매음굴을 서슴없이 찾아다녔고 작은 촌락과 뒷골목 그리고 길모퉁이에서도 그의 선교활동은 계속되었다. 또한 그는 무어인들도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터키 죄수들까지 신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를 통해 회개한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이는 자신의 부친을 살해한 어느 프랑스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회개한 후 남장을 하고 에스파냐 군에서 복무하였다. 또한 그는 위험한 환경에 있는 수많은 어린이들을 구하였다. 그의 장례식 때에는 나폴리의 거의 모든 걸인들이 관 주위에 모여 그를 애도하였다. 그는 1806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예수회에서는 7월 2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한다.
오늘 축일을 맞은 프란치스코(성 예로니모의) (Francis of St. Jerome)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