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르다 [이향란]
이별 속으로 숨어버린 사람을 문질렀더니 돌아왔다. 희
고 탱탱한 얼굴로 미끄러지듯 거짓말을 하듯 걸어 나갔던
3번 출구로 다시
죽은 나무의 뽑힌 영혼을 문질렀더니 새콤달콤한 잎들이
혀를 내둘렀다. 기막히네. 대체 어떻게 알았지? 갸웃거리
는 표정들로 수선거렸다.
찰랑, 시냇물을 문질렀다. 물고기를 밟고 찰방찰방 이끼
낀 돌들과 걸핏하면 빠져 죽던 구름과 서슬 퍼런 시간이 물
줄기를 털며 세차게 솟구쳤다. 물속에 가라앉아 울던 수초
도 눈물을 멈췄다.
허공을 문질렀다. 옅은 통증에 눈 감는 것들. 아하, 밤은
그렇게 오는 거구나. 어둠은 제가 밤이라는 걸 처음 안 듯
휘청거리며 가시 같은 빛을 얼른 뱉어 냈다. 그 순간, 별들
이 일제히 빛났다.
서로가 서로를 문질러 대는 꽃밭
그곳을 들여다보던 나는 말할 수 없는 향을 뒤집어쓰고
나비가 되었다. 공중의 한가운데를 날개로 문질렀다. 한바
탕 비를 쏟고야 말겠다는 듯 회색 구름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여전히 알지 못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문질러야 하는 그 무엇에 대해. 그러므로 멈
추지 않고 서두르지도 않고 끝까지 알수 없는 것들을 계속
문질러 댔다.
- 뮤즈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천년의시작, 2022
* 어릴 때, ‘엄마 배가 아파요.’ 하고 말하면 엄마는 아픈 배를 문질문질 문질러 주고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배는 나았다.
문지르는 것을 한자로 표현하면 애무(愛撫)인데 요즘은 스킨십이라고 한다.
영어도 아닌 스킨십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학문적으로 많이 쓰다보니
이제는 영어사전에 아예 등재가 되어버렸다.
애무는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니 손으로 문지르는 게 되겠지만
마음으로 서로 문지르는 것은 교감 내지는 관계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꽃밭에서 향을 뒤집어 쓰고 나비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이지만
엄마가 문질러준 배가 낫게 되는 것과 같으니 기적은 사랑의 결과물이 아닐까.
보름달 뜨고 달맞이꽃이 발꿈치 들면 여기저기 문질문질 기적이 일어나겠다.
** 시와편견 2022 가을호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