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펄 벅
중딩때 같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책장에 꽂혀 있던 세계문학전집에서,
유일하게 한권 빌린 책이 있으니,
바로 펄 벅의 <대지>라는 소설이었다.
책을 즐겨 읽지 않던 시절에,
내가 왜 그 책을 빌려 왔는지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작가와 작품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책을 읽어도 추리 소설만 읽던 나에게,
그 책은 버거운 내용에 버거운 양이었지만,
다 읽어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줄거리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왜 미국 작가가 중국 이야기를 썼을까 하는 생각 정도를 했었다.
그게 나와 펄 벅의 유일한 인연이었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책 좀 읽는다는 요즘...
몇 년 전 헌책방에 갔다가 구입한 책이 바로 이번에 읽은 <연인 서태후>이다.
엄청난 두께 때문에, 독서 우선순위에 밀려 있던 책.
앞부분을 읽어보고, 두껍지만 문체는 읽기는 편한 문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집어 들었다.
연말이라 몇몇 송년회와 그 후유증으로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읽기 어렵지 않은 책이다.
재미도 있다.
인내력은 없어도, 시간만 있으면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펄 벅.
그녀는 어린시절 선교사인 부모님 때문에 중국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펄 벅은 그래서 중국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 때문에서 잠시 미국으로 돌아왔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중국농업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된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 박사와 결혼을 하였고,
두 딸을 두었다고 한다.
첫작품은 동양, 서양의 문명 갈등을 다룬 <동풍 서풍>으로 엄청난 일기몰이를 하였고,
이후 대지 3부작이라 부르는 <대지>, <아들들>, <대지의 집>를 연이어 썼고,
이 작품들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다.
펄 벅은 사회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펄 벅 재단을 설립하여 아시아 국적의 사생아 입양 알선 사업을 하였다.
그는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가 2차 대전으로 미국의 OSS에 중국 담당이 되고,
당시 한국 전문으로 오게 된 유한양행의 창업자이기도 한 유일한과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일한의 아내가 중국계 미국인인 호미리였으며,
유일한도 숙주나물 통조림 제조회사인 라초이 식품회사를 운영하면서
중국의 녹두장사와 거래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펄벅은 자신의 작품 중 하나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김일한으로 하는데,
이는 유일한과의 인연을 중요히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한국과 인연으로 펄 벅은
한국 관련 소설도 집필하였는데,
한국 전쟁 후에 한국의 수난사를 그린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1963년)와
한국의 혼혈아를 소재로 한 소설 《새해》(1968년)를 쓰기도 했다.
....이상 펄 벅에 관한 글은 일부 인터넷 자료를 참조하였음.
1. 서태후
서태후.
많이 들어보긴 했지만, 정확하게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청나라 말기 청나라를 말아먹은 사람 중에 하나?
좋지 못한 평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중국에서 황제 노릇을 했다고 해서
측천무후와 비견되는 사람.
뭐 대충 이정도....
이 책은 소설이다.
작가적 상상력이 가미되었을 것이다.
서태후의 역사적 기술이 어떻게 되었는지 본 적이 없으니,
이 소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에 대한 평가 중에 하나가 서태후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평가도 있다.
서태후의 인간적인 갈등과 외로움, 어쩔 수 없는 선택,
결과로 평가되는 그녀의 삶에 대한 동정 등을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이지만, 서태후의 삶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2. 예흐나라
때는 청나라 함풍제 시절...
함풍제가 태자 시절에 태자비가 있었는데, 일찍 죽고 말았다.
그 죽은 태자비의 사촌이었던 난아.
그 난아가 바로 후에 서태후가 된다.
난아는 3급 후궁으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가면서 난아라는 아명을 버리고,
예흐나라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이때 예흐나라의 사촌이자 죽은 태자비의 동생인 사코타가 황후가 되었다.
예흐나라는 다른 후궁들과 달리
황제나 태후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당돌한 모습을 보였다.
황제나 태후 앞에서 할 말은 다 하고 고개를 들어 용안을 직접 쳐다보기도 하였다.
이런 당돌함이 황제에게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예흐나라는 황제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애를 썼다.
환관인 이연영과 계획을 세으고,
당시 권력 중심인 태후에게 잘 보였다.
그런 노력 덕분에,
황제의 부름을 받고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예흐나라와 황제는 며칠 동안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업무도 뒷전이었다.
예흐나라에 푹 빠져 버린 것이다.
정작 그렇게 며칠을 지낸 예흐나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외로움에 빠져든다.
후회가 밀려든다.
예흐나라는 궁에 들어오기 전에 사랑의 감정을 느낀 먼 친척 오빠 영록이 있었다.
영록은 예흐나라에게 몇번 청혼을 하기도 하였다.
예흐나라는 영록과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 걸
하는 후회를 하였다.
예흐나라는 두문분출하였다.
황제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사코타가 방문하여 위로해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따.
예흐나라는 영록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영록은 경비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환관을 통해 영록과 비밀리에 만날 수 있었다.
영록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영록으로부터 위로를 받은 후에야 다시 기력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영록과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넘어버렸다.
암튼, 다시 원기를 회복한 예흐나라는 황제를 모셨다.
황후에 이어 임신을 하게 된 예흐나라...
황후가 딸을 출산한 것에 반에, 예흐나라는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어쩌면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흐나라 자신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림, 역사, 고전 등 다방면을 공부하였다.
예흐나라가 아들을 출산하였다는 것은 황제의 후세에 대한 암투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황제는 어린 나이부터 방탕한 생활로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미 성불구자가 되었고 기력이 없었다. 폐인이었다.
그렇다보니 여기저기서 황제가 일찍 죽을 것을 대비한 암투가 벌어졌다.
이에 예흐나라도 자신의 편을 만들었다.
황관인 이연영, 환관장 안덕해, 황제의 동생인 공친왕이 그들이었다.
특히 공친왕은 총명하고, 남자답고, 예흐나라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믿음직스러웠다.
반대파는 또다른 황제의 형제들이 있었다.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예희나라는 황후로 봉해지길 원했고,
황제는 유일한 아들을 낳은 예흐나라를 자희황후로 봉했다.
참고로, 예흐나라가 낳은 아들은 이상하게도
황제를 닮지 않고, 영록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나중에 소문으로 퍼지기도 하였다.
3. 황후
폐인이 되어 국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황제.
자희 황후는 자청하여 국사를 맡겠다고 하였고, 황제도 이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자희 황후는 아침조회에 참석하여
군신회의를 듣고, 자신의 의견을 황제에게 제안하는 식으로 국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외세의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던 시절이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가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생기면
이를 기회로 청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빠른 국제 정세 변화와 위기 속에서 긴급하게 중요한 결정들이 필요할 때였다.
안으로는 다음 권력을 위한 암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약한 황제를 대신하여 자희 황후가 처리하는 업무가 늘어나면서 자희황후는 피곤함을 느꼈다.
그나마 여름마다 원명원이라는 여름궁전으로 가서 쉬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서양 세력의 무력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들이 북경까지 침략하여 황제는 피신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북경 공격으로 여름 궁전인 원명원이 전소하는 피해를 보기도 하였다.
북경을 피해 피신한 상황에서
자희 황후는 공친왕과 의견을 조율하야 서양과 협상하기로 하였다.
이에 다시 북경으로 환궁할 수 있었다.
잠시 여유를 돌릴 틈도 없이 황제 함풍제가 죽고 말았다.
태자 나이 여섯살에 불과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대권싸움이 일어날 것을 준비하고 있던 자희황후는
공친왕과 함께 반대파를 빨리 처단하고 정권을 잡았다.
어린 태자를 황제 자리에 앉히고,
그가 열여섯살이 될 때까지 자희 황후와 자안 황후가 공동 섭정을 하는 것으로 공표하였다.
자안 황후는 명목으로 내세운 것이고,
자희 황후 자신이 권력을 잡는 계기가 된 것이다.
자안 황후는 동쪽에 궁이 있다 하여 동태후라 불렸고,
자희 황후는 서쪽에 궁이 있다 하여 서태후라 불렸다.
반대파를 처치하는 데 공을 세운 공친왕과 영록에게 상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4. 태후
서태후.
드디어 본격적인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반대파를 정리하고 황제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서양 세력들과 밀고 당기면서 전세를 조율하기도 하였다.
어린 황제에 대한 교육도 시켰다.
어린 황제를 '동치제'라 명하였다.
...
하지만, 청나라 말기 자신의 주장으로만 나라를 이끌어가기에는 너무 복잡한 상황이었다.
서양 세력에 대한 대처 방안을 주고 자주 공친왕과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황제도 나이를 먹으면서 반항을 하기도 하였다.
황제는 자신의 친모 서태후보다 동태후를 더 따랐다.
그리고, 황제는 독단적으로 환관장 안덕해를 죽임으로써 어머니와 더욱 갈등을 빚게 된다.
그래도 아들이었다. 서태후는 이해하려고 하였다.
어느덧 황제 나이 열여섯살이 되었다.
약속한 것처럼 서태후는 섭정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동치제의 시대가 온 것이다.
5. 복귀
동치제의 통치 방식.
서양 세력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하고,
황후인 알루트만 너무 사랑하여 어머니인 자신과 거리가 멀어지고,
점점 자신의 의견과 달리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태후와 황후는 황제를 사이에 두고 자주 충돌을 하였다.
황제가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메다가 회복을 하던 시기에,
서태후와 황후의 심한 말다툼에 황제가 흥분하다가 상태가 다시 안좋아졌다.
그리고,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서태후는 황제가 죽자, 황후에게도 죽음을 강요하고,
황후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다시 후세에 대해 문제가 발생하였다.
동치제가 후세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하기야 당시 서태후의 권력에 대항할 이도 없었지만 말이다.
서태후는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이자 함풍제 막내동생의 아들을 양아들로 삼고,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으니 그의 나이 고작 세살이었다.
그가 바로 광서제이다.
다시 서태후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서태후가 판단력이 그다지 좋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젊었을 때는 이성적인 판단을 했지만,
나이를 먹어서인지 점점 나라가 우선이 아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일을 많이 했다.
공친왕과 영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화원이라고 부르는 여름궁전을 무리해서 완성하였다.
이를 위해 세금과 부역을 탈취당한 백성들의 성토가 끊이지 않았다.
서태후의 독단은
공친왕과 영록마저 멀어지게 하였다.
공친왕도 서태후보다 동태후와 친하게 되고,
어린 황제 역시 자상한 동태후를 더 따랐다.
영록과도 계속된 대립에다 영록이 궁녀와 사랑하다 발각되어
배신감을 느낀 서태후는 그를 관직삭탈을 시켰다.
권력이 점점 커지면서 점점 외로움도 커졌다.
외세 침략 위협은 커졌고, 그들과 협상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라 여기 저기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홍장 등 새로운 인물들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위기가 닥쳐서 공친왕, 영록과 화해하여 다시 그들을 중용하였다.
역기 역부족이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다시 광서제 나이가 열일곱이 되고,
서태후는 섭정을 마감하였다.
광서제는 서양 세력과 협상을 통해 문물을 받아들이는 등
진보적 성향으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런 광서제의 행보를 들은 서태후는 격분하였다.
여름 궁전으로 물러나 있던 서태후는 다시 북경으로 향했다.
그리고 광서제를 유폐시키고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광서제는 이제부터 이름만 황제였다.
서태후가 다시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서양 세력과 대립하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서태후는 나이가 들고, 주변 측근들도 세월과 함께 세상을 등졌다.
서태후는 뒤늦게 변화하는 세상을 읽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여러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많이 늦었다.
이런 그의 개혁 정책은 그간 보였던 그의 독단으로 가리워져 역사에서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6. 뒷이야기
1908년 11월 15일에 서태후가 죽었다.
그런데, 무척 건강하던 광서제가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에 죽었다고 공표되었다.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광서제가 서태후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고 한다.
...
서태후.
그녀는 자신의 권력을 차지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지만,
자신의 나라인 청나라도 보존하고자 노력을 했다고 생각한다.
주변의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말이다.
뒤늦게 개혁 정책을 시도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역사는 과정보다 결과에 의해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더 안좋게 평가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고 나서 서태후에 대한 평가를 좋게 할 것 같지는 않다.
물러날 때 확실히 물러날 줄 알고,
믿을 바에는 확실하게 믿을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서태후는 잘 하지 못했다.
그런 서태후는 오늘날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서태후같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다 다짐해 본다.
책제목 : 연인 서태후
지은이 : 펄 벅
펴낸곳 : 길산
페이지 : 730 page
펴낸날 : 2003년 6월 20일
정가 : 22,000원
읽은날 : 2009.12.18 - 2009.12.24
글쓴날 : 2009.12.2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