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선생님들
어제는 정말 더웠다. 전철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 멀게 느껴졌는지?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7월이 마지막으로 다가오니 외손녀 아이도 방학이 시작됐다. 학교에서 성적표를 받은 모양이다. ‘잘함’이라고 적혀있는데 수식어가 없다. 요즘의 교육은 우리가 어릴 때와는 딴 세상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이 난다. 전교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께서 일제고사에서 꼴찌를 한 반을 거명하며 학급 전체 학생들에게 손을 들어 올리라고 하셨다. 우리는 너무 창피하여 가까스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담임 선생님이 우리 뒤에서 큰 소리로 ‘손 내려!’라 하셨다. 우리는 어찌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도망가고 싶었다. 담임 선생님은 커다란 모욕감을 느끼신 게 분명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그 선생님은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사모님께서 가계를 돌보시느라고 힘들게 사시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큰 형님같이 자상하시고 깔끔하신 분이 담임 선생님으로 오셨다. 채 학기를 마치기 전 대구로 전근 가셔서 너무 아쉬웠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친구의 형님이셨는데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미국의 링컨 대통령같이 키가 크시고 광대뼈가 나오신 분인데, 옛이야기를 잘 해주셨다. 한번은 아이들에게 장래에 되고 싶은 희망을 각자 발표하라고 하셨다. 그때 장난기가 발동하여 다리가 불편한 친구에게 ‘상이군인이 되겠다’라고 시켰더니 그대로 했다가 야단을 맞았다. 내 차례가 되었다. 그 당시는 전쟁 후라 취업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집에서 부모님이 형들에게 늘 하시던 말씀이 취직이란 말이었다. 그래서, ‘취직하겠습니다’라고 했다가 핀잔을 맞은 기억이 났다.
5학년 때의 기억은 너무 모호했다. 담임 선생님이 철부지 아이들에게 ‘정의’를 항상 강조하셨다. 그래서 각자 책상 앞 벽에 ‘정의는 이긴다.’라는 ‘힘없는’ 혹은 ‘무서운’ 말을 붓글씨로 써서 공부할 때마다 생각하라고 당부하셨다. 왜 그런 아포리즘을 아이들에게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보니 정의는 늘 악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멀찍이 밀려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어찌하든 점점 악해지는 세상에서 그래도 ‘정의는 이긴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오래 살은 자의 도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자의식을 깨워 주신 고마운 분이셨다. 자기관리가 철저하셔서 학급 미화에서부터 수업에 이르기까지 완벽함을 추구하셨다. 그래서 우리 학급은 모든 면에서 전교의 모범이 되었다. 한 분의 성실하심과 열정이 그렇게 힘을 발휘하는지를 일찍 깨닫게 되었다. 졸업하기 전에 대구로 전근 가셔서 못내 아쉬웠다. 이제 고인이 되신 그분이 가끔 그리워진다.
외손녀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을 망팔의 나이에 떠 올려보았다. 오늘도 무척 덥고 혼미하다.
2022.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