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한 엄마가 공책에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살짝 엿보았다.
이름과 전화번호 리스트들이었다.
그 종이들을 뜯어 그녀는 자기 아이들의 옷 주머니마다 쑤셔넣었다.
혹시나 헤어지게 될까봐.
(96)
전쟁 첫째 날 내 아이들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내 팔에도 적었다.
혹시나 사망 후 식별을 위해서.
무서운 사실이지만 그 생각으로 미리 적어두었다.
(102)
리보르(르비우)
이별의 도시.
남편과 작별인사를 나눠야 하는 지점.
남편은 국경을 넘지 못했다. 남자들은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우리는 마지막 하루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
도시를 걸으며 산책했다.
마지막으로 식당에 갔지만, 한입도 삼킬 수가 없었다.
식당의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우리가 8일을 보낸 지하실 분위기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마지막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다.
혹시나 ‘파괴공작원’으로 오인될 수 있어서,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 산책은 그림으로만,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만 간직하고 있다.
(114)
폴란드에서 30년째 살고 있는 러시아 여자가 표 끊는 걸 도와줬다.
홈페이지상에서 강아지 동반 표 예매가 안 되어서 전화로 예매해야만 했다.
그녀는 폴란드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친다.
전쟁이 터진 이후 여러 친구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건 옳지 않아.
사람은 ‘민족 소속’이 아닌데.
어제 난 그녀의 얼굴에서 ‘수호천사’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