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17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탁월한 저술가이며, ‘쾌락의 독재’ 체제에 맞서 싸우는 전사이다. ‘환경 파괴의 위험과 테크놀러지의 재앙적 남용’을 경고하며 행동을 촉구하는 열정적인 선동가이며 다양한 강연활동과 와튼 스쿨에서 CEO 등을 대상으로 강의을 하고 있는 교수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환경,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미치는 과학과 기술의 영향을 검토하는 비영리 기관인 The Foundation on Economic Trend(www.foet.org)의 설립자이자 이사장이다.
리프킨은 1945년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플라스틱 백 제조업자였고, 어머니는 자선 사업으로 맹인들을 위해 책을 녹음한 테이프를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리프킨은 펜실바니아대 워튼 스쿨에서 경제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고, 이어 터프스대 플레처스쿨에서 국제 관계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남부럽지 않은 학력에 돈벌이도 아주 좋은 전공을 가진 리프킨의 인생을 바꿔 놓은 사건은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후일 리프킨도 그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자기가 지금처럼 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기자에게 말한 바 있다. 리프킨은 반전 시위을 주동하며 적극적으로 반전 운동에 참여했다. 그런 운동 경험으로 인생관이 달라진 리프킨은 돈 버는 길을 버린 채 70년대부터 워싱턴 DC에 진을 치고,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가 제일 먼저 결성한 조직은 1971년에 만든 '새로운 아메리카 운동(New American Movement)'이었으며, 이 조직은 다음 해에 '200주년 국민위원회(People's Bicentennial Commission)'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건국 200주년이란 이슈가 사그러들자, '국민기업위원회'(People's Business Commission)를 조직했다. 이건 대기업의 횡포에 저항하면서, 기존 경제 시스템의 민주적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제법 성과를 거둬 리프킨은 일부 평자들로부터 "급진적 사상의 대중화에 가장 재능 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얻었다.
리프킨은 1977년에, 현재 그가 활동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경제동향연구재단(the Foundation on Economic Trends)'을 세웠다. 그가 처음에 주로 다룬 이슈는 노동 문제였지만 그와 동시에 오늘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유전자 조작에 대해 본격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국립과학 아카데미에서 열린 ‘유전자를 조작한 생물체의 향후 전망을 토론하는 심포지엄’에 들이닥쳐, 수백 명의 시위자들과 함께 "우리는 복제되지 않을 것이다!(We will not be cloned!)"라고 외치는 시위를 통해 행동주의자 제레미 리프킨은 미국에서 가장 적극적인 생물공학의 반대자 중 한 사람으로서 공적 영역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수년 동안 리프킨은 유전공학적으로 만들어진 곡물에서 유전자 특허, 나아가 생물학적 무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생물공학적 주제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또한 1993년에 ‘Beyond Beef Coalition’을 창립하여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으며, 1994년에 워튼 스쿨 경영대 최고 경영자 과정 교수로 취임하여 재직 중이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는 법률소송, 불매운동, 게릴라식 시위, 17권에 이르는 저서, 수많은 신문 투고와 칼럼, 강연과 TV 출연 등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다.
2) 주요 저서
리프킨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서부터 세계 경제 트렌드와 지속 가능한 발전 등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로 약 30년 동안 17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의 주요 베스트셀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European Dream (2004) _ 유러피안 드림
“미국인의 3분의 1은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을 믿지 않는다.”
리프킨은 이 책에서 아메리칸 드림과 새롭게 부상하는 유러피안 드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개인의 자율성과 부의 축적이 핵심인 아메리칸 드림은 더 이상 급변하는 미래 사회를 지탱할 수 없고, 이제 아메리칸 드림을 뛰어넘는 새 비전이 필요할 때이며, 모두가 긴밀히 연결된 글로벌 세계에서 타인과의 관계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유러피언 드림이야말로 미래의 새로운 비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The Hydrogen Economy(2002) _ 수소 혁명
이 책에서 리프킨은 수소가 중심이 되는 차세대 경제 체계로 안내한다. 산업 시대 초기에 석탄과 증기 기관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마련했듯이 미래에는 수소 에너지가 기존의 경제, 정치,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 The Age of Access(2000) _ 소유의 종말
이 책에서 경제의 중심이 소유에서 접속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문화마저 자본에 잠식되어 모든 경험과 시간이 상품화되는 ‘접속의 시대’에 대한 그림을 펼쳐 보인다.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둔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나가는 것만이 인간의 문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 말한다.
* The Biotech Century (1998) _ 바이오테크 시대
저물어가는 금세기가 물리학과 원자핵 기술의 시대였다면 다가오는 새 세기는 생물학의 세기가 될 것이며, 인류의 최대 이슈는 바로 생명 공학이 될 것임을 보여준다. 산업 시대에 비견될 만큼 중요한 ‘유전자의 시대’가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것이란 우려를 표명하며, 생명공학 기술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윤리적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 The End of Work (1995) _ 노동의 종말
이 책에서 그는 첨단기술과 정보화 사회, 경영 혁신 등이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한 인간의 노동이 서서히 제거되어 나감에 따라 사회는 점차 양극화되고,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는 기술이 발달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미래 사회에 대한 리프킨의 진단이다.
* Entropy (1980) _ 엔트로피
물질이 열역학적 변화를 일으킬 때 변화된 온도로 열량을 나눈 값이며, 쓸 수 없게 된 에너지를 뜻하는 엔트로피가 가용 에너지를 초과하는 상황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으며, 정치, 사회, 역사 등 여러 분야에서 엔트로피 법칙이 가져올 여러 가지 엄청난 결과들에 대한 예측을 담고 있는 책으로 과학적 진보의 무조건적인 맹신에 경종을 울리고, 생태적 정치학 등을 통해 저(低) 엔트로피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의 초기 대표작이다.
3) 그에 대한 논란들 (pros & cons)
이처럼 많은 저서와 다양한 강연 활동, 끊임없는 환경 운동과 반대 투쟁으로 그는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서있었고, 그의 눈부신 활동 또한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다. 그에 대한 각계의 찬반 논란을 통해 ‘제레미 리프킨’이란 인물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자 한다.
*찬성 (pros)
“저자의 주장은 공리적이고 분절적인 기능주의, 자연과 분리된 인간중심주의의 포로가 된 기존 정치학의 패러다임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며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 생태계 파괴와 수평지향적인 공동체의 궤멸을 막아내려는 대안적 정치학의 기본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값진 것이다. 그것은 생명과 생태계를 핵으로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인식체계가 자연과학적 생태주의나 인문학적 생태론에만 머물지 않고 어떻게 시회과학, 특히 정치학의 기본 가정과 관념 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왜 변화시켜야 하는 지를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권혁범
"리프킨이 거둔 가장 큰 성공은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을 중심으로 기층 연대를 형성함으로써 생명공학과 연관된 주제에서 반대 활동을 벌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프킨의 조직 활동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노력은 1995년에 이루어졌다. 그는 최소한 80개의 서로 다른 종교단체들에서 나온 1백80명의 지도자들을 설득해서 유전자 조작된 동물들과 사람의 장기에 대한 특허에 반대하는 성명에 서명하게 했다. 이 성명은 『뉴욕타임스』에 대서특필되었고, 신상품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키기 위해서 특허를 필요로 하던 생물공학회사와 제약회사의 경영자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한 신학교수는 '어떻게 그처럼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과 전통을 가진 종교 지도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을까'라고 감탄했다." – 김동광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이런 난잡한 리프킨의 이론에 대해 비판을 하고 나섰지만 리프킨은 생물공학의 발전을 지연시키는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리프킨은 그가 믿는 바를 열정적으로 밀고 나갔는데 정부 규제의 메커니즘은 매우 정교하기 때문에 리프킨 같은 열정적인 한 명의 사람이 톱니바퀴를 멈추게 하는 작은 모래알이 되기에 충분했다. 운동가적 경험을 통해 리프킨은 규제 제도와 법 제도를 조작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 로널드 베일리
* 반대 (cons)
"(이 책(Algeny)은) 반(反) 지성적 프로파간다를 교묘하게 구성하여 마치 학술적 저술이나 되는 것 같이 행세하고 있는 허울 좋은 가식(飾)일 뿐이다. 중요한 사상가에 의한 지적 저술이라고 판촉 되는 책 중에서 이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가짜를 나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 - 하버드대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리프킨의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는 열역학 법칙을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고, 그의 새로운 세계관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무책임하고 상투적인 구호와 크게 다르지 않다. … 리프킨의 역사관이나 현실 인식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리프킨은 ‘인류의 역사는 진보의 과정이 아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이 역사 진보의 척도일 수는 없다.” – 이덕환
"그의 반대자들은 리프킨이 문제를 지나치게 극단화시키기 때문에 토론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오류를 저지른다고 비난한다. 또한 코넬 대학의 영양생화학 교수인 데일 바우만 씨는 동식물에 대한 호르몬의 사용이 사람들이 이용하는 음식물에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리프킨의 주장을 비판한다. 그는 리프킨이나 그의 재단이 잘못된 정보를 기초로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리프킨이 제시하는 정보가 부분적으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일부의 정보를 지나치게 일반화시키는 식으로 잘못된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 김동광
"아쉬운 점은 그의 분석이 지나치게 수박 겉핥기식이며 대안 제시가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단 한 권의 저서를 통하여 구획화, 자동차, 음식, 육체, 생명공학, 프라이버시, 핵전쟁, 다국적기업, 민족 국가 등의 수많은 문제를 다루려다 보니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분석과 통합적 조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개별 주제에 대해 2차 자료를 요약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뭐하나 제대로 배웠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여러 책에서 읽었던 것을 복습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권혁범
이런 그에 대한 평가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정열적인 좌파 운동가이지만 역사의 진보에 대해서는 불신하는 복고주의자인 것 같다. 그의 가장 큰 성공과 강점은 바로 극소수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유통되는 논제를 대중화시켜 살아있는 공공적 이슈로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을 중심으로 공감을 형성함으로써 여러 과학 기술과 생명 공학과 연계된 주제에서 연대를 이끌어내고 반대 운동을 벌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서는 사회적 공론화를 시키기 위한 욕심이 지나쳐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나 잘못된 정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등의 문제점이 노출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그가 주장한 ‘엔트로피’ 법칙의 경우에는 물이 다시 얼음이 되는 일반적인 자연현상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치명적 결함 또한 존재한다. 이런 논리적 오류나 지나친 극단주의 등에 바로 그의 한계가 존재하는 듯 하다.
제레미 리프킨의 미래에 대한 주장을 끝으로 저자에 대한 모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혹자는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미래를 얻는다는 것이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연구가 추진되어야 하는지 제어할 수단이 없으며, 어떤 종류의 제품과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을 것인지 회사 중역실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 가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중매체와 광고의 일제 공격에 반대하고 외면하는 다른 어떤 효과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 모두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시장이 소비자를 창출하는 것만큼, 소비자가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이들 조직적인 세력들의 압도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들 각자는 함께 공유해야 할 집단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책임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 대부분이 우리의 운명과 숙명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는 수동적 방관자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할 것이다."
*참고자료
- 환경주의자들, 강준만 외, 인물과 사상사 - The Foundation on Economic Trend 홈페이지 (www.foet.org) 등
2. 마음 속에 들어온 글귀들
1부 자본주의의 새로운 프론티어
(9) 접속의 시대가 오고 있다
(10)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운다.
(12) 새로운 경제에서는 물건이 아니라 개념, 아이디어, 이미지가 실리를 가져온다. 부는 이제 물적 자본에서 나오지 않는다. 부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에서 나온다.
(14) 앞으로 각광을 받을 사업은 예전처럼 상품과 서비스를 파는 사업이 아니라 다양하고 광범위한 문화적 체험을 파는 사업이 될 것이다.
(15) 노동을 상품화하는 것이 산업 시대의 특징이었다면, 접속의 시대에는 놀이의 상품화가 그 특징이다.
(17) 제품 생산에서 기본 서비스의 제공으로, 다시 인간 관계의 상품화로, 마지막으로 문화적 체험에 대한 접속권의 판매로 경제적 우선 순위가 달라져 온 것에서 우리는 모든 관계를 경제적 관계로 만들려는 상업 영역의 집요한 의지를 목격한다.
(26) 정보와 서비스, 의식(意識)과 살아 있는 경험을 거래하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물질이 비물질에 밀려나고 시간을 상품화하는 것이 공간을 차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지는 세계에서, 산업 시대의 생활 방식을 규정지었던 종래의 소유 관계와 시장 개념은 점차 실효성을 잃어가고 있다.
(26) 접속과 네트워크라는 관념은 일찍이 근대의 여명기에 소유와 시장이라는 관념이 중요한 기능을 맡았던 것처럼 앞으로 갈수록 중요해지고 사회의 역학 구조를 새롭게 재편할 것이다.
(28) <전기 덕분에 물결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신경이 되어 순식간에 수천 마일을 오갈 수 있다는 것이……사실인가? 그렇다면 둥그런 지구는 지성으로 가득 찬 거대한 머리요 뇌란 소리! 아니, 지구 자체가 사고(思考), 그야말로 오로지 사고일 뿐이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실체가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30-31)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인터넷이〕사물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터넷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인터넷을 운영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만인의 컴퓨터를 연결한 것, 그것이 인터넷이다>
(32) <앞으로 올 시대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행위는 모든 것을 모든 것에 연결시키는 것>
(32) 켈리는 <크건 작건 모든 물질이 다영한 차원의 광범위한 네크워크로 연결되는> 미래가 올 것이라고 예견한다.
(36) 경쟁에서 앞서 나가려면 자신을 상대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39) <구체제가 클럽이었다면 신체제는 네트워크>
(45) 할리우드는 수직으로 통합된 고전적 거대 기업으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네트워크 경제로 변신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지식 집약 산업이 할리우드와 똑같은 납작한 원자 상태로 해체될 것이다.
(45-46)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새로운 경제에서는 정해진 규칙과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막스 베버식의 고정된 조직은 와해되기 시작한다.
(46) <파편화된 기업들이 네트워크를 이루어 2,3년 동안 시장의 기회를 활용하면서 존속하다가 해체되어, 다시는 똑 같은 네트워크를 재현하진 않을 것이다.>
(47) 경제의 모든 영역이 지리적 시장에서 사이버스페이스로 이동하고 물건과 서비스의 판매에서 모든 이간 경험 영역의 상품화로 옮겨가기 시작하면 할리우드의 조직 모델은 상업 행위를 조직하는 전범으로 여겨질 것이다.
(55) <지리적 시장에 기반을 둔 시대>에서 <사이버스페이스의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시대>로 변하는 추세의 중요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57) <이 차가운 잿빛 그림자는 볼 수는 있어도 만질 수는 없다. 감촉이 없다. 무게나 중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돈은 이미지다.>
(64) <사용하되 소유하지는 말라.>
(64) 소유가 중시되던 시대에는 <빌리지도 말고 빌려주지도 말라>는 충고가 먹혀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접속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정반대가 되었다.
(70) 독자적이며 울타리로 둘러싸인 낡은 기업 관념은 복수의 파트너들이 업무적으로 깊숙이 얽히고 공식, 비공식의 상포 관계를 맺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73) 제조업체는 아무것도 안 만들고 소매점은 자기가 파는 물건에 손도 안 댄다.
(73)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 사고 파는 것은 아이디어와 이미지이다. (76) 궁극적으로 사업 성공의 열쇠는 소유가 아니라 접속이었다.
(77) 접속의 시대에 <제조 회사는 고립된 생산 시설이 아니라 공급업자, 소비자, 엔지니어링, 기타 서비스 기능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의 한 접점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77) 소유권의 중심의 시장 지향 체제는 내 것과 네 것으로 경제 활동을 확연히 구분하기 때문에, <내 것이 네 것이고 네 것이 내 것>이라는 발상을 한 발 앞서 실천에 옮기는 기업이 성공을 거두는 네트워크 기반 경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78) 마이크로소프트의 유일한 공장 자선은 직원들의 상상력이다.
(81) <회계 시스템은 현실을 잘 포착하지 못한다>
(84)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비물질적이고 사색적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말한 형상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 원형의 세계다. 개념의 세계, 픽션의 세계다. 산업 시대의 인간이 물질을 축적하고 가공하는 데 빠져들어 있었다면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정신을 관리하는 데 훨씬 관심이 많다. 사업의 성패를 아이디어가 좌우하는 접속과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가장 드높은 꿈이다. 자신의 정신을 최대한 확장하여 보편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영향을 미치겠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산업 활동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다.
(87) 접속을 통해 유형, 무형의 자산을 공유하는 주체들의 관계를 상품화하는 것, 이것이 곧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상업 활동의 핵심이다.
(89) 상품의 대량 생산이 아니라 개념의 대량 생산 시대가 열린 것이다.
(93) 체인점 계약의 핵심은 접속의 합의이지 소유권의 양도가 아니다.
(108) 네트워크가 앞으로 이렇게 시장을 계속 제거한다면, 그것은 종래의 시장을 보호한다는 유일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반독점법을 위반하는 것인가?
(111)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동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확인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 선언이요, 나라는 존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달라는 주문이다.
(114) 소유에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집착은 느슨해지고 있다.
(115) 앞으로 경제 생활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물건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서비스와 경험에 대한 접속이 될 것이다. 소유권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접속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127) 서비스 경제에서 상품화되는 것은 인간의 시간이지 장소나 물건이 아니다. 서비스는 사람과 물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호소한다.
(128-129) 이제 기업은 제품을 고정된 특징과 일회적 사용 가치를 지닌 고정된 품목이 아니라 온갖 유형의 업그레이드와 부가 가치 서비스를 실어 보낼 수 있는 <플랫폼>으로 여긴다. 새로운 제조업의 풍토에서 중시되는 것은 서비스와 업그레이드이다. 플랫폼은 이런 서비스를 실어 나르는 통에 불과하다.
(130) 결국 물리적 형체보다는 그 안에 들어있는 독특한 서비스가 더 중요하다. 고객이 정말로 구입하는 것은 물품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접속권이다.
(133) <이제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만든 모든 제품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물건을 정말로 사는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물건 자체가 필요한 건가 아니면 그 물건의 기능이 필요한 건가? 만약 우리가 카펫이 아니라 카펫 서비스를 판다면 그 경제적 여파는 어떻게 될까?>
(136) <나한테 물건을 팔겠다면서 유지비는 고스란히 나더라 부담하라는 건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140) <더 많은 제품을 팔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설치한 시설을 업그레이드하고 관리하는 쪽에서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142) 가치라는 것은 처음 개발한 제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만 창출될 수 있다.
(143) 세상 만사가 서비스화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상품을 교환하는 데 바탕을 둔 체제에서 경험 영역에 접속하는 데 바탕을 둔 체제로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45) 접속의 시대는 한마디로 모든 인간 경험의 상품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이다. 온갖 유형의 상업 네트워크가 인간 생활을 거미줄처럼 사방에서 에워싸서 살아 있는 경험의 모든 순간은 상품으로 자리매김된다.
(146) <제아무리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기업이라 하더라도 진정으로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소프트웨어는 ‘고객 관계’>라고 주장한다. 페피스와 로저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당신이 만든 모든 제품은 뜬구름처럼 덧없이 사라진다. 믿을 건 당신의 고객밖에 없다.>
(146) 새로운 마케팅 전략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시장을 얼마나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고객을 얼마나 사로잡느냐이다.
(149) <우리는 기술이 정보를 관리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관계의 매개물이라는 쪽으로 과감한 의식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52)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하루하루 생활을 하고 경험을 하는 데 필요한 접속의 권리가 상품처럼 선망의 대상이 되며 추구해야 할 무형 자산으로 여겨진다.
(155) 우리는 접속의 시대에서는 소비자를 관리하는 것이 제품을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제품이라는 것은 고객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서비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156-157) 가장 큰 자산은 고객에 접속할 수 있는 힘, 최종 사용자와 장기적으로 상업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다.
(158) 기업의 목표는 고객을 창출하는 데 있으므로 모든 기업은 오직 둑 가지 기능, 즉 마케팅과 혁신에만 전념하면 된다.
(161) 제품의 설계에 고객의 요구가 적극적으로 반영되면서 회사와 최종 사용자의 관계는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가 아니라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관계에 가까워졌다.
(164) <아이들의 가슴과 머리를 사로잡아 예순 살까지 묶어두자는 것>이다.
(165) 소속된다는 것은 새로운 글로벌 경제를 구성하는 수많은 네트워크에 연결된다는 뜻이다. 구독자, 회원, 클라이언트가 된다는 것은 재산을 소유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해진다. 앞으로 사람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접속이 되는 시대가 온다.
(167) 시간 그 자체를 사고 파고, 삶이라는 것이 한낱 계약과 금전적 도구에 의해서 결합된 상업적 거래의 연속에 불과한 것으로 변질될 때, 애정, 사랑, 헌신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전통적 상호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168) 우리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이 유료 활동으로 바뀌면 궁극적으로는 인간 그 자체도 상품이 되어버리고 상업적 영역은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권을 쥐게 된다.
(172) CID는 단순히 집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파는 것이다. 집 그 자체는 독특한 생활 경험을 제공하는 서비스 네트워크 안에 끼워 넣어져 있는 것이다.
(175) 설계와 용도는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도시는 전체적 계획에 따라서 만들어가야지 영국의 모든 도시들이 그런 것처럼 중구난방으로 자라나도록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182) 이제 공동체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사는 것이 되었다.
(183) 이런 점에서 볼 때 CID는 과도기적 주거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두 가지 세계와 두 가지 생활 방식, 다시 말해서 소유와 재산 관계에 우위를 두는 낡은 방식과 상품화된 관계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공간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에 중점을 두는 새로운 방식 사이에서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중간 기착지의 역할을 CID가 해내고 있는 것이다.
(185) 어느 모로 보나 재고가 가장 부족한 상품은 시간이다.
(187) 이동성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제반 조건이 상존하고 고용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불안정해지는 상황에서 그런 결정 시점이 돌아왔을 때 구입보다는 임대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192-193) 사람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재산으로 확인하고 또 표현한다고 헤겔을 믿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묶어둠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투사하고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헤겔의 세계관에서 일은 노동 행위가 아니라 창조적 표현이다. 그리고 일이 만들어낸 생산물은 세계로부터 징발한 것이며 일을 한 사람의 인격 안으로 세계를 통합한 것이다. 헤겔을 이렇게 주장한다. 인격은 스스로에게 현실을 부여하려는 다시 말해서 외부 세계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려는 몸부림이다.
(195) 전자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역사적 지리> 감각을 뒤흔들어 놓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는 우리가 물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좌우되지 않는다>
(196) 전자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도 대지는 우리가 가장 근본적인 연결 고리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우리를 둘러싼 흙으로부터 잠시 빌려온 것이다.
(196) 그러니 어머니 품 같은 대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땅에 드러누워 온 몸을 한번 쭉 뻗어봄이 어떠한가. 그대는 이제 확실한 반석에 올라서 있다. 대지처럼 단단한 그대를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다……. 대지는 내일이라는 선물을 그대에게 확실히 가져다 주겠지만 새로운 갈망과 고통으로도 그대를 확실히 이끌어갈 것이다.
(196) 우리의 더욱 원초적인 본능은 시간성뿐 아니라 지리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는 시간 뿐 아니라 대지에도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영토는 단순한 사회적 관습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존재의 상태이기도 하다…… 집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장소에, 영통, 우리의 기원에 맞닿아 있다는 원초적 감정을 경험한다.
(197-198) 장소의 비중을 서서히 감소시키고 관계와 경험의 가치를 부각시킴으로써 인간의 의제를 한 차원 높은 지평으로 올려놓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이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는 접속의 시대에서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적, 생물학적 토대와의 깊은 교감을 잃어버리고 방향 감각을 상실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는 이들도 있다.
(198) 우리의 생활 공간을 소유에서 접속으로 어느 정도까지 탈바꿈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21세기를 어떤 식으로 살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감수성의 우열에 따라 판가람 날 것이다.
2부 문화를 고갈시키는 자본주의
(201)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던져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 날 불현듯 깨닫는다. 깨달음은 늦게 온다.
(201-202) 지난 수백 년 동안 물리적 자원을 소유권이 부여되는 상품으로 전환하는 데 역점을 두어온 우리는 이제 유료로 제공되는 개인적 경험과 오락으로 문화적 자원이 전환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03) 문화라는 것이 인간이 자기 주위에 엮어나가는 <의미망>이라면, 커뮤니케이션-언어, 미술, 음악, 무용, 책, 영화, 음반, 소프트웨어-은 우리 인간이 의미망을 해석하고 생산하고 유지하고 변형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 이론가 리 데이어는 말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인간 문화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문화를 매일매일 재창조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보며 알고 세계와 소통한다는 뜻이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커뮤니케이션이 문화의 핵심, 아니 생명 그 자체의 핵심>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205) 모든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상품화된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요체인 문화도 필연적으로 상품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5) <인간이 가진 창조성을 표현하는 이런 기본적 요소를 집단적 공동체적 기원으로부터 자꾸만 분리하여 돈을 내는 사람에게만 팔아먹으려는 시도가 파죽지세로 확산되고 있다>.
(206) 사람은 공동체와 문화의 일원으로 의미와 경험을 공유하는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권리를 누리든지 배제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207) 경제 영역의 핵심적 원리는 자원 이용의 효율화라고 벨은 주장한다. 정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다. 문화 영역에서 제일로 치는 것은 자기 실현과 자기 고양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정치 영역과 문화 영역의 가치는 경제 영역으로 포섭되어 끊임없이 상품화되었다.
(209) 그들은 대량 생산품이 흘러 넘치고 대중의 익명성에 잠긴 세계에서 자기 표현과 자기 실현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개인의 욕망에 호소했다.
(209-210) 이 새로운 예술가들은 <순간의 삶, 향락주의, 자기 표현, 육체미, 무종교, 사회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머나먼 곳에 대한, 동경, 스타일의 개발과 삶의 미학화를 찬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감수성은 자본주의라는 지배 체제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것은 생산 중심에서 소비 중심으로 변하는 과도기의 경제에서 이상적인 자극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210)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를 전달하는 중요한 소임을 맡았던 예술은, 이제 광고 회사와 마케팅 전문가의 볼모가 되어 <생활 양식>을 파는 데 동원되었다.
(212) <더 이상 살 것이 없다>
(212) 문화적 생활을 상징하는 기호, 그 기호를 해석하는 예술적 의사 소통의 형식만 우려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체험 그 자체를 우려먹는 것이다.
(212)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체험이라는 가장 일시적이면서도 가장 지속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에서 살 게 될 것이다>.
(212) <살아 있는 체험은 상품 구체화의 최종 단계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살아 있는 체험은…… 자본 순환에서 최종 상품이 되었다.>
(213) <이제 소비자는 ‘내가 아직 안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 뭔가?’라고 묻지 않고 ‘내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 중에서 체험하고 싶은 것이 뭔가?’라고 묻는다.>
(213) <체험 산업은 심장 박동을 빠르게 만드는 모든 내용을 거래하는 것>
(213) 가령 제조업체는 상품을 <체험화>해야 한다. 자동차 회사는 <모든 체험>을, 가구업체는 <앉는 체험>을, 가전업체는 <닦는 체험과 요리하는 체험>을, 의류업체는 <입는 체험>을 격상시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
(221) <이런 관광지는 정교하게 설계된 간접 경험을 제공한다. 그것은 유형 상품의 가격이 공기처럼 싼 곳에서 소비되는 무형의 상품이다>.
(227) 쇼핑몰은 온갖 종류의 살아 있는 체험에 접속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233)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쇼핑하고 놀고 위험과 희열을 체험할 수 있고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돌리는 것처럼 순간순간 경험을 바꿀 수 있고…… 플라스틱으로 된 신용카드 한 장만 있으면 무엇이든 체험할 수 있는, 사탕을 발라놓은 꿈의 세계>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236) 문화는 체험의 공유다. 서로 비슷한 가치 아래 사람을 모아들이는 것이다. 반면 문화 상품은 문화를 잘게 토막내어 분할하는 것이고 상업화된 오락물로 개별 판매하는 것이다.
(236) <20세기 말, 미국을 이끌어가는 사업은 더 이상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락이다.>
(240) 영화는 <온 국민이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진 관객을 영화라는 상상의 국가 시민으로 변모시켰다. 그 상상의 국가는 조만간 현실의 나라를 대체하고 삼켜버렸다.>
(242-243) <사업의 성패는 고객의 머리에 감동적 드라마를 얼마나 많이 집어 넣느냐에 좌우된다>고 조언한다.
(243) 새로운 시대의 주역은 <근면>이 아니라 <창조>이며 사업은 일보다는 유희에 가까워진다.
(246) 접속의 시대에 문화 생산은 경제 생활의 제1열로 부상하고 정보와 서비스는 2열로, 제조업은 3열로, 농업은 4열로 내려간다. 이 네 개의 열은 소유 관계에 바탕을 둔 체제를 접속에 바탕을 둔 체제로 꾸준히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와 사이버 세계를 통합한 네트워크 관계 안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할 것이다.
(249) <우주에서 단 하나 잘못된 점은 우리 아닌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이 우주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251) <우리는 우리가 갈구하는 모든 체험을 실현하기 일보 직전에 와 있다>.
(251) 인공 환경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우리의 삶 자체가 상품으로 바꾼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삶을 만들어주고 우리는 그것을 구입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소비자가 되어버린다.
(251) <화면 저 너머로 현실이 사라지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에서는 <현실 자체가 상품으로 제조되고 계량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깨어 있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컴퓨터가 만든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인간은 타인과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반문한다.
(253) 이 새로운 마케팅 현실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이름이 박힌 최고급 상품의 세계다. 제냐 셔츠, 빌 블라스 전등, 에디 바우어 주문형 자동차를 구입하는 사람은 자기가 소유하거나 경험하고 싶어하는 생활 양식의 이미지, 즉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접속권을 사는 셈이다.
(253) 고급 상표가 붙은 제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그 디자이너가 창조한 가치와 의미의 세계에 자기도 끼여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55) 새로운 마케팅 시대에는 <이미지가 제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이 이미지를 표현>한다고 강조한다.
(256) 보디 숍에서 비누와 향수를 사는 사람들은 실은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체험을 구입하는 것이다.
(256) <소비자는 점점 문화의 소비자가 되고 문화는 점점 시장에서 파는 상품이 된다>.
(261) 고도 자본주의의 본질은 단순한 제품의 생산도 아니고 서비스의 수행도 아니고 정보의 교환도 아니다. 그것은 정교한 문화 상품의 창조다.
(262) 소유 관계는 소유하는 사람과 소유되는 사람을 구별한다. 접속 관계는 연결되는 사람과 연결되지 못하는 사람을 구별한다. 따라서 소유 관계도 접속 관계도 결국은 포함과 배제라는 주제로 귀결된다.
(262) 접속 관계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는 그 누구건 커뮤니케이션 회로를 소유하고 네트워크에 이르는 통행로를 장악한 사람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264) 폴 라자스펠드는 <문지기가 된다는 것은 상품과 뉴스와 사람이 오가는 통로의 전략적 요충을 장악한다는 뜻이고, 이것은 곧 그 통로로 들어갈 수 있는 것과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264) 접속의 시대에는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이 모든 사회 활동의 전제 조건이다.
(264) <네트워크 안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무한히 열리지만 네트워크 밖에서는 점차 생존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몰린다.>
(266) <결과적으로 우리가 자신의 삶과 주변 세계를 정의하는 방식은 크게 보면 이런 문지기가 내린 결정의 산물인 것이다.>
(269) <이 새로운 취향의 기수들은 눈에 불을 켜고 새로운 문화 상품이나 체험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새롭게 뜨는 생활 양식이나 유행의 동태를 기민하게 파악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다>.
(272-273) <언어가 사라지면 문화도 소멸한다>고 지적한다. <이 세상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인류가 쌓아온 지적 성취와 살아 있는 지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더 큰 문제>
(273) 다국적 기업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문화 중개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접속이 체험의 유일한 통로가 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지기의 노릇을 하게 된다.
(274) 심리학자 로버트 리프턴은 이 새로운 세대를 <변화 무쌍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275-276) 7초 안에 할 말을 모두 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정보에 즉각 접속하여 인출하는 데 익숙하고 하나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며 성찰적이기보다는 찰나적이다.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경기자라고 생각하고 근면하다는 말보다는 창조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더 뿌듯해한다. … 부모 세대처럼 단단히 뿌리 박은 삶보다는 아주 유연하고 순간적인 삶을 추구한다. 이념적이기보다는 심리적이고 글자보다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쪽이다. … 세계는 하나의 무대이며 삶은 공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단계단계마다 새로운 생활 양식을 과감히 받아들이면서 자기를 끊임없이 바꾸어나간다. 이 변화 무쌍한 남녀를 끌어당기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스타일과 패션이다.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혁신을 도모한다. … 이들에게 접속은 생명이다. 접속이 끊긴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이들은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가 말한 대로 탈근대 세계를 처음으로 살아가는 세대다.
(276) 탈근대에서 사람을 가르는 선은 소유가 아니라 접속이다.
(277) 베이컨은, 자연은 <길거리에 널린 창녀>나 다를 바없다면서 <불가능이 없을 만큼 인간의 제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창녀의 야성을 <누르고 순화하고 길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베이컨은 과학적 방법을 앞세워 마침내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을 뿌리까지 흔들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
(278) 인간이 가진 능력은 무한정 발전할 수 있다……. 인간은 끝없는 완전성을 추구할 수 있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이 지구라는 터전이 존속하는 한, 인간이 완전해지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힘을 완전히 제압하는 이 과정은 무한정 계속될 것이다.
(280) 베이컨의 세계에서 모든 활동은 주변에 널린 객체를 소유하고 착취하기 위해 주체들이 생사를 걸고 벌이는 투쟁으로 귀착된다. 결국은 주체의 의지만이 남는다. 주체의 의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것을 먹이고 살찌우는 객체로서 존재할 뿐이다. <사물>의 배타적 소유와 통제에 바탕을 둔 사유 재산 체제는 우주를 능동적 주체 아니면 수동적 객체로 양분하는 세계관 속에서 힘을 얻는다.
(281) 하이젠베르크는 관찰을 포함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282-283) 관계는 <운동의 리듬이 생길 만큼 충분한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283) 결국 사물은 시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283) <공간이 수동적이고 체계적이며 기하학적인 관계를 거느리고 있다는 생각은 얼토당토않다……. 자연은 부단히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뀌고 있으며 따라서 시간과는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가 없다.>
(285) 현실은 우리가 증여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 소통을 통해 지어내는 것이다.
(285) <나는 나와 주변 상황의 합>
(285-286)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이 노출시킨 자연이다. 물리학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연구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가진 언어로 자연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결국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현실을 설명하고 묘사하고 현실과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와 함수 관계에 놓여 있다는 뜻이 된다. 햄릿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은 <말, 말, 말>이다.
(287)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중요한 것은 순간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 생활에서도 사회 생활에서도 절정감과 카타르시스는 효율성과 생산성보다 윗자리에 놓인다.
(288) 근대의 핵심이 근면이라면 탈근대의 핵심은 유희다. 노동을 중심으로 구축된 체제에서 생산은 운영의 지표가 되고 재산은 인간 노동의 결실을 의미한다. 유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는 공연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문화적 접속에 대한 상업적 접속이 인간 활동의 목표가 된다.
(289) 이제 텔레비전은 세계를 해석하거나 극화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 바로 세계이다.>
(296) 호감을 주고 창조적이고 흡인력 있고 끄는 힘이 있고 애교 있고 쾌활하고 속을 드러내는 포근한 사람을 두고 우리는 매력 있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297) 현대 마케팅 <매력 예찬론>일 손을 잡고 새로운 인간을 창조했다. 이 새로운 인간에게 자기 충족은 자기 제어 못지않게 중요했다. 양식이 매력으로 바뀌는 기나긴 여정에서 사유 재산은 여전히 사회에서 가장 으뜸가는 지위를 차지했지만 강조점은 서서히 생산에서 소비로 이동했다.
(298) <우리는 발 밑에 놓여 있는 무정형화된 삶의 심연을 응시한다.>
(296) <자신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자리에 고정되어 같이 움직일 생각을 안하는 생산품들과 부단한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다.>
(300) <역사를 지향하는 인간>은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를 위해 살아가지만 <치료를 지향하는 인간>은 현재를 위해 살아가며 거창한 역사적 사명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300) 순간을 위해서 살아가며 거창한 역사적 사명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300) 순간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열정이 사람을 지배한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선조나 후손을 위해 살진 않는다.
(301) <우리는 역사적 연속성애 대한 감각, 과거의 세대와 미래의 세대를 이어가고 있다는 의식을 빠르게 상실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 시간 감각의 소멸이다>
(306) 책은 결과이지만 하이퍼텍스트는 과정이다. 책은 오래도록 소유하는 것이지만 하이퍼텍스트는 순간순간 접속하는 것이 제격이다.
(307) 새로운 자아는 섬처럼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관계를 지향하는 자아이다.
(309) 우리는 서로의 관심을 끌어당기고 붙들어 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세계에서 살아간다. 온갖 종류의 관계가 우리의 생활 한가운데 온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새로운 명제로 바뀌었다.
(310) 이 자아 관념의 파편화는 조리가 없고 일관성이 없는 관계들의 복수성과 맞물려 나타난다. 이런 관계들은 무수히 많은 방향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면서 다양한 역할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래서 알아볼 수 있는 윤곽을 가진 <진정한 자아>는 점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완전히 포화 상태에 이른 자아는 더 이상 자아가 아니다.
(312) <나의 일부, 나의 아주 중요한 일부는 머드 속의 인물로서만 존재한다>
(313) 오늘날 값을 치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접속을 통해 현대 세계의 어느 곳으로부터든지, 지나온 인류 역사의 어느 문화로든지 이미지나 관념을 자유롭게 가져올 수 있다> … 이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섬뜩한 접속>은 인류 역사에서 유례가 없다고 리프턴은 말한다.
(314) <변화 무쌍함은 한편으로는 외부 상황에 맞추어 자기 모습을 바꾸어가는 것이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응집하고 강화하는 노력>
(319) <우리는 종국에 가서는 그 안에서 살 수도 있을 만큼 너무나 생생하고 너무나 설득력 있고 너무나 ‘실감’이 아는 환각을 만들어낸 최초의 인간이 될 위험성이 있다.>
(321) 연출적 관점은 통신을 인간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자아를 관계의 중심으로 재정의하며, 체험 자체를 연극적 활동으로 만들고, 재산을 상징으로 변형시킨다.
(322) 연기를 할 수 있고 변신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324) <통신 서비스에 대한 지배가 권력의 원천이 되고 통신에 대한 접속이 자유의 조건이 된다.>
(336) 그러나 인류의 사업 범위와 교제 범위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비물질적 세계로 이동하게 되면 영토에 기반을 둔 정부의 지위가 점점 흔들리게 되지 않을까?
(340) 미래는 풍족하고 어디서나 살 수 있으며 교육을 많이 받은 우리 주의 소수에게만 기회의 낙원으로 다가올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들, 다시 말해서 대학을 나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소위 불필요한 사람들에게 디지털 암흑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343)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사람은 접속의 시대에도 낙오된다.
(346) 개인과 기업의 통신은 점차 전자 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매체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다. 이런 매체를 통해야만 문화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접속의 문제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이다.
(346) 접속의 문제는 다가오는 시대가 성찰해야 할 가장 중요한 화두의 하나가 된다.
(350) 사유 재산은 타인을 배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고, 공유 재산은 타인으로부터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했다. 그러나 근대로 넘어오면서 공유재산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맥퍼슨은 말한다.
(351) 소유 개념은 <접속으로부터 배제 당하지 않을 권리>까지 포함시키는 쪽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354) 네트워크 세계에서 자치를 고수한다는 것은 단절과 고립을 의미한다. 반면, 배제되지 않을 권리, 곧 접속의 권리는 개인적 자유를 재는 잣대가 된다.
(356) 새로운 시대의 아킬레스건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상업적으로 규정되는 관계와 전자로 매개되는 네트워크가 전통적 관계와 공동체를 대체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일 것이다.
(356) 전통적 관계는 친족, 민족, 지리, 공유하는 정서로부터 탄생한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책임감과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으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 … 관계와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반면 상품화된 관계의 핵심은 그것이 도구적이라는 데 있다. 이런 관계를 유지시키는 유일한 결속력은 쌍방이 합의한 거래 가격이다. … 이것은 쌍방이 계약상의 의무를 존중하는 동안 존속하는 공동 관심 네트워크에 의해 유지된다.
(362)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통해 동질성을 확인한다>. 사회적 신뢰는 공감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 공감은 <타자의 인간성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요구한다.
(364) 서로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세대는 문화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신뢰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
(365) 자연처럼 문화도 자꾸 캐내면 고갈되게 마련이다.
(369) <특히 젊은 세대는 정치, 종교, 국가 배경이 판이하게 다르면서도 다양한 사회에 의해 수용되는 동질화된 정보와 스타일에 맞추어 문화 생활을 한다>.
(372) 인간 활동과 관계를 조직하는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자주 갈등을 일으키는 두 방식 사이에서 중간 지점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화 영역과 상업 영역에 똑 같은 시간과 관심을 배분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373)모든 현실 문화는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친밀감은 지리적 공간에서 움트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문화를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려면 적어도 사이버 스페이스에 쏟아붓는 만큼의 관심을 지리적 공간에도 보여야 하고 채팅방에 들이는 만큼의 정성을 현실 공동체에도 기울여야 한다.
(375) 인터넷에서 해당 정보를 클릭하는 것이 배움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현실의 시공간에서 남들과 살을 맞대고 어울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배움의 일부분이다.
(376) 시장에서 자기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은 21세기의 교육 이념으로는 지나치게 옹색하다. 이런 교육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 의식을 가진 균형잡힌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남에게 팔아먹을 수 있는 재산쯤으로 치부하는 어른을 양산한다.
(379)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는 절대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문화 자원, 의식, 활동은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다. … 문화가 공동의 거점을 잃고 상업적 오락물로 변질되는 순간 내재 가치는 증발한다. 오로지 효용성만이 시장을 지배한다.
(380) 문화는 대체로 생명을 긍정한다. 문화는 자연에 우리가 진 빚을 이야기하며 우리를 더 큰 생명의 힘으로 이끈다. 이런 생명의 긍정이 바로 내재 가치의 핵심이다.
(381) 정치적으로 각성된 지역 문화는 글로벌 네트워크 경제에 저항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글로벌 네트워크 경제의 존립에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383) <나는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창문을 굳게 닫아놓은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 온 세계에서 불어오는 문화를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밖에서 불어온 문화에 덩달아 휩쓸려 가지는 않겠다.>
(384) 산업 자본주의가 문화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지금, 노동정신은 놀이정신에게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 놀이는 간단히 말해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놀이는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 범주에 해당한다. 놀이가 없으면 문명도 존립할 수 없다.
(387) 놀이는 현실에 뿌리를 두면서도 가볍고 경쾌하다. 놀이를 하는 사람은 <놀이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놀이에 빠진다.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놀이는 일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일의 목적은 징발하고 죽이고 가공하고 생산하는 것이다. 생산은 언제나 사물을 고갈시킨다.
(389) <사람은 가장 인간다울 때 놀고, 사람은 놀 때 가장 인간답다>
(390) 놀이도 희열도 결국은 경험의 공유이다. 숲을 혼자 거닐 때 느끼는 잔잔한 희열도 나를 둘러싼 생명과 혼연 일체가 된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다. … 우리는 서로에게 빠져들 때만 진정한 인간이 된다.
(392) 수천년을 이어온 살아 있는 인간 체험의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생물 다양성을 잃는 것 못지않게 앞으로 우리가 생존하고 번영하는 데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392) 접속의 시대는 <우리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다. … 그것은 단순히 누가 접속권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체험과 세계가 과연 접속할 만한 가치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3. 내가 저자라면
1) 책을 읽은 뒤
이 책은 크게 ‘1부. 자본주의의 새로운 프론티어’와 ‘2부. 문화를 고갈시키는 자본주의’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 그는 시장 경제가 네트워크로 전환되고, 소유의 시대에서 접속의 전환되는 과정을 묘사하며, 이제 제품이나 서비스를 넘어 인간의 체험과 문화까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광맥에 대한 전체 그림을 그린다. 2부에서는 문화의 광맥을 마구 파헤치려는 자본주의의 과욕이 우리의 소중한 자원을 고갈시킬 것을 염려하며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리프킨은 ‘접속(access)’이란 용어를 통해 미래의 모든 변화의 흐름을 조망하려 시도한다. 누군가는 미래를 네트워크의 시대라고 하고, 경험의 시대라고 하고, 창조의 시대라고 하며, 또 이미지의 시대라고도 하지만 그는 이 모든 복합적인 현상을 ‘접속’이란 키워드로 통합시키려 시도한다. 이렇게 한 단어로 압축하는 강력한 키워드의 힘에 바로 이 책의 장점이 존재하지만, 또한 이런 시도 때문에 약점 또한 존재한다. ‘접속’이란 용어로 모든 현상을 갈무리하려다 보니 무리한 논리 전개가 눈에 띄며,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논제(agenda)를 설정해서 논란을 일으키려는 저자의 욕심이 곳곳에 묻어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을 세가지만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유의 종말’이라는 번역서의 제목이다. 원제는 분명 ‘the Age of Access’ 즉, 접속의 시대이다. 물론 좀 더 잘 팔리는 책을 만들어야 하고, 또 육식의 종말, 노동의 종말과 함께 ‘종말 3부작’을 구성하고자 하는 출판사의 마케팅적 욕심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이 때문에 책의 내용까지 오해되는 일은 없어야 할 듯하다.
둘째, 저자의 서문이나 프롤로그 등이 없는 것이 아쉽다. 바로 ‘접속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선언에서 시작해서 전체적인 흐름이나 구성에 대한 큰 그림도 없이 따라가다 보니, 중간에서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독자에 대한 배려가 조금 부족해 보인다.
셋째, 어디까지가 전망이고 어디까지가 비판인지가 헷갈린다. 어떤 때는 잘 연결되지 않는 현상들 사이의 관련성을 찾아내고, 큰 변화의 흐름을 읽는 저자의 날카로운 안목에 감탄하다가도, 곧 그의 비판적인 시각 때문에 글에 몰입하는 것이 끊기곤 한다. 미래에 대한 전망과 비판을 따로 나누어 풀어줬으면 어떨까, 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가장 큰 아쉬움 중 하나였다.
2) 책의 재구성
책의 제목은 ‘접속(Access)’ 이다. ‘접속이’란 용어가 가진 시대적 의미와 다양한 담론에 좀 더 집중할 것이다. 우선 프롤로그를 통해 주제의 의미와 전체적인 구성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줄 테다.
책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될 것이다. 1부는 ‘접속의 시대(the age of access)’이다. 여기에서는 ‘접속’이란 용어의 의미와 ‘탈근대’의 시대적 변화와 다양한 문화적 맥락의 변화에 대해 전망할 것이다. 독자의 흥미를 위해 경제 뿐 만 아니라 영화, 음악, 문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접속’의 의미를 되짚어 볼 것이다. 이 장은 한마디로 미래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는 ‘전략’의 장이 될 것이다.
2부는 ‘접속의 위기(the crisis of access)’로 시대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문제점과 위험성에 대해 논할 것이다. 이 장에는 지적 재산의 독점, 인간 관계의 상품화, 지역 문화 고갈 등의 문제점에 대해 심도 깊게 살펴볼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반성해보는 ‘비평’의 장이다.
3부는 ‘접속의 영혼(the soul of access)’이다. 접속의 시대로의 변화에 따른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여 미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단순한 비판을 넘어 인간답게 사는 법과 모두가 문화를 향유하는 방법 등을 치열하게 고민해볼 것이다. ‘접속의 시대’란 파도를 타는 방법에 대한 ‘실천’의 장이다.
에필로그에서는 걸어온 길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고, 책의 주제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면서 독자의 가슴에 화두를 던져 주는 은유가 담긴 짧은 구절로 마무리 할 것이다. ‘접속’이란 용어 자체가 어딘가 사이버펑크 시대의 대선사가 제자에게 던져줄 법한 화두 같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