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10.토
|
루카 복음 15장 1-3.11-32절 |
|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
|
|
|
구원의 보편성 허찬란 신부 |
|
작은아들이 유산으로 받은 재산을 흥청망청 쓰고 갈 곳을 찾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오히려 아버지는 버선발로 달려나가 맞이하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던 형이 분개하여 집을 나갑니다. 이에 대해 철학적 인간학을 전공하신 한 신부님이 강론으로, 큰아들도 작은아들이 갔던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재미있는 상황을 물음표로 던지며 묵상거리를 주셨던 때가 떠오릅니다. 큰아들 역시도 세상이라는 곳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죄를 짓고 다 탕진하여 작은아들이 걸어 들어왔던 그 집,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를 떠올릴 때 비로소 큰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비난하고 욕을 하지만 사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그 사람에 대해 전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각양 각색의 사람들 무리 속에서 인간 구원을 바라시는 주님의 사랑, 또한 인류를 보고 계시는 너그러우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도 죄를 많이 짓고 삽니다. 작은아들처럼 방탕한 죄, 큰아들처럼 하느님의 현존을 감사할 줄 모르는 죄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판관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보편성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사랑 지극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
|
|
|
자기 수용 |
|
고향으로 돌아가는 즐거움은 우리에게 온전함을 느끼게 해주며,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아는 것은 자신을 평화롭게 수용할 때 일어난다. 이러한 자기수용이 깊어질 때, 불완전하고 사랑받지 못한 존재라는 부끄러움은 겸손과 깊은 깨달음으로 대치된다. 즉 현재 나의 모습은 나를 즐겁게 수용하기에 충분하며, 하느님의 지지해주시는 사랑으로 포용되기에 충분하다는 깨달음이다. 겸손은 우리가 완벽하게 되고자 하는 요구를 없애주며, 자신을 창조물로서 감사하면서 받아들이도록 이끌어준다. 즉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훌륭한 창조물이며, 죄를 짓고 살지만 사랑받는 창조물인 것이다.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끼고 부끄러워하며 사악한 길에서 돌아와 집으로 향하던 ‘잃어버린 아들’처럼, 우리 역시 자신에 대한 태도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하도록 부름받았다. 즉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시기하는 마음에 근거한 자기거부로부터 많은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자기수용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집을 나갔던 아들은 아버지가 기쁘게 받아들여준 뒤 자기 미래를 안내해준 고통스러운 과거의 교훈을 통해 아버지의 충실한 사랑을 신뢰하며 자신의 약하고 불확실한 자아를 그대로 수용할 필요가 있음을 뼛속 깊이 느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무한함을 알려주시기 위해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존재의 모든 것, 즉 그림자를 포함한 모든 것을 수용하신다는 것이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시고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들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은 우리 존재를 풍성한 은총과 수용으로 감싸주시는 데 실패하지 않으신다.
윌키 오·노린 캐논 공저 | 생활성서사 | <마음의 갈망들>에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