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과 시어머니
열아홉살 철부지 나이에 지금의 남편에게 마음을 뺏겨 시집을 간다고 보채자 친정 부모님은 그 사람의 됨됨이 보다 겉으로 보이는 가난하고, 나이 많으신 홀어머니 밑에 성이 다른 두 형제들과 3년째 앓고 있는 폐결핵으로 건강까지 좋지 않은 예비사위가 당신의 사윗감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고 하시며 결혼을 많이 반대를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는 남편과의 결혼을 강행했습니다. 제게 남편의 많은 단점들은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고 부모님이 떼어 내면 낼수록 더 마음이 가고, 제가 남편 곁에 있어줘야 남편이 힘을 내고, 앓고 있던 폐결핵도 금방 나을 것 같았습니다. 가난 따윈 이유가 되지 않았고, 누가 봐도 단점 투성이 인 남편은 제 눈엔 크게 성공할 사람으로 밖에 안보였습니다. 남편 혼자보다는 제가 곁에서 도와주어야 남편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결혼만을 고집했던 저희 부부는 결국 친정 부모님의 자리를 비워 둔 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쓸쓸하고 가슴 아픈 결혼식을 치르면서 마음속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잘 살아서 부모님 살아생전에 성공하여 친정 부모님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다시 한 번 하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누구보다 간절한 목표가 있었기에 저희 부부는 더 열심히 살 수 있었습니다.
신혼생활은 집 한 채 없이 소 우사에 방 한 칸이 전부였고 없는 집에 시집가서 뭘 하겠냐는 주변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땡볕에서 일을 하면서도 남편과 함께라면 힘든 줄 모르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중 작은형님 댁에서 살고 계시던 시어머님께서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자주 다투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남편은 마음도 착하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였습니다. 결혼 전에도 항상 마음에 어머님 생각이 가득했고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님을 결혼하면 본인이 꼭 모시고 살면서 효도 할 것이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를 했습니다. 이런 남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어머님을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기로 마음을 먹은 다음날 어머님은 옷 보따리만 챙겨 단칸방 저희 집으로 오셨습니다.
일흔 한살 되신 어머님은 ‘내가 젊으면 너희한테 짐도 안되고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을 텐데 쓸데없는 나이만 많이 먹었구나. 늙은 몸뚱이만 너희 차지가 되었으니 면목 없다’ 하시며 미안해 하셨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막내며느리라 시어머니를 단칸방에서 모신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였지만 남편이 어머님을 모시고 살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하는 모습과 단칸방인데도 불구하고 저희 집으로 오실 수밖에 없는 어머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기에 불평불만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으로 한해 한해 남의 땅을 임대하여 여름 한철은 수박밭원두막에서 지내고 농사가 끝나면 소 막사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등 이곳저곳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돈은 모이지 않았고 농사만 지어서는 가난을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틈틈이 시장노점에서 아이를 업고 장사까지 하며 돈이 되고 먹고사는 일에는 밤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소도 한두 마리씩 늘어가고 돈도 조금씩 모아졌습니다. 이렇게 밤 낮 없이 일에 몰두 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어머님의 도움이 매우 컸습니다.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틈틈이 농사일까지 도와주셔서 저희에게는 어머님이 천군만마와도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단칸방에서 시어머님하고 어떻게 살수 있냐며 아이들은 어떻게 낳았냐고 대견해하시면서 농담도 하시지만 저희는 어머님이 계셔서 너무나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셨습니다. 어머님은 당뇨합병증으로 중풍도 오고 다리도 부러지셔서 고생은 하셨지만 몇 달 만에 완쾌되실 정도로 정신력도 강하셨습니다. 식이요법도 잘하시고 건강관리를 워낙 잘하셔서 많은 연세에 비해 건강하셨습니다. 본인 스스로가 막내아들한테 짐이 되지 않으려는 굳은 의지가 있었기에 당뇨와 고혈압을 이겨 내신 것 같습니다.
식구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살아온 결과 4년 만에 철원 와수리 시장 안에 2층 상가주택을 샀습니다. 어머님은 제가 없는 집에 시집와 고생을 많이 했다며, 저를 안아주시면서 너무 기뻐 시장 한복판에 나가 춤이라도 추고 싶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쌀가게를 차렸으며 어머님과 저는 소매를 했고 남편은 의정부와 서울로 한차씩 도매를 했습니다.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고 셋째아이를 낳고 철원가게는 임대를 주고 94년 10월에 고향땅을 떠나 타관객지 의정부3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어머님이 늙어서 남의 집 셋방은 싫다하셔서 작지만 분양받은 상가안에 방 한칸 들여 어머님과 아이들 셋, 그리고 형님아들까지 모두 7명이 비좁게 살았지만 마음은 늘 넉넉하고 행복했습니다.
돈은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써야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열심히 벌어 어머님께 효도하며 멋지게 쓰자는 희망을 가지고 밤잠을 줄여가며 새벽 4시부터 밤12시가 넘도록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님 돌아가시기 전에 좋은 집에서 편히 모시고 효도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남편은 제가 집안일과 장사 외엔 집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어머님 모시는 것에 소홀할까봐 오로지 어머님 공경에 애를 썼고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님의 식이요법을 잘해드리지 못하면 합병증으로 증세가 갑자기 나빠지기 때문에 아무리 바쁘고 힘이 들어도 어머님 식사에 신경을 써야했고 한끼라도 귀찮아 쌀밥을 드리면 밥상이 날아갈 정도로 엄하게 하며 세상이 두 쪽이 나도 잡곡, 보리밥을 해서 드릴 정도로 둘도 없는 효자였습니다.
남편이 워낙 어머님 생각하는게 각별했기에 남편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했으며 어머님께 더 신경을 써야했고 그래서인지 84세가 되도록 정정하셨습니다.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저희 부부 싸우지 않고 아이들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저희 부부는 어머님 생신 때 의정부3동 노인정 어르신들께 식사 대접을 해드리고, 쌀가게에 항상 지팡이를 20~30개씩 두고 어려운 어르신들께 나눠드리고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오곡밥을 지어 노인정 5곳에 나누어 드리기도 하고, 고향땅 철원 시집동네와 친정동네 어르신들께 돌아가시면 타시는 꽃상여를 선물하는 등 어르신을 위하는 일이라면 내 어머님께 하듯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로인해 어머님은 고향과 노인정 등 어디를 가시든지 막내 효자 아들덕분에 항상 기뻐 하셨으며, 그런 모습을 보며 우리부부도 행복했습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서인지 의정부 온지 2년만에 33평 아파트로 이사를 갈 수 있게 되었고, 조만간 넓고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어머님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술을 좋아하시는 큰 아주버님이 간경화로 갑자기 돌아 가셨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님이 아시면 충격 받으실까봐 숨기고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그 사실을 결국 아시고는 충격으로 새집으로 이사도 못가시고 저희 결혼기념일에 84세의 연세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생을 고생만 하신 어머님. 사시는 날까지 비좁은 단칸방에서 사셨지만 사시는 내내 행복해하셨으며 막내아들 사업도 잘되고 좋은 집으로 이사도 가게되었으니 마음 편하게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13년을 단칸방에서 어머님과 살면서 고생도 많이 했고 어머님으로 인해 마음고생도 많았지만 가족의 소중함도 알았습니다.
남편은 그동안 마음고생 몸 고생 많이 했다며 보상이라도 하듯 처음으로 3박4일 경주로 신혼여행 겸 여행을 가자고 하였습니다.
어머님과 사는 내내 불평불만 없이 잘 모셔줘서 고마웠다는 남편의 그말 한마디에 13년 고생이 눈 녹듯이 사라졌으며 어머님을 위해 한 일이였지만 동네에서는 착한 며느리로 소문도 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97년도에 바르게살기운동 의정부3동 협의회에 가입을 하고 새마을 부녀회와 청소년지도위원회에 가입 하면서 틈틈이 봉사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어머님은 돌아가셨지만 마음속에는 늘 어머님과 함께하고 있으며 어머님을 위해 뜻 있는 일을 하고 싶다며 어머님 생신날 어머님을 생각하며 경로잔치를 하자고 제안하여 시작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50여분 정도 오시다 10년 가까이 하다 보니 차차 소문이 나 300여분 가까이 오실정도로 경로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게 되었습니다.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어머님 생신 때 어머님을 생각하며 어르신들을 모시니 돌아가신 어머님이 살아 계신 것처럼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동네의 경로잔치며, 어르신들에게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효자효부로 칭찬을 받다보니 시장님표창장에 봉사와 효에 관련된 상을 여러번 받게 되었습니다.
제9회 바르게살기운동 효자효부에 효행 상을 받았으며, 2003년은 3동 노인회장님께서 한해도 아니고 매년 그것도 살아 계신 분도 아닌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해 경로잔치를 열어 고맙고 감사드린다며 본인 자식들한테 귀감이 되었다며 회장님 자식들이 노인정에 음식을 마련해놓고 저희 부부를 초청해 감사장과 은수저세트를 주시며 본인자식은 물론 이세상사람들에게 빛과 소금 같은 모범을 보인 훌륭한 부부라며 모범을 보여줘 감사하다며 감사장을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그 어느 상보다 보람 있고 귀한 것 같아 가슴까지 뛰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모범이 되었다는 노인회장님 말씀에 저희 부부의 가슴은 벅차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제가 바르게 위원으로 봉사한지도 14년이 되었습니다.
의정부3동 부위원장에서 2007년 10월 8일 의정부3동 위원장이 되면서 저는 의정부3동 바르게살기위원회가 의정부시 15개동 위원회 중 최고로 봉사 잘 하는 우수 동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30대에서 70대의 다양한 연령층과 여성과 남성 반으로 구성되어 있는 28명의 회원분들이 바르게살기이념인 진실, 질서, 화합을 바탕으로 불법광고물행사에 법질서 캠페인, 가정사사랑 캠페인, 환경정화캠페인, 불우이웃돕기 독거노인 도배, 집수리 봉사 등을 하며 서로 힘 모아 15개동 위원회에서 모범이 되려고 열심히 봉사 하며 단합과 봉사에 있어 3동위원회가 최고가 아닌가! 자부합니다.
작년부터 바르게살기 위원회 주최로 경로잔치를 하고 있는데 내년 3회 때는 올해보다 더 성대하게 경로잔치를 할 계획으로 준비 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봉사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살고 있는 남편은 현재 쌀가게를 접고 아들과 저와 함께 부동산을 운영하며 의정부3동 8통 통장을 맡고 있으며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노력하며 홀로사시는 어르신 댁에 고장 난 것이 있으면 고쳐 주기도 하며 작게나마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는 의3동 주민자치센터에서 바르게 모범적으로 살며 봉사하는 부부로, “2006년 가족이 행복한 경기도 만들기 건강가정 부부지킴이”로 위촉을 받았습니다.
항상 모범적이고 이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봉사란 가진 것이 많아 남을 돕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조금씩 나눠가며 그 안에서 넉넉하고 훈훈한 정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아이들도 누구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며 봉사하고 어르신공경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자랐기에 단칸방에서 같이 사셨던 할머니를 못 잊어하며 사랑하는 할머니를 지금도 마음깊이 그리워하고있는 우리 아이들을 보며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끼며, 저희 또한 자식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베푸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매일 매일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