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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 外編 17篇 추수 秋水 제17장】 "'대지관어원근 大知觀於遠近'
1.
가을이 되면 물이 불어난 모든 냇물이 황하로 흘러든다. 그 본 줄기는 커서 양편 물가의 거리가 상대편에 있는 소나 말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황하의 신은 기뻐하며 천하의 모든 아름다움이 자신에게 갖추어졌다고 생각하고,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가 북해에 도착했다. 그 곳에 이르러 동쪽을 바라보았으나 물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황하의 신은 비로소 그의 얼굴을 돌려 북해의 신을 우러러 보고 탄식하며 말했다.
“속담에 백가지 도리를 알고는 자기 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저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일찍이 공자의 넓은 지식을 낮게 평가하고 백이 같은 절의를 가볍게 여기는 이론을 듣고도 지금까지는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선생님의 끝을 알 수 없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런 것 같이 느껴집니다. 제가 선생님의 문하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위대한 도를 터득한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북해의 신이 말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 어름에 대해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시간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선비에게 도에 관해 얘기를 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물가를 벗어나 큰 바다를 보고서야 당신의 추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신에게 위대한 도리를 얘기해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의 물 중에 바다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며, 잠시도 흘러듦을 멈추지 않는 데도 차서 넘치지 않는다. 미려에서는 바닷물이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 나가지만 물이 마르지 않는다. 봄이나 가을에도 변화가 없고, 장마가 지나 가뭄이 드나 영향이 없다. 이 바다가 장강이나 황하의 흐름보다 얼마나 방대한 것인가는 수량으로 계측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으로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늘과 땅으로부터 형체를 받았고, 음과 양으로부터 기운을 받았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 작은 나무나 작은 돌이 마치 큰산에 있는 것이나 같은 존재이다. 이렇게 나의 존재를 작게 보고 있는데 어찌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방의 바다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크기를 헤아려보면, 소라 구멍이 큰 연못가에 나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한 나라가 세상에 차지하는 크기를 헤아려 보면 큰 창고 속에 있는 곡식 알 하나와 비슷하지 않은가?
물건의 종류에는 몇 만이라는 숫자가 붙는데 사람들이 그 중 하나의 숫자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곡식들이 생산되는 곳과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에 널리 살고 있는데, 사람이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을 만물과 비교해 본다면 말의 몸에 있는 하나의 가는 털에 지나지 않는다. 오제가 천자 자리를 서로 물려준 것이나, 삼왕에 이르러 서로 다툰 것이나, 어진 사람이 근심하는 것이나,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수고를 하는 것이나 모두가 이와 같이 작은 일이다.
백이는 왕위를 사양함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공자는 여러 가지 가르침을 얘기하여 박학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당신이 조금 전까지 스스로 물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여기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황하의 신이 말했다.
“하늘과 땅을 크다고 하고, 털끝은 작다고 할 수도 있습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아니다. 물건이란 양이 무궁하여 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각자의 분수는 일정하지 않고 변하는 것이며, 일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위대한 지혜를 지닌 사람은 먼 것과 가까운 것을 똑같이 본다. 그래서 작은 것이라 무시하지 않고, 큰 것이라 대단히 여기지 않는다. 물건의 양이란 무궁하여 한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옛날과 현재를 한가지 것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오래 산다 해도 교만하지 않고, 생명이 짧다 해도 더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시간이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은 달처럼 찼다 기울었다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물건을 얻어도 기뻐하지 않고, 물건을 잃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분수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란 넓은 것임을 분명히 알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다고 해서 기뻐하지 않고, 죽는다고 해서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일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헤아려 보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비길 것이 못 된다. 또한 살아 있는 시간이란 살아 있지 못한 시간에 비길 것이 못 된다. 그런 지극히 작은 입장에서 지극히 큰 영역을 추궁하려 들기 때문에 미혹되고 혼란하여 스스로 안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털끝이 지극히 미세하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하늘과 땅이 지극히 큰 영역이라고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황하의 신이 말했다.
“세상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지극히 정세한 것에는 형체가 없고, 지극히 큰 것은 포괄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면 그 전체를 다 볼 수가 없고,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보면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정세하다는 것은 작은 것 중에서도 미세하다는 뜻이다. 극대하다는 것은 큰 것 중에서도 아주 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 볼 수 없고,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자연의 형세가 그런 것이다. 정세하다느니 굵다느니 하는 것은 형체가 있어서 결정되는 것이다. 형체가 없는 것은 수량으로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포괄할 수 없이 큰 것은 숫자로서 크기를 따져 밝힐 수 없는 것이다.
말로써 논할 수 있는 것이란 물건으로서 큰 것이다. 뜻으로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물건으로서 정세한 것이다. 말로써 논할 수 없고, 뜻으로서 살펴 인지할 수 없는 것은 정세하고 크다는 것을 결정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의 행동은 사람을 해치는 짓을 하지 않고 어짊과 은혜를 많이 베풀려 하지도 않는다. 행동은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없지만 문지기나 노예를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재물을 위해 다투지 않지만 사양하는 것을 훌륭한 것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일을 함에 있어 남의 힘을 빌리지도 않지만 자기 힘으로 먹고사는 것을 훌륭하게 여기지 않으며, 탐욕 많은 자나 비열한 자들을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행동은 세속과 다르지만 치우치고 기이한 것을 훌륭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행동은 여러 사람을 따르지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세상의 벼슬이나 봉록으로도 그의 행동을 유도하기에는 부족하고, 형벌이나 치욕으로도 그를 욕되게 하기는 부족하다. 그는 옳고 그름은 분별할 수 없는 것이며, 작고 큰 것도 분별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듣건대 도를 터득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은 남이 알아주지 않으며, 위대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없다고 하였는데, 자기의 분수를 한정하고 지내는 지극한 경지인 것이다.
황하의 신이 말했다.
“물건의 외형이나 내면에 있어서 무엇을 기준으로 귀하고 천한 구분이 생기며, 무엇을 기준으로 작고 큰 구분이 생기는 것입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건에는 귀하고 천한 것이 없다. 물건 자체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은 귀하고 남은 천한 것이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귀하고 천한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정하는 것이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어느 것에 비하여 크다는 입장에서 말하면 만물 중에 크지 않은 것이 없게 되며, 어느 것에 비하여 작다는 입장에서 보면 만물 중에 작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하늘과 땅도 큰 것과 비교를 하면 작은 풀 씨 한 알 정도로 생각될 수 있고, 털끝도 작은 것과 비교하면 큰 산 정도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모든 것이 상대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공용(功用)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공용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만물에는 쓸데 없는 것이란 없게 되며, 그 공용을 없다고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만물 중에 쓸데 있는 것이란 없게 된다. 동쪽과 서쪽은 서로 반대가 되면서도 서로 어느 한편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안다면, 곧 공용의 규정도 상대적인 것임을 알 것이다.
취향이란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그러함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만물에는 옳지 않은 것이란 없게 된다. 그것이 그름을 비난하는 입장에서는 만물에는 그릇되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요임금이나 걸왕이 모두 스스로는 시인하면서도 남이 비난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취향이란 것도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옛날에 요와 순은 천자의 자리를 물려받아 제업을 이루었고, 연나라 임금 증은 재상의 아들 지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었으나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은나라 탕왕이나 주나라 무왕은 다툼을 통해 왕이 되었으나, 초나라 백공은 다툼으로 멸망했다.
이처럼 다투고 사양하는 예절이나, 요임금과 걸왕 같은 행동은 때에 따라 귀하게도 되고 천하게도 되는 것이어서 일정한 표준에 의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들보나 기둥같이 큰 재목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작은 구멍을 막는 데는 소용이 없다. 그것은 기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는 삵쾡이만 못하다. 그것은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도 벼룩을 잡고 터럭 끝도 볼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뜨고도 큰산도 보지 못한다. 그것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데 어찌 옳다는 것을 존중하고 그르다는 것은 무시하며, 다스림은 존중하고 혼란은 무시하는가? 그것은 하늘과 땅의 이치와 만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은 존중하면서 땅은 무시하고, 음은 존중하면서 양은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것이 통용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주장을 버리지 않고 내세우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거짓말쟁이인 것이다.
옛날 제왕들을 보면 물려주는 방법이 서로 달랐고, 하·은·주 3대의 왕위 계승 방법도 각기 달랐다. 그 시대와 어긋나게 하고, 그 때의 세속을 거스르는 자를 두고 찬탈자라 부르며, 그 시대에 합당하게 하고 그 때의 세속을 따르는 사람을 두고 의로운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다.
황하의 신이 말했다.
“저는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제가 사양하거나 나가거나 멈추는데 있어서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도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무엇을 천히 여기겠는가? 이런 경지를 혼돈하게 통일된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뜻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에 크게 어긋나게 된다. 도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을 적다하고 무엇을 많다 하겠는가? 이런 경지를 구별 없이 연결되는 상태라 말하는 것이다.
한편에만 치우치는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에 어긋나게 된다. 엄격하기가 나라의 임금과 같아서 사사로운 은덕을 베푸는 일이 없어야 한다. 유유자득하기가 제사를 받는 땅의 신과 같아서 사사로이 복을 내려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 대범하기가 사방이 끝없는 것과 같아서 아무런 한계도 없어야 한다. 만물을 다 같아 아울러 감싸서 그 어떤 사람만을 아껴주거나 도와 주는 일이 없으면 이것을 두고 일정한 넓이가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만물은 한결같이 평등한 것이니, 어느 것이 못하고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도에는 시작도 끝도 없지만 물건에는 삶과 죽음이 있다. 그래서 물건의 공용이란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비어 있다가도 어떤 때는 차게 마련이어서 그 형세에는 일정한 위치가 없다. 늙어 가는 나이는 막을 수가 없고, 흘러가는 시간은 멈출 수가 없다. 생성소멸과 찼다가 비는 일을 반복하여 그치면 또 시작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위대한 도의 뜻을 얘기하고 만물의 이치를 논하는 까닭인 것이다.
물건의 생성은 말이 뛰거나 달리는 것처럼 변화한다.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란 없고, 잠시도 바뀌지 않는 것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하겠는가? 그대로 스스로 변화하게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황하의 신이 말했다.
“어째서 도가 귀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도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理)에도 통달해 있고, 이에 통달한 사람은 물건의 변화에 대한 적응에 밝다. 물건의 변화에 대한 적응이 밝은 사람은 사물에 의해 자신이 해를 받는 일이 없다.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은 불도 뜨겁게 하지 못하며, 물도 그를 빠져죽게 하지 못하며, 추위와 더위도 그를 해칠 수가 없고, 새나 짐승들도 그를 상하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가볍게 여긴다는 말은 아니다. 편안함과 위험을 살피고 화와 복 어느 것에나 안주하여 자기의 거취를 신중히 함으로써 아무것도 그를 해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그의 내부에 존재하게 하고, 인위적인 것은 밖으로 내보내어, 그의 덕이 자연에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연과 사람의 행위에 대해 알고 자연을 근본으로 삼는다면, 그의 올바른 위치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아가고 물러나고 굽히고 뻗치고 자유자재로 되며, 도로 되돌아가 진리의 극치를 얘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황하의 신이 물었다.
“무엇을 자연이라 하고, 무엇을 인위라 하는 것입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소나 말이 네 발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연이라 말하고, 말의 머리에 고삐를 매거나 소의 코를 뚫는 것을 인위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위로써 자연을 손상시키면 안되고, 지혜로 천명을 손상시키면 안되고, 자기의 덕을 명성을 위해 희생시키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자연을 지켜 잃지 않는 것을 그의 진실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秋水時至, 百川灌河, 涇流之大, 兩涘渚崖之間不辯牛馬. 於是焉河伯欣然自喜, 以天下之美爲盡在己. 順流而東行, 至於北海, 東面而視, 不見水端, 於是焉河伯始旋其面目, 望洋向若而歎曰:「野語有之曰:“聞道百以爲莫己若者”, 我之謂也. 且夫我嘗聞少仲尼之聞而輕伯夷之義者, 始吾弗信., 今我睹者之難窮也, 吾非至於子之門, 則殆矣, 吾長見笑於大方之家.」
北海若曰「井䵷不可以語於海者, 拘於虛也., 夏蟲不可以語於氷者, 篤於時也., 曲士不可以語於道者, 束於敎也. 今爾出於崖涘, 觀於大海.乃知爾醜, 爾將可與語大理矣. 天下之水, 莫大於海, 萬川歸之, 不知何時止而不盈, 眉閭泄之, 不知何時已而不虛., 春秋不變, 水旱不知. 此其過江河之流, 不可爲量數. 而吾未嘗以此自多者, 自以比形於天地而受氣於陰陽, 吾在天地之間, 猶小石小木之在大山也, 方存乎見少, 又奚以自多! 計四海之在天地之間也, 不似礨空之在大澤乎? 計中國之在海內, 不似稊米之在大倉乎? 號物之數謂之萬, 人處一焉., 人卒九州, 穀食之所生, 舟車之所通, 人處一焉., 此其比萬物也, 不似豪末之在於馬體乎? 五帝之所運, 三王之所爭, 仁人之所憂, 任士之所勞, 盡此矣. 伯夷辭之以爲名, 仲尼語之以爲博, 此其自多也, 不似爾向之自多於水乎?」
河伯曰:「然則吾大天地而小毫末, 可乎?」
北海若曰:「否, 夫物, 量无窮, 時无止, 分无常, 終始无故. 是故大知觀於遠近, 故小而不寡, 大而不多, 知量无窮., 證曏今故, 故遙而不悶, 掇而不跂. 知時无止., 察乎盈虛, 故得而不喜, 失而不憂, 知分之无常也., 明乎坦塗, 故生而不說, 死而不禍, 知終始之不可故也. 計人之所知, 不若其所不知., 其生之時, 不若未生之時., 以其至小求窮其至大之域, 是故迷亂而不能自得也. 由此觀之, 又何以知毫末之足以定至細之倪! 又何以知天地之足以窮至大之域!」
河伯曰:「世之議者皆曰:“至精无形, 至大不可圍.” 是信情乎?」
北海若曰:「夫自細視大者不盡, 自大視細者不明. 故異便, 此勢之有也. 夫情, 小之微也., 垺, 大之殷也., 夫精粗者, 期於有形者也., 无形者, 數之所不能分也., 不可圍者, 數之所不能窮也. 可以言論者, 物之粗也., 可以意致者, 物之精也., 言之所不能論, 意之所不能致者, 不期精粗焉.」
<是故大人之行, 不出乎害人, 不多仁恩., 動不爲利, 不賤門隸., 貨財弗爭, 不多辭讓., 事焉不借人, 不多食乎力, 不賤貧汚., 行殊乎俗, 不多벽異., 爲在從衆, 不賤佞諂., 世之爵祿不足以爲勸, 戮恥不足以爲辱., 知是非之不可爲分, 細大之不可爲倪. 聞曰:“道人不聞, 至德不得, 大人无己.” 約分之至也.>
河伯曰:「若物之外.約物之內, 惡至而倪貴賤? 惡至而倪小大?」
北海若曰:「以道觀之, 物无貴賤., 以物觀之, 自貴而相賤., 以俗觀之, 貴賤不在己. 以差觀之.因其所大而大之, 則萬物莫不大., 因其所小而小之., 則萬物莫不小., 知天地之爲稊米也, 知毫末之爲丘山也, 則差數覩矣. 以功觀之, 因其所有而有之, 則萬物莫不有., 因其所无而无之., 則萬物莫不无., 知東西之相反而不可以相无, 則功分定矣. 以趣觀之., 因其所然而然之, 則萬物莫不然., 因其所非而非之.則萬物莫不非., 知堯桀之自然而相非, 則趣操覩矣.
「昔者堯舜讓而帝, 之괘噲讓而絶., 湯武爭而王, 白工爭而滅. 由此觀之, 爭讓之禮, 堯桀之行, 貴賤有時, 未可以爲常也. 梁麗可以衝城, 而不可以窒穴, 言殊器也., 騏驥驊騮, 一日而馳千里, 捕鼠不如狸狌, 言殊技也., 鴟鵂夜撮蚤, 察毫末, 晝出瞋目而不見丘山, 言殊性也. 故曰, 蓋師是而无非, 師治而无亂乎? 是未明天地之理 萬物之情者也. 是猶師天而无地, 師陰而无陽, 其不可行明矣. 然且語而不舍, 非愚則誣也. 帝王殊禪, 三代殊繼. 差其時, 逆其俗者, 謂之簒夫., 當其時, 順其俗者, 謂之義之徒. 黙黙乎河伯! 女惡知貴賤之門, 小大之家!」
河伯曰:「然則我何爲乎, 何不爲乎? 吾辭受趣舍, 吾終奈何?」
北海若曰:「以道觀之, 何貴何賤, 是謂反衍., 无拘而志, 與道大蹇. 何少何多, 是謂謝施., 無一而行, 與道參差. 嚴嚴乎若國之有君, 其无私德., 繇繇乎若祭之有社, 其无私福., 泛泛乎其若砂防之无窮, 其无所畛域. 兼懷萬物, 其孰承翼? 是謂无方. 萬物一齊, 孰短孰長? 道无終始, 物有死生, 不恃其成., 一虛一盈, 不位乎其形. 年不可擧, 時不可止., 消息盈虛, 終則有始. 是所以語大義之方, 論萬物之理也. 物之生也, 若驟若馳, 无動而不變, 无時而不移. 何爲乎, 何不爲乎? 夫固將自化.」
河伯曰:「然則何貴於道邪?」
北海若曰:「知道者必達於理, 達於理者必明於權, 明於權者不以物害己. 至德者, 火弗能熱, 水弗能溺, 寒暑弗能害, 禽獸不能賊. 非謂其薄之也, 言察乎安危, 寧於禍福, 謹於去就, 莫之能害也. 故曰, 天在內, 人在外, 德在乎天. 知乎人之行, 本乎天, 位乎得., 蹢躅而屈伸, 反要而語極.」
河伯曰:「何謂天? 何謂人?」
北海若曰:「牛馬四足, 是謂天., 落馬首, 穿牛鼻, 是謂人. 故曰, 无以人滅天, 无以故滅命, 无以得殉名. 謹守而勿失, 是謂反其眞.」
2.
발이 하나밖에 없는 기는 발이 많은 지네를 부러워하고, 지네는 발 없이도 움직이는 뱀을 부러워하고, 뱀은 의지하는 데 없이 움직이는 바람을 부러워하고, 바람은 움직이지도 않고 가는 눈(目)을 부러워하고, 눈은 가지 않고도 아는 마음을 부러워한다.
기가 지네에게 말했다.
“나는 한발로 껑충껑충 뛰어다니지만 뜻대로 가지지 않습니다. 선생은 수많은 발을 쓰니 얼마나 편하십니까?”
지네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침 뱉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침을 뱉으면 큰 것은 구슬 같고 작은 것은 안개 같은데, 크고 작은 것이 섞여 떨어지는 그 수는 이루 다 알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지금 나는 그처럼 나의 자연스러운 기능을 사용할 따름이어서 그렇게 편리한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지네가 뱀에게 물었다.
“저는 많은 발로 다니고 있지만 선생의 발 없는 것만 못하니 어째서입니까?”
뱀이 대답했다.
“자연스러운 기능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내 어찌 발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뱀이 바람에게 물었다.
“저는 저의 척추와 갈비뼈를 움직여 다니고 있으니 의지하는 곳이 있는 셈입니다. 선생께서는 북해에서 일어나 남해로 불어 들어가는데도 의지하는 곳이 없으니 어째서입니까?”
바람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북해에서 일어나 남해로 불어 들어갑니다. 그러나 손가락도 나를 이겨고, 발길질도 나를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 나무를 꺾고 큰 지붕을 날려 보내는 것이 또한 나의 능력입니다. 작은 것은 이겨내지 못하면서도 큰 것은 이겨내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크게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夔憐蚿, 蚿憐蛇, 蛇憐風, 風憐目, 目憐心.
夔謂蚿曰:「吾以一足趻踔而行, 予无如矣. 今子之使萬足, 獨奈何?」
蚿曰:「不然. 子不見夫唾者乎? 噴則大者如珠, 小者如霧, 雜而下者不可勝數也. 今予動吾天機, 而不知其所以然.」
蚿謂蛇曰:「吾以衆足行, 而不及子之无足, 何也?」
蛇曰:「夫天機之所動, 何可易邪? 吾安用足哉!」
蛇謂風曰:「予動吾脊脅而行, 則有似也. 今子蓬蓬然起於北海, 蓬蓬然入於南海, 而似无有, 下野?」
風曰:「然. 予蓬蓬然起於北海而入於南海也, 然而指我則勝我, 鰌我亦勝我. 雖然, 夫折大木, 蜚大屋者, 唯我能也, 故以衆小不勝爲大勝也. 爲大勝者, 唯聖人能之.」
3.
공자가 광이라는 곳에 갔을 때 송나라 사람들이 그를 몇 겹으로 포위하고 해치려 하였으나 공자는 쉬지 않고 금을 타며 노래를 했다.
자로가 들어와서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 즐거우실 수가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내가 이제껏 곤궁한 것을 싫어한지 오래 되었지만 그것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운명일 것이다. 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지 오래 되었지만 그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시세(時勢)일 것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시대에는 천하에 곤궁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지혜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걸왕과 주왕 시대에는 천하에 뜻대로 사는 사람이란 없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지혜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던 것은 아니다. 시세가 마침 그랬던 것이다.
물 속을 다니면서도 교룡이나 용을 피하지 않는 것은 어부들의 용기이다. 육지를 다니면서도 외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는 것은 사냥꾼들의 용기이다. 시퍼런 칼날이 눈앞에 맞부딪치고 있어도 죽음을 삶과 같이 여기는 것은 열사들이 용기이다. 자기가 곤궁하여진 것은 운명임을 알고, 뜻대로 되자면 시세를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큰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성인의 용기이다. 자로야! 자리에 편히 앉거라. 나는 운명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무장한 군사를 이끄는 장수가 들어와 사과했다.
“저희들은 선생님이 양호인 줄 알고 포위했었습니다. 이제 양호가 아닌 것을 알았으니 사과를 드리고 물러나려고 왔습니다.”
孔子遊於匡, 衛人圍之數帀, 而絃歌不惙. 子路入見, 曰:「何夫子之娛也?」
孔子曰:「來! 吾語女. 我諱窮久矣, 而不免, 命也., 求通久矣, 而不得, 時也. 當堯舜之時而天下无窮人, 非知得也., 當桀紂之時而天下无通人, 非知失也., 時勢適然. 夫水行不避蛟龍者, 漁父之勇也., 陸行不避兕虎者, 獵夫之勇也., 白刃交於前, 視死若生者, 烈士之勇也., 知窮之有命., 知通之有時, 臨大難而不懼者, 聖人之勇也. 由處矣, 吾命有所制矣.」
无幾何, 將甲者進, 辭曰:「以爲陽虎也, 故圍之. 今非也, 請辭而退.」
4.
공손룡이 위모에게 물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옛 임금들의 도를 배웠고, 자라서는 어짊과 의로움으로 행동을 했습니다. 같고 다른 것들을 하나로 합하여 논하였고, 같은 돌에서 굳다는 개념과 희다는 개념을 둘로 분리시켰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 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 했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지혜를 곤경으로 몰아 넣었고, 여러 사람들의 언변을 궁지로 몰았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지극히 통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말을 듣고 나서는 멍하니 정신이 없고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의 이론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인지, 저의 지혜가 그만 못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입을 열 수가 없습니다. 그의 도는 어떤 것입니까?”
공자 모가 책상에 기대어 크게 한숨을 짓고 하늘을 우러러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무너진 우물 안의 개구리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개구리가 어느 날 동해의 거북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참 즐겁다. 우물가 위로 뛰어올라가 놀기도 하고, 깨어진 벽 틈으로 들어가 쉬기도 한다. 물로 들어가서는 양편 겨드랑이를 수면에 대고 턱을 물 위에 받치며, 진흙을 발로 차면 발등까지 밖에 빠지지 않는다. 장구벌레나 게나 올챙이를 둘러봐도 나만한 것이 없다. 거기에다 한 우물을 독점하고서 무너진 우물을 지배하는 즐거움 또한 최고이다. 당신도 한 번 들어와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동해의 거북이 들어가 보려고 왼발을 넣기도 전에 오른편 무릎이 걸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나와 개구리에게 바다 얘기를 했습니다.
「천리의 먼 거리로도 바다를 크기를 표현하기에 부족하고, 천 길의 높이로도 바다의 깊이를 형용하기에 부족하다. 우 임금 때 십 년 동안에 아홉 번이나 큰 장마가 졌지만 바다의 물은 불어나지 않았고, 탕 임금 때 팔 년 동안에 일곱 번이나 가뭄이 들었지만 바다의 물은 줄어들지 않았다. 시간이 짧고 긴 것에 따라 변화하는 법이 없으며, 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줄고 늘지 않는 것이 바다의 즐거움이다.」
그 얘기를 듣고 우물안 개구리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멍하니 정신을 잃어 버렸다 합니다.”
위모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지혜란 옳고 그름의 한계조차 모를 정도인데 장자의 말을 이해하려 하고 있으니, 그것은 마치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게 하고, 노래기에게 황하를 건너게 하는 것과 같아서 감당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지혜가 오묘한 말을 논할 정도가 못 되면서도 스스로 일시적인 궤변에 의한 이익이나 추구하는 것은 무너진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지 않습니까?
장자는 황천을 내리 밟고 하늘로 올라가 남쪽도 없고 북쪽도 없이 질펀히 사방으로 퍼져서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달하여 있고, 동쪽도 없고 서쪽도 없이 아득한 우주의 근본에서 시작하여 위대한 도로 되돌아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멍청히 관찰로 이해하고 변론으로 추구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는 대롱으로 하늘을 내다보고, 송곳으로 땅을 가리키며 하늘과 땅의 넓이를 살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작은 소견입니까.
당신은 수릉의 젊은이가 한단으로 가서 걸음걸이를 배웠던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그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우기도 전에 옛날의 걸음걸이마져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어서 돌아왔다 합니다. 지금 당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당신의 옛 마음마저 잊을 것이고, 당신의 옛 직업도 잃을 것입니다.”
공손룡은 이 말을 듣자 입은 열린 채 닫혀지지 않았고, 혀는 말려 올라간 채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돌려 달아나고 말았다.
公孫龍問於魏牟曰:「龍少學先王之道, 長而明仁義之行., 合同異, 離堅白然不然, 可不可., 困百家之知, 窮衆口之辯., 吾自以爲至達已. 今吾聞莊子之言, 汒焉異之. 不知論之不及與, 知之弗若與? 今吾无所開吾喙, 敢問其方.」
公子牟隱机大息, 仰天而笑曰:「子獨不聞夫埳井之䵷乎? 謂東海之鱉曰:“吾樂與! 出跳梁乎井幹之上, 入休乎缺甃之崖., 赴水則接腋持頤, 蹶泥則沒足滅跗., 還視虷蟹與科斗, 莫吾能若也. 且夫擅一壑之水, 而跨跱埳井之樂, 此亦至矣, 夫子奚不時來入觀乎!” 東海之鱉左足未入, 而右膝已縶矣. 於是逡巡而却, 告之海曰:“夫千里之遠, 不足以擧其大., 千仞之高, 不足以極其深. 禹之時十年九潦, 而水弗爲加益., 湯之時八年七旱, 而崖不爲加損. 夫不爲頃久推移, 不以多少進退者, 此亦東海之大樂也.” 於是埳井之䵷聞之, 適適然驚, 規規然自失也.
「且夫知不知是非之竟, 而猶欲觀於莊子之言, 是猶使蚊虻負山, 商蚷馳河也, 必不勝任矣, 且夫知不知論極妙之言而自適一時之利者, 是非埳井之䵷與? 且彼方跐黃泉而登大皇, 无南无北, 奭然四解, 淪於不測., 无東无西, 始於玄冥, 反於大通. 子乃規規然而求之以察, 索之以辯, 是直用管窺天, 用錐指地也, 不亦小乎! 子往矣! 且子獨不聞夫壽陵餘子之學行於邯鄲與? 未得國能, 又失其故行矣, 直匍匐而歸耳. 今子不去, 將忘子之故, 失子之業.」
公孫龍口呿而不合, 舌擧而不下, 乃逸而走.
5.
장자가 복수 근처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을 때, 초나라 임금이 대부 두 사람을 그에게 보내어 자신의 뜻을 전하게 했다.
“번거롭겠지만 나라의 정치를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듣건대,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삼천 년이나 되었다 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서 상자에 넣어 묘당 위에 그것을 보관한다 합니다. 그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아 존귀하게 되고 싶겠습니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겠습니까?”
두 대부가 대답했다.
“그야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려 할 것입니다.”
장자가 말했다.
“그러면 돌아가시오. 나는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며 살려는 것입니다.”
莊子釣於濮水, , 楚王使大夫二人往先焉, 曰:「願以境內累矣!」
莊子持竿不顧, 曰:「吾聞楚有神龜, 死已三千歲矣, 王以巾笥而藏之廟堂之上. 此龜者, 寧其死爲留骨而貴乎? 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
二大夫曰:「寧生而曳尾塗中.」
莊子曰:「往矣! 吾將曳尾於塗中.」
6.
혜자가 양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장자가 그를 만나러 갔다.
어떤 사람이 혜자에게
“장자가 오는 것은 선생님 대신 이 나라 재상이 되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니, 혜자는 놀라 사람들을 시켜 사흘 낮 사흘 밤을 두고 장자의 행방을 찾게 했다.
그 뒤에 장자가 찾아와 만나서 얘기했다.
“남방에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을 원추라 부른다. 당신도 그 새를 알고 있는가? 원추라는 새는 남해에서 출발하면 북해까지 날아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단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솔개가 썩은 쥐를 갖고 있다가, 원추가 날아오자 자기 것을 빼앗을까봐 깩 소리를 내며 놀랐다고 한다. 지금 당신은 양나라 때문에 나를 보고 깩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인가?”
惠子相梁, 莊子往見之. 或謂惠子曰:「莊子來, 欲代子相.」 於是惠子恐, 搜於國中三日三夜.
莊子往見之, 曰:「南方有鳥, 其名爲鵷鶵, 子知之乎? 夫鵷鶵, 發於南海而飛於北海,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 於是鴟得腐鼠, 鵷鶵過之, 仰而視之曰:“嚇!” 今子欲以子之梁國而嚇我邪?」
7.
장자가 혜자와 더불어 호수가 둑을 거닐고 있었다.
그 때 장자가 말했다.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군. 물고기는 즐거울 거야.”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것을 아는가?”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라서 본시 자네를 알지 못하네. 자네도 본시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틀림없네.”
장자가 말했다.
“얘기를 그 근본으로 되돌려 보세. 자네가 내게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고 물었던 것은, 이미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네. 그래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인데, 나는 호수가에서 물고기와 일체가 되어 그들의 즐거움을 알고 있었던 것이네.”
莊子與惠子遊於濠梁之上. 莊子曰:「儵魚出遊從容, 是魚之樂也.」
惠子曰:「子非魚, 安知魚之樂?」
莊子曰:「子非我, 安知我不知魚之樂?」
惠子曰:「我非子, 固不知子矣., 子固非魚也, 子之不知魚之樂, 全矣.」
莊子曰:「請循其本. 子曰 “汝安知魚樂” 云者, 旣已知吾知之而問我, 我知之濠上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