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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미·소,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Ⅰ) 체결
← 닉슨(왼쪽)과 브레즈네프가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SALT 1에 조인했다.
1969년 11월 17일 제럴드 스미스 군축 국장을 앞세운 4명의 미국 대표와 블라디미르 세미오노프를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소련대표가 헬싱키 교외 스몰라궁에 마주 앉았다. 스미스는 "책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전세계의 관심사"라고 운을 뗐고, 세미오노프는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짧게 답했다. 그리고, 앞으로 협상을 해나갈 비밀 장소를 정하는 것으로 첫 회의를 시작했다.
후에 SALT 1, 즉 전략무기제한협정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이란 이름으로 조인되는 미소 핵군축 회담의 시작이었다. 두 나라를 협상 테이블에 앉힌 것은 핵무기 경쟁에 대한 공포심이었지만, 그 의도와 관계없이 핵으로 인한 인류의 멸망 가능성에 제동을 거는 사건이기도 했다.
SALT 1의 제동이 처음은 아니었다. 1963년에 대기권 핵실험금지조약이 체결됐고, 5년후엔 핵무기확산금지조약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핵실험 금지조약은 실험장소를 지하로 한정시켜 낙진의 위험을 최소화하자는 정도였고, 핵 확산금지조약은 핵무기 보유국을 동결하자는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핵확산금지조약은 이미 핵을 가진 나라만 살찌운다는 의미에서 불평등조약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려웠다. 그런 전례를 뒤로 하고, 힘겹게 마련된 두 나라의 협상은 무려 2년 6개월을 끌었다. 434회를 기록한 만남은 순조롭지 않았지만 난항끝에 1972년 5월 26일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모스크바에서 만나 요격미사일(ABM) 체제에 관한 조약과 공격용 전략무기 제한에 관한 두가지 주요 협정에 서명하면서 SALT 1이 체결됐다.
[1912년] 시인 김용호(金容浩) 출생
1912. 5. 26 경남 마산∼1973. 5. 14 서울.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어두운 시대상과 압박받는 민족의 현실을 읊다가 차츰 서민생활을 노래했다. 본관은 김해. 아명은 만석(萬石), 호는 학산(鶴山)·야돈(野豚)·추강(秋江).
아버지 치완(致琓)과 어머니 박경포(朴敬布) 사이의 3남매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금성철공소·원동상회 등에서 일하다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8년 〈맥〉 동인으로 활동했다. 1941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고, 다음해 신문고등연구과를 수료한 후 귀국했다. 선만(鮮滿)경제통신사 기자로 있으면서 시집 〈부동항〉을 펴내려 했으나 일제에 의해 압수되었다. 예술신문사 주간 등을 거쳐 건국대학교 강사, 단국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역임했다. 8·15해방 후 한때 좌익문학단체에 관계했으나, 그후 한국자유문학가협회에 가담해 기관지인 〈자유문학〉 주간을 맡아보았다. 1962년에는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을 지냈다. 〈동아일보〉에 시 〈선언〉(1935.10. 14)을 발표한 데 이어 노자영이 주재로 있는 〈신인문학〉에 〈첫여름밤 귀를 기울이다〉·〈쓸쓸하던 그날〉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41년 도쿄에서 첫시집 〈향연〉을 펴냈다. 시는 재치로 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1938년에 발표한 장시 〈낙동강〉(사해공론, 1938. 9)에서 낙동강을 배경으로 주민들의 생활상과 굴욕적인 민족사적 상황에 대한 분노를 노래했다.
시집 〈해마다 피는 꽃〉(1948)·〈푸른 별〉(1952)·〈남해찬가〉(1952)·〈날개〉(1956) 등을 통해 향수를 바탕으로 한 회고와 순수 서정을 노래하고, 6·25전쟁의 충격과 구국적 의지를 읊었다. 1960년대 이후로는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읊은 시집 〈의상세례 衣裳洗禮〉(1962) 등을 펴냈다. 1956년 아세아자유문학상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52년] 국회의원 48명 탄 통근버스 통째로 연행
← 헌병대에 강제로 끌려간 국회의원 통근버스
1952년, 피란지 부산은 집권연장을 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무리수로 연일 시끄러웠다. 직선제 개헌을 추진, 연임을 노렸지만 야당의 반대로 계획이 차질을 빚자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비상수단을 강구하던 이승만에게 1952년 4월과 5월에 치러진 지방의원 선거에서의 승리는 낭보였다.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등 정체 모를 집단들이 연일 반국회 시위를 벌였다. 관제 데모대가 우마차를 타고 상경했다 해서 생겨난 해학성 조어 ‘우의·마의’도 이때 유행했다.
그러던 1952년 오늘, 우리 헌정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새벽에 정헌주·이석기 등 야당 의원이 구속된 데 이어 48명의 국회의원을 태운 전용버스가 통째로 헌병대에 끌려간 것이다. 곽상훈·서범석 등 야당 의원들이 국제공산주의와 결탁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결국 발췌개헌으로 직선제는 관철됐지만 일각에선 ‘민주주의의 장송’이란 탄식을 들었다./조선
[2005년] 패션기업 ㈜신원의 개성공장 준공기념 패션쇼
← 개성공단 시범지구에서 2005년 5월 26일 오후 열린 (주)신원의 개성공장 준공기념 피복전시회에 참가한 김태희씨가 봄 신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패션그룹 (주)신원이 2005년 5월 26일 남 북 경협사업의 상징인 개성공단에서 `개성공장 준공 기념 패션쇼`를 개최했다.
신원은 2005년 1월 초 개성공장을 준공해 2월 말까지 시범 가동을 끝내고 3월 초부터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해 개성산 의류제품을 전국 신원 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이번 패션쇼에서는 여성복 브랜드 베스띠벨리, 씨, 비키 등과 남성복 브랜드 지이크, 캐주얼 브랜드 쿨하스 등 총 5개 브랜드 100여 제품을 소개하며 신원 의 2005년 봄~여름 제품과 개성에서 생산된 의류제품을 함께 선보였다.
이날 패션쇼를 참관하기 위해 남측에서는 박성철 신원 회장을 비롯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 이수영 한국경총 회장, 김용구 중소 기협중앙회장 등 각계 인사 500여 명이 26일 오전 9시 30분께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개성으로 들어갔다. 또 신세대 스타 김태희 씨도 씨(SI)의 전속모델 자격으로 이날 패션쇼 무대에 섰다.이번 신원 공장 패션쇼는 북측에서도 상당히 높은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성철 신원 회장은 "90년대 북한에서 임가공으로 의류생산을 해 봤을 때 북한 노동자들의 손재주가 뛰어나 육로만 트인다면 북한에서 생산하는 것이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원은 앞으로 개성공단에서 월 2만피스 이상의 제품을 생산할 예정이며 총 생산량의15~20%를 개성공단에서 생산할 계획이다./조선
[2002년] 임권택 감독, 영화 ‘취화선’으로 제5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수상
← 제55회 칸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임권택(오른쪽) 감독과 취화선의 주연배우 최민식(왼쪽)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2년 5월 26일 제5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의 임권택 감독이 영화 ‘취화선’으로 미국의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과 공동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주요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한국 영화나 한국인 감독·배우가 상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취화선’은 조선 후기 유명 화가였던 오원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66세의 감독은 시상식 단상에 올라가 예의 ‘느릿느릿 분명한’ 어투로 1600여명의 전세계 영화계 VIP 앞에서 소감을 말했다. "이 상은, 남북한을 통틀어 우리 한민족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 시절 끼니를 해결하려고 충무로에 들어갔던 청년이 세계가 인정하는 영화 거장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의 40년 영화 인생은 한편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1936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임권택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얼룩졌다. 부친의 좌익 활동 가담이 빚어낸 그늘이 소년 임권택을 고통스럽게 했다. 학력도 중졸에 그쳤다. 그러던 그가 1955년경 충무로에 처음 뛰어든 것은 "영화판 일을 하면 밥을 굶지 않을 수 있다"는 주변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촬영 현장에 들어가서 처음 맡은 임권택의 역할은 소품 조수. 식사 때가 되면 배우들이나 주요 스태프들 밥을 나르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1962년 임권택은 ‘두만강아 잘있거라’로 데뷔, 1970년대까지 무려 60여편의 필름들을 정신없이 찍어댔지만 40대 들어 임권택은 "이 ‘싸구려 영화’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싶다"는 자각을 한다.
임권택이 국제 영화제의 문을 노크하기 시작한 것은 1981년 ‘만다라’로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면서부터. 그의 영화는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씨받이’)을 시발로 국제영화제 수상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으나, 감독은 1990년대 초반부터 ‘세계 최고’ 영화제인 칸을 겨냥했다. 1992년 ‘서편제’부터 ‘축제’ ‘춘향뎐’ 그리고 ‘취화선’에 이르는 영화들은 아예 5월 칸 영화제 시기에 맞춰 매년 4월 안팎에 완성했다. 그리고 임권택은 ‘3전4기’ 끝에 과녁을 맞혔다./조선
[1907년] 영화배우 존 웨인 출생
← 웨인, 〈리오 브라보〉(1959)에서
별칭은 Duke. 본명은 Marion Michael Morrison.
1907. 5. 26 미국 아이오와 윈터셋~1979. 6. 11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건장하고 과묵한 카우보이나 보안관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배우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의 미식축구 선수였을 때 여름방학을 이용, 폭스영화사에서 소품담당자로 일하던 중 존 포드 감독을 알게 되었고, 1928년 포드 감독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은 라울 월시 감독의 〈빅 트레일 The Big Trail〉(1930)이었으며 그뒤 8년간 8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들 영화는 제작비를 적게 들인 하찮은 작품들이었다. 그가 진정한 스타 위치에 오른 것은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 Stagecoach〉(1939)에서 링고 키드 역을 맡고 나서부터였다. 이 영화로 미국 영화계에서 그의 지위는 확립되었으며 해마다 성공을 거듭했다. 그의 많은 출연작 가운데에 존 포드가 감독한 〈조용한 사나이 The Quiet Man〉(1952)·〈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1962)에서 맡은 역할과 하워드 혹스가 감독한 〈붉은 강 Red River〉(1948)·〈리오 브라보 Rio Bravo〉(1959) 등에서 맡은 역할이 가장 뛰어나다. 〈진정한 용기 True Grit〉(1969)에서 주정뱅이 애꾸눈 보안관 루스터 코그번을 연기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웨인은 40년간 영화계에서 활동하면서 25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영화계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배우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가 죽은 뒤 그를 기리고자 미국의회 자유의 메달이 주조되었다.
[1602년] 프랑스의 바로크 시대 초상화가 샹파뉴 출생
← 샹파뉴가 그린 유화 〈1662년의 봉헌물〉(1662), 파리에 있는 Musee du Louvre 소장
브뤼셀에서 수업받은 그는 1621년에 파리에 도착하여 고전적인 바로크 화가 니콜라 푸생과 함께 니콜라 뒤셴의 감독하에 뤽상부르 궁전을 장식하는 일에 고용되었다. 그는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와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원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들을 위해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렸다. 마리 드 메디시스의 궁정화가로 임명된 1628년에 뒤셴의 직책을 계승했다. 그는 1653년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를 거친 후 원장이 되었으며, 루아얄 궁과 교회를 위해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리슐리외를 위해 왕궁의 한 갤러리를 장식했으며 유력한 프랑스 저명인사였던 그의 초상화를 제작했다(〈리슐리외 추기경〉, 1635경, 루브르 박물관). 그의 가장 감동적인 역작은 당대의 저명인사들을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하게 심리를 묘사한 초상화들이다. 플랑드르·프랑스·이탈리아 풍의 요소들이 혼합된 그의 작품은 화려한 색채 감각과 기념비적인 표현의 인물상, 절제된 구성이 특징이다. 그의 초상화 양식은 루벤스와 반 다이크의 영향을 보여준다. 1643년에 그는 금욕주의 종파인 얀센주의에 몰두하여 이전의 바로크 기법을 거부하게 되었다. 그림은 매우 간결해졌으며 검은 옷의 모델이 종종 등장하는 초상화는 서민적인 감수성과 그들에 대한 이해를 표현했다. 후기의 걸작 중에 〈1662년의 봉헌물 Ex Voto de 1662〉(1662, 루브르 박물관)이 있는데 이는 포르 루아얄의 얀센주의 수녀원에서 수녀생활을 하던 딸의 기적적인 치유를 묘사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예술론에서 소묘를 강조했는데, 이것이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를 떠들썩하게 만든 선과 색에 관한 논쟁의 시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76년]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 사망
←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실존주의의 선구자인 세계적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1976년 5월 26일 서독 프라이부르크 그의 자택에서 서거했다. 향년 86세였다. 하이데거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중의 한 사람이었다.
작은 키에 콧수염을 기른 하이데거는 장기간의 나치당원 경력으로 인해 지적명성에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가장 존경받는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꼽혀왔다. 이러한 가운데 하이데거는 장 폴 샤르트르와 같은 다른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889년 9월 26일 남부 독일 바덴지방의 메스키르히 시에서 태어난 하이데거는 대학 시절 로마 가톨릭에 심취했으나 곧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선언, 역사와 철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첫 번째 철학저술은 모든 전통적인 철학체계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했다.
프라이부르크대학 교수를 지낸 그는 1927년 현상학의 기관지 ‘존재와 시간’을 발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일약 독일철학계의 중진이 되었다. 그는 리케르트의 가치철학, 후설의 현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등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철학을 완성했다. 그는 그의 철학을 ‘기초적 존재론’이라고 불렀다. 그는 해석학적, 현상학적 방법을 가지고 그것의 본질을 ‘우려’와 ‘시간’에 환원시켰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존재와 시간(1927)’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1929)’ ‘니체(1961)’ 등이 있다.
[1999년] 과학실험위성 ‘우리별3호’, 인도 샤르기지에서 발사
소형 과학실험위성 '우리별3호'가 1999년 5월26일 인도 남동부의 하늘을 가르며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우리별3호는 인도 FSLV 4단 로켓에 실려 인도 해양과 해양관측위성 및 독일 과학실험위성과 함께 발사돼 발사후 17분40초만에 로켓에서 분리됐다. 우리별3호는 92년과 93년에 발사한 우리별1호-2호의 개발경험을 바탕으로 설계에서부터 주요 시스템제작 조립에 이르기까지 외국기관의 도움없이 거의 100% 우리 손으로 설계하고 제작, 시험을 거쳤다. 우리별3호는 무게 110kg, 크기 60 X 50 X 85cm의 소형과학위성으로 하루에 약 14-5번 지구를 선회했다. 위성내에는 지상 15m까지 구분할 수 있는 CCD카메라, 고에너지 입자검출기, 반도체 방사능영향 측정기, 고해상도 지자기감지기 등을 탑재했다. 우리별 3호 개발에는 95년부터 과학기술부-정보통신부-과학재단의 지원으로 약 80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1993년] 한국-에리트레아 국교 수립
[1877년] 미국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출생
←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원형극장에서 춤추는 덩컨, Raymond Duncan이 찍은 사진(1903)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예술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석가모니가 그러했듯이 사랑하는 것이다." - 이사도라 덩컨
덩컨은 고전 발레의 엄격함을 거부하고 현대무용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미국의 무용가이다. 미국에서 처음 공연했을 때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영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투명한 의상을 입고 맨발로 춤을 추는 자연스런 춤사위로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무용만큼이나 자유분방한 사생활로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녀는 자연스런 움직임에서 우러나는 우아함을 중시함으로써 엄격한 형식과 현란하지만 공허한 기술적 묘기의 나열에 의존하던 춤을 해방시켰다. 그녀의 영향을 받아 마리 비그만과 마사 그레이엄 등이 현대무용을 더 높은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862년] 삼정이정청 설치
← 임술농민항쟁을 기록한 <임술록>,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862년(철종 13년) 5월 26일 전국에서 발생한 농민봉기 임술농민항쟁에 대한 대책으로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다.
조선 정부는 농민항쟁의 기본 원인을 삼정문란으로 파악해 진주 안핵사 박규수의 건의에 따라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전결세·군역·환곡 등 삼정의 개혁을 통해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여러 종류의 개혁 방안이 삼정이정청에 접수되어 대신들의 검토가 진행되었고, 이를 토대로 <삼정이정절목 三政釐整節目>이 완성되었다.
삼정이정청이 제시한 개혁안인 삼정이정책은 이후 조선 왕조의 세제개혁안으로 자리잡고 대원군 정권하에서 일정하게 시행되었다./브리태니커
[1994년] 패륜아 박한상 사건
← 살인 방화 혐의로 구속된 박한상이 1994년 11월 4일 서울 지방법원에 선고공판을 받으러 입정하고 있다.
1994년 5월 26일 1백억원대의 아버지 재산을 노려 부모를 살해한 패륜적 범죄가 발생했다. 한약상 박순태씨 부부는 각각 온몸을 흉기에 50곳, 40곳 난자해 살해된 뒤 불에 타 숨진 채로 발견됐다. 사건조사결과 박씨의 장남 한상군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박은 1993년 8월부터 미국에 어학연수를 갔으나 라스베이가스에서 포커도박으로 생활비, 승용차구입비 등 2만3천달러를 탕진한 뒤 아버지에게 심한 꾸중과 함께 유학포기를 종용받고 1백억원대의 아버지 재산을 상속받을 욕심으로 범행을 결심했다고 경찰에서 말했다. 경찰조사결과 박은 어머니를 먼저 흉기로 찔러 쓰러뜨리고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의 얼굴과 가슴 등을 마구 찔러 살해한 뒤 어머니를 난자해 사망여부를 재확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박은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체계적인 범행수법을 계획, 서울 세운상가에서 등산용칼을 2만원에 구입하고 주유소에서 휘발유 8ℓ를 사는 등 사전에 범행을 치밀히 준비했다. 박은 범행 후 화장실에서 몸을 씻고 차고에 숨겨둔 휘발유를 가져와 부모방에 뿌린 뒤 범행에 사용한 등산용 칼과 휘발유통, 운동화 1켤레 등 증거물을 아버지 승용차에 싣고 집에서 5백m 떨어진 공터에 가서 버리고 돌아와 집에 불을 질렀다.
경찰은 "박이 조카를 화재현장에 남겨둔 채 도망쳐 나온데다 당시 박의 머리카락에 피가 묻어 있었다는 간호사의 진술 등에 따라 박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집중수사를 벌인끝에 범행을 자백받았다"고 말했다./조선
[1992년] 김대중 민주당 공동대표, 제14대 대통령후보로 선출
김대중(金大中, 1926~ )은 1987년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당시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1년] 페르시아만 협력협의회 창설(GCC)
‘페르시아만안 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 GCC)'는 1981년 5월에 페르시아 만안의 6개 아랍산유국이 역내(域內)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결성한 지역협력기구로 '걸프협력회의'라고도 한다. 1979년 2월 이란혁명으로 인한 왕정붕괴,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980년 9월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전쟁 발발 등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걸프만 주변에서 발생한 정치적 불안에 대한 공동대응책을 모색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카타르·오만·바레인 등 6개국 정상들이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모여서 결성한 단체이다. 상호간의 경제 및 안전보장의 협력과 치안·국방면에서 결속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6개국은 석유의 생산·수출국일 뿐만 아니라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며 세습왕정체제를 유지하는 동일 민족국가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지리적으로도 인접해 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를 적대시하는 이란의 반발이 심해지자 동맹국간의 보조가 흐트러져, 1982년 11월의 제3차 정상회담에서는 경제통합협정만을 조인하고 집단안전보장에 관한 결정은 유보하였다. 1983년 3월부터는 역내의 관세장벽 철폐, 여행제한의 해제 등을 실시하고 있다.
6개국은 해마다 각국을 돌면서 정상회담을 개최하는데, 결성 이후 10년 동안 활동의 중심은 정치·군사적인 면보다는 경제협력에 있었다. 그러나 1991년의 걸프전쟁을 계기로 공동방위력의 증강 등 정치·군사적 협력에도 무게를 두고 있다.
[1966년] 가이아나, 영국으로부터 독립
1838~1917년에 인도인(人)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이 설탕 생산을 위해 이입(移入)되었는데, 현재의 복잡한 인종 구성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영국은 1928년 선거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단원제 의회를 두고, 점차적으로 자치정부를 육성하였다. 1953년 헌법으로 자치정부가 약속되었으나, 선거 결과 체디 자간(인도계)의 사회주의 정당이 압승을 거두자, 영국은 10월에 군함을 파견하여 헌법을 정지시켰다. 그후, 인도계 주민과 아프리카계 주민 사이에 인종적 대립이 격화되었다.
1961년 새 헌법에 따른 선거에서 자간의 인민진보당이 승리하여 자간이 자치정부의 수상이 되었으나, 1962년에 아프리카계 주민에 의한 폭동 반란이 일어나서, 수도에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1964년에 다시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포브스 버남(아프리카계)이 영도하는 인민민족당과 혼혈인의 정당인 통일세력이 연립하여, 버남이 총리가 되었다. 1966년 5월에 영국령 기아나는 ‘가이아나’로 독립하였고, 1970년 2월에 공화제로 바뀌었다.
[1961년] 한국군의 작전권 유엔군에 복귀
1961년 오늘, 5·16군사정변으로 유엔군에서 이탈됐던 우리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에 반환됐다.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서울에 들어와 쿠데타를 도운 제1해병여단 등을 본래 소재지로 복귀시켰다. 유엔군 총사령관은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위하는 데만 국군 작전 통제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6.25전쟁 기간에 유엔군사령부가 갖고 있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된 후에는 한.미 간에 '합의 의사록'을 체결하면서 '작전지휘권'에서 '작전통제권'으로 명칭을 바꾸고 이를 유엔군사령부가 계속 행사해 왔다.
[1898년] 군산, 청진, 마산항 개항 결정
일본이 마산포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은 처절할 정도로 집요했다. 마산 개항 이전에 부산(1876년), 원산(1879년), 인천(1882년), 목포(1879년) 등이 개항되고 1899년에는 군산, 성진과 함께 마산이 개항된다. 마산포의 개항은 1898년 5월 26일 열린 의정부 회의에서 이루어진다. 고종의 지시에 의해 외부대신 박병목이 청원한 '성진, 군산, 마산 3구 개항 및 평양을 개시'한다는 안은 찬성 7표와 반대 3표로 통과됨으로써 가결된다. 광무 3년(1899) 5월 1일 마산포는 개항장으로 발족하고, 마산포의 개항업무를 담당할 관청인 '창원 감리서(1898년 현재 남성동 제일은행 건물 자리)'가 설치되고 창원 부윤이었던 안길수가 감리업무를 겸임했다. 개항이 되면 외국인이 거주하며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치외법권지대인 조계지가 필요했다. 창원군 외서면의 신월리·월영리 2개 지역의 해안 약 13만여평이 외국인 거류지, 즉 조계지로 확정되었다. 조계지가 확정되자 각국 공동조계의 획정을 내용으로 하는 조계장정을 조인했다. 조계장정에는 조계지 주위 10여리를 개방하여 매매양도가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마산포 조계장정은 다른 개항장과는 달리 영사관이 보유할 수 있는 부지면적은 최대 4500평으로 제한했지만, 일본은 이 조항을 무시했다. 러시아도 마산포를 조차해 러시아의 해군기지를 마련할 속셈으로 토지 매입에 적극 나섰다. 일본과 러시아의 마산포 땅 매수 경쟁은 치열했다. 이보다 늦게 영국은 1만2000㎡에 이르는 부지를 매입하기도 해 마산포는 열강들의 토지 매입의 각축장이 되었다. /Google
[1822] 프랑스 작가 에드몽 콩쿠르(콩쿠르형제중 형) 출생
← Edmond (left) with his brother Jules. Photographed by Félix Nadar
1822. 5. 26 ~ 1896. 7. 16
형 에드몽(Edmond de Goncourt, 1822∼1896), 동생 쥘(Jules de Goncourt, 1830∼1870). 당시의 명문 출생으로 형 에드몽은 내향적인 공상가였고, 동생 쥘은 정열적인 활동가였는데, 두 사람 모두 병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자부하였다. 이 형제는 동생이 죽을 때까지 합작(合作)의 형식으로 작품을 썼는데, 주로 형이 작품을 구상하고 동생이 문체를 다듬었다. 소설 《18××년에》(1851)가 처녀작이며, 처음에는 프랑스 18세기의 사회·여성·미술에 대해서 연구하여 《대혁명기의 프랑스 사회사》(1854) 《18세기의 여성》(1862) 《18세기의 미술》(1859∼1875) 등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역사가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소설가는 현재를 이야기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정밀한 관찰기록에 입각한 소설을 잇달아 써서 《샤를 두마이》(1860) 《피로멘 자매》(1861) 《르네 모프랭》(1864) 《제르미니 라세르퇴 Germinie Lacerteux》(1865) 《마네트 살로몽 Manette Salomon》(1867) 《제르베제 부인》(1869)을 발표하였다. 그들의 작품에는 급격히 발전한 물질문명의 소산으로서 얼마간 변질적인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심리분석보다는 병리학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작품은 자연주의의 선구로 인정되고 있지만, 한편 ‘예술적 문체’라고 하여 특이하고 정교한 문체를 이루어, 예민한 감각만이 알아챌 수 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조성함으로써 인상파풍의 시각적인 효과를 노렸다.
동생이 죽은 후로는 형이 단독으로 집필을 계속하여 《매춘부 엘리자》(1877) 《장가노 형제》(1879) 《라 포스탱》(1882) 등의 소설을 썼다. 동생과 함께 썼던 《공쿠르의 일기》(9권, 1887∼1896)는 19세기 후반기의 풍속과 문단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며, 일기문학의 걸작이다. ‘공쿠르상(賞)’은 에드몽의 유언에 의한 것이며, 그들의 유산을 기금으로 1903년에 설립되었다. /naver
그밖에
2005 파크랜드배 2005 부산 국제청소년축구대회 한국-콜롬비아 경기
2005 프로농구 자유계약선수(FA) 현주엽, 창원 LG세이커스와 입단 계약
2005 신기성, 프로농구 KTF 입단
2005 올림픽공원 제2경기장에서 열린 핸드볼세계최강전 한국-덴마크 친선경기
2001 아프리카 연합(AU) 공식 출범
1999 제1회 조선일보 인터넷대상 시상
1999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현 국가원수 처음으로 전범협의 기소
1991 오스트리아 라운다 항공 소속 보잉 767-300기 방콩부근 추락. 223명 사망
1987 이한기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6 파리 감옥서 헬기를 이용한 탈옥사건 발생
1983 프랑스 남태평양 무루로아제도서 사상최대 지하핵실험
1983 일본에 해중지진 발생 102명 사망 실종
1982 소설가 유주현 사망
1981 한국-싱가포르 해운협정 서명
1979 한국 판소리 예능보유자 박녹주 사망
1978 여천 석유화학공단 준공
1976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 사망
1972 탄도탄 요격미사일 조약(ABM) 조인
1969 볼리비아-콜롬비아-에쿠아도르-페루-칠레 5개국 안데스통합협정에 조인
1964 서독 루루지방-프랑스 로렌지방 연결하는 모젤운하 개통
1955 서울발레단 창립공연
1955 영국 총선서 보수당 승리
1952 미국-영국-프랑스-서독간에 평화조약 조인
1946 정부 대외무역에 허가제 채택
1942 영국-소련 상호협조조약 체결
1940 영국군, 덩케르크에서 철수 시작
1919 33인중의 한사람인 양한묵,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
1911 독일, 알자스·로렌을 한 주로 공인
1910 멕시코의 대통령(1958-64) 로페스 마테오스 출생
1908 이란(페르시아)사막서 대유전 발견. 최초의 중동 석유 개발
1905 마산-삼량진간 철도 개통
1901 빈에서 제2회 국제자동차쇼 개막
1815 가이슬러 펌프와 가이슬러 관을 발명한 유리불기공 가이슬러 출생
1478 나약하고 우유부단했던 교황 클레멘스 7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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