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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것이 세월뿐이랴] 01
$#1. 아버지의 집, 마당 (오전)
낡았지만 정취있는 옛 한옥 처마끝, 수돗가, 마루 곳곳에 초겨울의 햇살이 부드럽게 퍼진다.
마당 한켠에 있는 얕은 등받이 의자에 앉아있는 아버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연탄화덕 위에는 들통에 물이 끓고 있고 그 뒤쪽에 이발사, 이발을 준비하고 있다. 길다란 나무의자 위에 놓인 이발도구.
$#1-1. 마루
대여섯개의 통장, 바닥에 퍼져있고 외출복 차림의 어머니, 통장 하나를 손에 들고 전화하고 있다.
어머니 : 마산댁 정말 이러기야?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구, 넣는다구 했으면 넣어야지!
(사이) 그래서? 요새 시장에 2부가 어딨어? (사이) 좋아, 그래. 맘대루 해봐.
마당에서 이발사, 어머니 악쓰는 소리에 마루쪽을 한번 본다.
어머니 : 잔말 말구 12시까지 넣어. 안 그러면 나 저녁이라두 당장 그집 애들 공부방에 드러누울 테니까!
거칠게 수화기 내려놓는다.
$#1-2. 마당
아버지, 무심히 담배연기를 내뱉다가 쿨럭이고 기침을 두어번 한다. 이발사 (흰색 이발 가운을 들고 아버지 뒤에 서며) 오래 가시네요. 아버지 (재떨이에 담배를 부벼 끄며) 그러게요. (다시 한번 기침) 이발사 (가운을 아버지의 어깨에 받쳐준다) 다음 이발은 마루에서 하 셔야겠습니다. 한 해가 참 빠르지요? 아버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발사, 빗을 들어 아버지의 머리를 고르게 정리하기 시작한다. 이발사, 가위를 들다 문득 열린 마루문을 통해 뒷 마당을 본다. 이발사의 시선에 보이는 어머니. 이발사 사모님이 곱게 차려 입으셨네요. (가위로 머리 자르며) 두분 어디 좋은데 가시나 봅니다. 아버지 ... $#2. 장독대 뒷마당 한편에 있는 장독대. 크고 작은, 까만 오지 장독들이 올망졸망 놓여있다. 외출복 차림의 어머니, 장독 뚜껑을 연다. 햇장을 담은 커다란 장독에 메주, 붉은 고추, 숯이 띄워져있다. 어머니, 장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다, 문득 마루문 안으로 이발하는 아버지 를 본다. 어머니 (혼잣말로 구시렁) 헤픈 기집 쌀독 들어먹구, 통 큰 사내 집안 말아먹는다더니. 코 옆에다 이발솔 놔두구 가당찮게 출장이발 이 다 뭐야? (손목시계보고) 시간 다 됐구만, 세상에 바쁜 게 없지. 바쁜 게 없어. $#3. 이혼법정 판사(30대 초반) 앉아있고, 측면에 주사(40대), 판사 맞은편에 아버지와 어머니, 앉아있다. 판사 (서류 들춰보며, 계속 거침없는 말투다) 서른 세해나 같이 사 셨는데, 이제 와서 이혼은 왜 하시려구요? 아버지 (머뭇거리다) 성격차입니다. 어머니 (혼잣말로) 성격차! 하이구! 고상도 하시네. (비웃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본다) 판사 성격차이 없는 부부가 있나요. 아버지 ... 판사 열한살 된 아이가 있네요? 양육 문제는 합의하셨습니까? 아버지 예. 판사 (고개 끄덕이고) 의사 확인하겠습니다. 이명순씨 이혼하시겠습 니까? (하는데) 어머니의 호출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판사와 주사,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 가방에서 부시럭거리며 호출기를 꺼내 끈다. 어머니 (전혀 눈치 보지 않고 투덜거리는) 이놈에 삐삐, 왜 하필 이때 울려. (판사에게) 뭐라 그러셨어요? 판사 (못마땅하다는 듯 보고) 이혼하시겠냐구요? 어머니 예. 그럼요. 판사 박민식씨는요? 아버지 ...(착잡한 표정으로 아내를 본다) 판사 두 분 합의하신 거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잘 생각 해서 대답하십시오. 이혼하시겠습니까? 아버지 ...(망설이는) 어머니 정희 아버지! 아버지 (고개 들어서 판사를 무심한 눈으로 본다) 예. $#4. 커피숍 두 사람 앞에 차 놓여져 있고, 어머니, 손가방에서 통장 2개를 꺼내 아버지 앞 에 밀어놓는다. 어머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건 정민이 결혼시키려고 든 적금이 구. 이건 당신 이름으로 부운 주택부금이에요. 아버지 ... 어머니 집은 복덕방에 내놨어요. 내가 벌어 샀고, 내 명의로 된 집이 니까, 불만 없을 거라 생각해요. 집 나가기 전에 어디 전세라 도 얻으세요. 난 당분간 큰앤 집에 가 있을 테니. 아버지 ...당신이 넣어두게. 어머니 내가 뭐한다구 당신 통장을 가져요? 아버지 위자료라 여기게. 어머니 위자료? 하이구. 앓느니 죽지. 당신 뒤치닥거리에 바친 내 평 생이 겨우 이거라구요? 싫어요. 아버지 (밀어준다) 그래도 자네가 간수하게. 그 동안 고생 많았네. 어머니 (통장을 손가방에 넣는다. 놀리듯) 고마워요. 내 자알 쓸게요. 아버지 ...(그 모습 보다가 말없이 일어선다) 있다 그리로 올텐가? 아버지, 어머니를 착잡한 표정으로 한번 보고, 돌아서 간다. 어머니,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흘겨보다. 버럭 소리 지른다. 어머니 난 안 가요! $#5. 아버지의 집, 골목+이발관 앞 가방을 맨 정수와 친구 사내아이 1, 2 걸어온다. 아이1 정수야, 너네 집에서 놀다 가도 돼? 정수 오늘은 안돼. 아이2 그럼, 우리 집에 가서 오락 할래? 새 게임기 샀다. 정수 (망설이다) 다음에. 안녕, 먼저 갈게. (손 흔들고 뛰어간다) 아이들, 다른 쪽으로 가고 정수, 이발관 앞을 지나친다. 이발사 늦었구나? 정수, 돌아보면 이발사다. 정수 (고개 숙여 인사하고) 청소 당번이에요. 이발사 (고개 끄덕하고) 그래. (시럽을 내민다) 자. 정수, 움직이면 정수 뭐예요? 할아버지. 이발사 부장님 기침이 심하시더구나. 내 먹어보니 다른 놈보다 이놈이 용하더라. 아버지 드려라. 정수 (받고) 고맙습니다. $#5-1. 아버지 집 전경 $#6. 마루 (저녁) 정수, 엎드려 책 읽고 정희, 커피 마시고 있다. 그 옆에 정민, 룩색에 옷을 챙기고 있다. 정희 그렇게 보면 눈 버려. 이제 그만 봐라. 해두 다 갔는데. 정숙 괜찮아. 정희 정수 너, 그러면 다신 책 안 사다 준다. 정수 알았어. (앉으며) 언니, 근데 원정인 왜 안 데려왔어? 정희 놀이방에서 놀아. (정민에게) 아버지가 나만 오라구 하시던데. 정민 무슨 일이지? 밖에서 우릴 다 부르시고... 혹시 오늘 엄마 아버 지, 결혼 기념일 아냐? 정희 얘는, 4월이지. 두 분 기념일은... 정민 언니, 오늘 모이는 거, 나 빠지면 안 될까? 애들 데리구 엠티 가야 되는데... 정희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부다. 좀 늦더라두 들렸다 가. 정민 (고개 끄덕이고 가방 챙기고) $#7. 중국집, 한방(저녁) 아버지, 앉아서 담배 피운다. 세 딸들 들어온다. 정민 저희 왔어요. 정희 아버지. 아버지 정희 왔구나. 앉어라. 정수, 아버지의 옆에 먼저 앉고, 정희, 정민 앉고. 아버지 김서방은 그래 출장에서 돌아왔냐? 정희 (표정 어두워진다) 아직요. 아버지 (고개 끄덕이고) 너나 없이 사는 게 힘들어서... 잘 해줘라. 남자는 집이 편해야 된다. 알았지? 정희 예. 문 열리고, 주인, 차 주전자를 들고 들어와, 따른다. 아버지 자, 다들 먹고 싶은 걸로 골라라. 정희 엄마 오시면 하죠? 아버지 네 어머닌 안 오실게다. (시간 경과) 푸짐하게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과 소주 한병. 정희, 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른다. 딸들, 젓가락 든다. 정민, 시계보다 초조한 듯 정민 아버지, 저 죄송한데요. 먼저 일어날게요. 엠티 가야 되서요. 아버지 조금 기다려라. 할 얘기가 있다. 정민 (시계 보다) 죄송해요. 학생들이 기다리거든요. (일어선다) 아버지 앉거라. 잠깐이면 된다. 정희 (정민에게) 얼른 앉아. 정민, 앉는데, 문 열리고 어머니, 들어온다. 정희 엄마, 못 오신다더니요? 어머니 그냥 왔다. (자리에 털썩 앉고) 아휴, 배 고프다. 점심부터 그 냥 쫄쫄 굶었네. (젓가락 들고 음식 먹기 시작한다) 아버지, 그런 어머니를 보다 자작해서 술 한잔을 마신다. 아버지 ...네 어머니와 헤어지기로 했다. 정희 (놀라고) 정민 엄마! 정수 (음식을 집다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치 살핀다) 어머니 갈라서기루 하긴, 뭘 갈라서기로 해요. (정희에게) 벌서 법원에 갔다 왔다. 정희 그게 무슨... 아버지 미안하다. 그렇게 됐구나. 큰애는 이제 애엄마구, 정민이도 그 렇고....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정희 (창백해진다) 정민 엄마! 아버지! 아무 말씀도 없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말이 없고) 어머니 그냥 그렇게들 알어. 엄마, 아버지 일에 니들이 미리 알아서 뭐 어쩌겠다구? 얘기 다 끝났거든 이거나 먹어. (하나 집어먹고) 그새 다 식었네. 어머니, 능청스레 음식을 먹는다. 아버지, 그런 어머니 보고. 세 자매, 굳은 표정으로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어머니 얼른 먹어. 음식 앞에 놓고 고사 지내? 정민, 무슨 말하려는데 정희, 가만 정민을 잡는다. 정희와 정민, 마지못해 저를 든다. 정수, 음식을 깨작거린다. 그런 딸들과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 위로, 정수NA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며 살겠냐구 결혼식에 가면, 주례 선 생님이 물어본다. 아빠랑 엄만 뭐라구 했을까? 싫다구, 나중에 헤어질 거라구 그렇게 대답하진 않았을 텐데... 어른들은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걸까... 오늘 짜장면은 정말 하나도 맛이 없다. $#8. 중국집 앞 (저녁) 아버지와 정희 세 자매, 착잡한 표정으로 서있고. 어머니, 남은 음식을 포장한 듯, 중국집 봉투를 들고 나온다. 아버지, 그런 어머니를 보고는 착잡한 듯 고개 돌리고. 부모의 모습을 보고있던 정민, 화난 듯 돌아선다. 아버지 (정민을 보고) 어머니 정민아! 정민 (들은 척도 않고 가고) 어머니 정민아! 정희 (어머니에게) 학교에서 어디 간데요. 정민이. 어머니 (정희 한번보고) 기집애가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저리 칠락 팔락 돌아댕기니... $#9. 아버지의 집, 마당 (저녁) 댓돌 위에 어머니의 트렁크 놓여있고, 아버지 안방으로 들어간다. 어머니, 댓돌 위에 정희와 정수, 마당에 서 있다. 어머니, 중국집 봉투에 든 음식을 마루 끝에 내려놓으며. 어머니 (정수에게) 냉동실에 넣어뒀다, 하나씩 꺼내서 먹어. 너무 센 불에 데우면 타니까, 가스불 나즉하게 해서, 알았어? 정수 ... (고개 끄덕인다) 어머니 엄마 없다구 딴 짓하고 돌아다니지 말구, 숙제 꼬박꼬박 하구, 작은언니 올 때까지 문단속은 니가 하구, 알아들었어? 정수 예. (고개 끄덕끄덕) 어머니 (딸의 흐트러진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 잘 해. (트렁크 들고, 정희에게) 가자. 정희 어떻게 이러구 그냥 가요? 어머니 어서 앞서래두. 정희 엄마! 어머니 너, 여기서 살꺼야? 그럼 나 혼자서 가구. 어머니, 트렁크 들고 대문쪽으로 간다. $#10. 아파트 광장 (밤) 어머니와 트렁크를 든 정희, 걷는다. 어머니 집 팔릴 때까지 만이야. 오래 안 걸릴 테니 김서방 눈치 볼 거 없어. 그래, 김서방은 여즉 안 왔니? 정희 ...(머뭇거리며) 네. 어머니 그놈의 아이엠에픈지 뭔지 사람 잡는구나. 이러다 사위 얼굴두 잊어먹겠다. 정희 ...(표정이 어둡다) $#11. 정희의 집 아파트 현관방 (밤) 어머니, 트렁크의 옷 꺼내 거실 붙박이장에 옷 건다. $#11-1. 거실 (밤) 어머니, 들어선다. 현관문 열리고, 정희, 원정이를 업고 들어온다. 어머니 자니? 정희 네. 어머니 기집애가 비우두 좋다. 너 안 닮았나부다. 남의 집에서 잘 먹 구 잘 자구. 얼른 갔다 뉘어라. 정희 (소파에 원정이를 눕히며) 좀 있다가요. 옷 갈아 입혀 씻겨야죠. 어머니 그래. 근데 김서방은 출장 가면서 옷을 다 가지고 갔니? 어째 김서방 옷이 하나도 안 보이니? 정희 ...철 지난 건 따로 두구요, 동복 두어벌 있는 건 가져갔어요. 어머니 (고개 끄덕이고) $#12. 동 집, 안방 (밤) 장롱과 화장대 놓여있고, 침대는 없다. 화장대 위에, 성수와 정희의 신혼사진, 원정이까지 세 식구가 단란한 모습으로 찍은 가족사진 액자들이 보기 좋게 세워져있다. 어머니와 정희, 앉아있다. 정희 기영오빠 보증 서준 것 때문에 속상해서 그러세요? 어머니 이제 와서 이러구 저러구가 무슨 소용이냐. 되새겨봤자 울화만 치밀지. 정희 부부가 돈 문제루 갈라 서는 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머니 너, 나이 헛 먹었구나. E 사람 사는데 돈 보다 더 큰 게 어딨냐? 부부도 마찬가지다. 정 없는데 돈까지 없어봐라. 웬수두 그만한 웬수 없지. 정희 아버지, 보증 서신 게 얼마나 되는데요? 어머니 니 아버지한테 물어봐라. 내 평생 빚물알이 하느라 좋은 시절 다 보냈다. 이제 육십에 밑자락 깔구 앉아 또 그 짓 해야겠니? 내 청춘 그렇게 녹았음 됐지, 더는 못한다. 정희 ... 어머니 집까지 넘어가게 생겼다. 내 명의로 돼있으니까 건지지, 안 그 러면 은행에 넘어가. 이러니 안 헤어지고 무슨 방도가 있니? 알량한 집이라두 그나마 안 건지면 정민이 공부는 어떻게 시 키구? 결혼은 또 어떻게 시키니? 정수는 아예 니가 맡아 키워줄래? 정희 아버지랑 화해하시면 그렇게 하죠. 동생 공부 하나 못 시키겠 어요. 어머니 (웃고) 아구, 말은 잘 한다. (쓸쓸하게) 정수 없었으면, 애저녁 에 니 아버지랑 갈라섰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하루도 이혼 생 각 안 해본 날 없었다. 정희 (사정조로) 엄마. 어머니 이 얘긴 이제 그만두자. (일어선다) 피곤하다. 정희 ...(안타까운 듯 어머니를 본다) $#13. 동 집, 거실 (밤) 베란다 유리에 그어지는 빗줄기. 정희, 거실의 커튼 치고, 집안 단속한다. 정희, 벽에 붙은 결혼사진을 착잡하게 본다. $#14. 동 집, 현관방 (밤) 어머니, 불 켜놓은 채 코까지 골며 깊이 잠들어 있다. 정희,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다 서랍장 위의 얇은 이불을 꺼내 덮어주고 불 끄고 나간다. $#14-1. Insert(밤) 비가 내린다. $#15. 아버지의 집 안방 (밤) 불꺼진 어두운 방안. TV에서 마감뉴스를 한다. 아버지,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생각에 잠겨 담배를 피우고 있다. 담배연기가 푸른 조명에 섞여 올라간다. 정수, 아버지 옆 맨바닥에 누워 TV를 본다. 아버지 자니? 정수 응. 아버지 니 방 가서 자야지. 정수 안 자. 아버지 늦었다. 그만 자야지. 정수 ...아빠 있잖아. 나, 아빠하구 엄마하구 중에... (하다가, 입을 다 문다) 아버지 ...(정수를 본다) 정수 ... 아버지 건너가 자거라. 정수 응. 아빠 나, 여기서 잘꺼야. 아버지 ...그래라. 정수, 눈을 감는다. 아버지, 여전히 무심한 시선으로 모니터를 지켜보며 담배를 피운다. 정수, 실눈을 뜨고 아버지를 훔쳐본다. $#16. 뒷마당 (밤) 추적추적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장독대에, 뚜껑이 그대로 열려있는 장독대. $#17. 호텔 로비 라운지 (밤) 경쾌한 라틴 음악이 생음악으로 연주되고, 한 좌석에 하준일, 이교수 앉아 칵테 일을 마시고 있다. 준일 (시계보고) 벌써 자정이네요. 이교수 지하 바로 옮겨서 한잔 더 할까요? (일어선다) 준일 (일어선다. 내키지 않는다) 내일 공연도 있고... 괜찮으시겠어 요? 피곤하실 텐데... 이교수 (준일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그러네요. 내일 공연이 또 있죠. 그만 올라가죠. 두 사람, 걸어나온다. 준일, 지갑 꺼내, 계산대 쪽으로 가면, 이교수 먼저 갈게요. 선생님. 여기서 일곱시에 뵈요. 아침이나 같이 하죠. 준일 그러지요. 이교수, 목례하고 또각또각 로비라운지를 빠져 나간다. $#18. 객실(밤) 넓은 객실. 더블침대가 놓여있다. 준일,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클라리넷을 손질한다. E 벨소리- 준일, 하는 의아한 시선으로 방문을 본다. 다시 벨 울리고, 준일, 일어나 문 쪽으로 간다. 준일 누구세요? E 하우스 키핑입니다. 준일, 체어 푼다. $#19. 객실 앞 (밤) 정민, 한손에 꽃, 다른 손에 샴페인 들고 서 있다. 문 열리고, 준일, 보인다. 준일 (반갑게) 정민아. $#20. 객실 (밤) 샴페인, 펑 터지고, 정민, 잔에 술 따른다. 창가 테이블에 마주앉은 두 사람. 정민 (준일의 잔에 부딪치며) 축하해요. 선생님. 준일 고맙다. 그건 그렇고, 이 밤에 웬일이니? 정민 선생님하고 이렇게 오붓하게 축하파티 하려구요. 공연 어땠어요? 준일 (고개 끄덕이고) 괜찮았다. 정민 선생님, 우리 어떻게 축하할까요? 준일 글세... 정민 말씀해보세요. 준일 (술잔 들고) 그냥 이렇게 술이나 한잔하자. 정민 그래요. 그럼. 정민, 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창 밖으로 본다. 준일, 그런 정민을 보고 어두운 창이 흐린 거울처럼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아낸 다. 정민 (그대로 창을 보고) 선생님. 준일 (정민 보고) 응? 정민 저녁에요 터미널 앞 서점엘 갔었는데, 지금 사랑하지 않으면 시간이 없다. 그런 책이 있더라구요...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한 평생 짧을 것 같은데.... 준일 무슨 일 있니? 정민 예... (쓸쓸히 웃고) 그런데요.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문제 예요. (술잔 들고) 드세요. 선생님. (시간경과) 정민, 침대 위에서 자고 있다. 준일, 테이블에 앉아 그런 정민을 보다, 탁자에 놓여있는 전화를 든다. 준일 객실 있습니까? (사이) 예. 방이 하나 더 필요 해서요. (사이) 그래요? 할 수 없죠. 알겠습니다. 준일, 수화기 내려놓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준일, 탁자에 놓인 메모지를 본다. (인서트) 이교수 000호. 준일, 수화기를 들고, 버튼 누르려다 시계를 본다. 전자시계, 새벽 2시가 넘었다. 준일 수화기 내려놓고, 곤란한 듯 손으로 턱을 만진다. $#21. 호텔, 로비 라운지 (아침) 이 교수, 바다가 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있다. 중앙에 마련된 조식 뷔페. 사람들, 접시 들고 빵 등 담는 모습 있고. 이교수, 시계를 본다. $#22. 객실 (아침)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창 밖으로 짙푸른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정민, 침대 위에서 자고 있고, 준일, 바닥에 모포를 깔고 자고 있다. 곤하게 자고 있는 두 사람. 그 위로 벨소리 들린다. E 띵똥띵똥- $#23. 객실 앞 (아침) 이교수, 서 있다. 문 열리고, 준일, 나온다. 이교수 주무시는데 제가 방해 했나요? 준일 (방에 신경이 쓰인다) 미안합니다. 로비라운지에서 뵙기로 했 었죠? 이교수 아침 먹긴 좀 이른가요? 준일 아, 아닙니다. 차라도 드시고 계세요. 좀 씻고 내려가겠습니다. 이교수 그럴까요? 그럼 있다 뵙죠. (돌아서려는데) 정민E 선생님, 거기서 뭐하세요? 이교수, 돌아보면, 부스스 머리 엉크러진 실내복 차림의 정민이 보인다. 이교수, 놀라고, 당황한 준일, 이교수와 정민을 번갈아 보고, 정민, 이교수와 눈이 마주친다. 정민 (밝게) 안녕하세요? 교수님. 이교수 박조교... $#24. 로비 라운지 (아침) 준일과 이교수, 나란한 자세로 어색하게 앉아있다. 두 사람 앞에 쥬스와 커피, 접시에 약간의 야채와 토스트 정도 가볍게 놓여있 다. 준일, 창 밖으로 시선 두고, 이교수, 정민을 보고 있다. 정민, 쟁반에 음식 푸짐하게 담아서 가져온다. 정민 (접시 내려놓고 맞은 편에 앉고) 어머, 챙피해. 나만 또 산처럼 가져왔네. 선생님하고 교수님은 그거밖에 안 드세요? 이교수 아무래도 아침은 좀 부담 돼서. 정민 전요, 뷔페에 오면 꼭 흥분해요. 왜 이렇게 먹을 걸 밝히나 모 르겠어요. (하나 집어먹고) 맛있다. 안 드세요? 이교수 천천히... 정민 저 아직 두 번은 더 갖다 먹을 거거든요. 너무 빨리 일어나지 마세요. 이교수 (미소, 아무렇지도 않게 차 마시며) 언제 왔어? 정민 그때가 몇시더라... 선생님 저 언제 왔어요? 준일 (이 교수에게) 자정이 훨 넘어서요. 이 녀석이 놀래준다고 왔 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주무실 거 같아 연락 못 드렸습니 다. 이교수 저도 부르셨음 좋았을 걸요. 잠자리가 바뀌어 그런지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어요. 정민 어머 그런 줄 알았으면, 교수님한테 가서 잘걸. (준일에게) 선생님, 등 안 아프세요. 제가 바닥에서 자야 되는 건데... 준일 괜찮다. 정민 얼른 드세요. 다 식어요. 준일 (이교수 보고) 드시죠. 이교수 예. 이교수, 아무 거리낌없이 열심히 아침을 먹는 정민과 준일을 본다. $#25. 아버지의 집, 마루 (아침) 정수, 가방을 옆에 놓고, 걸터앉아 은박지 도시락에 중국집에서 싸온 음식을 먹 고 있다. 아버지, 안방에서 양복차림으로 서류가방 들고 나온다. 아버지, 가방 옆에 놓고 정민 앞에 앉는다. 아버지 천천히 먹어라. 아직 시간 많다. (기침을 쿨럭한다) 정수, 아버지를 보다 가방에서 시럼 기침약을 꺼내 작은 약컵에 조금 따른다. 정수 (내밀며) 아빠. 이거. 아버지 (의아하게 보면) 정수 기침약. 이발소 할아버지가 주셨어. 아버지 그래. (받아서 마신다) 정수 (시럽병을 닫아 아버지의 가방에 넣어주며) 나중에, 아빠 점심 먹고 나서 또 드세요. 아버지 (고개 끄덕이고) $#26. 정희의 아파트 앞 광장 정희와 유치원 가방에 모자 쓴 원정, 외출복 차림의 어머니 나온다. 원정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간다) 어머니 오냐. 조심해서 갔다 와라. 정희 (동시에) 그래. (허리 숙이며) 뽀뽀. 원정, 정희의 볼에 입 맞추고 쫄래쫄래 뛰어간다. 어머니 (원정이의 뒷모습을 보고) 아들이면 얼마나 좋아. 청주 사돈댁 에서 속으로 욕하시겠다. 딸만 있는 집 며느리 봤더니, 지 에 미 닮아서 딸 낳는다구. 원정이두 다 컸구 둘째 낳아야지. 정희 원정이 하나면 되죠. 둘짼, 무슨. 어머니 요새 단촐하게 끝낸다구 하나 낳고 치우는데 그러는 거 아냐. 외롭다. 나중에. 여자한테 뭐니뭐니 해도 자식이 힘이지. 하나보단 둘이 좋고. 둘 보단 셋이 좋고, 키울 능력만 있으면 많이 낳는 게 좋아. 정희 엄마두 참... (쑥스러운 듯 웃고) 어머니 가자. 정희 (표정 어둡다) 나중에 그이 오면 가요. 어머니 한시가 급한데, 언제 올지도 모르는 김서방을 어찌 기다리니! 정희 ... $#27. 은행 로비 은행 본사의 깨끗한 빌딩 안. 잘 꾸며져 있다. 정희와 어머니, 한쪽 휴게공간에 앉아있다. 어머니 챙피하면 넌 그냥 여기 있어. 나 혼자 갔다 올 테니까. 김서방 장모라고 안 하면 될꺼 아니냐. (일어선다) 정희 (생각하다) 잠깐 좀 계세요. 제가 좀 알아보고 올게요. 정희, 일어서서 안내대 쪽으로 간다. 어머니, 그런 정희의 뒷모습 보다 다시 의자에 앉고. $#28. 동, 안내대 정희, 구내전화 수화기 들고 버튼 누른다. $#29. 동, 건물 내 휴게실 정희, 앉아있고, 성수, 뚜벅거리고 걸어온다. 성수 (앉으며) 당신이 여기까지 웬일이야? 정희 ... 성수 이제야 결심이 선건가? 정희 ...원정이 잘 있나 물어보지도 않나요? 이제 당신 딸도 마음에 서 지워버렸어요? 성수 ...원정이 한테 무슨 일 있나? 정희 잘 있어요. 아빠 보고 싶다는 것만 빼구요. 성수 (짜증이 난다) 나하고 말싸움 하자고 왔어? 당신. 정희 아뇨. 밑에 어머니 와 계세요. 성수 (놀라는 표정) $#30. 동, 로비 (아침) 정희를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 시계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31. 동, 휴게실 (아침) 정희 담당자한테 얘기 좀 해줘요. 성수 (착잡한) 그러지. 정희 어머니, 우리 사이 모르세요. 아직 말씀 못 드렸어요. 성수 그거야 당신이 알아서 할 문제지만, 갈수록 말씀 드리기 더 어 려울 텐데... 정희 (성수를 원망스럽게 본다) 어머니E 김서방 아냐! 정희, 놀라서 일어난다. 성수, 표정 굳어져 일어나고. 어머니 (다가와) 출장 갔다더니, 언제 왔나? 정희 (성수 눈치 살피고) 성수 ...(머뭇거리다) 아침에 왔습니다. (시간경과) 세사람 앉아있고 성수, '보증 채무이행 최고장'이라 쓰인 서류를 읽고 있다. 어머니, 긴장된 표정으로 보고, 어머니 상식적으로 그렇잖은가? 나모르게 보증선 걸, 내가 왜 갚아야 해? 게다가 원정이 할아버지랑은 벌서 갈라섰네. 정희 (민망한) 엄마.... 성수 (놀라서 정희를 한 번 보고, 어머니에게) 알아보겠습니다. 어머니 그래. 부탁하네. 어떻든 좋은 쪽으루! 알았지? 성수 예. 어머니 바쁜 사람 시간 뺏어서 미안하네. 저녁엔 집으루 올 거지? 성수 ...(난처한) 정희 이이 바루 지방 출장 간데요. 어머니 아휴 이를 어째? 피곤할 텐데, 쉬지도 못 하고. 남의 밥 벌어 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정희 .... 성수 (정희를 못마땅하게 본다) $#32. 연주회장 (저녁) (M)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중 'Adagio' 무대에 오케스트라 연주하고 있다. 이교수, 피아노 연주하고, 준일, 무대 앞, 지휘자 옆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한다. 객석 앞 정민과 최조교, 여학생 1, 2 앉아있다. 여학생 1, 2의 귀에다 소근거리고 앉은 정민, 준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33. 거리 (저녁) (M) 음악 이어지고. 정수, 목을 빼고 경사진 차도 쪽을 보고 있다. 이윽꼬 아버지의 통근버스 다가와 멎는다. 000 컨트리 클럽이라고 쓰여진 버스. 아버지, 내리다 정수를 본다. 아버지, 정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34. 정육점 앞 (저녁) (M) 계속 되고. 검은 봉지 든 아버지와 아버지의 서류가방을 든 정수, 나온다. 부녀, 어둠이 깔리는 거리를 두손을 꼭 잡고 다정히 걸어온다. $#35. 아버지의 집, 마당 (저녁) 마루 처마 밑에 알전구가 밝혀져있다. 화덕 위에 놓인 석쇠에 돼지고기가 익어간다. 화덕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아버지와 정수. 아버지, 소금통에서 굵은 소금을 한줌 꺼내 고기에 뿌린다. 아버지 (긴 저로 뒤집으며) 자, 다 익었다. 아버지, 하나를 집어 호호 불어 식힌 다음, 딸의 입에 넣어준다. 정수 (오물오물 씹다) 아빠두 먹어. 아버지 그래 먹자. 우리 정수, 아빠 술 한 잔 따라 줄래? 정수, 아버지가 내민 잔에 소주를 따른다. 아버지, 한 잔 마시고. 정수 (아버지를 빤히 보다) 아빠. 나, 이제 누구랑 살아. 아버지 ...(보면) 정수 엄마랑 큰언니랑 살아? 아님 아빠랑 짝은언니랑 살아? 아버지 정수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정수 (볼이 메인다) 몰라. 아버지 겨울방학 끝날 때까지만 아버지랑 있자. 신학기 시작되기 전에 정민이 정수, 엄마가 데리러 오실 거다. 정수 그럼 아버진? 아버지 ... 글쎄다. 딸은 엄마랑 살아야지. 아버지, 고기를 뒤적거리고, 정수, 눈물이 핑 돌아 고개를 숙인다. 잠시 두 부녀 말이 없고... 아버지, 그런 정수를 애잔하게 본다. 아버지 우리 정수 노래 하나 불러 볼래? 정수 (고개 흔든다) 아버지 싫어? 정수 (아버지를 본다) 뭐 부를까? (일어선다) 아빠가 좋아하는 거? 내가 좋아하는 거? 아버지 정수가 좋아하는 거. 정수, 댓돌 위로 올라간다. 정수, 과장되게 율동까지 하며 신세대가 부르는 노래 부른다. 아버지, 과장되게 웃고 술잔 들이키다, 갑자기 기침을 쿨럭인다. 괴로운 듯 기침을 토하다, 아버지, 그대로 뒤로 쓰러진다. 정수 (노래 부르다, 놀라서 비명같이) 아빠! $#36. 정희의 아파트, 거실 (밤) 어둠에 잠긴 실내에 전화벨 소리만 요란하다. 거실 한 벽 간접조명에 드러나는 정희와 성수의 결혼사진... 전화벨 울리다, 끊어지고 응답기 돌아간다. 각각의 목소리로 "여기는 김성수, 박정희, 원정이의 집입니다." 정수E 언니! 언니! $#37. 시장 안 (저녁) 어머니와 정희, 원정이의 손 잡고 걸어간다. (소리) 삐삐- (어머니의 손가방에서 희미하게 호출기 울리는) 어머니와 정희, 시장 안의 시끄러운 소음들로 듣지 못한다. 어머니, 술집을 보고 문득 발을 멈춘다. $#38. 병원, 응급실 (밤) 아버지 의식 없이 누워있고, 그 옆에 정수와 이발사. 정수, 너무 울어 눈이 충혈된 채 딸꾹질까지 한다. $#39. 시장 안 술집 (밤) 허름한 술집, 부침개와 순대 등의 간단한 안주를 파는. 한 테이블에 어머니와 정희 앉아있다. 둥근 양철 테이블 위에 막걸리 주전자와 부침개 정도 놓여있고, 테이블 옆쪽으 로 주인이 앉아 쉬는 돋우어진 구들에 원정이 누워 자고 있다. 어머니 (꺌꺌거리고 웃으며, 자신의 잔에 술 따른다) 정희 그만 하세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어머니 어떠니? 술 먹고 우는 건 흉 될지 몰라두 웃는 건 죄 없다. 너 도 한잔할래? 정희 ... 어머니 난 왜 술만 마시면 미친년처럼 웃음이 나나 몰라 (소리내서 웃고) 옛날에 말이다 (웃고) 나 고모부 돌아가셨을 때, 오일장 을 치뤘거든. 왜 그렇게 힘들고, 피곤하고... 기어이 이냥반 내 빚도 안 갚고 세상 떠나는구나 싶어 속상하구 해서 소주를 한 잔 마셨거든... 정희 (웃으며) 그래서요? 또 웃으셨어요? 어머니 그전에 술을 마셔봤어야 알지. 이리 웃음 터지는 걸. 배꼽을 잡고 웃는데 문상온 사람들이 쳐다보고, 쑤근대고. 하이구 (웃 고) 그런 난리 없었지. 정희 고모 화 나셨겠네요. 어머니 머리채 끄들릴 뻔했다. (웃고) 세상에 니 애비, 니 고모, 고모 부, 기영이까지 징글징글하다. 한 평생 몸서리가 나. 진작에 끝 냈어야 했는데... 정희 정수는 어쩌구요? 엄마. 정수 너무 어리잖아요. 어머니 ...내가 주책이지. 다 늦게 아들인가 싶었더니... 기집앤거 알구 지울라구 했지. 헌데 니 아버지 말려서.. 어린 게 뱃속에서두 아나부더라. 지 아버지만 따르고. 정수년 날 때부터 내 새긴 아니다. 지 아부지 딸이지. 어머니, 웃으며 잔 비우고, 정희, 그런 어머니를 보다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40. 정희의 집, 거실 (밤) 정희, 원정이 업고, 어머니 부축해서 들어온다. 어머니, 술이 취해, 깔깔거리고 웃느라 정신이 없다. 정희, 원정이 소파에 누이고, 넘어지려는 어머니를 붙잡는다. 정희 엄마. 정신 좀 차리세요. 어머니 안 취했다니까. 정희 차가운 단술 가져 올게요. 정희, 어머니를 앉히고, 주방 쪽으로 가다 전화기를 본다. 메시지가 있다는 표시 반짝인다. 정희, 응답기 튼다. $#41. 병실 (밤) 아버지, 일인실에 옮겨져있다. 정수와 이발사, 소파에 앉아있는데. 문 열리고 어머니와 정희, 들어온다. 어머니, 아직도 정신이 없어, 정희의 부축을 받고 있다. 정수 (달려가 언니 치마폭에 안긴다) 언니! 정희 괜찮아. 괜찮아. (이발사에게 인사한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이발사 뭘... (어머니에게) 사모님 오셨어요? 어머니 (대꾸도 없이, 아버지를 물끄러미 보다, 웃는다) 얘. 니 아버지 왜 이래? 정희 엄마! 어머니 이러구 보니 훤칠하니 잘두 생겼다. 생긴 건 멀쩡해서 남의 속 은 왜 뒤집나 몰라. (웃고) 말 좀 해봐요. 그렇게 자는 척 하지 말구. 정희 엄마. 그러지 말구, 여기 좀 앉으세요. 정희, 엄마를 소파에 앉히고, 이발사, 보다 슬그머니 나간다. $#42. 화장실 안 (밤) 정수,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토한다. 정희, 등을 두드려 준다. 정희 놀래서 꽉 얹혔구나. (두드리며) 더 토해. $#43. 병원 앞 (밤) 정희, 정수를 업고 걸어간다. 정수 아빠한테 갈래. 정희 엄마 계시잖아. 넌 내일 학교 가야지. 정수 ...아빠, 많이 아픈 걸까? 정희 괜찮으실 거야. 정수, 정희의 등에 얼굴 묻고, 정희, 밤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44. 병실 안 (아침) 술에 취한 어머니, 소파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깨어난 아버지, 침대에 앉아있고, 그 앞에 정박사 (남, 40대), 간호사 서있다. 아버지 고기를 구워먹었는데, 그게 얹혔나 모르겠습니다. 정박사 체하신 건 아니구요. 어디 달리 불편하신 데는 없습니까? (차 트 넘겨보며) 기침을 많이 하신다구요. 아버지 많이 하는 건 아니구요. 물약을 먹었는데, 어제 낮에부터 손가 락에 이렇게 물집을 잡히네요. (손바닥을 내민다) 정박사,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살펴본다. 열손가락 끝이 전부 보라색으로 변해있고, 물집이 잡혀있다. 정박사, 표정이 굳어진다. 정박사 MRA 검사를 한번 해보죠. 아버지 예. 정박사와 간호사, 나가고. 아버지, 침대에서 내려선다. 아버지, 창가 쪽으로 가다 어머니를 본다. 여전히 코를 드르렁 골며 곤하게 자는 어머니. $#45. 정희의 집, 현관 (아침) 정희, 문 열고, 어머니 들어온다. 정희 아버진요? 아버진 어떠세요? 어머니 애두 아니구... 체했단다. 낼 모래 얼음 얼게 생겼구만, 한데서 돼지고기가 다 뭐야. 그 바람에 애만 잡을 뻔 했잖니. (하품하 고) 아휴. 피곤하다. 찝부둥한 게 영 잠자리가 신통찮아서.... 어머니, 문간방 쪽으로 들어간다. $#46. 아버지의 집, 마당 대문 앞에 정민, 문 열어주고, 아버지, 들어온다. 아버지 정민이 왔구나. 정민 괜찮으세요? 아버지 그래. (마루 쪽으로) 정민 (따라가며) 오늘은 하루 쉬세요. 회사에 연락하시구요. 아버지 걱정할 것 없다. 그래. 넌 잘 다녀왔니? 정민 예. 아버지 (고개 끄덕이고 마루에 올라선다) $#47. 골프장 사무실 (아침) 아버지와 경리과 직원 1, 2, 3 여직원 1, 2 소파에 앉아 회의하고 있다. 아버지, 멍하니 딴 생각에 잠겨있다. 직원2 기온이 뚝 떨어져서 그런지 하루 지날 때마다 손님이 뚝뚝 떨 어집니다. 대책을 세워야 되겠는데요. 직원3 예년보다 겨울도 빨리 온데다, 올핸 이거 뭐 11월부터 눈이 날 렸으니... 눈썰매장은 어떨까요? 여직원1 어머, 그거 너무 좋은 아이디어다. 눈썰매장 잘 된데요. 여직원2 어디다 만들 건데. 직원1 만든다면 5번홀 그늘 집 뒤, 그 언덕이 좋겠는데 경사도 적당 하고. 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아버지 ... 여직원2 부장님... 아버지 (그제서야) 응. (시계보고) 그늘집 매상 좀 점검해야겠군. (여 직원1과 직원1에게) 김양하고, 최계장하고 같이 가지. (일어난 다) $#48. 필드, 그늘집 9낮) 아버지, 장부 들고 그늘집에서 나온다. 뒤따라 나오는 직원1, 여직원1. 아버지 기침이 터져 나온다. 옆에 있는 나무를 부여잡고 힘겹게 기침하는 직원1 부장님. 아버지 (괜찮다는 손짓) 여직원1 따뜻한데서 나오니까 그러신가 봐요. 들어가서 뜨거운 물이라 도 가져 올까요? 아버지 (호흡 고르고) 됐어. 괜찮아. 직원들 걱정스럽게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 주먹ㅇ로 기침을 막다 무거운 표정으로 멀리 시선을 둔다. $#49. 아버지의 집, 대문 앞 (오후) 묵골댁, 짐을 대문 앞에 바리바리 두고, 쪼그리고 앉아있다. 정수, 학교에서 돌아오다 묵골댁을 본다. 정수 고모! 묵골댁 (일어나며) 아구 다리 저려라. 인제 오나? 정수 네. 고모 안녕하셨어요? 묵골댁 (못마땅해서) 아따 그년 인사성 한번 밝네. 퍼득 문이나 열고 인사도 해라. 고마 얼어죽겠다. 이년아. 정수 (주머니에서 열쇠 꺼내 연다) $#50. 진료실 (오후) 뷰-박스에 MRA 필림 걸려있다. 양복차림의 아버지, 정박사와 마주 앉아있다. 정박사 (뷰박스에 시선 돌리고) 담배 태우신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아버지 젊어서요. 정박사 많이 태우십니까? 아버지 (쑥스러운 듯 미소) 그런 편이지요. 정박사 ... (표정 무거운) 아버지 (긴장하는) $#51. 병원 로비 아버지, 병원 벽에 걸린 시계만 바라보고 있다. 다른 소음들 out되고, 시계 초침만 크게 들린다. 그 위로. 정박사E 보호자가 안 계시니 선생님께 직접 말씀 드릴 수밖에 없군요. 폐암입니다. 아버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아버지, 떨리는 손으로 성냥불을 붙이는데, 잘 붙지 않는다. 의사 가운을 입고, 동료들과 웃으며 걸어오던 태준, 아버지를 본다. 태준 선생님. 아버지 ....(성냥을 탁탁 긋는다) 태준 선생님. 아버지 (그제서야 멍한 얼굴로 태준을 본다) 태준 (웃으며) 여기서는 금연입니다. 아버지, 잠시 멍하니 태준을 보다, 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입구쪽으로 걸어간다. 태준, 돌아서 가다가, 뭔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아버지를 본다. 태준 선생님. 아버지, 출입문을 빠져나가고, 태준,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돌아선다. $#52. 아버지의 집, 마당 (오후) 빨랫줄에 삐덕하니 말린 생선들이 걸려있고, 화덕에 들통이 올려져 있다. 묵골댁, 간장을 달인다. 묵골댁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기집년들이 우굴우굴 모여서 장독 하나 간수도 몬하고... 니 에미는 뭐하는 사람이고? 뒷마당 쪽에서 정민, 양푼에 장을 퍼담아 온다. 정민, 들통에 장을 붓는다. 묵골댁 고마! 그래 요량이 없나? 부르륵 넘친다 아이가? 정수 (웃고) 고모 화 줌 그만 내세요. 묵골댁 시끄럽다. 니 아부지한테 전화 한 번 너 봐라. 정민 일찍 퇴근 하셨대요. 묵골댁 그때가 운젠데 여즉 와 안 오노. 니 에미는? 니 에미는 어디 갔노? 정민 ... 정수 ... $#53. 이발소 앞 싸인볼 돌아가는 초라한 동네 이발관. 앞에 내어놓은 건조대에 이발사, 수건을 널고 있다. 아버지, 한손에 정육점 봉지, 다른 손에 소주 두병이 든 봉지를 들고 걸어온다. 이발사 이제 오십니까? 아버지 (보고) 예. 이발사 좀 어떠십니까? 아버지 괜찮습니다. 지난번에는 고마웠습니다. 아버지, 인사하고 돌아선다. 이발사, 무심히 수건을 널고. $#54. 아버지 집, 마당 (오후/저녁) 묵골댁, 숟가락으로 끓어 괴는 장의 거품을 걷어내며, 묵골댁 우짜고. 아까봐서. 장 다 버리면 우짜꼬. 다시 담지도 몬하고, 한해 살림인데 우짜고. 정민 소금 먹으면 되죠. 요샌, 다 소금써요. 묵골댁 시끄럽다. 이년아. 옛날 같으면 애를 낳아도 한 죽을 낳았을 년이 장독대 한 번 을 안 살피고. 아버지, 들어온다. 정수 아빠! 정민 늦으셨네요. 묵골댁 (반색하며) 동상! 아버지 ...오셨습니까? 묵골댁 야야. 피곤체? 욕 봤다. 기집, 새끼 벌어 먹이느라 욕본다. 아버지 별일 없으시지요? 묵골댁 내사 황천에 자리 봐 둔 몸 아이가? 무슨 일 있겄나. 아버지 예에. (정민에게 봉투 주며) 삼겹살이다. 구워먹자. 정민 예. 준비할게요. (시간 경과)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간다. 편안한 차림으로 마루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는 아버지. 묵골댁 (간장 맛 보며) 예펜네가 이리 안 야물어 우짜노. 비가 드가서 고마 다 베릿네. 아버지 정민아. 여태 뭐하고 있니? 저녁 먹자. 정민 (쟁반에 꺼낸 고기 가져오고) 고모, 장 다리시느라구요. 묵골댁 아구, 아까 봐서 우짜꼬. 내사 저 진주장에까정 가서 콩 안 사 왔나? 힘들이 삶아 메주 띄워 보냈더니... 쯧쯧 (혀 차고) 아버지 누님, 불 좀 빼지요. 묵골댁 (정민에게) 메주 남은 거 없나? 여덟 장 보냈는데, 하나도 안 남았나? 아버지 누님. 고기 좀 구워 먹죠. 묵골댁 우리 대주, 내년 육순잔치에 쓸라고 정성껏 해 보냈더니, 이기 뭐꼬? 원래 기집이 돈 번다고 대문 밖을 넘으믄 그때부터 살 림은 영 그른기라. 벌믄 얼마나 번다꼬. 니 에미 안 오나? 정민 ... 묵골댁 참말로 해가 떨어질라 카는구만. 우째 그리 요랑이 없는지. 하늘 같은 대주가 퇴근을 했으믄 퍼득퍼득 들어와서 착 옷도 받아 걸고, 뜨근뜨근하게 밥도 해서 아랫목에 묻어 놓고... 이거는 무신 기집인지 사낸지 천지 분간이 안 되는 갑다. 안 그런가 동상? 아버지 (화가 난 표정이다) 누님! 그만하세요! 묵골댁 (숟가락 끝으로 간장 찍어) 계집이 이리 손이 거칠어서... 고마 다 베릿다. 아버지, 자신도 모르게 울컥 치밀어 들통을 확 밀친다. 화덕에서 떨어진 장이 수돗가에 튀고, 마당에 주르르 흐른다. 묵골댁 동상! 정민 아버지! 아버지 (소리친다) 고기 좀 구워 먹자고 하잖아요! 고모, 멍하니 아버지를 보고, 정민과 정수 놀란 듯 본다. 정수 아빠. 아버지, 그제서야 정신 차린 듯 둘러보고는, 고개 숙인 채 그대로 밖으로 나간 다. $#55. 술집 (밤) 열린 문 안으로 초라한 순대국집 보인다. 손님들 앉아있고, 한 구석에 아버지, 순대국을 앞에 놓고, 술 마신다. 빈 소주병이 두어개. 정수, 들어온다. 정수 아빠! 아버지 (충혈 된 눈으로 딸을 본다) 정수 (아버지 옆에 앉는다) 아버지 저녁 먹었니? 정수 (고개 흔든다) 아버지, 저로 순대국에서 순대를 건져, 소금에 찍어 정수의 입에 넣어준다. 아버지 꼭꼭 씹어 먹어. 저번처럼 얹힐라. 정수 (오물오물 씹어 먹는다) 두 사람, 잠시 말이 없다. 정수 아빠, 이제 집에 가. 아버지 (정수를 잠시 보다) 우리 딸 노래 하나 할래? 정수 ... 아버지 왜, 사람들 있어서 싫어? 정수 아니. (일어난다) 아버지 무슨 노래 할래? 정수 아빠가 좋아하는 거. (두 손 모으고 노래한다) 푸른 물결 춤추고- 갈매기떼 넘나드는 곳- 내 고향집 오막살이에 황혼빛이 물들어 간다- 아버지, 쫓기듯 술을 벌컥 마시고, 딸을 본다. 애틋하게 바라보는 눈에 눈물이 고인다. $#56. 술국집 앞 (밤) 술국집 앞, 큰 양은 솥에서 순대국 끓는 김이 오르고. 문 열린 술집 안으로 서서 노래를 부르는 정수와 술을 마시는 아버지가 보인다. 그 위로 정수의 노래 이어진다. 정수 어머니는 된장국 끓여- 밥상 위에 올려 놓고-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 새워 기다리신다. 정수의 노래 소리 잦아들고, 정수의 나레이션 겹쳐진다. 정수(NA) 그날 아빠가 간장을 쏟아버린 이유를 우리는 아무도 알지 못 했다. 아빠는, 순대국 집에 앉아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내게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 주셨다. 삼천포 바닷가에서 평생을 어부로 지냈던 할아버지. 청어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 끝내 돌아오시지 못했다고 한다. 아빠는 조금 우셨던 것 같다. 그 밤, 나는 꿈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바다에 나가 청어를 잡 았다. 제 1 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