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았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그것을 완성하기까지의 이야기와 그 후에 소련의 스파이로 몰려 청문회에서 모욕을 받은 이야기가 주요한 줄거리다.
이 영화에는 아인쉬타인을 비롯하여 당대의 영웅들이 등장하여 반가운 마음이 솟아난다. 그리고 이 영화의 배경에는 국가간의 세력다툼이 가장 짙은 색깔로 칠해져 있다. 그 경쟁과 증오심은 20만이 넘게 죽은 사건 앞에서 환호하게 했고, 사람의 본심을 헤아리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어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결국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던 시절의 미국 사회는 소련이라는 세력과의 다가올 치열한 대결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그려준다. 그런데 그보다 더 본질적인 악은 오펜하이머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그 열등감에서 나온 증오심이 결국 이념을 도구로 하여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는 원래 이유였다.
오늘의 한국 사회도 때 아닌 이념 논쟁으로 시끄럽다.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한 빨치산이었다느니 하는 주장은 이념 논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증오심이 그 바탕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논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 싸움은 이념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심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이 활개를 치던 1950년대의 미국사회는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리던 중세의 서양사회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은 남북이 대치하는 우리나라에서 뿌리깊게 이어져온 빨갱이 논쟁과 유사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대중이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이용하는 더 악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증오심을 숨기고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낙인을 찍어 제거한다.
증오심을 숨기고 지위와 이념을 도구로 사용하여 진실을 비틀려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다. 그 가운데 고통을 겪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호소할 것이다: ‘누가 진실을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런데 진실을 말해주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나온다. 그의 진술은 결국 악인에게 심판의 형벌을 가하는 정의의 검이 된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묘사 중에 그 입에서 검이 나온다는 표현이 있다. 용기와 소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악인의 위선과 음모를 도려내는 예리한 검과 같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조금만 낼 수 있다면, 그리고 눈앞의 이익에 대한 욕심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구차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예와 아니오’로 분명하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진실이 있고, 그 진실의 땅에서만 생명의 기운이 움틀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