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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거절은 은혜입니다(대상17:15-27)-2018.9.2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거절을 할 때도 있고 당할 때가 있습니다. 혹시 금전거래를 통해서 거절을 당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혹은 사랑에 거절을 당해 보신 적은요? 아니면 어려운 부탁을 거절당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아니면 전도하다가 거절을 당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리고 거절을 당했을 때 당신의 감정은 어떠하시었는지요? 솔직히 거절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거절을 불쾌하게 여기는 이유는 자신의 의사와 의지와 스타일에 대한 다름으로 인정하지 않고, 틀림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불쾌한 것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거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절이 불쾌하고 불편한 것입니다. 때문에 거절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고, 보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절을 잘못하면 불행해집니다.
그러므로 거절은 기술이 필요합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거절은 잘하고 잘 받아야 합니다. 거절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배려해서 지혜롭게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혹은 내가 거절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인격을 거절당했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 방법과 스타일이 상대방과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거절이라도 상처를 받지 않고 너그럽게 수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절이 내 의지나 결단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거절을 하고, 거절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거절을 통해 상처를 주지 않고 받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거절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항상 내 생각과 방법이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니 거절이 우리 인생의 브레이크 역할을 톡톡히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 때 누군가 나에게 거절이라는 브레이크를 밟아주지 않았다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났을는지 모릅니다. 그 때 그 사람이 거절이라는 브레이크를 밟아주었기 때문에 금전적인 손실을 막을 수 있었고, 건강을 지킬 수 있었으며, 불의의 사고로부터 나를 지켜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거절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거절을 내 인생의 윤활유로 접목시키면 나의 약점과 단점을 보완하여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거절이 내 인생을 충분히 알차게 하고 유익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거절을 당했기에 내 삶의 진보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성공적인 인생을 살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에 숱하게 찾아드는 거절을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시렵니까? 거절을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 당신의 삶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절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거절을 무서워하지도 마십시오. 오히려 거절을 은혜의 방편으로 수용하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거절은 은혜의 새 방편입니다
세상의 거절도 당신이 어떤 자세로 수용하느냐에 따라 삶이 완전히 바뀔 수 있는데 하나님의 거절은 어떠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거절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거절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것은 몇 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 삶 가운데 유익되지 않기 때문이요,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나의 영적인 관계가 불편해지거나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관계가 친밀할 수만 있다면 특별히 거절하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혹은 우리 방법보다는 하나님의 방법이 훨씬 더 유익하기 때문에 거절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절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거절이 무슨 은혜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은혜 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이 거절하셨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래서 낙담하여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거절은 당신에게 가장 큰 은혜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소원을 당신의 방법으로 이루어주시기를 간구하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소원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일이 당신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면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말 비참해지고 불행해집니다. 만일에 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세상의 모든 질서와 체계가 무너질 것이요, 공의와 정의가 사라질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기준이 무너질 것이요, 수상과 수하의 질서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끔찍한 상상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은혜 되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절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거절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당신은 그런 하나님의 거절의 은혜를 체험해 보신 적이 있으셨나요? 거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체험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자신은 백향목 궁에 거하면서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밑에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해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말 순수하고 선한 의도요, 숭고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다윗의 그런 마음에 나단 선지자도 지지하고 동의했습니다(2절).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하나님이 거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에게 그 밤에 말씀하사 다윗에게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고 전하게 하셨습니다(3-4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의 의중을 알아주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믿음이라는 시선으로 접근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절은 포기하라는 신호가 아닙니다. 방법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거절은 나와 다르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수용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거절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의 거절을 은혜로 수용한 사람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의도와 반대로 거절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아시아 전도를 위해 힘쓰는 바울에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16:6절). 바울은 하나님의 거절을 순종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을 따르겠다고 자청합니다(눅9:57절). 그러나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반박하십니다. 일종의 거절입니다. 이번에는 주님이 직접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명하십니다. 그 때 그 사람이 먼저 자기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청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명하십니다(눅9:60절). 이것도 거절입니다.
더욱 심한 거절을 체험한 여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을 지나가시다가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쳐주기는커녕 자존심이 상할 정도의 인격적 모독을 줍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게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입니다(막7:27절). 하지만 그 여인은 안색하나 변치 않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거절을 통해 그녀의 자존심을 버리게 하신 것입니다. 거절을 통해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더러운 독성들을 끄집어내어 버리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더러운 그릇에 음식을 담는 것을 보고서 거절치 아니하겠습니까? 그 여인은 거절을 통해 큰 은혜를 경험합니다. 거절의 은혜가 그녀의 귀신들린 딸에게 임하여 완전해진 것입니다. 거절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거절을 무조건 반대로 여기지 않고 은혜로 수용한 것입니다. 주님의 거절은 수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거절이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거절을 저주로 여기기도 하고 무시하거나 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절의 은혜를 받을 사람은 단순히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을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또 다른 통로로 본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사람에 따라 거절이 저주가 되기도 하고 은혜가 되기도 합니다. 아람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왕하5:1절). 그런데 다행히 자기 집의 계집종으로부터 희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문둥병을 고쳐주는 선지자가 있다는 소식입니다. 정말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지요.
나아만 장관은 아람왕의 친서를 가지고 이스라엘 왕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엘리사라는 선지자의 집을 찾아가게 됩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신을 극진히 예우하여 고쳐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사자를 보내어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통보합니다. 한마디로 홀대를 받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격적인 거절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 외교적으로 볼 때 아람 나라는 대단히 강한 나라였거든요. 나아만의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는 아람에는 이보다 더 깨끗한 강물이 있다고 분노하며 떠나려합니다.
만일 그 때 그가 그 자리를 떠났다면 그는 문둥병을 영원히 고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들이 그를 말립니다. 한마디로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시키는대로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만이 그들의 말을 듣고 순종했더니 어린아이 살과 같이 깨끗함을 얻은 것입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무시하고 대적하며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은혜 받을 수 없습니다. 항상 내 생각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항상 내 방법이 옳은 것도 아닙니다. 가만히 내 생각과 마음을 내려놓으면 분명히 좋은 길이 열립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절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거절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은혜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안되는 것도 은혜요, 없는 것도 은혜며, 아픈 것도 은혜입니다. 고난도 은혜요, 시련도 은혜입니다. 거절당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는 이유 없는 거절이 없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여기 나오는 모든 것들 속에는 실패나 실수, 거절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거절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방법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고, 하나님의 방법과 우리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고 말씀하십니다. 인정하십니까?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을 수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거절을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반항하는 것도 안됩니다. 하나님 은혜의 또 다른 통로로 여기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거절하시면 은혜가 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곧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거절을 은혜와 축복의 통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지, 하나님이 나에게 맞추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거절을 통해 은혜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3) 하나님의 거절을 은혜로 체험한 다윗
다윗은 하나님의 거절을 통해 은혜를 체험했던 인물이요, 더 큰 성숙을 이루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열심은 누구와도 비교가 안됩니다. 다윗은 범죄하고도 하나님의 은혜를 외치고, 얻어터지면서도 은혜를 외치며, 거절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외친 사람입니다. 은혜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중에 거절도 은혜였던 것입니다.
다윗의 소원은 성전건축이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그가 이 땅에서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 보았으나 유일하게 성전건축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청해서 성전건축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화려한 백향목 궁궐에 거하면서 성막에 천으로 덮여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생각하면 하나님께 항상 죄송하고 부담감을 느끼고 살았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법궤를 소중하게 여겼고, 하나님을 사랑하던 인물이었기에 성전을 지어 드리고 싶은 마음의 소원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다윗의 마음을 하나님이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4절). 다윗의 상실감은 어떠했을까요? 정말 억장이 무너지고 탄식하고 싶었을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섭섭하고 서운했을까요? 우리 같으면 믿음을 무시한다고 원망과 불평을 토해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다윗은 전혀 그런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섭섭함을 토로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거절을 당할지라도 원망과 불평하지 말고, 혹은 상처받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의 의중을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무엘하 7장도 본문과 같은 내용입니다. 역시 복을 받을 신앙인은 뭔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성전건축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지만 그의 중심까지 거절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절하신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니면 거절하시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거절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안되면 거절하십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거절은 이 셋 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성전건축을 거절하신 이유도 하나님의 때와 방법이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때에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성전건축을 거절하셨지만 다윗의 열심과 마음까지 거절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을 주시기로 하십니다. 사무엘하7장에 나오는 복은 세 가지입니다. ‘너를 존귀케 하고’(9절), ‘평안케 하며’(11절), ‘견고케 하리라’(13절)는 것입니다. 비록 성전은 거절하셨지만 다윗의 가문을 통해 세워질 나라까지 복을 받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복이 아니라 최소한 몇 백 년 동안 계속되어질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절을 통해서 은혜로 보상을 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멋쟁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다윗도 멋쟁이입니다. 통치자에게는 자기가 통치한 기간 동안 남다른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합니다. 왜 다윗에게 그런 욕망이 없었을까요? 특별히 신정주의 통치 밑에서 최초의 성전을 짓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다윗은 성전건축이 거절당했어도 삐지거나 토라지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무리하게 추진하려고도 안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은혜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거절을 은혜로 수용한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늘위에서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우리의 기도와는 수준이 다릅니다. 우리 같으면 섭섭해서 나를 위로해 달라고 기도하든지, 혹은 그래도 하나님이 다시 한번 응답해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거절 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주신 은혜, 앞으로 주실 은혜를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이 성전건축이 거절당한 후에 기도한 은혜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여겨주시는 은혜’입니다(17절).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감사한 내용은 여겨주시는 은혜였습니다. ‘여겨주시는 은혜’는 자신은 그런 수준이나 자질이 없는데 하나님이 믿어주시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은 일개목동으로 볼품없는 하류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택하사 존귀한 자의 위치에 높여주셨다는 말입니다. 거절을 당한 후에 고백한 다윗의 기도는 그래서 더 돋보이고 감동적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이런 은혜를 받고 삽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추하고 부족한 나를 택하사 얼마나 존귀한 자로 높여주시는지 아십니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감히 무엇으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가장 큰 은혜는 억만 가지 죄악 가운데 죽어 마땅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시는 은혜가 아닐까요?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영광과 존귀와 복된 자리까지 높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감히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다윗이 거절을 통해 얻은 은혜는 ‘알게 하시는 은혜’입니다(18-19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 중에 깨달아 ‘알게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상의 비밀들을 자기 백성들에게는 공개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큰일들을 알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모든 큰일은 무엇일까요? 가까이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들로부터 장차 자신의 가문을 통해서 행하실 모든 일들을 다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일은 장차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큰일을 알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알게 하시는 은혜로 말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11:1)를 알았습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33:15)는 말씀을 알았습니다. 또한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계22:16)는 말씀도 알았습니다. 한마디로 이런 모든 일들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이런 모든 은혜를 알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들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다.
세 번째로 ‘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21-27절). 다윗을 다윗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는 고백이 나오게 하십시다. ‘되게 하시는 것’은 누림의 은혜입니다. 오늘날 여기까지 나를 도우사 나 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되게 하신다’는 뜻은 만들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답지 못한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일군답지 못한 나를 일군답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상황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문제가 해결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내가 될려고 하면 될 것도 안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되게 하셔야 합니다. 공부도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이 되게 하셔야 합니다. 장사도 하나님이 되게 하셔야 하고, 사업도 되게 하셔야 합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거절을 통해 받은 다윗의 세 가지 복은 내안에서 나를 성전 삼고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으로부터 행하실 복입니다. ‘여겨주시는 복’과 ‘알게 하시는 복’, 그리고 ‘되게 하시는 복’은 오직 내안에서 나의 주인되시고 왕되시며, 나의 생명과 전부이신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복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거절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가장 성숙한 신앙인은 거절을 통해서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수용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거절은 우리의 믿음을 보다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시금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하나님의 어떤 거절이 주어질지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낙심하거나 토라지지 말며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로 여기시어 날마다 감사하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가장 좋은 방편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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