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한 국가의 명칭은 국시(國是)를 가장 간명하게 대내외에 공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새로 태어날 나라의 이름을 짓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주지하듯 중국공산당(이하 중공) 주도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People’s Republic of China)이 공식 출범하였다. 세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 명칭은 그 자체로 여러 함의를 내포한다.
우선 ‘중화’는 1912년 세워진 중화민국을 계승한 것이다. ‘중화’는 본디 특정 지역이나 종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동아시아 유교문명 그 자체를 뜻하는 용어였다.1) 이 전통적 호칭을 국명으로 사용한 것은 청말 배만(排滿)사상에 기반을 둔 한족(漢族) 중심의 민족주의 혁명가들의 구호인 ‘오랑캐를 몰아내어 중화를 회복하고 민국을 창립한다’(驅除韃虜, 恢復中華,創立民國)에서 연유하며, 1907년 5월 장타이옌[章太炎](炳麟, 1869~1936)이 『민보(民報)』에 발표 한 「중화민국해(中華民國解)」에서 이론적 뒷받침을 받는다.2) 하지만 신해혁 명 이후 전개된 국가건설 과정에서 ‘중화’는 특정 민족을 배제하는 배타적 논리 에서 벗어나 지정학적으로 결정된 중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 집단을 포괄하는 ‘중화민족’이란 개념으로 발전하였다.3) 다음으로 ‘인민’이란 용어는 1948년 9월에 내려진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를 따라 각급 단위 정부와 각종 공공기관의 이름에 들어가게 됐으며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4)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마오쩌둥사상에 근거한 인민민주독재[人民民主專政]를 구현하는 정치공동체임을 표상한다. 특히 ‘국민’이 아닌 ‘인민’을 내세운 것은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와의 차별성을 두드러지게 만든다.5) 마지막으로 ‘공화국’은 세습군주제가 아닌 인민에 의해선출된 대표자들이 헌법에 의거해 통치하는 민주국가라는 의미이다. 후술하듯 ‘민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정한 것은 마오쩌둥사상의 핵심인 ‘신민주주의’ 강령에 기초하는 새로운 국가를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전에 세워진 중화민국과 차별화하려는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요컨대 ‘중화’는 계승하지만 국부(國府)와 달리 ‘국민’과 ‘민국’을 각각 ‘인민’과 ‘공화국’으로 대체한 것이다.6)
오늘날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국명을 당연시 여기지만 그렇게 결정된 내막은 꼼꼼하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 국호(國號) 결정 과정은 특히 중공 지 도자들의 국가주권에 대한 인식과 변경지역 영토주권에 대한 입장의 추이를 잘 반영하기 때문에 근현대 중국의 국가체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중국 본토에서조차 오랫동 안간과되어왔다.7) 이글은 근래에 나온 국명에 관한 짤막한 단편적 논의를 정리해 소개하기보다는, 나라 이름의 변화를 통해 드러났던 연방국가 건설방안으로부터 단일국가 수립이라는 이행과정을 1921년 중공 창립부터 1949년 9 월까지를 아우르는 통시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우선 애초부터 중공 지도부가 국명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내정한 것은 아니었다. 중공 초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1920년대에는 ‘중화연방공화국(中華聯 邦共和國)’, 1930년대에 들어서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中華蘇維埃共和國)’ 또는 ‘중화소비에트연방’이라는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대장정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지도력이 확립된 이후에도 국가 명칭은 수차례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공 산혁명 성공 이후 세워질 국가의 모습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 마오쩌둥의 중대선언들 가령 1940년 1월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 1945년 4월 「연합정부론[論聯合政府]」, 1949년 6월 중공 28주년 기념연설인 「인민민주전정론 [論人民民主專政]」에서 나라 만들기 과정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인 국명 문제는 잠정적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글에서 밝히듯이 「신민주주의론」에서는 ‘중화민주공화국(中華民主共和國)’으로 칭했고, 이후 「연합정부론」에서는 ‘중화민주공화국연방(中華民主共和國聯邦)’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1948년에 접어들어 비로소 중공 중앙 정치국 문건에 ‘중화인민공화국’이란 단어의 용례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를 최종 선택하고 대외로 공표한 것은 신정권 수립 불과 몇 주 전인 이듬해 8월에서 9월 초 사이였다.
그렇다면 중공 지도부는 왜 국호 확정을 마지막까지 미룬 것일까? 필자는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로 민족연방제 실시 여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뒤에서 상론하겠지만, 민족연방을 만든다는 구상은 중공 탄생 당시부터 일관되게 유지된 당의 노선이며 심지어 정부 수립 예정일이 40일도 채 남지 않았던 1949 년 8월 22일 중공 중앙 내부문건에도 나타난다. 사실 국가 이름을 정하는 문제 는 단순히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규정하는 문제를 넘어 민족독립, 민족자치, 평등자결권 같은 민족 문제와도 불가분의 관계였다. 즉 변경지역에 대한 영토 주권 문제였다. 이는 또한 이론적 난제이기도 하였다. 하나로 통일된 단일 공 화국을 만든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사상과 더불어 이론의 근간을 이루는 레닌주의적 민족연방제 노선과는 사뭇 다른 결정이었다. 다수의 민족 공화국으로 구성된 국가연합인 소비에트연방은 다름 아닌 레닌과 스탈린의 민족이론과 정책을 바탕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명 결정 과정은 『춘추 공양전』에서 기원한 중국 전통사상의 핵심인 대일통(大一統) 관념을 따른 단 일제와 볼셰비키 방식을 따른 연방제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의 문제 이며 소위 ‘중국특색 사회주의’의 특징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8)...
국문초록
이 글은 1921년 중국공산당 창립부터 건국 전야인 1949년 9월까지를 아우르는 통시적 관점에서 혁명 이후 세워질 국가 명칭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한 다. 처음부터 중공 지도부가 현재의 국명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중공 초 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1920년대에는 ‘중화연방공화국’, 1930년대에 들어서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또는 ‘중화소비에트연방’이라는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1940년대 후반 국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안이 혼재되어 있었으며 중공 지도부가 작성했던 각종 문건들을 추적해보면 대략 ‘중화민주공화국’, ‘중화인민민주 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순으로 변화하였다. 이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것은 연방제 도입에 대한 중공의 태도 변화이다. 변경지역 민족들의 자결권을 보장 할 제도적 장치인 민족연방제 안은 중공 지도부가 건국이 거의 임박할 때까지 그 채택 여부를 놓고 고심하였다. 비록 1940년대 초부터 이미 연방제의 핵심이라 할 연방으로의 자유로운 가입과 탈퇴를 인정하는 민족자결권에 대한 강조는 점점 줄었지만, 적어도 1948년까지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중공 지도부는 민족 문제에 대한 볼셰비키 방식을 받아들여 각 민족의 자결권과 민족 간 평등 권에 입각한 ‘중화민주공화국연방’을 세운다는 주장을 하였다. 중공 내부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국호를 확정한 것은 1949년 8월 중순이었지만 이를 대외적으로 선포한 것은 9월 초였다. 그 몇 주 사이 연방국가 방안은 완전히 폐기됐으며 동시에 연방제 불가론에 대한 당의 공식 입장도 최종 정리되었다. 따라서 국가 이름을 정하는 문제는 연방제 채택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중국 의 국호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결정된 과정 그 자체는 건국 이전 중공 지도부의 국가주권에 대한 인식과 변경지역 영토주권에 대한 입장의 추이를 잘 반영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연구는 근현대 중국의 국가체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국문 주제어
중화인민공화국, 연방국가, 단일국가, 소수민족, 중국공산당, 마오쩌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