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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둘째 주)
“지금” 안에 있는 보물: 물이 포도주로
사62:1~5; 고전12;1~11; 요한2:1~11
지난 주일에 동방박사 이야기와 예수님의 세례 받으시는 이야기가 주현절 본문으로 읽힌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현절 본문의 대표적인 또 하나의 본문은 오늘 요한복음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주현, 즉 에피파니(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현현하셨다)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는 매우 훌륭한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져 맥 빠지고 거의 파장이 될 뻔 했던 혼인잔치를 다시 생기 넘치고 흥이 가득한 혼인잔치로 만드셨는데, 그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써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신앙을 받아들이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변모하도록 부르는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우리 삶을 아주 특별한 삶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하는데, 그 특별한 삶이란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삶이라든가 다들 부러워하는 셀럽이 되는 그런 삶이 아니라,(물론 그런 삶을 살 수도 있겠지요) 어떤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삶이 자기의 삶인 것을 깨닫고, 그 삶과 친해지는 삶입니다. 그때 우리 안에 생명(life)이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삶(life)을 사는 것이지요.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변모하도록 부르신다는 사실을 우리가(저 자신을 포함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지금과는 다른 어떤 사람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으로만 착각합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미래로, 아니면 애써서 도달하는 목표로 생각합니다. 늘 지금을 놓치고 맙니다. 오늘 공동기도에서 기도한 것처럼, 우리는 오직 “지금”이라는 길만 걸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길만이 나의 길이고, 더 나아가 “지금”이라는 길만이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금”에 현존하시며,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지금”입니다.
출애굽기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저보고 저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들이 저에게 당신의 이름을 물을터인데, 내가 그들에게 가서 당신을 뭐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지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나는 “에흐예”다, (I am that I AM) 라고 합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I AM’ 이라고 하시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여기서 I AM을 다른 말로 하면 NOW입니다. I AM은 시간 속에 매인 분이 아닙니다. 어떤 형상에 매인 분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바탕”이라고 하고, “근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말론적(결정적인, 카이로스의, 지금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헬렌 말리콧라는 사람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나는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내 이름은 “I AM”이다./ 주님께서 잠시 말씀을 멈추신 후에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네가 과거를 살아갈 때/ 과거의 실수와 후회 속에 살아갈 때/ 너의 삶은 참으로 힘들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I Was(나였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미래를 살아갈 때/ 미래의 문제와 두려움으로 살아갈 때/ 네 삶은 참으로 힘들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I Will Be(나일 것이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이 순간, 지금을 살아갈 때/ 너의 삶을 그렇게 힘들지 않다/ 내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I AM(나다)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사야서62장에서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이 구원받기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한동안의 흥분이 가신 뒤에, 또 똑같은 삶이 계속되던 이스라엘에게 무력감과 실망감이 찾아왔습니다. 쇄락해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쇄락은 생명을 잃어 가는 것이고, 사랑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이사야62장은 바로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끌어당김”을 주목해볼 수 있습니다.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내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쉬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쉬자 않습니다. “지금”은 쉴 수가 없습니다. 기억되지 않은 과거, 기대하지 않는 미래는 잠시 사라지거나 쉴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쉴 수가 없습니다.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을 영원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를 생명과 사랑으로 끌어당기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의 이 말씀을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본다면 저는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뭔가 그럴 듯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나로 만들어 주겠다는 예언이 아니라, 이 말씀은 “지금” 일하시는, 끌어당기시는 하나님의 본성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총각이 처녀와 결혼하듯이, 너의 아들들이 너와 결혼하며,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이, 네 하나님께서 너를 반기실 것이다.” 결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이 비유는 오늘 요한복음의 가나의 혼인잔치의 그림자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아주 작고 이름 없는 마을에서 있었던 혼인잔치가 사람들이 대대로 기억하는 아주 환상적인 사건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원한 시간이 어떻게 물리적인 시간 안으로 들어와서 그 시간을 변모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본보기를 보게 됩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혼주가 당황해 할 때 일어난 일이 우주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혼인잔치 때 행하신 일은, 후일에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이루실 일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많은 상징들과, 매우 정교한 이야기 구조와 전개로 유명하지요. 어떤 단어 하나도 그냥 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야기 시작에서 “사흘째 되는 날”이라고 시작되는데, 어디부터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말일까요? 그것은 앞장(1장) 29절, 35절, 43절에 보면, “다음 날”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3번 나오지요. 그럼 오늘 본문에 사흘째 되는 날은 언제입니까? 7번째 날이지요? 7번째 날은 하나님의 창조가 끝나고 안식의 기쁨을 누리던 날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의 혼인잔치는 창조의 완성이 이루어진 안식일을 의미하고, 동시에 혼인잔치 자체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상징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좀 전에 이사야서 62장에서도 드러나지요. “총각이 처녀와 결혼하듯이,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이, 네 하나님이 너를 반기실 것이다.”) 혼인은 종말론적 기쁨을 상징합니다.
또 유대사람들의 정결예법에 따라 놓여진 여섯 개의 물 항아리가 나옵니다. 이 물항아리는 사람들이 들며날 때 정결례를 행하기 위해 손을 씻는 물을 담는 그릇이었지요. 이 정결례의 물은 불완전한 옛 언약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도 종말론적(결정적인, 카이로스의, “지금”의) 기쁨과 삶의 풍요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결혼잔치에는 반드시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율법의 질서를 은총의 질서로 바꾸어 놓으셨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나 미래의 생명을 지금의 생명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은 과거지요. 예언은 미래입니다. 율법도 사라지고 예언도 그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이름하는 지금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가나라는 아주 조그만 마을에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지요. 예, 여기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잔치에 사용하는 음식 하나가 떨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잔치가 파장 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 일행이 그 잔치에 도착을 했고,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한 말을 직역을 한다면, “그들이 더 이상 포도주를 가지고 있지 않구나”라는 말입니다.
우리 삶 속에도 이런 날이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들이 더 이상 포도주를 가지고 있지 않구나!” 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삶의 생기와 활력이 고갈 되어 버려 삶의 동력을 가지지 못하고 무기력 속에 빠지는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무감각,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무능력 속에 빠지는 때가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싸늘하게 말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때가 오지 않았다는 말은 또 무엇인지, 무슨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지 실감이 오지 않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런 저런 말로 설명을 하는데, 그렇게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내 내면의 은밀한 싸인에 주님이 바로 이렇게 “싸늘하게” 응대하시는 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주님은 내 내면의 을씨년스러운 풍경과 아무 상관없는 듯이 얼굴을 돌리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뜬금없이, 정말 뜬금없이 일꾼들에게 지시합니다.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오늘 기사의 불가사의한 전개입니다. 우리가 이 말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삶에서 우리는 어떤 논리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런 논리가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우리는 “이게 뭐지?”, 이유와 논리를 찾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모든 일에 다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좋은 일이 닥치면, 선물이니 은혜니 하면서 기뻐하며 받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일에는, “우째 이런 일이?” 하면서 혼란스러워합니다.)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저는 이 말을 “지금을 사세요.”라는 말로 듣습니다.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이 말은 과거와 관련된 말이 아니고, 또 미래와 관련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미래의 일도 아닙니다. 이 말은 “지금”과만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금에 대한 승복입니다. 우리 안의 마리아도 우리에게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고 속삭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거의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들어도 외면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과거와 미래에만 가 있기 일쑤입니다. 다시 말해 생각으로 가버립니다. 지금은 모순과 역설을 넘어서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에는 온전한 승복이 있습니다. 지금에는 “아멘”만이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거부하면, 우리 삶은 고단해집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정결예법에 따라 놓여있는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물 항아리 하나는 물동이 두 세 동이가 들어가는 양이라고 하니까 한 항아리는 80에서 120리터의 양의 물이 드는 항아리였다고 합니다. 적지 않은 양입니다. 아니 물이 귀한 팔레스틴에서는 엄청난 양입니다. 예수님은 일꾼들에게 물을 채우라고 하셨고, 다 채우자 잔치를 맡은 이에게 떠다 주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일꾼들에겐 힘든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많은 양의 물이니, 물을 긷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데 도대체 이 짓을 왜 하고 있어야 하는지, 그것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데, 왜 큰 항아리 6개에다 물을 채워놓아야 하는지?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은, 어쩌면 무의미하게 보이는 이 일, 즉 큰 항아리 여섯 개에다 물을 채워 넣는 순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일어나는 모든 의심과 회의 가운데서도 묵묵히 그 일을 해낸 일꾼들의 성실함으로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무의미한 일처럼 보이는 일에 도망가지 않고 한 동이 두 동이 채워 넣는 일로 인해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기적과는 다르게, 예수님의 첫 번 기적은 예수님 혼자 일으킨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전한 마리아가 있었고, 무엇보다 성실하게 물 항아리를 채운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예수님의 모든 다른 기적도, 그 안에 순종과 승복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말씀하셨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 혼자 일으킨 기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이적은 “지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섯 개의 항아리가 놓여 있는 곳입니다. 여섯은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물은 정결례라는 불완전한 옛 언약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더 잘 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순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더 깊게 인식됩니다. 우리가 온전함에 이르려고 한다면, 우리는 밝은 빛 가운데서만 온전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가장 밝은 빛은 “지금”이라는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아는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 삶이 솟아나는 근원이자 바탕입니다. 하나님의 I AM이 나의 I am이 되는 자리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예, 우리는 분명 불완전함의 상징인 여섯 개의 물 항아리에 물을 길어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약함과 무의미함, 가치 없음과 무기력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실존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생명체가 싸워야 하는 실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의미한 물 긷기가 이루어지는 “지금”에는 아무 모순도 약함도 무의미함도 없습니다.
여러분,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은 어디서 올까요? 지금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마리아가 일꾼들이 받아들였던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루미의 시 “여인숙”을 한번 읽어봅시다. 지금을 사는 길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