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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2호선 이대역 앞, 빛바랜 동네가 옹송그리듯 자리한다. 좁은 골목과 먼지 낀 간판 사이에 감성 넘치는 작은 가게가 하나둘 들어섰고, 담벼락은 화사하게 칠해졌다. 환한 골목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손바닥만 한 봄볕과 보드라운 바람이 머무른다. 아현동에서 염리동까지 이어진 골목으로 사붓사붓 산책을 나선다.
[왼쪽/오른쪽]범죄 예방 디자인 마을로 선정되어 한층 밝아진 염리동 / 계단에 꽃이 핀 마을 [왼쪽/오른쪽]노란 대문은 지킴이의 집. 비상벨을 2초 이상 눌러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 철거되는 염리동. 담 곳곳에 이삿짐센터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었다. [왼쪽/오른쪽]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은 동네라 쉴 수 있는 의자가 곳곳에 놓였다 / 소금언덕 프로젝트로 곱게 칠해진 화분들
빛바랬지만 환한 골목길
'소금 마을' 염리동과 '언덕 마을' 아현동, 이웃한 두 동네를 소금언덕이라 부른다. 염리동은 서울에 소금을 공급하던 곳으로, 소금배와 소금 장수가 드나들었다. 그 후 시간이 멈춘 듯 1970년대 풍경에 머물다가 몇 년 사이 젊은이들이 알음알음 들어와 감성 문화를 만들어갔고, 소금언덕 프로젝트로 마을이 한층 밝아졌다.
원래는 어두운 골목에 오래된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스산한 분위기가 나는 동네였다. 2013년 서울시가 염리동을 범죄 예방 디자인 마을로 선정한 뒤, 노란 가로등이 세워지고 다정한 벽화가 그려졌다. 또 해당화길과 라일락길 등 6개 길이 들어선 소금길이 생겨났고, 주민을 위한 운동 코스도 만들어졌다. 소금길은 심폐 지구력을 증진하고 열량을 소모할 수 있는 파워워킹 코스와 고즈넉하고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사색의 길로 구성된다.
먼지 낀 낯선 간판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전파사, 이발소, 통닭, 목욕탕 등 서서히 지워지는 언어를 새긴 간판이 무심한 듯 붙었다. 세월에 바랜 색이 더 멋스러운 철제문과 갈라진 담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풀들이 만들어낸 풍경도 정겹다.
염리동 일부는 재개발 지역으로, 요즘 이사가 한창이다. 그 자리에 있던 상점들은 텅 비고, 벽에는 이삿짐센터 전단지가 붙었다. 그 풍경이 아릿해 발걸음이 가볍지 않지만, 젊은이들이 조금씩 가꾼 동네는 여전히 소담하다.
[왼쪽/오른쪽]언뜻가게 주인장 피터 씨 / 2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는 부산슈퍼체인 [왼쪽/오른쪽]식물을 보살피는 식물성 사람들 / 식물성에는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아도 될, 튼튼한 식물이 대부분이다.
따뜻한 섬 같은 작은 상점들
소금길 산책이 시작되는 '언뜻가게'는 그룹 피터아저씨의 싱어송라이터 피터 씨가 운영하는 식당 겸 오픈 키친이다. 언뜻가게가 서울시 마을예술창작소로 지정되어 소금언덕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피터 씨는 음악 활동이나 가게 운영 외에도 다양한 일을 한다. 길가에 놓인 화분에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리고, 골목 곳곳에 쉴 수 있는 의자를 만들었으며, 마을 산책자를 위한 소금언덕 지도를 제작해서 무료로 배포했다.
풍년쌀상회를 인수해 언뜻가게를 연 때가 2014년 가을. 카레와 파스타 등을 파는 식당이지만, 그는 자주 가게를 비운다. 마을 사람이나 외지 사람 누구나 쉬었다 가도 괜찮은 곳이다. 친구들이 모여 음식을 해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오픈 키친으로도 활용된다. 예약하면 20명 정도 소소한 파티를 열 수 있다.
언뜻가게 옆에는 그 자리 그대로, 20년이 넘은 '부산슈퍼체인'이 자리한다. 인심 좋은 아저씨가 가게를 지킨다. 15년 전만 해도 이 길에 미니슈퍼와 우리슈퍼, 총각슈퍼 등 7개가 넘는 슈퍼가 줄지어 있었다. 편의점이 아니지만 24시간 운영할 정도로 활기를 띠었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취객을 위해 늘 불을 밝혔다.
"인수하기 전부터 이름이 부산슈퍼였어요. 전 부산 사람이 아닙니다. 쭉 서울에 살았어요. 다들 오해하시더라고요.(웃음)"
염리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식물성'에 닿는다. 화려한 꽃이나 화분 대신 다육식물과 선인장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무심한 듯 놔두면 스스로 자라는 틸란시아와 립살리스 등 식물 70여 종이 봄볕을 흡수하고 있다. 식물도 팔고 전시도 하는 문화 공간이다. 4월에는 장한나 작가의 전시 <같거나 다른>이 열릴 예정이다. 죽은 식물을 오브제로 감성적인 작품이 걸린다.
[왼쪽/오른쪽]여행책방 일단멈춤, 따스한 빛이 드리워지는 오후 / 소소하고 특별한 독립 출판물을 볼 수 있는 일단멈춤 [왼쪽/오른쪽]퇴근길 책한잔의 주인장은 자신을 자발적 거지라 부른다. / 퇴근길 책한잔 주인장이 취향에 따라 고른 책들 퇴근길에 들르고 싶은 책방
오래된 동네의 소담한 가게 주인장
식물성에서 몇 걸음 가면 빈티지 민트색으로 꾸민 가게가 보인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동네 책방이다. 출판사와 잡지사 에디터를 지낸 주인장이 여행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여행책방 일단멈춤'을 열었다. 여행 가이드북이 아니라 여행하기 전이나 여행 중에 혹은 돌아와서 읽기 좋은 다양한 책이 있다. 에세이를 포함한 문학, 인문사회 서적 그리고 독립 출판물 등이다. 이곳에서는 책이나 여행과 관련된 소박한 워크숍도 종종 열린다.
2015년 봄에 오픈한 '퇴근길 책한잔'도 눈에 띈다. 퇴근길 편하게 들러 커피나 술을 마시는, '북 앤드 펍(Booknpub)' 콘셉트로 꾸민 동네 책방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소박하게 산다고 자발적 거지라 칭하는 주인장이 있다. 가게 분위기에 맞는 독립 출판물과 주인장이 읽은 책 중에서 고른 목록으로 가득하다. 영화 상영회, 혁명적 책 모임, 먹고사는 일을 고민하는 '백수 토론' 등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왼쪽/오른쪽]카페 밀랑스의 정성 듬뿍 사과청주스와 마카롱 / 카페 더 퍼즐, 완성을 위해 집중하는 시간 [왼쪽/오른쪽]낡았지만 정감 가는 아현동 은성순대국의 외관 / 정직한 재료로 만든 순댓국 한 그릇
'카페 밀랑스'는 수제 디저트 가게다. 주인장이 개발한 50여 가지 마카롱을 맛볼 수 있다. 보통 하루에 6종씩 마카롱을 내놓는다. 무화과와 크랜베리 등 과일이 들어갈 때는 생과일을 아낌없이 넣어 씹는 맛을 살린다. 정성으로 만든 마카롱은 달지 않고 부드러워 건너 동네 사람들도 찾아온다. 우유에 말아 먹으면 맛있는 마카롱꼬꼬씨리얼은 이 집의 특별 메뉴다.
"이 동네가 마카롱과 어울릴까 고민했지만, 서울이 아닌 듯 소박하고 빈티지한 느낌이 좋았어요."
'카페 더 퍼즐'은 퍼즐을 좋아하는 주인장이 연 카페다. 음료를 주문하면 150피스 퍼즐을 맞춰볼 수 있고, 그 이상은 구입한 뒤 맞출 수 있다. 완성하지 못하면 다음에 올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해주는 서비스도 있다.
다시 아현동으로 건너간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전통시장에 닿았다. 떡볶이, 식혜, 크로켓 등 주전부리가 재미를 더한다. 시장의 소문난 맛집 '은성순대국'은 맛도 맛이지만 주인장의 이력이 독특하다. 1년에 한 달씩 가게 문을 닫고 오지를 여행하는 주인장 부부. 단골들의 원성이 자자하지만 여행의 재미에 푹 빠진 그들이다. 하루 한 솥을 다 팔면 마감하는 이곳은 일요일에는 오후 늦게, 평일에는 저녁쯤 닫는다. 담백한 순댓국 한 그릇은 산책길의 허기를 든든하게 채워준다. 쫄깃한 면발이 후루룩 넘어가는 '수칼국수', 첨가물을 빼고 건강한 빵을 만드는 '상식베이커리', 영양을 꾹꾹 눌러 담은 주먹밥집 '웃어밥', 착한 가격에 맛도 좋은 '좀비수제버거'도 들르기 좋다.
글, 사진 : 박산하(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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