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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재위 15년 만에 그를 흔히 '폭군' '패륜군주'로 혹평하고 있다.
그러나 승자의 기록 아래 숨겨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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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해군은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인 패륜군주다!
광해군은 조선 제 15대 왕으로서,
1575(선조 8)년에 태어나 1641(인조19)년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빈 김씨다.
공빈김씨 소생의 첫째 아들 임해군(臨海君) 진(璡)을 세자 삼으려 했으나 당시 조정에서는 광패(狂悖)하다는 이유를 들어 제외되었고,
1591년. 서인의 정철을 중심으로 광해군을 왕세자로 추천했으나,
선조는 인빈 김씨의 둘째 신성군에게 마음이 가 있던 상황이라 수락되지 않았고 정철은 강계에 위리안치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20만 대군으로 쳐들어온 왜군이 부산에서 동래진을 거쳐 충청도까지 북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는 피난길에 나선다.
호위군사들마저 도망가고 100여 명의 신하들이 뒤따르는 피난 행렬.
선조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성을 버린 것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조선 사대부 체제의 한계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임금의 피난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크게 분노하여 노비문서를 맡고 있는 장예원(掌隸院)과 형조(刑曹)에 불을 지른다.
"난민이 크게 노략질을 하고 불을 질렸다." (亂民, 大掠, 放火) - <선조수정실록> 개성에서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평양으로 옮기고 하는 수 없이 광해군을 왕세자에 책봉한다.
선조는 평산에 이르러 요동내부책(遼東內附策)을 내비추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백성을 버리고 소수의 비빈들만 데리고 요동으로 들어가 명나라에 의탁하려는 계획이었다.
"요동으로 건너가려 하다." (赴遼之意) - <선조실록>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에게 조정을 둘로 나누어 통치하는 분조(分朝)가 이루어진다.
전쟁 전체를 통괄할 의지가 없었던 선조가 왕세자 광해군에게 국왕의 권한 일부를 떼어준 것이었다.
광해군은 의주에서 영변, 맹산, 곡산, 강원 이천까지 내려가며 악화된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 활동을 격려하며 항전 활동에 앞장 선다.
"적도들이 무너졌고 승세를 타고 추격 하였다." - <선조실록>
그는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관군과 마찬가지로 의병에게도 군량을 보급하고 면세 혜택을 주며,
강화도, 의주, 경상도, 전라도의 교통로와 통신망을 확보하고 의병을 조직적으로 통제해 나갔다.
광해군 휘하의 관군과 의병들은 죽음을 무릎쓰고 적과 싸웠다. 호남 최초 의병장 김천일(金千鎰1537~1593)은 광해군의 명령을 지방에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이 오직 제군이 적을 죽이는 데 달렸으니 힘써 큰 공을 길러라." <광해군이 의병 김천일에게 보낸 편지 中>
"행조(전시조정)의 명령이 호남. 호서 지방까지 전해졌다." (行朝命令始達于兩--矣) - <건제문집(健齋文集)-김천일시문집>
선조는 전쟁에 대처하지 못했다.
차자(次子)이지만 전쟁에 탁월한 역할을 한 광해군은 백성과 관료들은 물론 명나라의 인정을 받게 된다.
명은 광해군에게 군사 일을 총독하라 명하고 아버지 선조의 무능함을 노골적으로 질책한다.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군사 일을 총독하도록 하라"
"부왕의 실패를 만회하여 종사가 보존도로록 하라" - <선조실록>
1594년 (선조27년). 명에 윤근수(尹根壽)를 보내 세자책봉을 주청하지만 명은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거절했다.
1600년(선조 33).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고 1602년 선조는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 ~ 1632)를 정비로 맞이하여 1606년에 그녀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다.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선조는 방계승통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고,
그러기에 더욱 적자를 원했지만 후궁들에게서 낳은 13명의 아들만 있는 상황에서 임란 중 어쩔 수없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했던 것이었고,
뒤늦게 인목대비에게서 적자 영창대군을 얻게 되자 선조는 태도를 바꾸어 신하들에게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하게 된다.
"감히 이를 부탁한다." - <광해군일기> (敢以此托之)
그리고 광해군을 대하는 선조의 태도는 더 냉담해진다.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라." - <당의통략>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광해군이 문안할 때마다 선조는 모진 말을 내뱉았고 그 충격에 광해군은 땅에 엎드려 피를 토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광해군은 궁지에 내몰리고 있었고 왕위 계승은 불투명하게 되었다.
임란에서 의병장을 배출했던 조식 문하의 북인(北人)들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다시 둘로 갈라졌다.
적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 중심의 다수의 소북파와 차자지만 광해군을 지지하는 정인홍 중심의 소수의 대북파.
선조41년. "편히 잘 잤다."고 했던 선조가 점심으로 나온 찹쌀밥을 먹고 갑자기 죽는다.
"찹쌀밥을 진어했다."
"상(선조)께서 기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 - <광해군일기>
신하들 대부분은 영창대군편이었으나 영창대군이 너무 어렸으므로 광해군의 즉위를 막지 못했다.
3.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조선 시대 세법>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토지에 대한 조세(租稅),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役), 가호(家戶)에 대한 공납(貢納)이고,
역은 다시 군역과 부역(노동력)으로 나누어진다. (有田則有租 有身則有役 有戶則有貢物)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조세, 공납, 역의 수취제도는 많은 병폐를 낳았다.
조세(租稅)제도를 보면, 과전법, 직전법, 관수관급제, 녹봉제를 거치면서
국가가 지배하는 토지 제도가 무너지고, 양반 지주들의 토지 사유화가 확대되며,
일반 백성들을 소작농(전호佃戶)으로 전락하는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일반화 된다.
자영농이 국가에 내는 조세는 1/10세였지만, 소작농민이 개인 양반지주에게 내야 하는 조세는 수확의 절반, 즉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였으니,
상대적으로 소작농민들의 부담과 빈곤은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노비, 유랑민, 초적, 나아가 조선 후기 임노동자로 전락한다.
군역제도는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양인(양반, 중인, 평민) 남자들이 군역에 임해야 하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였지만, 실제 양반들은 군역에서 면제되었고,
16세기로 가면서 사회가 안정되자 군역의 의무가 허술해지면서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는 대납(代納)과, 포(布)를 내고 군역을 면제 받는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라는 편법이 운영되어 국가 재정 수입 증대쪽으로 기울면서 훈련이 미흡하거나 군적에 허위로 올라 있는 군인의 숫자가 더 많았으니,
임란 당시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20일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시켰다는 건 조선의 군사체제가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며,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은 것도 그 군역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만성적인 병폐라 하겠다.
지방특산물을 내는 공납은 백성들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것이었는데,
집집마다(가호-家戶) 할당되는 것으로 부자인 양반은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것이었지만 일반 백성들에겐 부담이 컸는데다가,
수령과 공납을 대신 중앙에 납품하는 방납인(防納人)이 짜고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을 납부하게 하거나 이중 삼중으로 내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은 몇 배, 몇 십 배로 늘어나는 방납(防納)의 폐단이 있었다.
이러한 세법의 병폐는 백성들을 심각한 빈곤에 허덕이게 하고 임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점차 신분제에 모순과 왕조와 지배층에 불신을 드러내며 새로운 세상, 변화와 개혁을 원했지만,
조선 양반 사대부들은 신분 제도가 주는 특권 의식을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다.
1608년. 2월 1일.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전란의 피해를 복구해야 하는 산더미 같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는 물론 농지는 1/3로 줄었고 국가 재정은 바닥났으며, 궁궐과 불국사(佛國寺)와 사고(史庫) 등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광해군은 먼저 민생 안정 문제에 매달린다.
1608년.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기도에 처음으로 대동법(大同法) 실시한다.
대동법은 임란 이전에 율곡 이이가 이미 주장했던 것으로 지방 특산물을 받치는 공납(貢納) 대신에 쌀(米)이나 포(布), 전(錢)로 납부하는 방식으로,
결국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에게 세금 부담을 늘이고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제도였다.
백성들은 크게 환영했지만 양반 지주들과 방납업자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 확대 실시되지 못하였고,
1708년 숙종때 가서야 전국적으로 실시되니 대동법이 시행하는데 자그마치 100년이 걸린 것이다.
가진 자가 더 무섭다는 생각,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들의 특권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 여기서도 절감하게 된다.
광해군의 전란 복구 정책은 이어졌다.
양전사업과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국가 재정 수입을 늘이고,
창덕궁(昌德宮) 재건공사를 1608년에 끝내고, 경덕궁(慶德宮)· 인덕궁(仁德宮)· 자수궁(慈壽宮)을 중건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등 전쟁으로 없어진 여러 서적을 다시 간행하고,
춘추관과 충주. 청주 사고(史庫)에 보관했던 역대 왕의 <실록>들이 불타자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여 중요한 전적(典籍)들을 보관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개혁 정책은 양반 관료층의 반대로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정통성과 지지 기반이 약했던 왕이었으므로 실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1613년 ( 광해5년 ) 문경 조령에서 은장수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른바 '7서지옥(七庶之獄)'이다.
주모자들은 명문가 서얼들로서 관직에 나갈 수 없는 현실에 불만을 갖고 난을 일으켰으나,
이이첨과 김개, 정항 등 대북파에 의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로 부풀러져,
결국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南)은 사약을 받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정협(鄭浹), 신흠(申欽), 박동량(朴東亮)·한준겸(韓浚謙) 유영경(柳永慶) 등 다수의 소북파가 화를 입어 정계에서 내몰리며,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귀향가 위리안치(圍籬安置) 시키고 광해군에게 8개월에 걸쳐 사사할 것을 종용하지만 허락치 않는다.
"윤허하지 않는다."
"이 일을 어찌 어린 아이가 알았겠는가. 나는 차마 못하겠다."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7살의 영창대군은 온돌방에 불을 뎁혀 죽이는 증사(蒸死)를 당한다. 그리고 사건에 연루된 조정 안팎의 서.남인 세력까지 일시에 제거된다.
"강화부사 정항이 고을에 도착하여 위리안치 주변에 사람을 엄중히 금하고 음식물을 넣어주지 않고 침상에 불을 때서 눕지 못하게 하였다."
"의(영창대군)가 창살을 부여잡고 서서 밤낮으로 울부짖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 <광해군일기>
"대북파의 영수 이첨이 주도하여 영창대군을 살해했다." - <연려실기술>
이 계축화옥(癸丑禍獄)으로 실권을 잡은 대북파는 여세를 몰아 인목대비 폐모론까지 강경하게 주장하였고,
광해군은 강경히 거부하였으나 1618년. 결국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서궁(西宮)에 유폐한다.
어느덧 개혁의 실세였던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는 정국을 장악하여 왕권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4. 광해군이 배은망덕하여 오랑캐를 정성껏 대우했다? - 광해군의 중립외교!!!~
1618년(광해10년). 새로운 국면에 부딪히게 되는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명이 후금과의 전쟁을 위해 군대를 요청한 것이다.
후금의 성장을 주시하고 있던 광해군은 임란에 명에 은혜를 입은 것은 사실이나 강성해가는 후금과 대립하는 것은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며, 전쟁후 복구가 덜된 상태에서 훈련되지 않은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하고, 신하들은 명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강경히 맞선다.
"훈련 안된 군사를 적의 소굴로 몰아넣는 것은 마치 양떼를 가지고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같으니 아무런 도움 못된다."
"지금 큰소리를 치는 자들은 군사력을 헤아리지도 않고 무리한 의논만을 하고 있는데 그들(후금)과 맞싸우다가 잘못된다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망극한 은혜가 있으니 차라리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머리카락을 뽑아 짚신을 삼는다 하더라도 그 은혜 갚기 부족합니다." - <광해군일기>
광해11년. 명의 압력과 대신들의 명분론에 밀려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을 중심으로 조선군 1만 명을 파병하게 된다.
조선군이 출병하기 전, 광해군은 강홍립을 따로 만나 당부한다.
"중국 정세를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강도를 찾으라" - <광해군일기>
압록강을 넘어 명과 연합하여 보름만에 심하전투에서 후금과 격전을 벌이지만 누르하치의 기마병에 대패해 항복하고 만다.
"갑옷을 벗고 와서 항복하였다."
"(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했다." - <광해군일기>
강홍립은 부득이 출병했다는 것을 후금에 알리며 조선과 후금의 긴장을 완화하는 노력을 계속 한다.
후금은 강홍립의 말을 받아 들여 명의 압력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조선의 입장을 이해한다. 후금과 조선 사이에 더 큰 긴장과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강홍립은 후금 내부의 정보를 계속 광해군에게 보냄으로서 광해군으로 하여금 현실적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돕는다.
"지금 출병한 것은 부득이해서이다." - <자암집(종사관 이민한 일기)>
"종이(밀계)를 오려서 노끈으로 꼬아 말안장에 얽어 보냈다." - <연려실기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정에서는 강홍립은 역적이라며 그 가족까지 모조리 구금하라 청하지만 광해군은 듣지 않는다.
1622년(광해14년) 패전 이후에도 명은 계속 군대를 요청하고 대신들은 출병을 강요하고 광해군은 거부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광해군 - "싸우다 잘못 되면 종사를 어찌할 것인가."
대신들 - "명에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광해군의 남다른 외교 노선에 점차 대북파들조차도 광해군에게 등을 돌린다.
그리고 1623년(광해15년) 서인 김유(金?)·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등이 능양군(綾陽君) 종(悰)을 받들어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무릎 꿇게 한다.
"먼저 이혼(李琿, 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 - <광해군일기>
그의 죄목은 세 가지였다.
광해군은 '폐모살죄'로 왕에서 군(君)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제주도 등에 유배되었다.
유배 도중 부인과 아들을 모두 잃고 18년의 유배 생활중 마지막 3년을 제주도에 위리안치 된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배은망덕이라 비난하며 새로이 <숭명배금정책(崇明排金政策)>으로 돌아선다.
그 결과 1627 후금의 침략을 받아 형제의 예로 강화 맺게 되고(정묘호란),
1636년 인조15년.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군신의 예를 요구하며 쳐들어온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12 ~ 1637. 1)을 겪으며,
인조는 전쟁이 일어난 두달만에 삼전도(三田渡, 서울 송파)에서,
청 태종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해야 했다. ('삼전도의 치욕')
인조반정은 광해군이 폐위된지 5년 만에 정묘호란을 맞았고, 병자호란으로 청과 치욕적인 군신관계를 맺었다.
인조를 비롯한 반정공신들은 청이 제시한 강화조건을 대부분 수용하고 화친을 맺었다.
명나라와 관계도 끊고 성(城)을 신축하거거 보수하지 않으며 매년 세폐(歲弊)를 내겠다고 약속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그 부인들과 척화파 3학사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 대신들과 수십 만 명의 조선 백성이 줄줄이 포로로 끌려 가 노예 시장에 팔렸다고 한다.
광해군의 몰락과 동시에 조선도 더없는 치욕을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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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 때 왕이었던 남자.
왕위에서 쫓겨난 비운의 군주, 광해군
실록중 유일하게 <광해군일기>만 중초본과 정초본이 함께 남아 있는데 중간본에 숱하게 고치고 지운 흔적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조의 서인정권은 광해군에게서 무엇을 그토록 지우고 고쳐야 했던가! 인조반정의 명분은 무엇이었는가?
돌이켜 광해군의 폐위는 명분이 될 수 없었다. 인조반정은 전란 극복에 힘써야 할 상황에서 발생한 시대착오적인 쿠데타였다. 당파의 자리에서 국왕을 부정한 쿠데타로 사실상 왕조 체제의 전면적 부정이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일방적 공격으로 시작된 불가피한 전화(戰禍) 였지만 정묘. 병자호란은 사실상 인조반정체제가 자초한 전화로서 반정체제의 시대착오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한 것이었다.
소중화(小中華) 사상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 다른 모든 사상을 억압하고, 인질 생활을 통해 개방적 현실주의주로 변모한 소현세자까지 독살함으로서 조선은 개방과 현실의 기회를 잃고 더욱 폐쇄적인 사회로 나아가게 했다.
광해군. 그는 17세기 시대 변화를 앞서 읽은 선구적 임금이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그가 취했던 중립외교는 현명한 것이었다. 국제적 감각으로 조선의 살 길을 모색한 진정한 군주였다.
승자의 역사가 남기지 않은 광해군의 진실을 오늘날 우리는 읽고 다시 역사 앞에서 정당한 평가를 해주어야 한다.
광해군의 시대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 '조선국왕수만세' 적힌 광해군 직령>
"가고픈 마음에 봄 풀을 실컷 보았고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깨었네 서울의 친지는 생사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낀 강 위의 외로운 배에 누웠네." - 유배 중 제주에서 쓴 광해군 시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