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3. 마흔아홉 번째 주.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1장)
신앙고백
찬송 14 구세주를 아는 이들
기도 김정수 권사
성경말씀 에베소서 4:1~6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홍시처럼 익어, 제 살까지도 떼어 주는 사람.
찬송 206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새 가족 임배근 성도(71) 박숙희 간호사 송호상 성도
광고 -. 코로나 집단(일부) 양성반응으로 보호자 방문 금지(12월까지)
1월 첫째 주, 직원 총회 (팀장? 신우회 총무? 임명)
찬송 492 나의 영원하신 기업
축도 아프니까 그만하세요. 주님도 아프고, 나도 아프잖아요.
항상 연말이 되면 쓸쓸해집니다.
이런 쓸쓸함은
마치 추위를 재촉하기라도 하려는 듯
콜록콜록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겨울바람입니다.
그래서 중환자실서 인공호흡을 하며 살려달라고 하는 신음 소리처럼
1분 1초까지도 아까운 생명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이 아까운 12월 같은 우리 인생을
나쁜 생각
나쁜 행실로 낭비할 수 있겠습니까?
1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절,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오늘 말씀은
이론이 아닌 실천적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설교도 항상 목회적 삶을 말합니다.
크신 목사님들께서는 시시콜콜 사소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작은 저는
삭케오처럼 뽕나무 위에서
매일의 일상을 생명을 붙들며 살고 있기 때문에
오늘 말씀처럼 실천적 일상이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아마 에베소서를 기록할 때가
주후 60년경 봄에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가택 연금을 당할 때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실제 기록 연대는
바울이 순교(주후 68년경) 한 후 30여 년이 지났을 때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바울의 어록 등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28장 30절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그래서 난세에 영웅 난다고 합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고,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군사 독재에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았습니까?
사도바울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인생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인생의 비결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2절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런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이
어찌,
하루아침에 바울의 인격이 되었겠습니까?
인격은
빛바랜 일상적 삶이 빚어내는 우리의 품격입니다.
마치 커다란 바위의 촉촉한 이끼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기본 덕목입니다.
인생이 무엇이겠습니까?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차이만큼이나
커다란 슬픔과 고독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깨닫기 위해서는 이 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겸손의 문
온유의 문
인내의 문입니다.
헬라적 윤리로 표현하자면
겸손이라 함은
네발로 기어 다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천해지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노예근성입니다.
이런 인생을 사신 분이 인류에 꼭 한 분 계십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입니다.
이사야 53장 3절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마치, 겨울비처럼 춥고 쓸쓸합니다.
언젠가 도예가께서 말하기를
명품 도자기가 만들어지려면
도자기 흙을 많이 짓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게 부서질수록 명품 도자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미에서
목사님도 더 찢기고 짓밟혀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도 무참하리만큼 채찍에 맞지 않았습니까?
신학교 시절에 신약학 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the Chris 영화처럼
그렇게 참혹하게 채찍에 맞았을까?
과장은 아닌가? 토론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제 잘난 맛에 삽니다.
목사님도 제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더 찢기고 더 짓밟혀야겠습니다.
그래야 목사다운 목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찬송 141장입니다.
1.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2.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3.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4.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5.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_아멘
그리고 온유와 인내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마치, 추운 겨울에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잘 익은 홍시처럼
제 살을 떼어
겨울새들에게 내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2장 4절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같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대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찬송 315장입니다.
1절-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후렴-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와 어서 와 돌아오라
2절- 돌아와 돌아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우리 아버지께
3절- 돌아와 돌아와 환난 있는 곳과
죄가 있는 곳과 미혹받는 데서
4절- 돌아와 돌아와 집에 돌아오라
모든 것 풍성한 아버지 집으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대문 밖에 서서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오랫동안 요양원을 운영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수많은 환자들, 보호자분을 대하고
우리 선생님들도 수백 명을 상대했습니다.
그중에는 가족처럼 지냈던 선생님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박영수 집사처럼 가족과 같은 환자들도 계셨습니다.
물론, 많은 목사님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가족처럼 지냈던 분들이
오히려 끝은 가롯 유다처럼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반면교사反面敎師라!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
목사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다른 분들도
목사님의 모순을 보면서 반면교사 삼지 않겠습니까?
어느 분은
남을 괴롭히려고 태어난 사람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습니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입니다.
꽃은 꽃입니다.
개똥은 똥이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꼭 닮고 싶습니다.
얼마 전 우리 조용림 권사님 큰아들께서 머나먼 인천에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때문에 어머니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랬더니 전혀 따지지도 않고
두말도 없이 뒤돌아서는 쓸쓸한 큰아들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렇듯 옹달샘과 같은 사람을 꼭 닮고 싶습니다.
남 집사께서 100만 송이 국화 축제에 전시된
국화꽃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습니다.
참 잘 다듬어진 값진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요양원에서 야생화로 핀 국화꽃과 비교해 봤습니다.
우리 요양원에서 핀 국화꽃은 잡초 속에서 살면서
넘어지고 쓰러진 상처 많은 국화입니다.
볼품은 없겠지만 목사님 눈에는
우리 요양원 뜰에 핀 쓰러진 국화꽃이 훨씬 더 향기로웠습니다.
목사님은 이런 야생화로 살아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고생 한 번 하지 않은 귀공자처럼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은 살아오면서 찢기고 넘어져서 만신창이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목사님을 더 좋아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맞춰가는 것입니다.
야생화처럼
잡초들끼리 서로 엉켜 어우러지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까탈스러운 우리 임성례 권사님께 맞춰드립니다.
그래서 미운 사람 박영수 집사님께 맞춰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평생 대접만 받으며 사신 분입니다.
전주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19세부터 초등교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고모님도 제자입니다.
그리고 교회 수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스승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옛날에
얼마나 존경의 대상이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목사님의 형제들에게는 호랑이 아빠였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에
아빠와 한 밥상에서 밥을 먹으면 체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90이 되어서
목사님이 운영하는 요양원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피눈물로 세운 요양원에서도
목사님의 아버님은 제왕이었습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들께 욕설을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렇게 아버님과 골이 깊어만 갔습니다.
목사님은 우리 권사님들께는 속이라도 다 빼주듯 하면서
우리 아버님께만은 원망을 토해냈습니다.
차라리 다른 요양원으로 가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땅을 치며 통곡하듯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뿔~싸~, 우리 아버님도 치매 환자이시지?
그때부터 모든 것을 아버님 뜻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그냥 사랑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 입맛대로 고치려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3살 버릇 여든 간다는데 무얼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주님께서도 우리의 못 된 형편대로 기다려 주지 않습니까?
3절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절,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가끔 우리 박영수 집사께서 목사님과 한배 탔으니
우린 죽어도 함께
살아도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속으로 생각되기를
박 집사가 오락가락하고 있구나.
박영수 집사도 환자지.
그래서 우리 요양원에 사시지.
전혀 뉘앙스는 다른 이야기지만
우린 주 안에서 사랑의 줄로 꽁꽁 묶인 한 가족입니다.
그러니 누구 한 사람이라도 코로나에 감염되기라도 하면
우리 모두 함께 감염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감기가 들어도 함께 콜록콜록 아픕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기뻐합니다.
엊그제 임성례 권사님 동생께서 사과 한 상자를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임 권사님 혼자 먹으면 무슨 맛이겠습니까?
그래서 함께 나누어 먹잖습니까?
우리 요양원 감나무에 홍시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우리가 아껴두었더니
새들이 날아와서 새참을 먹으며 쉬어 갑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엊그제 피부과를 갔는데
맞은편에서 붕어빵을 굽는 포장마차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꾸깃꾸깃 떼 구정물이 잘잘 흐르고 있었지만
송송 구멍 난 포장마차에 겨울바람이 쌩쌩 몰아치기도 해서
5천 원 떨이다 속아 주면서
따뜻한 붕어빵을 병원 간호사 손님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요양원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 식사 때까지
방송으로 찬송가를 들려 드립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시간마다
우리 선생님께서 돌아가면서 방송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우리 요양원의 생명수입니다.
엊그제
새 가족이 된 임배근 성도께서도
종일 찬송가 소리에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님들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