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의 "상록수"
소설가로서 심훈의 본격적인 출발은 1932년 고향 충남 당진으로의 낙향에서 시작된다. 그는 낙향과 더불어 소설 집필에 전념한 결과 "영원의 모시(1933)","직녀성(1934)","상록수(1935)"등 세 장편을 해마다 내놓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실제 농촌에 살면서 농민의 삶을 접하고 또한 당시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동 경작회'회원들과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우리 근대 문학의 대표적 농민 소설로 손꼽히는 "영원의 미소"와 "상록수"를 썼던 것이다.
특히 장편 소설 "상록수"는 실제로 많은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우선 이 소설은 "동아일보"가 1935년 창간 15주년 기념 사업으로 마련한 장편 소설 현상 모집에 응모하여 당선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쓰게 된 직접적 계기는 당시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산골에서 농촌 운동을 하다 과도로 숨진 최용신에 대한 신문 기사였다. 여기에다 심훈은 또한 그 때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에 돌아와 '공동 경작회'를 만들어 농사 개량과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이던 자신의 장조카 심재영을 모델로 하여 "상록수"를 썼던 것이다. 말하자면 심재영을 박용혁, 최용신을 채영신으로 바꾸어, '공동 경작회'를 농우회로 바꾸었으며, 그 밖에 지명도 이름만 바꾸었을 분 실제 지역을 무대로 하는 등 실제적인 것을 토대로 하고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을 결합하여 한 편의 작품으로 완성했던 것이다.
전편 14장으로 구성된 "상록수"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여름 방학의 계몽 활동을 끝내고 갖게 된 농촌 계몽대의 귀환보고 대회에서 박동혁은 발언자로 지명되어 보고를 하였다. 뒤 이어 여자 신학교의 감상 토론이 이어져 채영신이 발표를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이 교제는 시작되었고 그들은 함께 농촌 문제 세미나에도 참석하였다. 거기서 동혁은 한 학기밖에 안 남은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하여 봉사할 것을 영신에게 이야기하며 손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 의기 투합하여 박동혁은 고향 한곡리로, 채영신은 기독교청년연합회 특파원으로 청석골로 내려갔다. 이들은 각자 마을에서 계몽 활동에 전념하고 사업 이야기를 보고하는 정도의 서신을 이따금 교환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채영신이 박동혁을 찾아오게 되었다. 박동혁은 그 때 조기 체조, 그리고 '한곡리 부인 근로회'등을 결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곳 방문에서 채영신은 많은 자극을 받게 된다.
채영신은 돌아와 육영 사업에 전념하여 학생들이 증가하게 되었고, 결국 학원을 지을 계획을 세워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그 낙성식을 보게 된다. 낙성식에 초청을 받은 동혁은 거기서 채영신이 급성 맹장염으로 갑작스레 절도, 입원하게 되자 그녀를 간호하게 된다.
그러한 사이 한곡리에서 강기천이 회를 말아먹게 되자 동혁은 회원들의 빚을 대신 갚아 주기까지 하면서 이를 해결하려고 애쓴다. 설상가상으로 불같은 성격을 지닌 동생 동화가 회간에 불을 어디론가 잠적해 버려 급기야는 동혁이 감옥에까지 가게 된다.
한편 퇴원한 영신은 몇 번이고 동혁에게 편지와 전보를 쳤으나 회답이 없었다.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유학길에 오르기 전 동혁을 만나려고 찾아왔으나 뜻밖에도 동혁은 방화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경찰서로 찾아간 영신은 동혁에게 "우리의 일터에서 만나지요. 한곡리하고 청석골하고 합병을 해 놓고서 실컷 만납시다"란 말을 나누고 동혁과 헤어졌다.
일본으로 간 영신은 끝내 사항병에 걸려 귀국하게 되었고 그러다 결국 쓰러졌다. 온몸이 쇠약해져서 각기병 환자가 되고 만 것이다. 청석골로 되돌아온 그녀는 이미 불구자가 되어 병석에 드러누운 지 얼마 안 돼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한편 그 때 형무소에서 갓 풀려난 동혁은 이 비보를 받아 들고 급히 청석골로 달려갔을 때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은 향해 울부짖으며 영신이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농촌의 개발과 무산 아동의 교육을 위해서 과도히 일하다 둘도 없는 몸을 바쳤다는 것을 역설하고, 자신이 사랑하던 이의 사업을 계속해 나갈 것을 굳게 다짐하게 된다.
이처럼 간단한 줄거리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박동혁과 채영신으로 대표되는 이상적 인간상의 제시와 함께 당시 열악한 삶을 영위하고 있던 농촌의 현실과 이의 극복을 위한 노력을 형상화하였다. "상록수"의 두 남녀 주인공은 이 땅의 브나로드(1870년 러시아에서 학생들이 벌인 계몽 선전 운동)운동의 선구자로서 철저한 극기 정신으로 암울한 일제 치하의 농촌을 구제하기 위한 희생적이며 선각자적인 행동과 헌신을 여설히 보여 주었다.
채영신은 자신을 한없이 억제하면서 독신주의자를 자처했고 끝내 노처녀로 숨을 거둔다. 그는 기독교적 휴머니즘 정신에 따라 이를 실천해 나갔다. 흔히 기독교적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개량주의적 자세라고 비판하지만 그녀는 "아는 것은 힘, 배워야 산다."며 문맹 퇴치를 주장하는 동시에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 말라", "우리를 살릴 사람은 결국 우리뿐이다"에서 보듯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하려는 자립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를 내보이고 이를 실천하였다. 또한 박동혁 역시 영신 못지않게 투철한 계몽주의자로서 남녀의 애정보다는 농촌 계몽 사업을 더욱 중시하였다. 거의 금욕까지 해가면서 영신과의 마지막 순결을 유지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 역시 강한 이념과 의지의 소유자이면서도 그 밑바닥에는 남다른 뜨거운 눈물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결국 "상록수"는 문맹 퇴치, 미신 타파 같은 소극적 계몽 운동의 중요성을 부각한 작품이 아니라 적극적인 경제 운동을 벌여야 함을 강조한 작품이다.
심훈은 이러한 운동이 탁상공론이나 이론적인 것이 아닌 대지에 뿌리박은 꿋꿋한 상록수 처럼 실제적인 현실에 토대를 두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현실 도피적인 경향을 보여 주고 있던 청년층에게 주인공들의 희생적인 삶과 사랑의 지고성을 보여 주려 한 심훈의 작가적 자세는 참으로 소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