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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셸림] 머리말
텍사스와 멕시코 사이의 국경, 리오그란데강이 멕시코만으로 흘러드는 지점. 바로 그곳에 영 어울리지 않는 마타모로스(Matamoros) 라는이름의 조용한 도시가 있다. '마타(Mata)’는 '죽이다'라는 뜻을 지닌 마타르(matar)라는 스페인어 동사에서 온 것이고, '모로스(moros)’는 영어 단어인 무어(moors)와 동의어인데, 스페인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경멸하면서 사용했던 말이다. 즉 마타모로스란 곧 '무어인을 죽이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런 호칭은 언뜻 보기에는 미국의 과거나 현재에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왜 멕시코 북동쪽의 화창한 국경 도시가'무어인을 죽이는 자'라고 명명됐을까? 과거 멕시코나 텍사스에 이슬람교도가 반드시 죽여야 하는 적으로 실제 존재했는가?
'마타모로스'라는 단어를 만든 건 스페인 가톨릭교도였다. 그들에게 무어인 처단자가 되는 건 기독교 군인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였다. 711년부터 1492년까지 스페인의 대부분 지역은 무슬림의 통치를 받았다. 1492년은 지정학적 역사에서 운명적인 한 해였다. 왜냐하면 스페인의 기독교 군대가 이베리아반도에 마지막으로 남은 무슬림 성채를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혹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한 마타모로스가 이슬람교에 대항하는 스페인 전쟁의 새로운 전선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의 그라나다 정복전에서 일개 병사로 참전했던 콜럼버스는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도라는 걸 몸소 보여주었다. 생애 내내 이슬람교도 더 구체적으로 지중해 도처에서 스페인의 주된 경쟁국이었던 오스만제국과의 잇따른 전투에서, 콜럼버스는 이슬람교도의 피 맛을 더욱 잘 알게 됐고, 성전의 숨고한 목적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됐다. 이리하여 그가 거친 물결을 세치고 바람에 흔들리며 서쪽을 향해 나아갈 때 그의 마음에는 발견에 대한 세속적인 열망이나 계산된 상업적 비전 같은건 별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숙적인 이슬람교와의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열의가 가득한 채로 아메리카로 항해했던 것이다.
기독교도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그 외의 다른 모든 지역들에서는 인력(포로로 잡혀간 사람), 상업적 영향력, 영토를 오스만제국에 빼앗겨버렸다. 이념의 바람은 하얀 돛달린 콜럼버스의 배 세 척을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는데, 15세기 세상의 가장 급박한 정치적 투쟁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그것은 가톨릭 유럽과 무슬림 오스만제국 사이의 투쟁이었다.
거의 모든 전통적인 세계사는 전혀 다르게 서술하고 있지만, 실은 오스만제국이야말로 유럽인으로 하여금 아메리카로 가게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
1492년 이전의 50년 동안에, 그리고 이후 몇 세기 동안에 오스만제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군림했다. 고대 로마 이래로 지중해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고, 이슬람교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제국이었다. 1500년 부근의 몇십 년 동안에 오스만제국은 다른 모든 열강보다 더 큰 영토를 차지했고 더 많은 사람들을 통치했다. 오스만제국이 동양으로 가는 무역로를 독점하고 그 길 주변의 육지와 바다에서 엄청난 군사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지중해 지역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5세기에 여러 왕국에 소속된 상인과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세상을 탐험해야 했고, 미지의 대양을 건너가고 대륙을 빙 도는 위험한 여행을 감수해야 했다. 그것은 결국 무서운 오스만제국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스만제국은 중국에서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16세기 초에 알려져 있던 세상과 널리 접촉했다. 그들의 헤게모니를 생각해볼 때, 오스만제국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여러 나라들, 러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다른 이슬람 세력들을 상대로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경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제국은 당대 거의 모든 주요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고, 그 파급 효과는 우리가 사는 오늘날까지도 메아리치고 있다. 콜럼버스, 바스쿠 다가마, 몬테수마, 종교개혁가 루터, 정복군주 티무르, 그리고 여러 세대에 걸친 교황들, 그 외의 수백만에 달하는 크고 작은 역사적 인물들이 오스만 세력의 영토와 권력에 대응하여 그들의 행동을 수정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활방식을 규정했다.
오스만제국이 서진하여 유럽에 들어오면서 이슬람 종교의 오스만 지파가 제기하는 도전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만들어낸 주된 배후 세력이었다. 제국의 동쪽 국경에서 벌어지던 사파비 제국과의 전쟁은 이슬람교의 양대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사이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 무슬림 양파의 분열은 오늘날에도 무슬림 세계를 크게 뒤흔들고 있다. 오스만의 군사적 정복과 경제적 위력은 세상의 진정한 첫 글로벌 상품인 커피를 개발했고, 또 커피하우스라는유통 기구를 발명하여 소비를 널리 진작함으로써 커피의 자본주의를 활성화시켰다.
유럽이 지중해에서 떠나게 되면서—실은 쫓겨나면서—기독교유럽에서 종말론적 사고방식은 더욱 만연하게 됐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두 거대 종교는 세상 모든 피조물의 신체와 영혼을 얻기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듯 보였다. 자칭 그리스도의 군인들은 일단 신세계에 들어가자 구세계의 전쟁을 그곳에서 계속했다. 단지 그들이 상대하는 사람들만 달라져서, 이제 먼 땅의 토착민을 상대로 구세계에서 했던 전쟁을 그대로 수행한 것이다. 이 무어인 처단자들은 구세계에서 이슬람교도를 상대로 쌓은 경험을 밑바탕으로 하여 아메리카라는 지역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들었다. 그들은 심지어 교황에게서 영적·법적 지원을 받아가며 이슬람교에 대응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떠벌이며, 서아프리카 노예를 아메리카로 수입하는 노예무역을 정당화했다. 서양인들은 이슬람교를 이런식으로 무시함으로써 콜럼버스와 그의 시대를 온전히, 그리고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게 됐다.
이 책 <술탄 셀림》은 오스만세력의 세계적 영향력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구세계와 신세계의 모습을 규정한 이슬람교와 오스만제국의 역할에 대해, 혁신적이면서 심지어 혁명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지난 다섯 세기 동안에 이런 오스만 이야기의 대부분은 역사학자와 일반 독자들에 의해 일축되거나 무시되어왔다. 그렇지만 무슬림들은 서양과 동양이 공유하는 역사에서 필수적인 한부분이다. 여기서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오스만제국이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서양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삼키기 어려운 아주 씁쓸한 알약이다.
왜 그럴까?
주된 이유는 21세기 서양에서 그리고 15세기와 16세기 유럽에서 유럽인들이 무슬림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무슬림이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적이자 테러리스트를 생각한다. 무슬림이 서양 문화를 규정하는 기독교에 정면으로 맞서고, 서양인이 신성시하는 정치 체계와는 정반대로 행동한다고 보는 것이다. 대중문화에서 세계 정치에 이르기까지 보수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이슬람교는 특히 미국에서 '거대한 타자' 어떻게든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문젯거리’로 인식한다. 서양사회에서 무슬림은 일반대중과 관청이 악마화하는 대상이고, 종종 노골적인 신체 폭력이 가해지는 피해자다.
다른 사실들 또한 서양 역사에 미친 오스만제국의 영향력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난 500년의역사를 '서양의 부상’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이런 시대착오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그런 것처럼 터키와 나머지 중동에서도 별 의문 없이 받아들여진다). 사실 1500년, 그리고 심지어 1600년에도 지금 우리가 그토록 칭송하는 '서양'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 초기의 몇 세기 동안에 유럽 대륙에서는 서로 독립된 여러 왕국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벌었고, 소규모의 나약한 여러 공국들이 깨지기 쉬운 집합체를이루고 있었다. 이런 유럽이 아니라, 거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유라시아의 제국들이 구세계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었고, 카리브해 내부와 주변의 소수 유럽 전초기지들을 제외하면, 아메리카는 여전히 그곳 토착민이 소유하고 있는 광대한 영토였다. 오스만제국은 대다수 유럽 기반의 나라들보다 더 큰 유럽 내 영토를 소유했다. 1600년, 세상을 지배할 단 하나의 세력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도박사들은 오스만제국이나 중국에 돈을 걸었지, 유럽의 그 어떤 국가에도 베팅하지 않았을 것이다.
산업혁명과 소위 19세기 유럽의 영광 이래에, 이러한 오스만 우위의 역사는 부정됐고,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콜럼버스 시대로까지 소급되어 오히려 유럽의 우위를 내세우도록 다시 수정, 작성됐다. 이는 분명 역사적 오류다. 이러한 수정은 근대 유럽의 초창기에 발생한 아주 심각한 균열을 은폐하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19세기에 '유럽의 병자'라는 경멸적인 별칭을 얻기 이전 몇 세기 동안에 오스만제국이 온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는 사실도 감추어버린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오스만제국이 1600년경에 이르러 정점에서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무렵이라면 잉글랜드인이 아메리카에 막 정착하기 시작하던 때다. 그 시기 이후에 오스만제국이 전쟁에서 자주 패하고 영토를 내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제국은 중동에서 가장 큰 패권 세력으로 남았으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차후 300년 동안, 즉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가장 강력한 나라들 중 하나였다. 실제로 제국의 오랜 수명과 세계사에서의 중심적 역할은 오스만역사의 가장 놀라운 특징이다. 오스만제국은 모든 제국이 그런 것처럼 성공의 길을 걸어갔지만, 600년 이상이나 통치한 후에야 비로소 멸망했던 것이다. 우리가 19세기의 렌즈나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에 관한 에드워드 기번의 규범적인 18세기 설명'을 통해 16세기 오스만제국 역사를 읽는다면 역사적으로 옹호하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서게 된다.
우리는 유럽과 오스만제국 사이의 격렬한 갈등을 있는 그대로 살피면서 오스만제국이 어떻게 오늘날의 세계를 구축했는지 고찰할것이다. 그러면 이슬람과 유럽 (나중엔 아메리카도)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상호 대립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공유된 역사는 두 문명의 폭력 사태를 넘어서서 훨씬 더 많은 걸 보여준다. 그러면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소위 '문명의 충돌'은 여러 갈래의 실들이 풍성하게 섞여 짜인 태피스트리의 극소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심층적 고찰은 또한 원주민이 아나우악이라고 불렀던 도시가 어떻게 마타모로스로 바뀌었는지도 설명해준다. 그러한 도시이름의 변경은 기독교 스페인이 이슬람교를 상대로 벌인 잔혹한 전쟁의 과정을 증언해주는 상징적 흔적이다.
오스만제국의 서사시적 이야기는 중동에서 한참 떨어진 아주 먼곳에서 시작된다. 오스만제국을 건설할 사람들은 6세기 초에 중국에서 서진하기 시작했고,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지중해로 왔다. 거의 1천 년 동안 그들은 꾸준히 집단 이동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여러 전쟁에서 싸웠고, 다양한 종교로 개종했다. 그렇게 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들이 개종한 이슬람교로 함께 개종시켰고,여러 도시와 마을을 건설하고, 상품과 식량을 교환하고, 여러 언어를 습득하여 퍼뜨리고, 다수의 교배를 통해 새로운 종의 말을 만들어내고, 예술적 명작을 만들고, 무척 아름다운 시를 썼다. 여정을 시작했던 사람들의 대다수 후손은 중간에 실크로드나 혹은 그 부근에서 현지 가문의 사람들과 결혼하여 현지의 새로운 가정 문화를 받아들이고, 또 일부 변경하기도 하면서 그곳에 정착했다.
그러나 두려움을 모르는 소수의 유목민들은 소아시아라고 부르는 아나톨리아까지 멀리 이동했다. 아나톨리아는 흑해와 지중해 사이에서 일종의 다리를 놓는 땅으로서, 유럽과 맞닿은 돌출된 아시아 부분이었다. 이렇게 먼 서부에 도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튀르크어파인 유목 민족이었다. 그들의 오랜 이주는 왜 오늘날 터키 사람이 중앙아시아 도처의 민족, 심지어 중국과 그 너머의 민족과 언어, 문화, 민족성 등의 상호 유대를 공유하는지 잘 설명해준다(한국인과 터키인이 모두 알타이 언어 집단에 속한다는 것도 그런 문화의 공유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아나톨리아에 도착한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착하고 가축을 방목할 수 있는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의 완만한 높이의 평원을 찾아나섰다. 그들은 그 정착지를 출발점으로 삼아 분열되어 있는 비잔티움제국(동로마제국) 휘하의 한 지역에 진입했다. 튀르크족은 13세기 아나톨리아에 존재하는 수많은 소규모 민족-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터키인과 그리스인-공국들 중 하나가 됐다. 또한 그들은 쇠퇴하는 비잔티움제국에 대항하여 종종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느슨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던 튀르크 부족 집단은 1320 년대 중반에 사망한 오스만이라는 지도자의 영도를 따랐다. 20세기에 이를 때까지 오스만제국을 통치한 모든 술탄은 그의 피를 이어받은 직계 후손들이었다.
오스만이 이 오스만제국에서 영토를 조금씩 빼앗긴 했어도 초기 오스만제국을 위해 진정한 첫 승리를 거두었던 인물은 그의 아들 오르한이었다. 1326년 오르한은 부르사를 점령했는데, 이곳은 마르마라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비옥한 계곡에 있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국제 비단 무역 중심지를 점령한 것은 오스만제국의 솟구치는 야심에 커다란 뒷받침이 됐다. 이 첫 오스만제국의 수도에서 오스만의 뒤를 이어 통치자가 된 자들은 연달아 승리를 거뒀고, 아나톨리아 서부와 발칸 지역에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됐다. 그곳에서 기독교 공동체들은 대부분 무슬림인 오스만제국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된 것은, 아시아 스텝 지대에서 온, 이 새로운 도착자들이 현지의 강력한 가문들 및 다른 지역의 유력 인사들을 통해 우호적인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제국의 정복군은 그런 세력들이 오스만 가문에 충성을 바치고 가끔 일정한 병력을 기여하는 대가로 군사적 보호와 함께 비잔티움제국이 제공하는 것 이상의 더 유리한 세금과 무역 조건의 혜택을 수여했다.
오스만제국은 비잔틴인들을 압박하기를 무려 한 세기에 걸쳐 계속한 후인 1453년에 비잔티움제국에 치명타를 가했다. 오스만제국의 7대 술탄인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티움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관통하여 돌격했다. 오스만제국은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놀라운 승리를 통해 기독교의 동부 수도이자 세상에서 가장 크고 전략적인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했다. 이 도시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요충에 있었고, 서양에서 동양으로 갈 때에도 주요 경유지인 도시였다. 메흐메트는 카이사르의 칭호를 사용하여 칭제하면서, 오스만제국이 새로운 로마제국임을 선언했다. 청년 콜럼버스를 포함한 유럽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볼 때, 무슬림 세력에 의한 '두 로마' 중 하나의 함락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조짐이었다. 당대 유럽인이 묘사한 것처럼 오스만제국은 기독교의 한쪽 눈알을뽑아낸 것이었다.
1453년부터 극도로 분열된 1800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4세기가 흘러가는 동안에 오스만제국은 온 세상의 정치, 경제, 전쟁의 중심지로 군림했다. 여러 유럽 국가들이 융성하고 쇠퇴하는 동안에도 오스만제국은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제자리를 지켰다. 오스만제국은 중세와 근대 초기에 유럽 제국들과 맞서 싸웠고, 20세기에도 계속 유럽 지역의 다른 적들에 대항하며 싸웠다. 영 어울리지 않는 삼인조이긴 하지만, 마키아벨리, 제퍼슨, 히틀러까지 오스만제국의 엄청난 위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부르사에서의 첫 군사적 승리로부터 계산하면 제국은 거의 6세기 동안에 오늘날의 33개국에 해당하는 영토를 통치했다. 그들의 군대는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또한 세상의 가장 중대한 무역로 일부와 지중해, 홍해, 흑해, 카스피해, 인도양, 페르시아만의 연안 도시들을 통제했다. 오스만제국은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 중 두 곳인 이스탄불과 카이로는 물론이고, 성스러운 도시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그리고 400년 넘게 세상에서 가장 큰 유대인 도시였던 살로니카(오늘날 그리스의 테살로니키도 소유했다. 오스만제국은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길고 험난한 길을 이동하는 양치기 신분으로 한미하게 시작했으나, 최종적으로 로마제국 이후 규모와 영토에서 로마제국에 가장 근접하는 창대한제국이 됐다.
그 누구보다도 오스만제국을 크게 변화시켜 세계적 강국으로 만든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셀림이다. 셀림은 술탄의 자식이지만 위대한 군왕 후보로 기대되는 왕자는 아니었다. 열 명의 왕자 중 넷째인 그는 1470년 아나톨리아의 한 작은 도시에서 노예 출신 첩의 아들로 태어났다. 술탄의 아들이라는 혈통만 생각한다면 여유롭고 부유하며, 어마어마하게 안락한 삶이 그의 차지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왕자는 단명할 가능성이 컸다. 술탄의 죽음과 다음 술탄의 즉위에 빈번히 수반되는 형제 살해의 참극을 생각하면 그런 예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무자비하고 흔들림 없으며, 무정하고 통찰력 있는 셀림은 다양한 대응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 즉 그를 왕좌로 올려놓은 여러 차례의 무력행사, 그가 보인 군사적 모험과 통치 기술, 그의 카리스마, 그의 신앙심에 관한 이야기는 오스만제국이 어떻게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었는지 탁월하게 설명해준다.
셀림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그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꾼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손자였다. 그의 아버지 바예지트는 이탈리아, 이란, 러시아, 헝가리를 침공하여 온 사방으로 국경을 넓히며 제국의 판도를 더 크게 확장했다. 국가 경영의 업적에서 선대의 모든 술탄을 능가하는 셀림은 심지어 콘스탄티노플보다 훨씬 더 중대한 정복을 완수했다. 그는 중동, 북아프리카, 카프카스에서 전쟁을 벌여제국의 영토를 전보다 세 배 이상 확장해놓았다. 셀림이 1520 년 사망했을 때 오스만제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제국이 됐고, 세상 다른 어떤 나라보다 훨씬 거대한 국가로 발전했다. 오스만제국은 구세계의 세 대륙을 제압한 건 물론이고 그 이상의 것을 노렸다. 셀림은 다수의 무슬림들을 통치하는 술탄이자, 술탄과 칼리프의 두 칭호를 한손에 틀어쥔 첫 오스만 사람이 됐다.
셀림은 또한 장자가 아닌 아들 중 술탄이 된 초기 왕자들 중 하나였다. 또한 아들을 하나만 둔 첫 술탄이었고, 최초로 현직 술탄, 그러니까 아버지를 폐위시킨 사람이었다. 권력을 축적하는 일에 광적으로 집착한 셀럼은 체계적으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국내외 경쟁자를 제거했고,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서 배다른 형제 두 명을 살해했다. 한 19세기 역사가는 당대의 아주 음산한 문장으로 그를 "피비린내 나는 폭군, 그 험악하고 맹렬한 시선과 성마른 안색은 그의 폭력적인 본성과 훌륭하게 부합한다"라고 서술했다. 셀림은 산자는 물론이고 죽은 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빈번히 처형된 자의 잘린머리를 발로 툭툭 걷어찼다. 정복왕 셀림(selim the Grim)[터키어로는 야부즈(Yavuz) 술탄 셀림]이라고 알려지게 된 건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베네치아 총독 안드레아 그리티는 이런 글을 남겼다. "그의 눈은 잔혹한 성향을 드러낸다. 흉포하고 교활하다." 셀림은 그야말로 '전쟁광'이었다.
정복왕 셀럼의 생애(1470~1520)와 치세는 세계사에서 아주 중대한 시기 50년에 걸쳐 있다. 그는 오스만 왕조의 서른여섯 술탄 중 가장 영향력이 큰 통치자였다. 그의 영향력은 오스만제국의 가장 유명한 술탄인 그의 아들 장엄왕 술레이만(Suleyman the Magnificent)보다 더 컸다. 그의 유산은 20세기 초반에 제국이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 제국을 지탱해왔으며,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지정학적 현실도 함께 빚어냈다. 그리스도의 유산과 마찬가지로—기독교인은 이런 비교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겠지— 셀림 이전의 제국과 세계가 있었다면, 셀림 이후의 제국과 세계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셀림의 그림자속에 살고 있는데, '세상에 드리운 신의 그림자'라는 셀림의 또 다른 별명은 아주 적절하게 그 당시 상황을 묘사해준다.
오스만제국 역사와 세계 정치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셀림의 생애는 여러 차례 연대기가 작성됐다. 그가 사망하기 전과 후에 집필된 오스만제국의 역사서들은 무수한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 가장 중요한 자료 전집은 총괄하여 《셀림나메(?Selimname)》, 즉 '셀림의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은 셀림 사후에 그를 최대한의 광명 속에서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발간됐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오스만제국의 역사가들은 기존 문서들을 복사하고 각색하여 아주 촘촘하게 연결된 전기들의 종합판 세트를 만들어냈다.《술탄 셀림》을 집필하면서 나는 《셀림나메》— 셀림을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료—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이 책의 칭송 일색이고 거의 성인전에 가까운 내용을 파편적이거나 불완전한 다른 증거들과 대조했다. 《셀림나메》와 다른 오스만제국 자료에 관한 비판적 이해와 더불어, 스페인, 맘루크제국, 베네치아, 인도양의 세계,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나온 동시대 자료들도 아울러 참고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셀림과 그의 제국에 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가 당시의 세계에 미친 폭넓은 영향력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술탄 셀림》은 하나의 수정주의적인 해석이 되어 지난 다섯 세기에 관해 좀 더 새롭고 총체적인 그림을 제공한다. 또한 이슬람 문화가 유럽, 아메리카, 미국 역사의 가장 근본적인 양상을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파악한다. 이슬람교를 세계사 이해의 핵심에 두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어떠할까? 우리는 '무어인 처단자'들이 텍사스와 멕시코 국경에서 기념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못할 것이며, 더 전체적 관점에서 보자면 공유된 과거의 주요 특징들을 반복적으로 간과해버린 맹목적인 역사의 탄생 과정을 결코 알지못할 것이다. 이 책에서 셀림과 그의 시대에 대한 연대기를 기록해나가는 동안에, 아주 새로운 세계사가 등장할 것이다. 이 새로운 역사는 지난 1천년 동안 역사학계를 지배해온 진부한 통설을 뒤집어놓을 것이다. 정치인, 전문가, 그리고 전통적인 역사학자가 좋아하든말든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상당부분 오스만제국이형성해놓은 것이다. 이것은 곧 셀림만이 해낼 수 있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