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기 때문에 설교의 종교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설교를 "만남"이란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즉 설교란 구속주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을 만나도록 하는 것이 설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도가 참으로 기독교다워지고, 교회가 참으로 교회다워진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증거 하는 설교를 전제하는 것이다. 또한 설교는 그 시대와 교회의 거울이기 때문에 說敎史는 바로 敎會史이고, 思想史라고 할 수 있다.
정성구교수님은 한국 교회 설교사를 통해서 우리 나라 교회 100년사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바른 성장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설교해야 한다는 진리를 증명하셨다.
가. 설교사의 필요성 - 신학의 최종적인 목표가 영혼구원에 있다면 구체적인 말씀의 선포인 설교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설교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없으면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說敎史를 연구하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說敎史는 신학분류학에서 역사신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실천신학 분야에 속한다.
나. 우리의 것을 알아야 한다. - 기독교인은 먼저 깨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도인들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노릇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 구조를 고칠 수 있는 것으로는 설교의 큰 영향으로 고칠 수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사상의 결핍증이다. 국가의 흥망은 설교의 힘에 의한다. 또한 세계관의 변화는 영원한 진리인 복음으로만 가능하다.
다. 효와의 관계 - 효는 하나님 말씀과 터 위에 효가 있어야 한다.
라. 의사 소통 - 인간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부분만 듣기 원하므로 전달자와의 의사소통이 잘 안될 수 있다.
2. 초기 한국 교회의 설교
가. 우리 나라 최초의 선교사들의 설교 - 최초의 선교사들은 언어 장벽과 경험 부족, 훈련 부족 등으로 바람직한 말씀의 설교가 되지 못했다. 선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하여 가르칠 위치에 서 있었지만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는 너무나 큰 문화적 격차, 피부의 색깔, 메시지의 생소함, 설득력을 동반하지 아니한 복음 전도가 동양과 서양사이의 감정의 통로를 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초기 카톨릭선교사들과 성도들이 흘린 순교의 피는 절대로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되며 그들이 설교한 내용이 하나의 a priori로서 받아져야 할 것이다.
(1) 선교사업의 시작 - 1884년 9월 20일 의료선교사 알렌이 시작함. 그 뒤를 이어서 언더우드, 마포삼열, 게일등 3명이 크게 활약했다. 언더우드는 실로 한국교회의 아버지로서 이 땅에 기독교의 뿌리를 내린 효시로서, 교파주의를 초월해서 참되게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마포삼열은 한국을 예루살렘화한 한국의 은인이요, 개척자요, 선각자였다. 게일은 한국학 개발의 결정적인 연구를 한 사람이다.
(2) 선교사들의 설교 - 1990년대 초부터 제목설교의 유행과 함께 예화를 많이 사용하였다.
나. 1990년대 - 유교사상에 젖어있는 우리 민족에게 유교 윤리를 기독교적으로 설교했으며, 일제 시대에 항거 또는 독립 사상을 고취, 그리고 민족의 개화 사상을 강조한 설교와 순수한 복음 전파의 설교가 주였다.
(1) 이때는 한국에서 열강들이 세력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이기 때문에 한국기독교인들은 자주의식을 고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가 개화와 항일 투쟁으로 민족의 수난 속에서 앞장서서 십자가를 맨 시기이다.
(2) 길선주 목사는 평남에서 태어나서 한학과 불교에 심취하여 선약으로 선도에 통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왼쪽 눈의 시력까지 거의 잃게되었다. 그 뒤에 김종섭의 인도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의 성격은 베드로와 같았으며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는 매일 한시간 이상의 기도와 매주 사흘씩의 금식기도, 그리고 매년 1주일간의 금식 기도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는 1907년 대부흥회의 주역이 되었다. 1907년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온 회중들은 회개의 기도를 했으며 이 부흥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길선주 목사는 새벽기도의 전통을 세웠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가르쳤고, 이러한 것들을 성경으로 증거하였다. 그의 설교를 관통하는 사상은 말세론이었다.
다. 1919년 이후 - 독립 운동이 벽에 부딪히자 설교의 내용이 십자가와 부활, 천국에 갈 자와 회개가 크게 강조되는 설교가 주였다. 이때 등장한 김익두 목사와 김장호 목사의 대결은 매우 뜨거웠다. 김장호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김익두 목사는 복음주의로 팽팽히 대립하였으나 한국 교회는 김익두 목사 편을 들어주었다.
(1) 김익두 목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험한 생활을 하다가 영생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서 평양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었으나 대부흥사로 크게 활약했다. 그의 부흥회는 항상 인산인해가 되어서 교회가 비좁아 밖에 있는 평상 위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부활, 회개 강조, 무당과 미신 타파를 주장하면서 민도를 높이려고 노력하여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생활 태도를 변화시켰다. 그는 항상 설교에서 상투를 없애도록 주장했고 교역자들을 존경할 것과 교인들의 의무, 십일조 설교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그의 메시지는 길선주와는 달리 내세 지향적이었기 때문에 대개 가난과 병마에 시달린 소외 계층에 크게 환영받았다.
(2) 김정호 목사는 이른바 조절적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신 신학적이고 자유주의적 방법의 해석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과학적인 면을 강조하다가 이단시 당하기도 했으나, 우리의 것을 찾으려고 한 점은 크게 돋보인다. 그의 설교가 일반 교회에서 배척받고 정죄받는 이유는 종교는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함께 교파 교벌의 항쟁을 버려야 한다는 초교파적 교회를 주장했다. 또한 기독교는 이른바 동양인에게 적합해야 한다고 기독교의 토착화를 주장한 것이다.
(3) 이성봉 목사는 김익두 목사의 뒤를 이은 한국의 무디요, 대부흥사였다. 그는 평남에서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가까이 했으며 김익두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그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수원에 첫 개척교회를 시작한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부흥회 인도로 복음을 전파한 대부흥사였다. 한국교회의 한 시대의 강단을 주름잡았던 그의 설교는 단순하면서 명쾌하여 고난받고 찌든 민초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정봉 목사는 설교에서 십자가의 보혈을 강조했으나 허무주의에 빠져 버린 경향이 있다.
라. 1930년대 - 이 때의 한국 교회는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1930년대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 정책의 제 2단계 시기로서 일본은 문화정책으로 이른바 日鮮同化를 꾀하여 정신적 방황을 하도록 했고, 어용기독교 단체를 만들어 교회 분열을 꾀했던 시기이다. 이때 돌연히 출현한 이용도 목사의 열광적이고 무차별적인 사랑의 메시지를 통하여 성도들의 텅 빈 마음에 파고들었다.
(1) 이용도 목사는 폐병 3기의 몸으로 3년간 뜨겁게 설교하다가 33세에 졸한 그는 무차별 사랑과 신비주의를 외치면서 한국 강산을 누볐다. 그는 강대상에서 울어 버릴 정도로 너무 감성적이라서 이단시 당하기도 했다. 설교를 할 때는 7시간을 계속하기도 했고, 목이 쉬어서 말이 잘 안나오면 다른 목사가 통역하기도 했다. 그의 설교는 성경적인 설교도, 해석적인 설교도 아닌 감정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신비주의적인 신비주의였다. 그의 설교는 일정한 형식이나 방법이 전혀 없었다. 또 설교 원고를 작성하거나 내용을 개요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말로서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설교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단시 당한 가장 큰 이유로 프로테스탄트의 기본교리인 "오직 성경만으로"가 결여되었다는 이유였다.
(2) 주기철 목사는 교회의 순결을 지키다 순교하셨는데 그는 경건하기를 온 국민들에게 주창하였다. 마음도 경건, 입도 경건, 말도 경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자기를 낮추고 숨기고 살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사상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이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멋지게 순교했다.
(3) 20세기 사랑의 사도요 진리의 사도인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았던 사랑의 원자탄이셨는데 끝까지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하였다. 그는 한국이 낳은 위대한 목회자요, 설교자요, 그리고 순교자이다. 그의 사상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의 사상가 하나님 중심의 사상으로 일관된 삶이었다. 그는 25년간이라는 기나긴 삶을 나환자들과 함께 하는 베푸는 삶을 살다가 순교한 사람이다.
마. 1960년대 이후 - 국가 경제의 발전에 맞추어 한국 교회의 강단의 메시지가 변했다. 그것은 기복주의와 물량주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뜨거운 감격과 그 말씀을 통한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빛과 소금 노릇을 하기는커녕 교회는 자기를 살찌우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필자는 정말 오늘의 교회 강단이 건전한가 묻고 있다.
3. 오늘의 한국교회 설교
가. 문제점 _ 우리 한국 교회는 1970년대 이후에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나 급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려움과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우리의 교회는 자기 정리가 없이 기형적으로 성장한 것도 적지 않다. 개교회의 성장을 지상의 과제로 생각한 나머지 교회의 부흥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이든지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 성장의 현장에는 비성경적, 비목음주의적인 방법이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수행되었던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설교는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물량적인 설교가 대다수이다. 신앙이 잘살기 위한 방편이나 복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된 메시지가 오늘의 한국 강단을 채우고 있는 한 한국 교회는 어디로 갈는지 걱정이다. 그리고, 오늘의 설교는 메시지의 틀이 상업적이거나 성공에 매달아 놓고 있는 실정이다.
나. 앞으로의 설교 - 우리의 한국 설교가 바로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한국 교회의 방향은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순수한 복음을 가진 한국 교회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뜨겁게 힘있게 복음을 외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성장시킴과 동시에 아시아와 세계를 위한 선교의 교두보로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