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물을 기념한다는 것은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평가이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기념관이 진정한 기념관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치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과거를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역사의 대한 평가는 발생 시점으로 30년은 지나야 공과사의 분별이 가능하다고 한다. 1979년에 그가 죽은지 30년이 넘었으니 대한민국의 영원한 대통령으로 표현되는 기념관이 세워지는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는 않기에 어떻게 평가하는지 기념관을 방문해 본다.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은 설립계획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신의 대선공약으로 '박정희기념사업회'에 재정 지원 의사를 밝히면서 시작됐다.
총 건립액 중 김대중 정부는 국고보조금 208억을 지원하기로 했으며 나머지는 국민성금을 통해 모으기로 발표했다.
김대중 정부에게 지원받은 208억 원에 민간기부금 500억 원을 추가해 2004년 완공을 목표로 했으나 시민단체 반대운동 등 여론이 좋지 않아 모금액이 100억 원에 그쳐 사업이 중단됐다.
이후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표류하던 박정희기념관 건립 계획은 이명박 정부들어 다시 시작 됐다. 2010년 3월 재개된 공사는 현 정부의 174억원 지원금 집행으로 탄력을 받아 건립에 박차를 가해 작년 11월에 완공을 마무리 했다.

제 1 전시실. 박정희 대통령 18년의 역사
제1전시실 첫머리 오른쪽 벽에는 박정희 집권 18년의 '연표'가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연도별로 자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항목은 정치·경제·외교·국토개발·사회문화·자주국방·교육 등이었습니다. 연표 아래에는 그에 해당하는 사진이 한두 점씩 붙어 있었습니다.

보통 어떤 인물의 연표는 출생부터 사망까지 일대기를 나열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연표였습니다.
태어난 해도 없고 그가 자랐던 젊은 시절의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1961년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이라는 역사로 시작됩니다. 또 한가지 마지막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표현도 없이 그가 이른 치적만 나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연표가 적힌 벽을 따라 작은 통로를 지나면 왼편으로 작은 공간이 하나 나타는데 이곳에선 박 정권 18년간의 업적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맞은편 벽에는 박 대통령이 쓴 '민족중흥', '하면 된다', '근면 자조 협동', '새마을운동' 등의 글귀와 함께 각종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1인당 GNP가 89달러(1962년)에서 1천 달러(1978년)가 됐으며, 수출은 4천만 달러(1962년)에서 100억 달러(1977년)로 증가한 사실 등이었습니다.

반공을 제 1혁명공약으로 내건 액자가 별실 한가운데 붙어있는 5.16.
그의 저서에는 '본인은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쿠데타로 일어섰지만 5.16의 동기는 순수했다고 말하는것 같다.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그날의 거사를 '혁명'이라고 불렀지만 나에게는 '쿠데타'로만 기억되는 곳이었다.

5·16 후 박정희는 1년마다 제 손으로 별을 하나씩 더 달았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1963년 대통령선거에 육군 대장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출마했습니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선거였지만 그는 마침내 그해 말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후 '3선 개헌'을 강행하면서까지 영구집권을 꿈꿨습니다.


수출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코너가 나타났습니다. 입구에는 '파독 간호사'들로부터 구로공단 가발공장, 누에고치공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작업 모습이 재현돼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이들이 당시 진정한 수출역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겪었던 고초나 그 무렵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의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왜 이리 여공들의 눈가는 피곤함이 묻어있는지 전시관에 놓인 마네킹의 모습에서 당시의 어려움 여공들의 모습을 표현한걸까요?


제 2 전시실 새마을운동, 고속도로 그리고 경제 발전
새마을운동.
열린 사립문을 들어서니 초가집 방안에서 세 식구가 무명옷 차림에 꽁보리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는 지붕개량을 한 집에서 세 식구가 깨끗한 복장에 조기가 오른 밥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새마을운동을 해서 지붕개량을 해 집도 좋아졌고 또 먹는 것도 좋아졌다는 얘기였습니다. 마당에는 우물 옆에 수도가 설치돼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차차 변해간 건 분명 맞습니다.

대한민국 국토의 종합 발전상을 보여주는 대형 사각코너.
대형지도 위에 고속도로, 발전소, 댐, 공업단지 등을 표기한 후 그 위에 유리를 덮어 사람들이 유리 위에서 이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만들었더군요. 그리고 그 주위 네 면에는 치산·치수, 보릿고개 극복, 중화학공업, 과학기술 인재양성, 총력안보 등을 사진과 함께 육성해설로 소개해 주었습니다. 명실공히 박정희 공적 찬양의 종합판 같았습니다.

제 3 전시실 인간 박정희
단란한 모습의 가족사진이 입구부터 여럿 전시돼 있었고, 스크린에는 그의 어린시절 등을 담은 영상물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한 대목을 소개하자면,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했지만 주눅들지 않고 잘 견뎌냈다거나 몸집이 작았지만 야무져 '대추 방망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는 인간적인 면을 부각한다.


박정희-육영수 두 사람의 유품 전시는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어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인간적 체취가 묻어나는 자필메모, 도장, 수첩, 안경, 훈장, 대통령 취임선서문, 대통령 전용지 메모까지 전시된 소장품 속에서 1, 2전시실은 간단히 보고 넘어갔던 분들도 3 전시실에서는 메모며 사진을 차근차근 보고 있다. 아마도 옛 향수를 남긴 사진 하나하나에서 찾아보려고 하는 것 같다.

제 4 전시실. 보여줄 수 없는 박정희
이 전시실은 상암에 있는 박정희 기념관에는 없는 공간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박정희의 뒷 모습입니다.
그는 영원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며 억압과 독재자의 양면도 가지고 있다.
기념관에서 보여주지 않은 젊은 시절의 박정희.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되었다. 박정희도 그의 이름은 한문을 이용해 '다까끼 마사오'로 개명한다.
이후 다시 개명한 이름 '오까모도 미노루'.
그는 그의 이름에서 조선인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일본의 언덕에서 사쿠라 열매를 맺겠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혈서를 쓰면서 까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다.
당시 만주는 독립군과 만주군의 전쟁이 치열한 곳에 자원해서 장교로 독립군을 잡으러 간것이다.

그의 일족의 나라에 대한 배신, 동료에 대한 배신으로 점철된다.
광복 후 좌익과 우익이 대결되는 시기 육군 소령 박정희는 군부 내 남로당 지도자였다.
그는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본격화된 군내 좌익 색출 숙군(肅軍)작업의 결과 11월11일에 체포되엇다.
만주군에서 광복군으로 변신했던 박정희는 좌익으로 변신했다가 이제 사형을 당할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이대로 죽을 것인가? 박정희는 고뇌했을 것이다.박정희는 또 한번의 변신을 감행했다.
박정희는 군부 안의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 수사에 적극 협력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은 것이다
300여명에 달하는 군내 남로당 명단을 넘겨주었다
군내 남로당의 조직표까지 그려서 제출했다
박정희는 일단 기소돼 사형을 구형받았지만,남로당원 색출의 공로를 인정받은 데다 그의 만주군 선배들이 적극 구명운동에 나서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 18년간 장기 집권을 하며 1972년 10월 17일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10일 이내에 헌법개정안을 작성하여 국민투표로써 확정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유신헌법은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었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 권력구조상에 있어 대통령 권한의 비대로 독재를 가능하게 한 헌법이었다.
박정희 기념관은 바로 이런 우리사회의 과거 기억의 문제, 과거 문제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함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박물관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박물관의 전시내용도 달라진다. 박물관에서 부끄러운 이야기는 숨기고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만 포장돼 사람들 앞에 설 때,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없고 성찰의 기회를 갖기도 어렵다.
박물관의 전시에서 우리는 우리가 과거 어떤 잘못을 했는지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교훈을 얻고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 한다.
주차장은 주변 공영주차장을 사용하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 기념관 앞에 30~40대 정도 기념관이 관리하는 주차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