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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유자적 등산여행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길라잡이
예 천 여 행
물맛 좋아 예천(醴泉)
예천은 소백 준령의 높은 줄기가 감싸고 낙동강, 내성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은근과 끈기가 스며있는 물 맑고 인정 많은 고장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고추 말고 활을 내건다는 마을(예천읍 남본동)도 있을 만큼 활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이래 신궁 김진호를 길러낸 오늘날에 이르러는 양궁의 도시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더 오랜 옛날엔 물맛이 좋아 예천(醴泉)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예천은 물맛 말고 인심 또한 좋은 고장입니다. 천석꾼 만석꾼들이 우글거리던 용문면 같은 곳을 두고 ‘금당 맛질, 반 서울’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하네요. 맛질은 금당실 마을인 상금곡리와 인접한 대제리, 제곡리, 하학리를 아우르는 옛 지명인데, 인심이 워낙 두터워서 서울 못지않게 '놀기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 '반 서울'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입니다.
400년이 넘는 고택이 한 가문의 유구함을 말해주고 있는 예천 권씨 종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금당실마을 등 우리들의 것을 오롯이 잘 지켜온 주민들의 강한 자긍심 때문에 일찍부터 예천은 '제2의 개성'으로도 통했습니다.
삼강주막(三江酒幕 ․ 경북도 민속자료 제134호)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三江里)는 안동댐을 지나온 낙동강, 태백산에서 발원한 내성천(乃城川), 죽월산에서 흘러온 금천(錦川) 등 세 강이 합류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한 배 타고 세 물을 건넌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삼강교 다리 끝이 옛 삼강나루터인데,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올라온 소금배, 쌀을 실은 미곡선 상인들의 물물교환으로 분주했던 곳입니다. 과거길에 나선 선비들과 장사치들이 문경새재를 지나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장이 서는 날이면 하루에도 나룻배가 30여 차례 이쪽과 저쪽을 오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룻배도 없어지고 뱃사공도 노를 놓고 떠났습니다. 번성하던 나루터가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라 합니다. 나루터 아래쪽에 다리가 놓이고, 제방이 생기면서 인적이 끊겼습니다. 건설 붐으로 강바닥에서 골재를 파내면서 그렇잖아도 줄어든 물이 더 말랐습니다.
뱃길도 끊긴지 오래된 나루터 옆의 회화나무 아래에 낙동강 1300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삼강주막이 전설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1박2일' TV 프로에서 한문시험을 보던 이곳은 그 옛날엔 보부상, 소금배, 풍류객들이 함께 어울렸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과거로 떠나는 추억의 여행지로 사랑 받고 있습니다.
삼강주막은 1900년쯤부터 세 강이 만나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삼강 나루의 거대한 회화나무 아래에 자리 잡았습니다.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는 1930년대에 삼강주막을 꾸리기 시작하여 지난 2005년 90세로 사망하기까지 70여 년간 영업을 하였습니다. 이후 주막은 2년여의 짧은 '임시휴업' 기간을 가졌고, 경북도청과 지역민들이 합심해 다시 문을 열어 마을주민들이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습니다.
유 할머니는 글도 숫자도 몰랐지만 머리가 비상했다고 합니다. 당시는 봄 보릿고개에 마신 술값을 가을 추수 후에나 갚는 '가내기'가 흔했다고 하는데, 외상을 주면 부엌 흙벽에 칼로 금을 그었다고 합니다. 세로로 짧은 금은 '막걸리 한 잔'이고, 긴 금은 '막걸리 한 되'란 뜻, 외상값 다 갚으면 가로로 긴 금을 그었다고 합니다. 부엌 흙벽 외상장부에는 길고 짧은 금이 무수히 남아 있지만 가로 긴 금이 없는 것도 많은 걸 보면, 할머니의 인심이 그렇게 야박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훼손된 목재와 지붕을 걷어내고 초가집을 복원할 때 유 할머니가 금을 새긴 흙벽은 그대로 뜯어내었다가 고스란히 살렸습니다. 1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원두막 두 채도 세웠고, 1934년 '갑술년 대홍수'로 무너진 흙집 두 채도 주막 앞에 다시 들어섰습니다. 한 채는 사공이, 다른 한 채는 보부상들의 숙소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삼강주막의 본채는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두 개의 방은 각 방마다 문이 셋씩 달렸고, 부엌은 드나드는 문만 넷입니다. 손님이 아무렇게나 드나들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고 어느 곳으로도 쉽게 술상을 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우리네 전통 술집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초가 주막, 보부상과 사공 숙소를 구경하고 450년의 시간을 품은 회화나무 아래에서 막걸리 한 잔 들이키며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물을 바라보며 옛 정취에 잠겨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삼강주막 차림표>를 소개합니다. 막걸리(1주전자) 5,000냥 막걸리(반되) 3,000냥 두부 ‧ 메밀묵 2,000냥 지짐이 3,000냥 주모 한상 주이소(막걸리, 두부, 메밀묵, 지짐이) 12,000냥 주막 체험 5,000냥
회룡대(回龍臺)
비룡산(240m) 중턱에 있는 회룡대(199m)는 '한국에서 가장 완벽한 물돌이동'으로 평가받는 회룡포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는 절묘한 포인트입니다. 물돌이동의 비경을 사진 한 컷에 모두 담을 수 있습니다. 계절마다 그 풍광을 달리하는 마을 주변 들녘과 금빛 모래밭 그리고 옥빛 강물이 황홀한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명승(名勝)을 내려다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회룡대에 오르기 전 장안사란 사찰을 거치게 됩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국태민안을 염원하여 전국 세 곳의 명산에 장안사를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이곳 비룡산이며, 나머지 둘은 금강산과 기장 불광산입니다. 비룡산 장안사는 의상대사의 제자인 운문대사가 세운 고찰로서, 고려조의 문인 이규보 선생이 이곳에 머무르며 글을 지었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침목으로 된 300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10분 거리에 있는 회룡대에 도착됩니다. 회룡대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회룡포는 규모면에선 하회마을에 미치지 못하지만 물돌이의 풍광만은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회룡대를 지나 비룡산 원산성터도 내친 김에 찾아볼 만한 곳입니다.
회룡포(回龍浦 ․ 명승 제16호)
강물이 원을 그리며 주변을 거의 한 바퀴 휘돌아 흐르는 곳, 모래 한 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 것 같아 ‘육지 속의 섬마을’로 불리는 곳을 ‘물돌이동’이라 하는데, 물줄기가 휘돌아가는 경관만 따진다면 안동의 하회마을도 동강의 사행천도 명함을 내밀기 어렵습니다. 국토해양부와 한국하천협회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이곳 회룡포는 한반도 최고의 물돌이동입니다.
내성천 물줄기의 흐름이 가로막고 있는 비룡산을 뚫지 못해 태극무늬 모양으로 350도 휘감아 돌면서 모래사장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마을이 섬처럼 떠 있는 곳으로, 강이 산을 부둥켜안고 용틀임하듯 휘감아 돈다는 의미에서 회룡포(回龍浦)라 이름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지명은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의성포입니다. 예로부터 산수가 수려하고 땅이 기름진데다 인심이 후해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져 ‘정감록’ 등의 비결서에서 십승지지로 꼽았던 이곳은 구한말 예천의 아랫고을인 의성에 살던 경주 김씨들이 이주해 와서 강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비옥한 충적토를 개간해 살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의성포라 불렀던 곳입니다.
유유히 흐르던 강물이 이곳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마치 용이 몸을 뒤트는 듯한 모양으로 상류 쪽으로 다시 올라가는 진풍경을 본 모 방송사의 취재팀들이 프로그램 자막에 회룡포라 잘못 알린 적이 있는데다, 많은 관광객들이 의성에 가서 물돌이 마을을 찾는 일이 빈번해지자 예천군이 1990년대 말 회룡포로 개명했던 것입니다. 진짜 회룡포는 의성포를 건너오려면 지나야 하는 마을입니다.
2000년 KBS 인기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주인공인 은서와 준서의 어린 시절 고향으로 나왔고, 강호동의 '1박2일'도 이곳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전국 여행작가 100인이 우리나라 최고의 여행지로 선정한 이 마을은 오늘날에도 경주 김씨 집성촌으로 9가구 15명이 벼농사와 고추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려면 준서와 은서가 어린 시절 놀았던 200m 길이의 뿅뿅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건축 공사장에서 흔히 쓰는 구멍이 ‘뿅뿅’ 뚫린 비계용 철판(일명 아르방)을 두 줄로 깔아놓아 뿅뿅다리라 합니다. 방송이 나갈 때만 해도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강을 건너다녔는데, 여름에 강물이 불면 건너다니지 못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방송이 나간 후 예천군에서 이 다리를 놓아 주었습니다. 개포면에서 뻗어온 임도가 있지만 30분 이상 돌아가야 하는데다 비포장도로입니다.
‘가을동화’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오렌지색 지붕의 2층집과 황토민박집, 먹거리 체험장 등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이 있고 강변산책로에 가로수로 심어진 사과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 살구나무에는 철따라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립니다. 정자와 벤치시설이 잘 되어 있어 아름다운 강변 풍경과 비룡이 꿈틀거리는 듯 뭇 봉우리들이 힘차게 굽이치는 비룡산 산줄기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山似飛龍雲似烟 相從日夕在南天(산줄기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이요 구름은 피어오르는 연기와도 같은데 서로 어우러져 남쪽 하늘에 머물러 있네)” 옛 시인이 읊은 비룡산 풍경[飛龍歸雲]도 여기에서 바라본 듯합니다. 내성천의 투명한 강물에 비치는 초록빛 산 그림자와 강변의 은백색 모래밭이 멋진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립니다. 마을을 휘감아 도는 물길 따라 한 바퀴 돌아보는 수중산책이나 ‘발마사지’를 겸한 모래밭 맨발산보는 물돌이동에서만 가능한 체험입니다.
용궁면(龍宮面) 5일장
삼강주막에서 용궁면 소재지까지는 차로 10분 거리입니다. 4와 9가 들어가는 날은 면사무소 부근에 '용궁장'이 섭니다. 지금은 한산하지만 옛날에는 문경과 예천의 물자와 사람들이 몰리던 5일장입니다.
용궁에 가면 1960년대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철공소, 떡집, 기름집 등 1960년대에 지어져 곱게 나이 먹은 건물들이 친근하고 반갑습니다. 옛 양조장 건물은 2층 벽돌집인데, 온통 담쟁이로 뒤덮인 모습이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습니다.
용궁면에는 막창순대가 유명합니다. 순대는 보통 돼지의 대창을 쓰지만, 용궁면에서는 막창을 씁니다. 대창보다 훨씬 두툼한 막창은 쫄깃하면서 씹을수록 고소합니다. 단 돼지 누린내가 심하게 납니다. 막창순대집은 다섯 곳쯤 되는데, 맛은 어디나 비슷합니다. 원조는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난 '단골식당(054-653-6126)'의 김대순 씨인데, 지금은 며느리 김미정 씨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황목근(黃木根 ․ 천연기념물 제400호)
황목근은 용궁면 금남리 금원마을의 당산목으로서 수령 500년쯤으로 추정되는 팽나무입니다. 5월이면 누런 꽃을 피운다 하여 '황(黃)'씨 성을, 근본이 있는 나무라 해서 '목근(木根)'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쌀을 모아 마련한 마을의 공동재산을 1939년에 이 나무 앞으로 등기 이전하면서 유래한 것입니다.
늠름한 풍채를 지닌 황목근은 인간처럼 세금을 냅니다. 일제 강점기에 토지 등기제도가 시작되자 마을 공동 소유 땅을 누구 앞으로 등기할까 고민하다 이 나무 앞으로 등기했다고 합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자신 주변의 논과 마을회관 땅 등을 합쳐 총 1만2899㎡에 이르는데, 2003년엔 1만690원의 토지종합세를 납부했다고 합니다.
용문사(龍門寺)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이 고장 출신의 두운(杜雲)선사가 바위 위에서 용의 영접을 받은 뒤 세웠다는 흥미로운 유래가 있는 천년고찰입니다. 태조 왕건이 천하평정의 뜻을 다진 곳이라는 인연으로 고려시대에는 상당한 사세(寺勢)를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대장전(大藏殿 ․ 보물 제145호)이라는 고풍스런 목조건물 내부에 있는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684호)는 국내에서 유일한 불경 보관대입니다. 커다란 팽이 모양을 하고 있어서 사람이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윤장대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불경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만 돌릴 수 있다고 합니다. 윤장대를 돌리는 것은 불교사상의 가장 큰 축인 윤회와 맞닿아 있다고 하네요.
용문사에는 윤장대릏 비롯하여 보물급 문화재만도 6점을 소장한 문화유산의 보고로 불교문화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좋은 교육의 장소입니다. 성보박물관에는 보물 탱화와 영정 등 불화류와 불상, 제례의식 도구 등 2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모형 윤장대를 직접 돌려 볼 수 있습니다.
초간정(草澗亭 ․ 경북 문화재자료 제143호)
용문면 죽림리 소재 초간정은 선조 15년(1582)에 권문해 선생이 49세에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세운 정자로, <대동운부군옥>을 집필한 곳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초가집으로 초간정사(草澗精舍)라 했습니다. 여러 차례 병화를 입고 재건되는 곡절을 겪었는데, 기와집으로 바뀐 지금의 건물은 초간의 현손이 1870년 중창한 것으로 우리나라 정자 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계곡가에 자리 잡고 있는 풍경이 정말로 보기 좋습니다. 기암괴석과 소나무, 계곡과 정자가 어우러진 경관은 그대로 수묵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옛날 선비들의 무위자연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인데, 요즘은 풍경여행의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예천 권씨 종택 별당(보물 제457호)
예천 권씨 종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과 11년 동안 주변의 일을 기록한 <초간일기>를 지은 초간(草澗) 권문해(1534-1591)가 지은 살림집입니다. 500년 된 향나무가 떡 버티고 선 모습이 퍽 인상적입니다.
초간 종택은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풍경을 한눈에 보여 주는 건축 양식으로 이름 높습니다. 왼쪽에 온돌방을 꾸미고 오른쪽 3칸에 넓은 대청을 들여 앞면은 문짝 없이 개방하고 옆면과 뒷면은 판벽을 친 조선 중기 이후 영남지방의 사대부가에서 즐겨 짓던 별당식 건물입니다.
<대동운부군옥>(보물 제878호)은 중국 송나라 사람 음시부의 저서 <운부군옥>을 본 따서 단군 개국 이래 조선 명종조에 이르기까지 역사, 지리, 문학, 철학, 예술, 풍속, 인물, 초목, 금수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한자의 107운으로 분류하여 편찬한 백과사전입니다.
<초간일기>(보물 제879호)는 1580-1591년까지 일상생활에서 국정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일들을 기록했는데, 특히 당시 사대부들의 생활상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지방관으로서 겪은 관아에 관한 일이나 당쟁에 관한 일들도 씌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 전하는 몇 안 되는 일기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금당실(金塘室) 전통마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 자리 잡은 금당실은 그 모양새가 꼭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전통마을입니다.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 마을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으로 정감록에는 십승지지 중의 한 곳으로 꼽았으며, 조선 태조가 도읍지 중 하나로 탐냈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조금의 부풀림도 없을 만큼 자연경관이 빼어난 명당입니다.
이곳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금곡서원, 추원재 및 사당(민속자료 제82호), 반송재 고택(문화재자료 제262호)과 사괴당 고택(문화재자료 제337호) 등 문화재가 산재해 있고, 구한말 세도가인 양주대감 이유인의 아흔아홉 칸 저택 터가 남아 있으며, 마을 안길은 아름다운 돌담길로 되어 있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일부 돌담이 헐리는 수모를 당했지만 지금껏 옛 모습을 갖춘 돌담이 적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볏짚과 황토를 이용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담은 마을을 이리저리 굽이치며 거미줄처럼 이어집니다. 7㎞에 걸쳐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을 거닐다 보면 자칫 헤매기 일쑤여서 마을입구에는 ‘골목에서 길 잃어버리지 마시게’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금당실 '쑤’라고도 불리는 금당실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은 내륙지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방풍림이자 마을 사람들의 더위를 식혀주는 그늘숲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당초 2㎞에 달했지만 현재는 800m 정도가 남아 있는데, 오랜 세월 천재와 인재로부터 마을을 지켜준 송림에 대한 주민들의 애정은 남다릅니다. 산책로가 조성돼 삼림욕을 즐기기에 좋고 봄이면 송림과 어우러진 벚꽃 길도 환상적입니다. 이 왕벚꽃길은 숲이 시작되는 마을입구에서 928번 지방도를 따라 용문사까지 8㎞에 달합니다.
금당실 마을은 2006년 ‘생활문화체험마을’로 선정돼 고택 복원공사를 벌인 결과 ‘민속마을’다운 모습을 온전히 갖추게 되었고, 옛날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잘 나타나 한결 운치가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촬영지가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영화 ‘영어완전정복’ ‘나의 결혼 원정기’ 등과 드라마 ‘황진이’도 이곳에서 촬영됐습니다. 이 마을에도 삼강주막에 버금가는 ‘금당주막’이 있습니다.
병암정(屛巖亭 ․ 경북문화재자료 제453호)
병암정은 구한말 법무대신 이유인(李裕寅)이 세우고 옥숙정이라 했는데, 예천 권씨 문중에서 구입하여 병암정으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정자 오른쪽에 있는 별묘(別廟)는 본래 인산서원(仁山書院)의 사당이었으나 서원이 훼철되자 사당만 이곳으로 이건했다고 하네요.
병풍처럼 펼쳐진 큰 바위 위의 정자가 넓은 들판(정자들)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 앞 큰 연못 가운데는 작은 인공섬 하나가 있습니다. 연못은 네모지고 가운데의 섬은 둥근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 조경에서 보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개념을 갖추기 위한 축조라 합니다.
2006년 KBS 드라마 '황진이'에서 황진이(하지원 분)와 김은호(장근석 분)가 꽃잎 뿌려진 길을 걸으며 데이트를 즐기고, 첫 키스를 하고, 사랑을 고백하던 장면 등 두 사람의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이 그려지던 최고의 명장면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석송령(石松靈 ․ 천연기념물 제294호)
감천면 천향1리 석평마을 마을회관 앞에 서 있는 석송령은 나이가 600살 이상으로 추정되니 예천의 조선시대 역사를 한눈에 다 보아온 나무라 하겠습니다. 그 세월의 무게 탓인지 하늘로 솟구쳐 자라지 않고 그 가지를 옆으로 넉넉히 퍼뜨려 펼치고 있습니다. 높이 10m, 폭이 동서로 32m, 남북으로 22m, 가슴높이 둘레는 3.6m쯤에 달하며 그늘 면적만 990㎡(324평)에 이르는 노거송(老巨松)입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소나무는 약 600년 전 큰 홍수가 났을 때 개울을 따라 떠내려 오던 것을 주민이 건져 심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 뒤 1920년대 마을 주민이었던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이 '석평마을에 사는 영감(靈感)이 있는 소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이란 이름을 지어 주고, 자식이 없던 자신의 소유 토지 4558㎡를 물려주고 등기까지 내주어 재산을 가지고 세금을 내는 나무가 됐다고 합니다. 문화재청은 "우리 민족의 나무에 대한 생각을 보여 주는 소나무"라며 1982년 11월 천연기념물로 지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