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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논단] 한글 창제와 신미스님 / 정광
1. 들어가기
2. 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
3. 한글의 명칭과 새 문자의 頒布
4. 중국 聲韻學으로 본 한글
5. 信眉大師와 고대인도의 聲明記論
6. 結語
1. 들어가기
1.0 한글에 대하여 우리 민족은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한 지극한 愛民精神에서 만들어준 문자로 생각하고 각별한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영명하신 세종대왕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하여 사상 유례가 없는 문자를 독창적으로 만드셨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한글을 전공하는 모든 연구자들도 동일하다. 그리하여 한글에 대하여 위와 같은 취지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연구는 철저하게 배척하고 입을 모아 비판한다. 그것이 애국심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글을 사용하는 일반인들도 자신들이 한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한다. 특히 외국인들에게 한글을 소개하는 많은 한국인들은 한결같이 세종의 독창적인 창제라고 외국 연구자들을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한글에 대하여 설명을 듣는 외국인들은 반신반의한다. 아니 神話와 같은 한글 발명에 대한 소개를 듣고는 그저 웃고 말 뿐이다. 왜냐하면 잘 모르는 역사적 사실은 신화나 傳說로 위장되어 소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글에 대하여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잘 모르는 부분이 정말 많다. 예를 들어 영어의 AB는 로마자의 첫째, 둘째 글자인 알파(alpha) 베타(beta)에서 왔고 알파벳(alphabet)이란 명칭이 이 두 글자의 명칭에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왜 한글의 첫 글자가 /ㄱ/이냐?”(졸고, 2016c)라는 질문에 어떤 한글 전문가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왜 한글은 모음자는 모두 /ㅇ/를 붙여 쓰는가?”(졸고, 2018b)에 대하여도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올바른 설명을 하지 못한다. 모두 한글과 주변 문자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특히 한글을 제정할 때에 이용된 음성의 언어학적 이론이 무엇인지 연구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더욱이 한글과 주변 여러 민족의 문자와의 관계에 대하여는 필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연구자가 무지하기 그지없다. 요즘 필자가 한글과 주변 문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충격적인 논저를 자꾸 발표하니까 한글박물관을 세우고 한글과 주변 문자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으나 몇몇 참가자들인 강하게 반발하여 결국 이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역시 한글은 독창적인 것이지 주변 문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문체부에서 곧 문자박물관을 세우고 세계 문자를 탐구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한글과 주변 문자와의 관련에 대하여 앞에서 언급한 졸저 『한글의 발명』(서울: 김영사, 2015)과 파스파 문자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폈던 『蒙古字韻硏究』(서울: 박문사, 2009; 중문판 北京: 民族出版社, 2013; 일어판 東京: 大倉 Info)가 심심치 않게 팔리고 있다. 아마도 한글에 대한 국수주의적 연구에 식상한 독자들이 필자의 새로운 주장에 관심을 갖는 것 같다.
1.1 많은 사람들이 한글이 다른 문자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면 이 문자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필자가 만난 외국의 한글 전문가들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帝王이 백성들을 위하여 독창적인 문자를 만들어주었다는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믿기 어려워한다. 그리고 몽골의 元代에 제정된 파스파 문자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제기한다. 2017년 뉴질랜드의 오크랜드 대학에서 열린 ISKS(International Society for Korean Studies)의 제13차 국제학술대회에서 필자가 한글과 파스파 문자에 대하여 발표하였을 때에 세계 각지에 몰려온 한글 연구자들은 모두 깊이 동감하고 그동안 한글에 대하여 잘 모르던 부분들이 밝혀지는 연구에 경의를 표하였다(졸고, 2017d).
우리의 선조들도 한글이 몽고 문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西陂 柳僖의 「諺文志」(1824, 『文通』, 전100권의 제19권)의 ‘全字例’에서 “諺文雖刱於蒙古, 成於我東, 實世間至妙之物 – 언문은 비록 몽고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세간에 지극히 오묘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같은 책의 ‘初聲例’에서 「訓民正音十五初聲」라는 제목으로 “我世宗朝命詞臣, 依蒙古字樣, 質問明學士黃瓚以製 – 우리 세종께서 신하들에게 명하시어 몽고 글자에 의거하고 명의 학사 황찬에게 질문하여 지은 것이다”라고 하여 훈민정음, 즉 한글이 몽고 자양, 즉 파스파 문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李瀷(1681~ 1763)의 『星湖僿說』에서 주장한 훈민정음의 몽고문자 기원설을 추종한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연구가 있었지만 오늘날의 우리 학계는 한글의 독창성에만 치중하여 다른 문자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한글 전문가는 모음을 따로 문자로 만든 것을 한글의 중요한 특징으로 생각하고 이를 자랑한다(김주원, 2016). 그러나 이미 기원 전 수세기 경에 만들어 사용한 산스크리트 문자, 즉 梵字에서 모음인 摩多(māta)와 자음인 体文(vyanjana)으로 나누어 문자를 만들었다. 이 중에 摩多가 기본이고 体文과 더불어 각기 半字로 보았다. 여러 불경에서 보이는 ‘半字敎’, 또는 ‘半字論’은 梵字의 알파벳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滿字敎’, ‘滿字論’은 摩多와 体文이 결합하여 하나의 음절 문자, 즉 悉曇의 교육과 이론을 말한다. 훈민정음이 우리 음운을 初聲과 中聲, 終聲으로 나누고 초성과 종성이 자음을 표기한 것이고 중성이 모음의 글자로 한 것은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芝峰 李晬光의 『芝峰類說』(1624, 20권 10책)의 권18에 “我國諺書字樣, 全倣梵字”라고 한 것은 諺文이 梵字로부터도 영향을 받은 것을 언급한 것이다.
1.2 한글의 연구에서 가장 큰 문제는 모두가 한글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우선 가장 기초적인 한글이란 명칭에 대하여 우리는 잘 모른다. 세종이 새로 만드신 문자를 ‘訓民正音’이라고 했지만 1930년대 한글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에는 모두 ‘正音’이라고 하였다. 또 <실록>에 보이는 정식 명칭은 ‘諺文’이다.
그러나 大韓帝國 시대에는 한글을 나라의 正文으로 정하고 ‘國文’이라 불렀다. 그 전까지는 吏文을 국가가 인정한 문자로 보아서 모든 문서는 이문으로 작성되어야 그 효력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吏文을 이 시대에 한글로 바꾸어 국가의 정문으로 한글을 인정한 것이다. 日帝 强占期에 다시 ‘諺文’이 되었고 이것이 우리글을 貶下하는 명칭이라고 해서 이에 반발하여 ‘한글’이란 명칭을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북한에서는 ‘조선 글’이라 한다. 한 때는 아녀자의 글이라고 하여 ‘안글’이라고도 했다. 과연 한글은 어떤 명칭으로 불러야 할까?
또 하나의 문제는 한글이 언제 어떻게 반포되었을까? 이에 대하여는 현전하는 澗松미술관 소장의 『훈민정음』(국보 70호)을 간행한 것으로 훈민정음이 頒布되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 책이 간행된 正統 11년(1446) 9월 上澣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한다. 과연 이 책의 간행을 새 문자의 반포로 볼 수 있을까? 흔히 훈민정음의 <해례본>으로 알려진 간송미술관 소장본은 한문으로 되었고 어려운 性理學과 聲韻學의 이론으로 설명되었다. 과연 이 책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새 문자를 익혀서 사용하였을 것인가?
예를 들면 <해례본>의 새 문자에 대한 설명에서 /ㅂ/은 “彆字初發聲 - 별자의 처음 펴내는 소리다”라고 하였는데 ‘彆- 활 시울 뒤틀릴 별’자는 여간한 僻字가 아니다. 거기다가 한문으로만 되어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이보다는 세종의 서문과 예의를 언해한 <언해본>, 즉 「세종어제훈민정음」이 차라리 백성들이 손쉽게 새 문자를 배울 수 있다. 과연 <해례본>의 간행을 새 문자의 반포로 볼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언해본>은 언제 간행되었을까?
1.3 다음으로 한글 연구에서 중요한 문제는 새 문자인 ‘언문’이 어떻게 제정되었으며 그 배경 이론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전혀 연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훈민정음의 <해례본>을 보면 현대 언어학의 이론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심오한 음성학 이론과 정서법이 소개되었다. 오늘날의 첨단적인 서양의 조음음성학이 고스란히 훈민정음의 解例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것을 그저 “영명하신 세종대왕의 독창적인 이론”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면 당시 어떤 음성학과 음운론의 이론이 새 문자의 제정에서 이용되었을까? 어떻게 보면 한글 연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의 연구가 아주 미약하다. 만일 한글 제정의 배경이론에 대한 연구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면 제대로 된 한글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외국 학자들이 많이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면 어떤 이론이 훈민정음의 제정이 이용되었을까? 그동안은 주로 중국 聲韻學의 이론으로 새 문자의 제정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졸고(2016b)에서 고대인도의 毘伽羅論에서 발달한 聲明記論의 조음음성학이 세종 시대에 學僧으로 훈민정음 제정에 많은 도움을 준 慧覺尊者 信眉 대사에 의하여 세종에게 전해졌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로부터 初聲 위주의 언문 제정에서 모음 글자인 中聲을 별도로 만든 것임을 주장하였다(졸저, 2019). 고대인도에는 베다(Veda) 經典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즉 梵語의 문법으로 毘伽羅論이 발달하였는데 이를 漢譯하여 記論이라 하였다(졸고, 2017b).
記論은 주론 屈折語(inflective lang.)인 梵語의 형태론과 통사론을 설명하는 문법이었지만 佛家 五明의 하나인 聲明, 즉 언어 음성에 대한 연구도 포함하고 있어서 이를 따로 ‘聲明記論’이라 하였다. 이 이론과 고대인도의 문자 이론인 半字論이 중국에 들어가 聲韻學이 되었고 불경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와 훈민정음의 기본 이론이 된 것으로 필자는 주장한다. 따라서 훈민정음 제정의 배경에는 이러한 이론이 있었기 때문에 <해례본>에서 고도로 발전된 음성학의 설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 우리 학계에는 한글에 대하여 주변 다른 민족의 문자와의 관계라든지 문자의 명칭, 그리고 그 배경 이론에 대하여 전혀 연구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오로지 한글은 독창적인 문자라는 국수주의적인 주장만이 되풀이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한글은 매우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임을 강조한다. 과연 무엇이 과학적이고 어떻게 우수한가를 밝혀야 한다. 이제 이 발표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그동안의 연구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
2.0 한반도 주변의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은 중국어와 다른 문법구조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즉, 고립적인 문법구조의 중국어에 비하여 주변의 여러 민족들은 그 동안 우리가 알타이어족이라고 부르던 膠着語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 언어들을 표기하는데 漢字가 매우 불편하였다. 왜냐하면 문장 속에서 각 단어들의 관계가 대부분 語順에 의존하는 중국어에 비하여 語尾와 助詞로서 각 단어의 관계를 표시해 주는 膠着的 문법구조의 언어를 한자로 적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한문으로 표기할 때에 口訣 吐를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은 한자 이외에 다양한 문자를 제정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는데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당시 가장 강력한 문자인 漢字를 표음 문자로 하여 자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이렇게 발달한 문자가 바로 일본의 假名 문자요 遼의 契丹 문자, 金의 女眞 문자이다. 때로는 서양의 셈(Semitic) 문자를 들여다가 표기하기도 하였다. 즉, 유라시아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한 칭기즈 칸(成吉思汗)은 영어의 알파벳과 같은 계통의 위구르 문자로 몽골 帝國의 언어를 표기하게 하였다. 이 문자는 오늘날에도 內蒙古에서 사용되고 있는 몽고-위구르 문자다. 이 문자는 북셈(Northern Semitic) 문자 계통인 아람(Aramaic) 문자에서 소그드(Sogd) 문자를 거쳐 온 위구르문자를 차용한 것이다.
한반도 주변의 여러 민족들이 제정하여 사용한 문자들은 졸고(2017c)에서 세 가지 부류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한자를 변형시켜 자민족의 언어를 기록한 문자인데 대표적인 것으로 일본의 假名 문자를 들 수 있고 앞에 든 契丹 문자의 거란 小字와 여진 문자가 그러하다. 한반도의 신라시대 鄕札이나 吏讀도 이에 속한다. 둘째는 서양의 표음 문자로서 북셈(Northern Semitic) 문자계통인 위구르 문자를 차용한 몽고-위구르 문자와 만주 문자를 들 수 있다. 위구르 문자의 첫째와 둘째 글자가 aleph, beth여서 로마자의 alpha, beta와 같다.
셋째는 梵字 계통의 표음 문자로서 음절 단위의 문자인 티베트의 西藏 문자와 元代 파스파 문자를 들 수 있다. 세계 문자학계에서는 한글을 셋째 계열의 문자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글은 梵字와 파스파 문자와의 관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1 梵字의 교육과 毘伽羅論
산스크리트 문자, 즉 梵字는 한자와 더불어 아시아의 가장 오래된 문자로 음절단위의 표음문자다. 이 문자의 교육은 많은 불경에서 半字敎, 滿字敎로 소개하고 있다. 음절 초의 자음을 体文이라 하고 그 다음에 연결된 모음을 摩多라 하여 각기 半字로 보고 이를 결합한 悉曇을 滿字로 보아 이 둘의 문자 교육을 半滿二字敎라고 한 것이다. 즉, 梵字의 悉曇은 자음과 모음이 결합된 음절문자이기 때문에 각 문자에 결합된 자음과 모음을 半字로 보고 이를 결합한 悉曇을 滿字로 보아 이 문자의 교육을 半字敎와 滿字敎라고 한 것이다.
梵字의 교육만이 아니라 베다 경전의 梵語를 문법적으로 고찰한 것이 있어서 이를 毘伽羅論이라 하였다. 베다(Veda) 경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즉 梵語의 문법을 연구하는 毘伽羅論은 범어의 ‘Vyākaraṇa(분석하다)’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毘伽羅, 毘伽羅那, 毘伽羅諵’ 등으로 쓰기도 하였다. 불경에는 많이 소개되었지만 서양학계에는 Aṣṭādhyāyī (八章, 이하 <팔장>으로 약칭)로 알려졌을 뿐이다. 졸저(2015)와 졸고(2016b) 등에서 여러 차례 소개한 <팔장>은 기원전 5~4세기에 파니니(Pāņini)가 저술한 것으로 이 책은 세계 언어학사에서 최초의 屈折語의 문법서로 알려졌다.
이 문법서의 이론 속에는 현대 음성학과 비견되는 고도로 발달된 조음 음성학이 포함되었다. <팔장>에서 소개된 음성학의 이론은 그 일부가 서양에 전달되어 19세기의 조음음성학을 낳게 하였고 20세기 후반에 미국 언어학계를 風靡한 촘스키의 變形生成文法이나 生成音韻論이 모두 이 <팔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서양언어학계는 인정한다(R. H. Robins, A Short History of Linguistics, Longman Linguistic Library, 4th edition, 1997). <팔장>에는 梵語의 문법만 아니라 인간의 發話에 쓰이는 음성의 연구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파니니가 편찬한 <팔장>의 毘伽羅論은 記論이라 漢譯하여 後漢시대부터 중국에 유입된 梵語 佛經들과 그의 漢譯으로 중국에 널리 알려졌다. 중국에서는 이 記論에 제시된 문법이론보다는 음성연구인 聲明學이 주로 한자음 연구에 이용되었다. 중국어는 고립어이고 梵語는 굴절어이어서 문법은 서로 근본이 달랐기 때문이다. 성명학은 東晋 이후에 字本論, 聲明記論으로 번역되어 학승들 사이에 많은 연구가 있었다. 성명기론은 불가의 五明 가운데 인간 언어의 음성을 연구하는 聲明, 즉 攝拖必駄(śabda-vidyā)를 毘伽羅論의 방법으로 밝히는 것이다.
이 이론은 중국에 들어와서 聲明學으로 소개되었고 중국의 聲韻學으로 발달한다. 그리고 聲明의 毘伽羅論에 의한 연구, 인간 발화음의 분석 연구라는 의미의 聲明記論으로 漢譯되었다. 이 성명기론은 고려의 대장경에 포함되어 한반도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초기에 세종과 그의 주변의 信眉와 같은 학승들에게 전달되어 훈민정음 제정의 이론적 배경이 된 것으로 졸저(2015)와 졸고(2019a)에서 주장하였다.
특히 졸고(2019a)에서는 信眉대사가 어떻게 승려가 되었고 그의 스승인 涵虛堂으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를 살펴보면서 그의 학문이 불경을 해독하고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념한 涵虛 스님의 학통을 어떻게 갔는지 고찰하였다. 그리하여 :
특히 신미는 梵字의 悉曇章에서 모음의 摩多를 모델로 하여 훈민정음의 중성을 별도로 추가하였다. 즉, 세종이 훈민정음을 제정할 초기에는 反切上字에 해당하는 초성 27자만을 만들어 이를 가지고 <운회>를 번역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崔萬理의 반대상소문에 등장하는 ‘諺文 27자’이며 「諺文字母」에 등장하는 ‘俗所謂反切 27자’다.
신미가 후에 悉曇의 摩多에 의거하여 모음을 표기하는 中聲 11자를 추가하고 반절 27자에서 전탁 6자와 순경음 4자를 제외한 초성 17자에 중성 11자를 더하여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게 된다. 역시 信眉대사가 불경을 통하여 배운 聲明記論과 悉曇章의 지식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졿고< 2019a:60) .
라고 결론하였다.
또 <팔장>을 저술한 파니니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唐 玄奘의 여행기인 大唐西域記의 파니니에 관한 기사에 의하면 그는 인도 간다라국의 烏鐸迦漢茶(udakakhāṇda) 城의 娑羅覩邏邑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박학하여 문자를 배우고 언어를 연구하였으며 字書를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자서’는 아마도 문법서인 파니니의 <팔장>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천 개의 偈頌이 갖추어졌고 32개의 말로 이루어졌으며 고금의 문자와 언어에 적용될 수 있다는 偈頌은 그가 <팔장>에서 제시한 문법 규칙, 앞에서 언급한 수드라(sūtra)를 말한 것이다.
『대당서역기』에는 이 책을 왕에게 진상하였고 왕은 이를 나라의 문자 교과서로 삼았다고 한다. 또 파니니가 고향인 娑羅(Śālārura)의 窣堵波에서 집필한 <팔장>으로 후진을 교육하였고 그 때문에 후대에 그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음도 증언하고 있다. 또 그가 죽은 후에도 毘伽羅論의 교육은 계속되었으며 또 학교에서는 아동들을 매질까지 하면서 이 記論을 가르쳤다고 적었다. <대당서역기>의 이 기사는 졸고(2016b)에 전문이 인용되었다.
2.2 티베트의 西藏 문자
梵字와 毘伽羅論의 聲明記論에 의거하여 제정된 문자는 티베트의 西藏 문자를 들 수 있다. 서장 문자는 기원 후 650년경에 吐蕃의 송첸감포(Srong-btsan sgam-po, 松贊干布) 왕이 그의 臣下인 톤미 아누이브(Thon-mi Anu'ibu)와 함께 16인을 문자 연수를 위하여 인도에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인도의 판디타 헤리그 셍 게(Pandita lHa'i rigs seng ge) 밑에서 인도의 비가라론을 배워서 티베트어에 맞도록 子音 문자 30개, 母音 기호 4개를 정리하여 西藏 문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 문자는 모두 음절 문자로 단독으로 쓰면 /ka, kha, ga, na/와 같이 읽힌다. 티베트 문자를 만든 사람은 톤미 삼보다(Thon-mi Sam-bho-ța)라는 주장도 있다(김민수, 1990). 그는 인도 파니니(Pānini)의 梵語 문법서인 <팔장>을 본 따서 티베트어 문법서 三十頌( Sum-cu- pa)과 性入法(rTags-kyi'jug-pa)을 편찬하였다(야마구찌, 1976). 이 일로 인하여 그는 톤미 아누이브를 대신하여 西藏 문자를 제정한 인물로 알려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9세기경의 인물로 7세기에 활약한 송첸감포(松贊干布) 시대의 인물이 될 수가 없다. 다만 <팔장>이 티베트 문자의 제정에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3 元代의 파스파 문자
2.3.0 파스파 문자는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忽必烈汗)이 南宋을 명하고 元을 세운 다음에 역시 새 국가에는 새 문자라는 북방민족의 전통에 따라 제정된 문자이다. 몽골의 元을 건국한 쿠빌라이 칸은 吐蕃의 라마僧인 팍스파(八思巴)로 하여금 帝國의 여러 언어의 표기하고 한자의 학습을 위하여 표음 문자를 제정하게 하였다.
이 문자가 완성되자 皇帝의 詔令으로 반포하고 國字를 삼았으며 제국의 각 路(현재의 省을 말함. 우리의 道에 해당함)에 國字學이란 학교를 세웠다. 그리하여 이 문자로 몽고인 학생에는 한문을, 그리고 漢人 학생에게는 몽고어를 학습시켰다. 즉, 몽고어를 파스파 문자로 써서 漢人 학생들의 몽고어 학습 교재로 사용하였고 몽골 학생들은 파스파 문자로 한자음을 기록하여 한자를 배우게 한 것이다. 졸저(2009:161~2)에서 이 國字學의 운영에 대하여 상세하게 거론하였다.
파스파 문자는 몽골의 元을 멸망시키고 漢人들의 明을 세운 태조 朱元璋이 胡元의 殘滓, 즉 오랑캐 元나라가 남긴 찌꺼기를 없앤다고 하면서 파스파 문자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그래서 파스파 문자로 쓰인 서적이 현재 중국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도 매우 疏略하여 세계의 문자학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문자의 하나로 간주된다. 우리나라의 파스파 문자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잘못된 지식을 가져서 파스파 문자가 西藏 문자처럼 음절문자로 보는 연구자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파스파 문자에서 모음자의 제정에 대한 의견이 제 각각이다. 필자는 영국 런던의 大英도서관에 소장된 『몽고자운』을 통하여 파스파 문자가 모두 7개의 모음자를 제정하였음을 밝혔다(졸고, 2011b). 즉, <몽고자운>의 런던 초본에서는 다음의 [사진 2-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 此七字歸喩母”라고 하여 파스파자 ‘ [i], [u], [iu̯, ṷ̈], [o], [eu, ö̭], [e]’의 6자를 喩母에 속한다고 하였다. 필자는 여기에 36성모에 이미 들어있는 喩母 / , [ɑ]/를 포함시켜 7자가 된 것으로 보고 파스파 문자에서 喩母字, 즉 모음자는 7개라고 한 것이다. <蒙韻>에서는 / /와 / /가 혼란되어 / /를 많이 선택하였다.
파스파 문자에서는 모음을 喩母에 귀속시켜 모음자를 단독으로 쓰일 때는 / /를 앞에 붙여 ‘외[ö], 위[ü]’를 /ꡝꡦꡡ, ꡝꡦꡟ/(횡서하였음)와 같이 쓴다. <몽운>에서는 ‘이[i]’를 /ꡭꡞ/로 썼다. 이로부터 훈민정음에서는 中聲, 즉 모음을 欲母 /ㅇ/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단독으로 쓸 때에는 /ㅇ/를 붙여 ‘ᄋᆞ, 으, 이, 오, 아, 우, 어’와 같이 쓰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졸고, 2018b). <광운> 36자모에서 喩母는 동국정운 23자모에서 欲母이기 때문이다. 한글과 파스파 문자가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2.3.1 파스파 문자도 훈민정음처럼 한자음 표기를 위하여 제정되었다. 清의 道光年間(1821~ 1850)에 활약한 羅以智의 ‘跋蒙古字韻’에 의하면 “[前略] 聨國師製新字謂之國字, 形如梵書乃梵天伽盧之變體。頒行諸路, 皆立蒙古學 {此書專爲國字漢文對音而作} [後略] - [전략] 국사(팍스파 라마를 말함)가 새 글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말하여 국자(國字)라고 하였다. [글자의] 모습은 범서(梵書)와 같고 인도의 가로스디 문자의 변체다. 제로(諸路)에 반포하고 모두 몽고학[이란 학교]을 세웠다, {이 글자는 주로 한문에 대한 발음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후략]”(底線 필자) 이라 하여 파스파 문자가 한자음의 표기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훈민정음이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위한 것과 같다.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고 바로 이 문자로 한자음을 표음한 <蒙韻>을 편찬한다. 훈민정음을 제정하고 『東國正韻』을 편찬한 것과 같다. 그리고 오늘날 전하지는 않지만 여러 문헌에 그 서명이 보이며 신숙주의 ‘四聲通攷 凡例’와 최세진의 『사성통해』에도 『蒙古韻略』을 비롯하여 『蒙古字韻』, {增訂}『몽고자운』 등이 인용되었다. 이들은 이를 <蒙韻>이라 불렀으며 모두 『동국정운』에서 훈민정음으로 표음한 것과 같이 파스파자로 한자의 당시 正音을 표기하였다.
『몽고운략』은 <광운> 계통인 『禮部韻略』을 수정한 『新刊韻略』의 한자음을 파스파자로 표음한 것이며 『蒙古字韻』은 『古今韻會擧要』를 참고하여 한자음을 정리한 것을 파스파자로 표기한 것이다. {增訂}『몽고자운』은 元末에 朱宗文이 기왕의 <蒙韻>을 수정하고 문자를 더 붙인 것으로 권두에 첨부된 編者의 序文에 “至大 戌申 淸明 前一日 信安 朱宗文 彦章 書”이란 후기가 있어 元 至大 1년(1308)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몽고자운>의 증정본이 淸의 乾隆 연간에 筆寫되어 런던의 大英도서관에 소장되었다(졸저, 2009:100).
2.3.2 파스파 문자의 제정은 元史의 기사에 의하면 元 至元 6년(1269)에 八思巴 라마가 41개 자모를 만들었다고 기록하였다. 즉, 원사(권202) 「傳」 89 ‘釋老 八思巴’조에 “中統元年, 世祖卽位, 尊他爲國師, 授給玉印。令他製作蒙古新文字, 文字造成後進上。這種文字祗有一千多個字, 韻母共四十一個, 和相關聲母造成字的, 有韻關法; 用兩個、三個、四個韻母合成字的, 有語韻法; 要點是以諧音爲宗旨。至元六年, 下詔頒行天下。- 중통 원년(1260)에 세조가 즉위하고 [팍스파를] 존경하여 국사를 삼았다. 옥인(玉印)을 수여하고 몽고 신문자를 제작하도록 명령하였고 그는 문자를 만들어 받쳤다. 문자는 일천 몇 개의 글자이었고 운모(韻母)는 모두 41개이었으며 성모(聲母)가 서로 관련하여 글자를 만들고 운이 연결하는 법칙이 있어 두 개, 세 개, 또는 네 개의 운모가 합하여 글자를 이루며 어운법(語韻法)이 있어 요점은 음이 화합하는 것이 근본 내용이다. 지원 6년(1269)에 반포하여 천하에 사용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리다”라는 기사가 있어 41개의 글자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元史(권6) 「世祖紀」에 “至元六年二月己丑、詔以新製蒙古字、頒行天下。-지원 6년 2월 己丑일에 새로 만든 몽고자를 천하에 반포하도록 조칙(詔勅)을 내리다”라는 기사에 의거하면 파스파 문자는 원 세조, 즉 쿠빌라이 칸에 의하여 至元 6년에 皇帝의 詔令으로 반포되었다. 이 詔令에는 몽고는 원래 문자가 없었지만 契丹의 遼나 女眞의 金에서 문자를 제정한 것과 같이 몽고어를 기록할 문자를 創制한 것이며 [한자의] 번역과 일체 문서를 모두 이 문자로 기록하겠다는 뜻이다. 이 詔令의 내용은 契丹文字와 女眞文字의 제정과 같은 취지로 이 문자를 만들었음을 밝힌 것이다.
파스파 문자를 반포하는 元 世祖의 詔令에는 몇 개의 글자를 만들었는지 명시되지 않았다. 다만 앞에 든 『元史』의 「釋老八思巴」조에서 41개의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元代에 간행된 盛熙明의 『法書考』와 陶宗儀의 『書史會要』에서는 帖兒月眞, 즉 파스파 문자가 43字로 소개되었다. 이것은 <광운> 계통의 전통 운서에서 한자음의 聲母로 정한 36자모에 喩母字 7자, 즉 다음의 [사진 2-1]에 보이는 “此七字歸喩母”의 7자를 더한 것이다. 실제로는 [사진 2-1]에서 제시된 문자는 7자가 아니라 6자여서 36 聲母에 이를 더하면 모두 42자밖에 되지 않으므로 이라 위의 『法書考』와 『書史會要』의 두 책에서는 43자를 제시하지 못하고 모두 42자만 보였다.
3. 한글의 명칭과 새 문자의 頒布
3.0 한글의 정확한 명칭은 무엇일까? 왜 새로 만든 문자를 ‘훈민정음’이라고 했을까? 또 그것을 儒臣들은 왜 ‘언문’이라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한다하는 국어학자들도 분명히 밝히지 못한다. 다만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졸저(2015) 『한글의 발명』에서 ‘訓民正音’은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새로운 한자음이고 그것을 표기하기 위하여 만든 기호를 말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훈민정음은 한자음의 발음기호라고 본 것이다. 한자음이 당시 중국의 漢語音과 너무 달라서 이를 새롭게 고친 東國正韻식 한자음이 바로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한자음, ‘훈민정음’이라는 것이다.
{신편}『월인석보』의 권1 권두에 첨부된 「세종어제훈민정음」은 그동안 <언해본>으로 알렸는데 이 판본의 版心題가 ‘正音’이라 훈민정음보다는 正音이란 명칭이 한때 널리 사용되었다. 1930년대에 한글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에 오늘날의 한글처럼 널리 쓰이던 正音은 후대에 훈민정음으로 대체된다. 졸고(2018a)에서는 훈민정음 <언해본>이 漢音의 표음가지 염두에 두고 齒頭와 正齒를 구별하여 모두 32개 初聲을 글자로 보였음을 예로 들고 正音은 중국의 표준 한자음을 말하고 훈민정음은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말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에서는 한자음에 대하여 광대한 지역의 여러 다른 발음 가운데 하나의 표준음을 정하고 그 발음으로 과거시험을 보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라를 세우면 처음에 初代 皇帝의 칙명으로 표준 한자음의 韻書를 편찬한다. 대표적인 예가 隋나라의 『切韻』이고 唐의 <唐韻>이며 宋의 『大宋重修廣韻』(<광운>으로 약칭하였음)이다. 모두 황제의 欽撰韻書로 한자의 正音을 정하기 위하여 간행한 것이다.
‘諺文’은 “우리말을 표기하는 글자”로서 ‘漢文’에 대하여 겸양하여 붙인 명칭이라고 주장하였다(졸저, 2015). 우리말은 겸양법이 발달한 언어여서 한문에 대하여 겸양한 것이다. 우리말에 겸양법이 발달한 것은 학교에서 아무리 ‘우리나라’라고 해야 한다고 열심히 가르쳐도 심심치 않게 ‘저희나라’가 사용되는 것으로 알 수가 있다. 우리말의 깊은 곳에는 話者에게 속한 것을 낮추어 말해야 한다는 겸양의 문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자의 주장은 학계에서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아직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훈민정음이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바른 문자로 이해하고 ‘諺文’은 써서는 안 되는 나쁜 명칭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音’은 발음이지 문자가 아니고 우리말에는 겸양법이 있어서 언문이 결코 한글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신라시대에 ‘唐藥’에 대하여 ‘鄕藥’, ‘唐文’에 대하여 ‘鄕札’이리고 한 것과 漢文에 대하여 諺文이라고 한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
3.1 한글이란 명칭
‘한글’은 1933년에 열리 조선어학회에서 日帝 治下의 ‘諺文’에 반발하여 새로 만들어 쓰기로 결정한 호칭이다. 당시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光復 이후에 남한에서 정식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국제적으로도 ‘Hangul'이 널리 쓰이지만 북한은 이것이 ’한국의 글‘로 보는지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한글 전용하는 북한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한글은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제정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해례본>과 <언해본>, 그리고 <실록본> 훈민정음의 맨 앞에 붙어있는 御製 서문을 읽고 모두 그 내용을 아전인수 격으로 제멋대로 해석하여 왔다. 그리하여 어제서문에 있는 <언해본>의 “故로 愚民이 有所欲言야도 而終不得伸其情者ㅣ多矣라 予ㅣ爲此憫然ᄒᆞ야 新制二十八字ᄒᆞ노니 -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끝내 자기의 뜻을 [글자로] 실어 펴지 못하는 것이 많으니라. 내가 이를 불상하게 여겨서 새로 28자를 만들다”라는 구절로부터 세종대왕이 문자를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하여 배우기 쉬운 새 글자를 만들어 문자생활에 쓰기 편하게 하려고 이 문자를 만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첫 구절에 “國之語音이 異乎中國ᄒᆞ야 與文字로 不相流通ᄒᆞᆯᄊᆡ - 우리나라의 [한자] 발음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기 때문에”는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 이 구절은 같은 한자가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통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3.2 訓民正音
우리 역사에서 가장 먼저 새 문자의 제정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세종실록』(권102) 세종 25년, 癸亥년 12월조 말미의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凡于文字及本國俚語, 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고전과 같고 총, 중 종성으로 나뉘어 이를 합한 다음에 글자가 이루어진다. 문자 및 속된 우리말도 가히 쓸 수가 있으며 글자는 비록 간단하지만 요체를 갖추어 전환이 무궁한데 이를 훈민정음이라 하기도 하다”라는 기사다.
이 기사에 의하면 한글은 세종 25년(1443) 12월에 세종이 친히 諺文을 제정하였으며 初聲과 中聲, 그리고 終聲으로 나누어 만든 다음에 이들을 결합하여 문자로 쓸 수 있게 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훈민정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글자 수효는 적지만 무한하게 전환시킬 수가 있다고 하여서 오늘날 우리기 쓰고 있는 한글이 세종에 의하여 이때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역시 의문이 따른다. 먼저 이렇게 중요하고 큰 사건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실록에 한 줄의 기사로 나타난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의심스럽게 보았다. 심지어 임홍빈(2008, 2013)에서는 이 기사가 세종 癸亥년의 마지막 기사지만 앞의 것과 그 서술 방식이 다르다고 하여 나중에 이 부분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같은 癸亥년 12월의 기사라도 그 앞에 날짜를 가리키는 ‘庚戌, 己酉’ 등의 간지가 빠진 상태에서 “是月 - 이 달”로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졸저(2015)에서는 새 문자의 제정에 대하여 우선 明의 노골적인 반대와 협박, 그리고 儒臣들의 저항에 때문에 가족들 중심으로 비밀리에 진행하였고 불교의 梵字에 기대여 佛書인 『월인석보』의 권두에 첨부하여 세상에 알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세종은 처음에 元代의 파스파 문자처럼 한자음의 표기를 위하여 훈민정음을 제정하였으며 이렇게 제정된 새 문자를 세종 25년(1443)에 세상에 알렸다고 보았다. 이것이 갑작스럽게 『세종실록』(권102)의 세종 25년 12월에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는 기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불과 2개월 후인 세종 26년 2월에 언문으로 <韻會>를 번역하라는 명령이 내린다. 즉, 『세종실록』(권103권)의 세종 26년 2월 丙申조에 “命集賢殿校理崔恒、副校理朴彭年、副修撰申叔舟ㆍ李善老ㆍ李塏、敦寧府注簿姜希顔等, 詣議事廳, 以諺文譯韻會, 東宮與晉陽大君 瑈、安平大君 瑢監掌其事。 皆稟睿斷, 賞賜稠重, 供億優厚矣。”이라 하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 에서 ‘以諺文譯韻會’는 元代 黃公紹의 『古今韻會』, 또는 그의 제자 熊忠의 『동 擧要』를 언문으로, 여기서는 훈민정음이 옳겠지만 飜譯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번역은 諺解와 달리 발음 표기를 말한다.
<운회>는 앞에서 거론한 『蒙古字韻』에서 당시 한자의 正音을 파스파 문자로 표음할 때에 근거가 되었던 운서이다. 따라서 <운회>의 번역은 바로 <蒙韻>의 파스파자 표음을 훈민정음으로 옮기는 작업을 말한다. 다음에 논의할 파스파 문자의 31자모도와 7개 喩母자를 훈민정음으로 대응시켜 ‘見 - 君ㄱ, 溪 - 快ㅋ, 群 - 虯ㄲ, 疑 - 業ㆁ’(이하 생략)과 같이 하거나 中聲을 ‘ [i] -ㅣ, [u] - ㅜ, [iu̯, ṷ̈] - ㅟ, [o] - ㅗ, [eu, ö̭] - ㅚ, [e] -ㅓ’로 표기하면 된다. 훈민정음을 제정하고 2개월 후에 <韻會>를 번역한 것은 이 문자의 제정 목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즉, 문자 제정 이후에 처음으로 한 사업이 <운회>라는 운서의 한자음을 이 문자로 발음 표기한 것이다. 이미 몽골의 元에서는 파스파 문자에서도 <韻略>이나 <韻會> 등을 이 문자로 표음하여 몽고인의 한자 교육에 이용될 수 있는 <蒙韻>을 편찬하였다. <운회>의 번역은 후일 『東國正韻』의 편찬으로 발전하지만 여기에서 사용된 훈민정음은 모두 한자음의 발음을 표음하기 위한 것이다.
3.3 變音吐着
그러나 이 문자로 ‘變音吐着’의 難題가 해결되자 훈민정음으로 우리말의 전면적 표기가 가능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首陽大君, 信眉, 金守溫 등으로 『釋譜詳節』을 짓게 하여 이를 시험하게 하고 세종은 스스로 『月印千江之曲』을 지으면서 이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 두 불경을 합편하여 『月印釋譜』를 편찬하면서 권두에 <언해본>을 첨부하여 세상에 알린 것이다. 한자음 표기만이 아니라 우리말의 표기가 가능함으로 비로소 ‘諺文’이라는 문자의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變音吐着’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吏讀로 “발음을 바꾸어 토를 달다”이다, 즉, ‘이다’를 이두로 “是如”로 쓸 때에 ‘是’와 ‘如’가 모두 발음을 바꾸어 ‘이’와 ‘다’로 읽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爲古’를 ‘ᄒᆞ고’로 읽거나 ‘爲也’를 ‘ᄒᆞ야’로 읽는 것은 모두 ‘爲’가 ‘ᄒᆞ’로 變音吐着한 것이며 ‘是羅, 是古’로 쓰고 ‘이라, 이고’로 읽는 것도 ‘是’를 ‘이’로 變音吐着한 것이다. 이것은 한자를 제대로 배운 사람들에게는 매우 괴로운 讀音의 방법이다.
훈민정음 제정에 세종의 둘째 따님인 貞懿공주가 ‘變音吐着’을 해결하여 父王으로부터 많은 상을 받았다는 『竹山安氏大同譜』(이하 <대동보>로 약칭)의 기사가 있다. 이로부터 공주를 諺文의 제정자로 본 일도 있었다. 이 말은 당시 閭巷에서 널리 퍼진 야담으로 李遇駿의 『夢遊野談』(卷下)의 ‘剏造文字’조에 “我國諺書, 卽世宗朝延昌公主所製也。- 우리나라 언서는 세종 때에 연창공주가 지은 것이다”라는 기사에서 볼 수 있다.
이가원(1994)에서 논의된 <대동보>의 ‘貞懿公主遺事’조에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而變音吐着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세종이 우리말(方言은 이런 의미로 쓰였음)을 [한자의] 문자로 [중국과] 상통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훈민정음을 제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발음을 바꾸어 토를 다는(變音吐着) 것에 대하여 아직 연구가 끝나지 못해서 여러 대군(大君)들을 시켜 [이 문제를] 풀게 하였으나 모두 미치지 못하고 공주에게 내려 보냈다. 공주가 즉시 이를 해결하여 받치니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특별히 노비 수 백 명을 내려주었다.”(죽산안씨대종회 편, 1999, 『竹山安氏大同譜』 권5 pp. 88~89)라는 기사와 더불어 세종의 따님인 延昌 공주, 즉 貞懿 공주가 언문 제작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대동보>의 기사에 따라 貞懿공주가 변음토착의 어려운 문제를 훈민정음으로 해결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즉, 훈민정음 <언해본>의 서문에 보이는 “國之語音이 異乎中國ᄒᆞ야 與文字로 不相流通ᄒᆞᆯᄊᆡ‘와 같이 훈민정음으로 토를 다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우준의 야담에 등장하는 우리나라의 諺書, 즉 諺文은 정의공주의 所製라는 주장으로부터 중종 때에 최세진의 『訓蒙字會』에 보이는 「諺文字母」를 공주가 지은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였다. 변음토착을 해결한 것만으로 奴婢 數百口를 받기에는 賞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즉, 훈민정음의 <한문본>이나 <언해본>에서 “ㄱ 君字初發聲 - ㄱ은 군자(君字)의 첫 소리, ㅂ 彆字初發聲 -ㅂ 은 별자(彆字)의 첫 소리”와 같이 ‘君, 彆’등의 어려운 『東國正韻』의 韻目 자로 음가를 표시하기 보다는 口訣과 吏讀에서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한자로 “ㄱ 其役(기역), ㄴ 尼隱(니은), ㄷ 池*末(디귿), ㄹ 梨乙(리을), ㅁ 眉音(미음), ㅂ 非邑(비읍), ㅅ 時*衣(시옷), ㅇ 異凝(이응)”과 같이 초성과 종성의 음가를 표시하고 ‘阿(ㅏ), 也(ㅑ). 於(ㅓ), 余(ㅕ), 吾(ㅗ), 要(ㅛ), 牛(ㅜ), 由(ㅠ), 應{不用終聲}(ㅡ), 伊{只用中聲}(ㅣ) 思{不用初聲}(ㆍ)“와 같이 中聲字의 음가를 표시하는 「諺文字母」의 방법은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새 문자를 익히기 쉽게 한다.
3.4 諺文字母
이 諺文字母는 貞懿공주가 계발한 것으로 추정되며 세조 때에 崔沆과 韓繼禧 등이 시작하여 세조 4년(1458)에 李承召가 언해를 마친 『初學字會』의 권두에 첨부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중종 때에 최세진이 『훈몽자회』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일반인들이 쉽게 알 수 있는 한자로 새 문자의 음가를 표시한 <언문자모>는 한글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訓蒙字會』의 권두에 첨부된 「諺文字母」를 사진으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그리하여 세조는 누님인 貞懿공주에게 큰 賞을 여러 번 내린다. 즉, 세조 1년 8월에 楊洲의 전토 1結을 하사하고(『세조실록』 권2 세조 1년 8월 己巳조) 세조 4년에 배천(白川) 온천으로 목욕을 가는 공주에게 쌀 10석과 黃豆 5석을 내리도록 황해도 監司에게 명한다(동 실록 권13 세조 4년 8월 癸亥 조). 뿐만 아니라 세조 6년 9월 壬寅에 쌀 1백석을 하사하였다. 따라서 중종 때에 『훈몽자회』의 권두에 첨부된 「언문자모」는 세조 때에 貞懿공주에 의해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세조가 특별히 이렇게 많은 상을 하사한 것은 특별히 누이를 공경하기도 하였겠지만 언문자모를 통하여 그와 父王인 세종이 새로 만든 문자의 보급에 기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세조는 새 문자의 보급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세조가 새로 편집하고 刻印한 {신편}『월인석보』의 권두에 「세종어제훈민정음」, 즉 훈민정음의 <언해본>을 첨부하여 세조 5년에 간행하였다. 새 문자의 보급을 위하여 <언해본>을 첨부한 것이지만 <월인석보>와 같은 불경을 儒者들이 읽지 않을 것임으로 <언해본>으로 새 문자의 보급은 아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初學字會』는 儒生들에게도 한자를 배우려면 반드시 보아야 하는 교재이므로 여기에 「언문자모」를 첨부한 것은 새 문자인 훈민정음의 학습을 위해서 매우 적절했기 때문이다.
元의 國字로서 皇帝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한 파스파 문자가 帝國의 멸망과 더불어 사라진 것과는 달리 훈민정음은 우리말 표기의 諺文으로 발전하여 생명을 유지한 것은 「언문자모」에 의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훈몽자회』에서는 「언문자모」를 첨부하면서 <범례>에서 “凡在邊鄙下邑之人, 必多不解諺文, 故今乃幷著諺文字母。使之先學諺文, 次學字會則, 庶可有曉誨之益矣。其不通文字者亦皆學諺, 而知字則, 雖無師授, 亦將得爲通文之人矣”라고 하여 언문자모를 통하여 한자 학습에도 도움이 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4. 중국 聲韻學으로 본 한글
4.0 앞에서 논의한 훈민정음의 글자 제정을 돌아보면 각 글자로 표시된 음운의 추출과 그에 대한 설명이 현대의 생성음운론에서 제기한 자질 이론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리하여 영국의 언어학자였던 샘손(1985)에서는 한글을 인류 최초의 자질 문자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문자학 연구자들이 한글의 음성학적인 글자 모양에 탄복한다.
그러면 이러한 조음음성학의 이론을 세종과 훈민정음 제정에 관여한 당시 조선인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물론 “영명하시 세종대왕”의 창의적인 연구로 얻어낸 결과로 보면 간단하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아무런 음성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이와 같은 고도의 음성 및 음운에 대하여 이해하고 그에 의거하여 문자를 제정하고 그것을 <해례본>의 설명처럼 조음음성학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먼저 제일 큰 가능성은 중국 聲韻學의 이론에 의거하여 훈민정음이 제정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운학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어떤 이론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동안 이 땅에서는 『切韻』, 『唐韻』, 『廣韻』 등의 隋, 唐, 宋代의 운서나 元代의 『古今韻會』 및 『古今韻會擧要』와 같은 韻書를 중심으로 성운학을 이해하였고 『切韻指掌圖』와 같은 等韻圖로 聲韻學을 학습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졸고(2009a, 2011a, 2012a)에서는 <몽운>, 즉 『蒙古韻略』, 『蒙古字韻』 등의 <몽운>을 연구한 것으로부터 보다 상세한 聲韻學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이 운서들은 파스파 문자로 한자를 표음하면서 한자의 당시 통용음을 표기하는 방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훈민정음을 제정하여 『동국정운』을 편찬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성운학에 의거하여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고 <蒙韻>을 편찬했기 때문이다.
성운학의 영향으로 편찬된 <蒙韻>은 훈민정음의 『동국정운』을 편찬할 때에 중국 聲韻學의 영향을 받게 된다. 실제로 훈민정음에서 초성, 중성, 종성의 구별이라든가 전청, 차청, 전탁, 불청불탁과 牙, 舌, 脣, 齒, 喉音의 자모의 분류는 모두 聲韻學의 이론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聲韻學은 고대인도의 毘伽羅論을 받아들여 한자음의 이해에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비가라론의 聲明記論이 역시 훈민정음 창제에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4.1 聲韻學과 韻書
훈민정음 제정의 이론으로 알려진 중국의 聲韻學은 隋, 唐代 이후에 발달한다. 한자에 대한 辭典的 연구의 문헌들은 字書, 韻書, 類書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원래 한자는 形, 音, 義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字書는 한자를 形, 즉 部首, 偏旁, 字劃에 따라 배열하고 그 발음과 뜻을 설명하는 부류이며 韻書는 한자를 音, 즉 발음에 따라 字母로 나누고 그 순서에 따라 배열하여 그 자형과 뜻을 풀이한 字典들이다. 類書는 義, 즉 뜻에 따라 '天文, 地理, 人事' 등으로 분류하고 그 자형과 발음을 설명하는 사전들이다. 字書는 後漢 때에 許愼의 『說文解字』를 嚆矢로 보고 類書는 周公의 『爾雅』로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그에 비하여 韻書는 비교적 후대에 발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운서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隋代에 陸法言이 편찬한 『切韻』(601)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에서 한자의 발음을 표음하기 위하여 서역의 譯經僧들이 反切法을 발달시킨 이후에 편찬된 운서다. 한자음을 2자 표음하는 反切法에 따라 反切上字와 反切下字로 나누고 이를 聲과 韻으로 하여 순서대로 글자를 배열해서 그 形, 義를 설명하는 방식의 字典을 말한다. 중국의 聲韻學은 바로 이러한 운서의 편찬에 이용되는 이론을 말한다. 이러한 反切에 의한 한자음의 표음은 모든 韻書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4.2 <절운>계 韻書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韻學, 즉 聲韻學이 발달한 것은 後漢시대에 西域의 譯經僧들에 의하여 반절법이 시작되면서 한자를 발음에 의하여 분류하고 해설하는 새로운 형태의 운서로 발달하였다(졸고, 2017b).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切韻』(601, <절운>으로 약칭)에 첨부된 陸法言의 서문에 呂靜의 『集韻』, 夏候該(詠)의 『韻略』, 陽休之의 『韻略』, 周思言의 『音韻』, 李季節의 『音韻』, 杜臺卿의 『韻略』 등의 운서 이름이 보인다. 이로 보아 중국에서는 <절운> 이전에도 많은 韻書가 편찬되고 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운서의 편찬은 중국에서 지역적으로 한자음이 차이가 나고 또는 역사적으로 발음이 변한 것에 이유가 있다. 즉, 陸法言의 '切韻序'에서 呂靜集韻、夏候該韻略、陽休之韻略、周思言音韻, 李季節音韻、杜臺卿韻略等, 各有乖互, 江東取韻與河北復殊, 因論南北是非, 古今通塞, 欲更捃選, 精切除削疏緩 蕭顔多所決定。- 여정의 <집운>과 하후해의 <운략>, 양휴지의 <운략>, 주사언의 <음운>, 이계절의 <음운>, 두대경의 <운략> 등은 각기 [한자음이] 서로 달라서 강동(江東)에서 운을 취한 것은 하북(河北)의 것과 비해서 매우 다르고 남북(南北)에서 시비의 논란이 될 뿐 아니라 옛날과 지금이 막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주워서 고르고 잘라내며 트이고 느슨하게 되어 비뚤어진 것이 많은 탓이다라고 하여 시간적 변화와 지역적 차이에 의하여 한자음이 서로 달라졌으며 이를 밝히기 위하여 운서들이 간행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운서는 한 사람의 힘으로 편찬하기 어렵다. 隋代 仁壽 元年(601)에 간행된 <절운>도 陸法言 이외에 劉臻(儀同三司), 安之推(外史), 魏淵(著作郞), 盧思道(武陽太守), 李若(散騎常侍), 蕭該(國子博士), 辛德源(參軍), 薛道衡(吏部侍郞) 등이 참여하였다. 물론 唐代에도 변화된 한자음에 따라 새로운 운서로 『唐韻』이 간행되었고 宋代에는 이들을 집대성한 <廣韻>, 즉 『大宋重修廣韻』이 간행된다. 이 <광운>의 卷頭에는 陸法言의 '切韻序'와 唐의 天寶 10년(751 )에 쓴 孫愐의 '唐韻序'가 함께 첨부되었다.
孫愐의 '唐韻序'에서도 운서의 편찬 목적이 한자음이 시대적 변화와 지역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後漢 이후에 反切法으로 시작한 중국의 성운학은 많은 운서를 편찬하게 되었고 隋代, 唐代의 운서들은 宋代에 <광운>으로 집대성된다. 宋代 이후의 聲韻學은 이 <광운>을 기준하여 이루어진다. 현존하는 운서로서 가장 완성된 판본이며 많은 간본이 전해져서 그 전체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宋代 大中祥符 원년(1008)에 간행된 <광운>은 陳彭年, 邱雍 등이 勅命으로 편찬하였다. 현전하는 張士俊 중간의 宋本 <광운>은 전 5권으로 되었다. 이 韻書는 각기 四聲 別로 분권한 것인데 平聲만을 上平聲과 下平聲으로 나누어 2권으로 하고 上聲 1권, 去聲 1권, 入聲 1권으로 모두 5권이다. <절운>의 체재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36聲과 206韻으로 나누어 중국 한자음의 聲, 즉 음절 초 자음(onset)을 36개로 보았고 韻(rhyme)으로는 206개를 인정한 것이다. 즉, 韻의 韻腹(nucleus)의 紐躡과 韻尾(coda)의 결합체를 206개로 나눈 것이다.
훈민정음에서는 이에 의거하여 反切上字의 聲을 初聲, 反切下字의 韻을 둘로 나누어 紐躡을 中聲, 韻尾를 終聲으로 구별하여 문자를 제정하였다. 중국 성운학이 훈민정음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는 所以가 여기에 있다. 성운학에서는 반절상자를 大韻으로, 그리고 반절하자를 小韻으로 구분하여 詩韻의 작성에 준용하였다.
4.3 <禮部韻略>
<광운>보다 30년 후에 『禮部韻略』이 간행된다. <광운>이 勅撰韻書인 것은 한자에 대하여 宋代의 표준 발음을 이것으로 정한 때문이다. 그러나 <광운>은 너무 방대하여 일반인들이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축약하여 『韻略』이 편찬되었다. 王應麟의 『玉海』에 의하면 景德 4년(1007)에 侍制 戚倫 등이 과거시험용 운서를 편찬하라는 칙명으로 <광운>에도 관여했던 邱雍과 함께 이 <운략>을 편찬했다고 한다.
『운략』은 서명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광운>보다 훨씬 간략해진 운서인 것으로 보이나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 景祐 4년(1037)에 丁度 등이 역시 勅命을 받아 <광운>을 축약한 『禮部韻略』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현전한다. 물론 고시용인데다가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禮部가 간행한 운서임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丁度 등은 <광운>을 증수하여 『集韻』을 편찬하였는데 이 운서들은 대부분 같은 시기에 같은 인물들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어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다만 『예부운략』은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개정하거나 증수되었다.
『예부운략』의 후대 간본으로 유명한 것은 紹興 32년(1163)에 毛晃이 증수한 『增修互註 禮部韻略』과 淳祐 12년(1162)에 江北의 平水에 살던 劉淵이 저술한 『壬子新刊 禮部韻略』이다. 毛晃의 증수본은 원본의 206운을 그대로 수용하였으나 劉淵은 107운으로 이를 줄였다. 소위 平水韻이라는 것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즉, 과거시험의 詩韻으로 107개만 인정한 것인데 후일에는 하나가 더 줄어 106운이 되었다. 王文郁이 편한 『平水新刊韻略』과 陰時夫의 『韻府群玉』에서 106운을 인정하였으며 107운의 平水韻에 대하여 이 106운을 그대로 詩韻이라 부른다. 다만 聲母만은 36자모를 그대로 유지하였다(김완진정광장소원, 1997). 이 36자모를 도표로 보이면 다음의 [표 4-1]과 같다.
『예부운략』은 중국만이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대단히 유행하였다. 역시 과거시험에 준용되는 詩韻이기 때문에 이의 한자음이 표준음으로 인정되어 고려에서 시행되던 科試에 역시 이 운서가 기준이 되었다. 小倉進平(1940:479)에 의하면 고려에서 忠烈王 26년(1300)에 『예부운략』이 복각되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禮部韻'으로 과거시험의 詩韻의 기준을 삼는다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고려의 儒臣들은 이미 四書五經으로 중국의 古文을 통한 東周 洛陽의 雅言에 익숙하였으며 唐宋의 여러 문학작품을 통하여 長安의 通語에도 능숙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宋의 使臣들이 왔을 때나 조선의 使臣들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에 언어 소통의 문제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北宋은 비록 長安에서 떨어진 汴京, 즉 開封縣의 汴梁에 도읍하였으나 표준어는 여전히 長安의 通語이었으며 한자음의 通語의 발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切韻系 운서로 <광운>을 비롯하여 『韻略』, 『禮部韻略』, 『新刊韻略』 등 계속해서 많은 운서를 간행하였다. 勅撰韻書로 <광운>에 이어 『예부운략』 등을 간행한 것도 통어의 한자음을 표준음으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 표준 한자음은 중원에 元 帝國이 세워지고 北京을 수도로 삼으면서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이 지역의 동북방언인 漢兒言語가 帝國의 통용어로 등장하였고 그에 따라 한자음도 크게 요동치게 되었다(졸고, 2003).
4.4 <古今韻會>
元代의 수도 北京을 중심으로 하는 漢語의 한자음은 黃公紹의 『古今韻會』에서 정리된다. 황공소는 원래 南宋의 昭武 사람으로 <운회>라고 약칭하는 대단한 분량의 운서를 간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간행된 것 같지 않고 현전하는 것도 없으나 그의 제자로서 문하에서 수학하던 元代의 熊忠이 이를 축약하여 『古今韻會擧要』(이하 <거요>로 약칭)를 간행하였다. <거요>의 권두에 실린 劉辰翁의 序에 元 至元 29년(1292)이란 간기가 보여 적어도 이 보다는 앞선 시기에 <거요>가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거요>의 권두에 실0린 凡例에 의하면 이 운서는 『예부운략』의 체재에 맞추어 이를 저본으로 하여 『고금운회』와 <거요>가 편찬된다.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된 <거요>의 판본은 조선에서 宣祖~仁祖 때에 李植이 跋을 붙여 30권을 10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것이 『세종실록』 권103), 세0종 25년 2월 丙申조 기사의 “以諺文譯韻會”에 보이는 <운회>일 것이다.
졸고(2016b)에 의하면 고려대 도서관의 화산문고에 세종 16년(1434)에 辛引孫이 경주와 밀양에서 元版을 복각한 판본이 있음을 소개하였다. 이 판본에 의하면 目錄 1책에는 劉辰翁의 서문(4엽)과 몽고인 孛朮魯翀의 '韻會擧要書考'(2엽), 凡例(8엽), 韻會韻目目錄(4엽), 그리고 '禮部韻略七音三十六母通攷'(30엽)이 있는데 마지막 '칠음삼십육모통고'에는 <광운>의 36字母圖를 예상했으나 도표는 탈락되었다. 서울대 도서관 소장본도 역시 36자모도는 없다.
<거요>의 「七音三十六母通攷」에는 '蒙古字韻音同'이란 副題가 붙어있다. 이 字母圖는 朱宗文의 {增訂}『蒙古字韻』의 런던 초본 권두 「字母」에서 파스파 문자로 표음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 자모도는 없다. 아마도 <거요>의 자모도가 생략된 것은 파스파 문자를 胡元의 殘滓로 보고 明代에 철저하게 폐절시킨 덕택이 아닌가 한다(졸고, 2009a,b). 元 至元 6년(1269)에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고 바로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蒙古韻略』에는 이 36자모가 모두 파스파자로 표시되어 喩母의 7자와 함께 43자로 공표되었을 것이다.
4.5 <蒙韻>
4.5.0 『蒙古字韻』의 <증정본>은 오늘날 전해지는 파스파 문자로 쓰인 유일한 문헌이다. 현전하는 것은 런던 대영도서관 소장의 {增訂}『蒙古字韻』, 즉 <증정본>의 鈔本이다. 이것은 元代 至大 戊申(1308)에 朱宗文이 편찬한 것을 淸代 乾隆연간, 즉 1737~1776 사이에 필사한 것으로 런던 鈔本으로 불린다(졸저, 2009:101). 이 자료의 권두에 「字母」라는 제목으로 36字母圖를 실었으나 실제는 32개의 서로 다른 파스파 글자만 제시되었다.
다음의 [사진 4-1]에서 보이는 것처럼 『蒙古字韻』의 <증정본>에서는 권두에 '字母'라는 제목으로 <광운>의 36字母圖의 자모를 파스파자로 보였다. 아마도 모든 蒙韻의 권두에 첨부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字母」는 오직 현전하는 {증정}『몽고자운』 런던초본의 것만 참고할 수 있다. 따라서 <몽운>에서 反切上字인 36자모를 어떻게 문자화했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그러나 그동안 이 자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였다.
졸저(2009)에서 비로소 이 자모도의 중요성이 거론되었고 이를 『東國正韻』의 23자모와 비교하고 훈민정음의 <언해본>에서 제시한 32자의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사진 4-1]의 「字母」를 도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표 4-2]에서 보이는 것처럼 파스파 문자는 舌上音의 전청, 차청, 전탁과 正齒音의 같은 글자가 동일하게 / , , /이어서 3개가 줄고 순경음의 전청과 전탁이 동일하게 / /이어서 1자가 줄어 모두 32개의 글자만을 制字한 것이다. [사진 2-1]과 [표 2-4]에 보이는 파스파 문자의 32자는 『四聲通解』의 '洪武韻 31字母之圖'와 거의 같다. 즉, 舌頭音의 ‘泥 ’와 舌上音의 ‘娘 ’가 구별된 것이 다를 뿐 나머지는 모두 같다. 『사성통해』 에서는 舌上音 /知 , 徹 , 澄 , 娘 /의 4자를 모두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다음의 [사진 4-2]는 『古今韻會擧要』의 권두에 실린 「禮部韻略七音三十六母通攷」인데 실제로 자모도는 삭제되었고 제목만 남아있다. 앞의 [사진 4-1]과 그 도표 [표 4-2]는 『고금운회거요』의ㅐ권두에 실린 「예부운략칠음삼십육모통고」의 자모도를 수정한 것으로 보여 매우 귀중한 자료다. 현전하는 어떤 운서에도 이 자모도는 삭제되어 게재되지 않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더욱 높다고 아니 할 수 없다.
4.5.1 이 자모도는 훈민정음 제정의 초기에 그대로 이용되었다. 즉, 초기의 언문 27자는 『몽고자운』에서 인정한 32자모에서 正齒音 5자를 모두를 없앤 것으로 이를 도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초기의 언문 27자>가 『세종실록』(권103)세종 25년(1443) 12월조 말미에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에 보이는 28자이며 이 기사는 <해례본>의 28자에 맞추어 후일에 수정하여 임홍빈(2006, 2008)의 주장처럼 실록이 편찬될 때에 추가한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실록에서 세종 26년 2월조의 기사에 최만리의 반대상소문에는 ‘언문 27자’로 명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훈몽자회』의 「언문자모」의 副題인 “俗所謂反切二十七字”에 보이는 ‘반절 27자’이기도 하다. 다만 「諺文字母」에서 초성 16자와 중성 11자를 反切 27자로 한 것은 中聲만으로는 反切下字가 될 수 없는데 원래 反切上字만을 27자를 언문이라 한 것이 訛傳되어 初聲 16자와 中聲 11자와 합한 반절 27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俗所謂'라는 말을 앞에 얹은 것이다(졸고, 2017b).
또 [표 4-3]에 의해서만 ‘以影補來’를 이해할 수 있다. 즉,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에 등장하는 ‘發 버ᇙ’의 받침 ‘ㄹㆆ’은 以影補來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發’은 원래 入聲이지만 ‘ㄹ’이 입성의 특징인 促急하지 못해서 ‘ㄹ’에 ‘ㆆ’을 보충하여 입성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만일 [표 4-3]이 아니고 동국정운 23자모에 의한다면 ‘以影補來’가 아니라 다음 4.6.1의 [표 4-7]에 의하여 ‘以挹補閭’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훈민정음이나 동국정운에서는 韻目 한자를 바꾸어서 ‘ㄹ’은 ‘閭’모이고 ‘ㆆ’은 ‘挹’모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표 4-3] ‘초기의 언문 27자’의 존재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4.5.2 훈민정음의 <언해본> 初聲 32자와 <蒙韻>의 32자모는 동일하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초기의 언문 27자’에서 훈민정음 <언해본>에만 추가된 齒頭와 正齒의 구별을 위하여 만든 5자를 더 하면 初聲이 모두 32자가 된다. 치두와 정치의 구별은 漢音의 표기를 위한 것이라고 단서를 붙였다.
그동안은 훈민정음의 <해례본>과 <언해본>에서는 훈민정음 28자를 초성 17자와 중성 11자로 해설하였다. 그러나 <언해본>에서는 비록 漢音의 표기라고 단서를 붙였지만 초성 17자에 전탁 6자, 순경음 4자, 그리고 齒頭와 正齒의 구별을 위한 5자를 더 추가하여 모두 32자의 초성을 제시하고 해설하였다. 이것이 바로 [표 4-2]로 보인 {증정}『몽고자운』의 런던초봉에서 보인 32자이다.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언해본>의 이러한 32자의 제시에 대하여 아무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훈민정음 <언해본>의 32 자모는 졸고(2011a)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朱宗文이 『蒙古字韻』을 증정한 <증정본>의 권두 「字母」에 보이는 32개 파스파 문자의 자음자와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增訂}『蒙古字韻』의 런던 초본에 소개된 字母圖는 매우 많은 사실을 알려준다. 원래 이 자모도는 『예부운략』을 파스파 문자로 번역한 『蒙古韻略』의 권두에 「禮部韻略七音三十六母通攷」라는 제목으로 첨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의 [사진 4-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古今韻會擧要』를 비롯한 현전하는 운서에는 이러한 제목만 남아있고 자모도는 삭제되었다.
즉, 元代에는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고 중국 전통 운서의 36자모를 이 문자로 표음하여 七音으로 經을 삼고 四聲으로 緯를 삼아 도표로 보이는 자모도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표 4-2]와 같이 파스파 문자로 36자모를 표음한 자모도는 중국의 운서에서 오늘날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明의 太祖 朱元璋은 파스파 문자를 胡元의 殘滓로 보고 철저하게 廢絶시켰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에서는 파스파 문자를 훈민정음으로 바꿔서 『四聲通攷』에 게재하였고 이 字母圖들이 『사성통해』에 轉載되어 전해온다. 『사성통해』에 제시한 자모도는 「광운 36자모도」와 「운회 35자모도」, 그리고 「홍무운 31자모도」의 3종이 있다. 그 가운데 <홍무운 31자모도>가 앞의 [표 4-2]에 파스파자로 보인 자모도와 가장 유사하다. 이를 먼저 보이면 다음과 같다.
[사진 4-3]를 보기 쉽게 도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四聲通解』에는 [표 4-4]로 정리한 자모도를 [사진 4-3]으로 보인 것처럼 「洪武韻三十一字母之圖」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이 [표 4-4]의 「홍무운 31자모도」는 훈민정음 <언해본>, 즉, 『훈민정음』이나 「세종어제 훈민정음」의 32자모에서 脣輕音 次淸의 ‘ㆄ’을 빼면 완전히 일치한다. 다만 <언해본>에서는 “ㅇᄅᆞᆯ 連書脣音之下ᄒᆞ면 則爲脣輕音ᄒᆞ니라 - ㅇ를 순음 아래 이어 쓰면 입술 가벼운 소리, 즉 순경음이 되니라”라고 하여 순음 4개 /ㅂ, ㅃ, ㅍ, ㅁ/의 순경음 /ㅸ, ㆄ, ㅹ, ㅱ/ 4개를 모두 인정하였으나 「홍무운 31자모」에서는 [표 4-4]에서 보인 것처럼 순경음 차청, 즉 ‘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훈민정음 <언해본>에서는 순경음 차청의 /ㆄ/를 넣어 32자로 소개하여 漢音의 표음을 위하여 만든 글자로 보았다. 여기서 漢音 표기의 치두와 정치를 구별하는 5자를 제외하면 언문 27자가 되어 세종 25년 12월의 초기에는 이것으로 ‘언문 27자’를 제정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全濁字 6개와 脣輕音 표음의 4자를 빼서 언문 초성 17자로 한 것이 바로 훈민정음 28자에 보이는 초성 17자이다. 실록에 보이는 “上親制諺文二十八字”의 ‘언문 28자’는 후일 信眉 대사에 의하여 중성 11자를 더하여 추가한 것이다.
4.5.3 『몽고운략』은 <고금훈회>에 의하여 수정되어 『蒙古字韻』이란 이름으로 간행되었고 후대의 至大 戊申(1308)에 朱宗文이 이를 증정하여 {증정}『蒙古字韻』이 간행되었다. 이것을 淸代 乾隆 연간(1737~1778)에 필사되어 런던의 大英도서관에 소장되었음을 전술한바 있다(졸저, 2009:101). 이 [사진 4-1]에서 보인 것처럼 런던 寫本의 권두에 「字母」라는 제목으로 36자모와 그를 표기하는 파스파자, 그리고 喩母에 속하는 파스파 7자를 소개하였다. 元代에 편찬된 『法書考』 와 『書史會要』에서 파스파자를 43자로 본 것은 한자음에서 전통적인 반절상자의 36자모에 喩母字 7개를 더한 때문이다.
앞에 든 [표 4-1]의 禮部韻 36자모는 파스파자 대신 훈민정음으로 표음되어 『四聲通解』에서는 「廣韻三十六字母之圖」로 실었다. 申叔舟의 『四聲通攷』에서는 이것을 옮겨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졸저(2009:245)에서 옮겨보면 [표 4-5]와 같다.
이 [표 4-5]을 앞의 [표 4-1]에 보인 예부운 36성모와 비교하면 몇 개의 차이가 발견되지만 대체로 유사하다. 차이가 나는 것은 아마도 『四聲通解』에서 『예부운략』의 다른 판본을 참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예부운략』을 파스파 문자로 번역한 『몽고운략』은 후대에 『고금운회』, 또는 『동 거요』에 의거하여 수정되어 『蒙古字韻』이란 서명으로 간행된다. 여기에도 파스파 문자로 36자모를 표기한 자모도가 첨부되었을 것인데 이를 훈민정음으로 전사한 것이 역시 『사성통해』에 게재되었다. 이를 옮겨 보면 [표 4-6]과 같다.
4.6 東國正韻과 古今韻會
4.6.0 유창균(1966:141)에서는 東國正韻은 古今韻會擧要를 底本으로 해서 우리의 音韻體系에 맞추어 改編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이어서 韻會擧要와 東國正韻은 같은 字韻 아래에 收錄된 字數에 있어서 一致할 뿐만 아니라 收錄한 字의 性格이나 排列의 차례까지도 전혀 同一하다(유창균, 1966:162)라고 하여 <거요>와 『동국정운』과의 관계가 긴밀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고금운회>로 『몽고운략』을 수정한 『몽고자운』에 의거한 때문이다.
실제로 훈민정음이 제정된 것을 처음으로 게재한 『세종실록』(권103) 癸亥년(1443) 12월말의 기사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짓다보다 두 달 후인 세종 甲子(1444) 2월 16일에 以諺文譯韻會 -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다(세종 26년 2월 丙申조)라는 기사가 있어 언문, 즉 훈민정음을 제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韻會>'의 번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음운회>나 『고음운회거요』는 훈민정음의 제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몽고자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유창균(1966)에서는 훈민정음으로 '韻會'를 번역한 것이 후일 『동국정운』으로 실현되었다고 보았으나 졸저(2015)에서는 明의 압력으로 『몽고자운』을 통한 '운회'의 번역을 중단하고 『洪武正韻』을 번역하여 端宗 3년에 『洪武正韻譯訓』을 간행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졸저, 2012).
운회의 <거요>를 훈민정음 번역한 것은 바로 『蒙古韻略』이나 『蒙古字韻』, {증정}『몽고자운』과 같은 <몽운>에서 중국 한자음을 파스파자로 轉寫한 것과 같은 작업이어서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훈민정음과 파스파자의 대응 관계만 설정되면 자동적으로 표음할 수 있었다. 그런 목적으로 앞의 [표 4-2]에 따라 [표 4-]으로 보인 초기의 언문 27자를 만들고 그것으로 파스파자를 대응하여 『몽고자운』처럼 훈민정음으로 <韻會>를 번역하려 한 것이다.
4.6.1 현전하는 元代 朱宗文의 증정본인 『몽고자운』의 런던초본을 보면 전통적인 운서의 36자모에 대한 파스파자의 대응 글자를 정하고 韻攝에 해당하는 喩母의 모음자를 정한 다음에 이를 기계적으로 대응시켜 이 운서를 편찬한 것으로 본다. 같은 방법이 『동국정운』에서도 이루어졌다. <거요>의 36聲母를 보면 [표 4-3]에서 보이는 舌上音과 正齒音의 구별을 없애고 [표 4-1]에 보이는 次濁次上의 /魚/음을 /疑/와 통합하며 /合/음도 /匣/에 통합하여 [표 4-4]과 같이 모두 31자모만 인정하였다.
이와 같은 <거요>의 자모체계는 바로 『동국정운』의 자모와 일치한다. 즉, '동국정운序'에 字母之作諧於聲耳, 如舌頭、舌上、脣重、脣輕、齒頭、正齒之類, 於我國字音未可分辨, 亦當因其自然 - 자모는 소리, 聲에 맞추어 지어야 한다. 예를 들면 설두와 설상, 순중과 순경, 치두와 정치의 부류는 우리 한자음에서 나뉘지 않으니 역시 마땅히 자연에 따라야 한다라고 하여 우리 한자음, 즉 東音에서는 舌上音과 正齒音, 脣重音과 脣輕音, 齒頭音과 正齒音의 구별이 없음으로 이를 표음하는 글자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국정운 23자모 체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은 자모도를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我國語音其淸濁之辨與中國無異, 而於字音獨無濁聲, 豈有此理, 此淸濁之變也 - 우리나라 말소리에서 청탁의 구별은 중국과 다르지 않으나 한자음에 유독 濁聲이 없으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이것이 청탁의 변화다라고 하여 우리 한자음에 濁音이 없음을 인정하였다. 여기서 濁音은 유성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에서는 [표 4-3]와같이 ‘탁음’으로 분류한 全濁字를 모두 뺐다. 앞에서 언급한 舌頭:舌上, 脣重:脣輕, 齒頭:正齒의 구별도 모두 없애서 다음과 같이 17자만 인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세종이 친제한 훈민정음 28자의 初聲 17자다. 여기에 전탁음 표기의 6자 /ㄲ, ㄸ, ㅃ, ㅆ, ㅉ, ㆅ/를 더하면 동국정운 23자모가 되며 여기에 다시 순경음 4자 /ㅸ, ㆄ, ㅹ, ㅱ/를 더 하면 우리말과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에 필요한 27자가 된다. 이 27자는 모두 훈민정음의 <해례본>에서 제자해, 초성해, 종성해로 설명되었다.
4.6.2 앞에서 고찰한 훈민정음 <언해본>, 즉 『훈민정음』이나 「世宗御製訓民正音」에 추가된 齒頭와 正齒의 구별은 漢音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말이나 우리 한자음, 그리고 동국정운식 한자음 정리에도 사용되지 않는 글자였음으로 諺文의 반절 27자로 분류한 초성에 속할 수 없다. 그런데도 <언해본>의 이러한 초성 32자는 전혀 파스파자의 <蒙韻>에 의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파스파 문자는 元 世祖 쿠빌라이 칸이 八思巴 喇嘛를 시켜 41개의 자모를 만들게 하였으며 이 문자를 발음기호로 하여 한자음을 표기한 운서, 흔히 앞에서 蒙韻이라고 부르는 『蒙古韻略』과 『蒙古字韻』을 간행하였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朱宗文이 至大 戊申(1308)에 이를 증보하고 수정한 <增訂本>을 간행하였다(졸저, 2009:33~38). 세 권의 蒙韻은 모두 失傳되었지만 마지막 <증정본>이 필사되어 전해오며 런던의 大英도서관에 소장되었다. 이 런던 초본에는 「字母」라는 題下에 「36字母之圖」를 보였다. 따라서 이 세 권의 <蒙韻>에는 모두 <증정본>의 「字母」와 같은 「36字母之圖」를 권두에 添載한 것으로 추정된다.
4.7 『四聲通解』 소재의 字母圖
『사성통해』에는 앞에서 [사진 4-3]으로 제시한 「洪武韻三十一字母圖」와 「광운 36자모도」 이외에도 「운회 35자모도」가 附載되었다. 이것은 『洪武正韻』의 「字母圖」란 이름으로 제목을 '洪武韻'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몽고자운』의 <증정본>에 「字母」라는 제목으로 열거한 32자모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아무래도 『몽고자운』이란 말은 明으로부터 禁忌視된 書名이므로 당시 明 太祖의 勅撰韻書인 『홍무정운』의 이름을 빌려 이렇게 표시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홍무운 31자모도」는 훈민정음 <언해본>의 漢音 표음을 위하여 제정했다는 齒頭와 正齒의 구별을 위한 5자를 더하여 모두 32자를 만들었다. 이 32자는 <홍무운 31자모>와 舌上音 /娘 [ㄴ]/만 제외하면 완전하게 일치한다. 앞에 보인 4.5.0의 파스파 문자의 자모표 [표 4-2]에서 순경음 비모와 봉모가 / /로 서로 같고 舌上音 4자 가운데 3자 / , , /가 정치음의 3자와 동일하여 36자모에서 4자가 줄어 32자만이 서로 다른 글자로 표기되었다. 舌上音의 불청불탁 娘母 / /만이 舌頭音 泥母 / /와 다르지만 [표 4-6]에서는 舌上音 4자를 모두 삭제하여 泥母를 없애면 31자가 된다.
훈민정음 <언해본>의 32자를 蒙韻의 런던초본 32자와 비교하면 舌上音의 불청불탁 娘母 대신에 순경음 전탁의 奉母 /ㅹ/를 더 인정한 것인데 아마도 서로 자모의 인식에서 이견이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하여 <홍무운 31자모>는 蒙韻의 파스파 문자로 표기한 자모와 娘母만을 제외하고 완전히 일치한다. <홍무운>에서는 舌上音 4자를 모두 인정하지 않은 셈이다.
『사성통해』에서는 권두에 '홍무운 31자모도 이외에 '廣韻36字母之圖'와 '韻會35字母之圖'가 附載되었다. 졸고(2011b)와 졸저(2015b)에서 이것은 朱宗文이 증정한 『몽고자운』의 「字母」에 보이는 36자모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이 蒙韻에서는 36자모 가운데 동일한 것으로 인정하여 같은 파스파 문자로 표시한 글자가 4개나 있어 모두 32자만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明 태조의 勅撰 운서인 『洪武正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31자모를 '洪武韻'이라 한 것은 바로 蒙韻을 따르는 훈민정음을 위장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나머지 '광운 36자모'는 실제로 <廣韻>, 즉 『大宋重修廣韻』이 36자모를 『蒙古韻略』에서 그대로 堅持하였고 '운회 35자모'도 실제로 『蒙古字韻』이 『古今韻會擧要』의 35자모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광운 35자모', '운회35자모'가 전혀 망발은 아니다(졸저, 2009).
따라서 『四聲通解』의 권두에 첨부된 「廣韻三十六字母之圖」와 「韻會三十五字母之圖」, 그리고 「洪武韻三十一字母之圖」는 모두 『蒙古韻略』, 『蒙古字韻』, {증정}『蒙古字韻』에 첨부된 것을 옮겨서 파스파 문자 대신에 훈민정음으로 표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목을 <몽운>이라 하지 않고 ‘廣韻, 韻會, 洪武韻’으로 한 것은 明의 눈치를 본 때문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고금운회 거요』(고려대 화산문고본)의 권두에 ‘蒙古字韻音同’을 ‘據古字韻音同’으로 한 것은 ‘蒙古’라는 말을 忌諱한 것이다. 얼마나 조선 초기에 明이 조선과 몽골의 北元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감시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몽고운략>이니 <몽고자운>이니 하는 운서의 서명이나 파스파 문자로 표음된 36자모도도 철저하게 회피하게 되었으며 다만 「禮部韻略七音三十六母通攷」라는 제목만을 남기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 제목 다음에는 앞의 4.5.0에서 보인 [사진 4-1]에서 보인 {增訂}『몽고자운』 권두의 字母圖와 같은 36 자모도가 파스파 문자로 표음되어 附載되었을 것이다.
5. 信眉大師와 고대인도의 聲明記論
5.0 앞에서 중국 聲韻學은 고대인도의 聲明記論에서 발달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필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된 고대인도의 毘伽羅論은 많은 佛經 속에 들어있었고 파니니((波膩尼, 波你尼: Paṇini)의 『八章(Aṣṭādhyāyī)』으로 그 일부가 서양언어학계에 알려졌음을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 가운데 음성 연구인 聲明記論이 信眉 대사에 의하여 조선의 세종에게도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 훈민정음을 제정할 때에는 『蒙古字韻』에 따라 중국 성운학의 聲母에 의거하여 언문 27자를 反切에 의거하여 만들었을 뿐이다.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에 보이는 언문 27자는 바로 이것을 말한다.
信眉에 의하여 悉曇의 摩多에 의거하여 중성 11자가 따로 추가되었다. 전에는 反切, 즉 初聲 27자만을 諺文으로 하였으나 신미로 인하여 毘伽羅論의 聲明記論이 도입되고 梵字의 半字論에서 독자적으로 설정된 摩多를 훈민정음의 中聲으로 하였다. 처음에는 파스파자의 喩母字 7개를 훈민정음에서는 기본자 /ᄋᆞ, 으, 이/와 初出字 /오, 아, 우, 어/의 7자로 표시하였으나 다음의 5.1.1.에서 보인 梵字의 12 摩多를 따라 再出字 /요,야, 유, 여/의 4자를 더 하여 모두 11자의 中聲字를 만들었다.
애초의 反切 27자 가운데 한자음 표기에만 사용되는 全濁字 6개 /ㄲ, ㄸ, ㅃ, ㅆ, ㅉ, ㆅ/와 脣輕音 4자 /ㅸ, ㆄ, ㅹ, ㅱ/를 제외하여 初聲 17자만을 인정하고 이것으로 유성음이 없고 순경음이 변별적이지 못한 우리말과 우리 한자음, 즉 東音의 표기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 11자 中聲字를 더하여 훈민정음의 28자가 된 것이다(졸저, 근간). 반면에 반절 27자는 反切法에서 反切上字, 즉 聲母로 27자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광운>의 36성모에서 이미 중국 성운학에서 사라진 舌上音 4자와 漢語에만 존재하는 권설음의 正齒音 5자의 9자를 뺀 것이다.
漢字는 ‘形, 音, 意’로 구성되었지만 글자만으로는 발음을 알 수가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後漢 이후에 중국에 불경을 들여온 西域의 譯經僧들은 한자의 발음을 표음하기 위하여 反切法을 개발하였다. 즉, 梵字가 자음과 모음으로 된 음절 문자이어서 첫 자음을 体文이라 하고 뒤에 오는 모음을 摩多라고 하여 이 각각을 半字라고 하였는데 한자도 같은 방법으로 한자음을 聲과 韻으로 나누어 그 각각을 다른 한자로 표음하는 반절의 방법으로 한자음을 표음하였다.
예를 들면 ‘東’의 발음을 “德紅切”, 즉 德의 聲인 [t]와 紅의 韻인 [ong]으로 하여 [tong]을 표음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의 韻書가 隋代 陸法言이 편찬한 『切韻』(601)이다. 중국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운서다. 따라서 <절운>은 이와 같은 반절법으로 한자음을 표기한 최초의 운서로 보인다. 西域의 譯經僧들이 梵語로 된 佛經을 漢譯할 때에 한자음의 정확한 記述을 위하여 발달시킨 것이 反切이다. 이와 같은 反切法을 隋代에 陸法言 등이 받아들여 만든 운서가 바로 <절운>이다.
이 운서는 한자의 발음을 표음하는데 梵字의 半字論 등의 방법으로 한자의 음운을 분석하여 표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졸고, 2017b). 불경에 자주 등장하는 半滿二敎라는 것은 半滿敎, 또는 半滿二字敎라고도 하며 梵字의 교육에서 사용하는 半字論과 滿字論을 말한다. 半字敎의 半字란 원래 범어의 산스크리트 문자, 즉, 梵字의 자음(体文)과 모음(摩多)과 같은 알파벳의 교육을 가리키고 滿字敎의 滿字는 이들을 합성한 悉曇의 교육을 말하며 모두 梵字를 교육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毘伽羅論에서 悉曇章은 글자의 자모를 가르치는 半字敎이고 滿字敎는 음절 단위의 문자인 梵字의 교육을 가리킴을 앞에서 누누이 설명하였다.
梵字에서 体文과 摩多로 나누어 음절 단위로 이해하고 反切로 한자음을 표음한 것이 중국에서 한자음을 聲과 韻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聲韻學을 발달시켰다. 다만 梵字의 体文과 摩多는 대체로 자음과 모음의 구별과 유사하지만 반절상자의 聲과 반절하자의 韻은 이러한 구분이 불가능하다. 즉, 대부분 개음절의 梵語와 달리 중국어에서는 음절 말의 자음이 매우 다양하고 또 변별적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에서도 聲韻學을 그대로 받아들여 문자를 제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중국 한자음의 음운 구조와 우리 한자음이나 우리말의 그것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훈민정음은 중국의 성운학이 아니라 직접 고대인도의 毘伽羅論에 의거하여 문자를 제정한 것이고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비가라론과 聲明記論에 많은 지식을 가진 信眉 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의 제정에 信眉와 같은 佛家의 學僧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로부터 이러한 주장은 가능하다.
5.1 大藏經의 성명기론
5.1.0 졸고(2016b)에서 우리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된 毘伽羅論과 그의 聲明記論은 불경의 大藏經에 포함되어 중국과 한반도에 전달되었다. 佛家의 대장경은 北宋의 태조가 勅令으로 간판한 開寶 勅板(971~983)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고려에서도 이를 들여다가 두 차례에 걸쳐서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즉 고려 顯宗 2년(1011)에 시작한 대장경의 간행 사업은 현종 20년(1029)에 거의 완성되었는데 이것을 初雕大藏經이라 하고 고려 고종 35년(1248)에 완성된 것을 再雕대장경이라 한다.
대장경 속에 들어있던 聲明記論은 어두 자음의 体文과 그에 후속하는 모음의 摩多로 구분됨으로 이것이 중국에 들어가 한자음을 聲과 韻으로 나누는 聲韻學으로 발달한다. 즉, 体文은 聲으로, 摩多는 韻으로 구별하고 한 음절 단위의 한자음을 聲과 韻으로 나누어 표음하는 反切法을 낳게 하였다. 漢字를 悉曇과 같이 음절 단위의 발음으로 보고 体文과 摩多로 나누어 이해한 것이 한자음을 聲과 韻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聲韻學이다.
다만 悉曇의 体文과 摩多는 대체로 자음과 모음의 구별과 유사하지만 聲과 韻은 이러한 구분이 불가능하다. 즉, 대부분 개음절의 梵語와 달리 中古 중국어에서는 음절 말의 자음이 매우 다양하고 또 변별적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에서도 聲韻學을 그대로 받아들여 문자를 제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중국 한자음의 음운 구조와 우리 한자음이나 우리말의 그것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훈민정음은 중국의 성운학이 아니라 직접 고대인도의 비가라론에 의거하여 문자를 제정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특히 훈민정음의 제정에 信眉와 같은 佛家의 學僧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일로부터 이러한 의혹은 사실에 가깝게 인정된다. 중국의 운학에만 의거한 것이라면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최만리 등의 반대상소에 대한 세종의 批答에서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과 자모가 몇 개 있는지 아느냐(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字母有幾乎?)”(『세종실록』 권 103, 세종 26년 2월조)라고 호통을 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이에 대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5.1.1 悉曇을 摩多와 体文으로 나누는 半字論에서 体文은 훈민정음의 初聲과 終聲에 해당되어 자음을 말한다. 半字論에서 体文으로 『大般涅槃經』 「文字品」은 36음을 인정하고 문자를 보였다. 그러나 唐의 智廣이 편찬한 『悉曇字記』(권1)에서는 体文을 35음으로 구별하였다. 졸고(2016b)에서는 『대반열반경』 「문자품」에 소개된 50음의 문자에 대하여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여기서는 唐의 승려 智廣이 편찬한 『悉曇字記』(권1)에서는 摩多와 体文을 살펴보고 그 합성법을 18장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梵字의 문자표인 「悉曇章」에는 마다 12音과 체문 35聲이 수록되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摩多— 阿[a], 阿[ā], 伊[i], 伊[ī], 歐[u], 歐[ū], 藹[e], 藹[ai], 奧[o], 奧[au], 暗[ɑm̥], 疴[ɑḥ]
体文— 迦[ka], 佉[kha], 誐[ga], 伽[gha], 哦[nga],
者[tsa], 車[tsha], 惹[za], 社[zha], 若[ɲa],
吒[ţa], 他[ţ̥ha], 茶[d͎ḁ], 茶[d̥ha] 拏[n̥a],
多[ta], 他[tha], 陀[da], 陀[dha], 那[na],
波[pa], 頗[pha], 婆[ba], 婆[bha], 磨[ma],
也[ja], 羅[ra], 囉[la], 縛[va], 奢[śa], 沙[șa], 紗[sa], 訶[ha], - 遍口聲
濫[llam], 乞灑[kșa] - 重字 - 졸고(2016b:9)
이것을 보면 체문은 “迦[ka], 佉[kha], 誐[ga], 伽(gha), 哦[nga]”을 비롯하여 마지막 乞灑 [kșa]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牙, 齒, 舌, 脣, 喉音’의 순서로 배열하여 훈민정음의 초성의 순서 ‘牙, 舌, 脣, 齒, 喉, 半舌, 半齒音’과 유사하다. 더욱이 牙音 내에서의 순서가 훈민정음의 ‘君[ㄱ, k], 快[ㅋ, kh], 虯[ㄲ, g], 業[ㆁ, ng]’와 같이 매우 같다.
중국 聲韻學에서 全淸, 次淸, 全濁, 不淸不濁으로 구분하는 방법은 원래 비가라론의 음성 연구, 즉 聲明記論에서 조음방식에 따라 무성무기음의 전청, 유기음의 차청, 유성음의 전탁, 비음의 불청불탁을 구별한 것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조음방식에 따른 구별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의 생성음운론에서 말하는 조음방식 자질에 의한 子音의 구분이다. 이러한 자질이 변별적인 梵語와 중국어에서 유용한 구분 방법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어에서는 유성 : 무성의 대립이 없어져 유성음 자질은 잉여적(redundant)이었다. 따라서 全濁의 구별은 한자음 표음에만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조음방식에 따른 자음의 구분은 원래 비가라론의 성명기론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성운학에 영향을 준 것이다.
특히 반절법이 일반화된 다음에 편찬된 <절운>과 이 계통의 <당운>, <광운>에서 36자모를 인정한 것은 半字論의 36 体文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광운>의 36자모는 고금운회의 <거요>에서 35자모, 『蒙古字韻』의 32자모, 『洪武正韻』의 31자모, 그리고 『中原音韻』에서 24자모로 변한 것이라고 본다면 36자모의 설정은 아무래도 悉曇의 36 체문이나 35음에 이끌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의 세종은 동국정운 23자모, 언문 반절의 27자를 인정하였다. 다만 한자의 東音을 표기하기 위하여 17자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5.1.2 半字論의 摩多는 훈민정음의 中聲으로 실현된다. 앞에서 인용한 唐 智廣의 『悉曇字記』에서는 모음에 해당하는 摩多로 12음을 인정하고 이를 표음하는 글자를 제시하였다. 즉, “阿[a], 阿[ā], 伊[i], 伊[ī], 歐[u], 歐[ū], 藹[ä], 藹[ǟ], 奧[o], 奧[õ], 暗[am̥], 疴[ah]”의 모음자는 ‘暗[am̥]’을 제외하면 모두 11자의 모음자들이다(졸고, 2016a). 이 모음들은 長音과 움라우트를 빼면 ‘[a, i, u, ä, o]’의 5모음이다. 일본 假名의 5모음과 같다.
훈민정음에서는 11개의 中聲을 인정하고 11의 中聲字를 제정하였다. 그러나 再出字라고 한 /ㅛ, ㅑ, ㅠ, ㅕ/의 4자를 제외하면 7개의 단모음 표기를 위한 글자를 만들었다고 본다. 또 이 中聲들은 陰陽으로 대립하여 /ㅗ:ㅜ, ㅏ:ㅓ, ㆍ:ㅡ/로 앞의 계열이 陽이고 뒤에 것이 陰이라 하여 모음체계에서 음운의 대립으로 간주하였다. /ㅣ/는 이러한 대립에서 무관하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훈민정음은 陽으로 표시된 후설모음 /ㅗ, ㆍ, 아/와 陰으로 표시된 전설모음 /ㅜ, ㅡ. ㅓ/가 서로 대립하는 구개적 조화(palatal harmony)의 모음조화를 갖춘 모음체계의 문자 제정으로 보았다. 다만 /ㅣ/는 이러한 전후 모음의 대립에서 자유롭다고 보았다.
이러한 中聲의 모음대립과 모음조화의 이해는 훈민정음의 <해례본>의 설명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많은 한국어 연구자들이 한국어에는 역사적으로 모음조화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특히 마틴(2000)과 보빈(2010)에서는 현대한국어에서는 물론 고대한국어에서도 모음조화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졸고(2011a)에서는 이러한 외국연구자들의 주장을 중세한국어의 諺文 자료에서 확인하고 훈민정음의 中聲字는 파스파 문자의 喩母자에 이끌린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모음조화는 중세몽고어의 모음체계를 파스파 문자에서 받아들여 모음자를 제정한 것으로 이해하였고 15세기 한국어 자료에서 보이는 모음조화는 느슨한 형태의 모음동화 현상임을 주장하였다.반면에 중세몽고어는 엄격한 모음조화가 있었다.
실제로 훈민정음 제정 당시에 우리말에도 중세몽고어와 같은 모음조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중성 11자 이외에도 많은 모음자를 만들었다. 즉 훈민정음 <해례본>의 ‘중성해’에서 원래 11자의 중성자에다가 二字合用 4자 /ㅘ, ㅝ, ㆇ, ㆊ/와 一字 中聲의 10字와 /ㅣ/자와의 相合의 10자 /ㆎ, ㅢ, ㅚ, ㅐ, ㅟ, ㅔ, ㆉ, ㅒ, ㆌ, ㅖ/, 그리고 앞의 二字 合用의 4자와 /ㅣ/의 相合字 4개 /ㅙ, ㅞ, ㆈ, ㆋ/를 더 하여 모두 29자의 中聲字를 制字하여 보였다.
이렇게 기존의 모음자에 /ㅣ/를 상합하여 모두 29의 中聲字를 더 만든 것은 /ㅣ/가 모음조화에 관계없이 모두 결합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해례본> ‘중성해’의 마지막에 “侵之爲用最居多, 於十四聲徧相隨 - /ㅣ/(侵)의 사용이 제일 많은 것은 14 소리에 두루 서로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다.
이것은 ㅣ계 이중모음의 형성이 가능한 우리말의 음운구조의 특성을 파악한 것으로 당시 우리말의 ㅣ모음 역행동화 현상을 꿰뚫어 보고 中聲字를 制字하였음을 말해 준다. 다만 중세한국어에 느슨하게 존재했던 모음동화 현상을 중세몽고어의 모음조화로 오해하고 中聲의 음운을 陰陽으로 나눈 것이다. 따라서 15세기 한글 문헌 자료에 보이는 모음조화는 많은 예외가 발견된다.
다만 이러한 현대음성학적인 이론의 적용은 古代인도의 毘伽羅論에 보이는 음성학, 즉 聲明記論을 익히 터득한 연구자가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 옆에서 도와주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信眉 대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그의 毘伽羅論에서 음운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 대하여는 졸저(근간)에서 상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음운에 대한 자음과 모음의 구별이라든지 모음에서 이중모음의 이해가 이미 이 이론에서 상당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5.2 信眉대사와 毘伽羅論
5.2.0 그러면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많은 공헌을 했다는 信眉대사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에 의하여 고대인도의 毘伽羅論의 聲明記論이 어떻게 훈민정음 제정에 이용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信眉 대사에 대하여는 이숭녕(1986)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고찰이 시작되었다. 다만 이 연구에는 당시의 실록 기사와 각종 族譜, 國朝榜目 등의 기록을 개괄적으로 고찰한 것이어서 불확실한 추정만이 가능했었다. 왜냐하면 儒臣들이 주도한 실록과 榜目에서 불가의 승려인 信眉에 대한 기록이 소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박해진(2015)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고찰되었으나 이 역시 역사적 사실의 기술과 저자의 想像이 겹쳐 있어서 사실 확인이 어려운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아무런 근거도 없이 “훈민정음은 세종과 신미가 피워 올린 우주의 꽃”이라든지 “이 땅에 훈민정음으로 온 譯經佛 신미는 ‘바른 소리(正音)’로 나그네를 떠나 주인으로 거듭나는 ‘해탈의 法文’ 훈민정음을 미래로 선물했다” 등등 과장되고 믿기 어려운 주장을 폈다. 다음은 신미의 생애에 대하여는 이 연구에서 언급된 것들을 실증적 전거로 확인하고 정리한 것이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제정에 많은 도움을 준 慧覺尊者 信眉는 太宗 때에 태어나서 13세 되던 해에 成均館에 私粮으로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한 金守省을 말한다(박해진, 2015:19~ 20). 그는 당시 今上인 태종과 上王으로 물러난 定宗과의 알력에서 ‘불충불효’의 죄를 입은 金訓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아비의 죄에 연루되어 廢錮, 즉 벼슬에 나아갈 자격이 없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몰래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아비의 죄로 인하여 일가가 籍沒할 때에 그의 외조부인 李行의 천거로 涵虛堂 스님에게 보내져 出家하게 되었다.
즉, 아비 김훈이 불충불효의 죄로 지방에 유배되자 당시 15세의 金守省은 외가로 보내졌고 외조부 李行은 똑똑한 외손자 守省을 楊洲 檜巖寺에 내려와 있던 당대의 명승 涵虛堂(1376~ 1433)에게 보냈다. 함허당은 守省을 제자로 삼고 손수 머리를 깎아주었다. 이 사실은 『문종실록』(권3) 문종 즉위년 7월 丁巳조의 集賢殿 直提學 朴彭年의 상소문의 “[전략] 信眉는 간사한 중입니다. 일찍이 學堂에 입학하여 함부로 행동하고 음란하고 방종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학도들이 사귀지 않았고 무뢰한으로 지목하였습니다. 그 아비 金訓이 죄를 입어 廢錮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몰래 도망하여 머리를 깎았습니다. [하략]”라는 기사에 나오는 “몰래 도망하여 머릴 깎은 것”과는 차이가 난다.
5.2.1 涵虛堂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많은 기여를 한 妙嚴尊者 無學의 제자로서 慈母山 烟峰寺에서 『金剛經五家解說誼』를 저술하여 得通의 法號를 얻은 고승이다. 박해진(2015)에서는 동국대학교출판부가 편한 『韓國佛敎全書』 (권7)의 「涵虛堂得通和尙行狀」에 소개된 함허당의 修學과 出家에 대한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는데 여기에 그것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함허당은 태조 5년(1396)에 당시 21세의 나이로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의 죽음을 보고 세상이 덧없음을 깨닫고 육신이 허깨비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관(觀)하고 두 종류의 생사에서 벗어나겠다고 서원(誓願)했다. 일승(一乘)의 열반(涅槃)을 추구하고 도를 넓혀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며 덕을 길러 삼유(三有)를 돕겠다는 뜻을 세워 출가하려고 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 잠도 자지 못하고 산수(山水)로 떠날 생각을 멈추는 날이 없었다. 손에 경서(經書)를 붙들고 갈림길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뜻밖에 혼자 바쁘게 길을 가는 한 스님을 만났다. 친척을 끊어버리고 천천히 지팡이를 짚고 길을 나섰다.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에 도착하여 그 스님과 각보(覺寶)라는 다른 늙은 산사람과 함께 뜻을 모아 머리를 깎았다. 박해진(2015:25)
이 글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함허당은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하다가 친구의 죽음으로 생사의 허무함을 깨닫고 佛家에 귀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함허당은 儒學과 불교에 관심이 있었고 성균관에서 배운 한문으로 불경을 탐구하여 도를 얻으려고 시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金守省, 후일의 信眉가 역시 어렸을 때에는 成均館에서 유학을 배우고 후일 涵虛堂에게 불교를 배우는 것과 상황이 유사하다. 따라서 신미도 그의 한문 실력으로 불경을 통하여 불도를 얻으려고 도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涵虛堂은 無學 대사의 적통을 이은 학승으로 호를 得通으로 한 것처럼 많은 불경에 정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불경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圓覺經疏』(3권)와 『金剛經五家解說誼』(2권), 『顯正論』, 『般若懺文』(2질), 『綸貫』(1권), 『對靈小參下語』 등의 불경을 교정하고 새로 베껴 써서 신도들이 참고하게 하였다. 함허당의 이러한 불경 해석의 학문적 태도는 후일 그의 제자인 신미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함허당의 스승인 無學이 고려 명승 懶翁의 적통을 이어받은 것처럼 信眉는 涵虛堂의 得通을 이은 것이다.
5.2.2 세종 1년부터 다음 해까지 涵虛堂은 순천 松廣寺에 있다가 세종 3년에 왕의 명에 따라 聖寧大君의 陵寢 사찰인 大慈庵의 주지로 있게 되었다. 세종 6년까지 이 암자에 있으면서 왕실의 많은 法會를 주관하였다. 이때에 신미는 侍子 승려로 스승을 도왔다. 세종 5년에는 왕실과 종친의 發願으로 강화도에 淨水寺를 重創하면서 역시 신미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大慈庵에서 法華法廣을 열어 『法華經』을 널리 소개하였다.
세종 6년 태종의 3주기 불사를 끝낸 함허당은 大慈庵 住持를 사직하고 雲嶽山 懸燈寺로 떠났고 신미는 속리산 法住寺로 향했다. 함허당은 세종 15년 4월에 寂滅하였다. 그는 평생 동안 불경의 주석과 불법에 대한 詩賦, 篇章을 남겼다. 門徒인 埜夫가 앞에서 언급한 「涵虛堂得通和尙行狀」을 정리했고 侍子 覺眉가 『涵虛堂語錄』을 편찬했다.
신미는 속리산 법주사에서 대장경을 읽고 「悉曇章」을 통해서 梵字를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周易』을 다시 공부했다고 하는데(박해진, 2015:36) 이러한 주장이 무슨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나 이러한 性理學의 이론이나 悉曇에 대한 지식은 모두 후일 훈민정음 배경이 된 이론들이다(졸고, 2016b,c).
『훈민정음』의 「해례」에 들어 있는 고대인도에서 발달한 毘伽羅論과 그의 음성학인 聲明記論이 대장경 속에 들어있었고(졸고, 2016b) 또 훈민정음 해례의 天地人 三才와 陰陽, 五行은 『周易』에서 온 이론들이다(졸고, 2016c). 신미가 <해례본>의 편찬자로 이름이 들어있지 않으나 이러한 배경적 이론이 훈민정음 제정에서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이 이론이 그대로 <해례본>에 녹아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5.2.3 信眉가 세종을 만난 것은 孝寧大君의 추천에 의한 것이다. 속리산 福泉寺에서 佛家의 대장경에 정통한 學僧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信眉를 세종이 수양대군을 보내어 불러 올려 효령대군의 저택에서 만났다는 기사가 金守溫의 『拭疣集』(권2) 「福泉寺記」에 전해진다. 물론 자신의 家兄에 관한 이야기임으로 좀 과장된 표현이 있었겠지만 세종과의 첫 만남에서 신미의 학식이 세종에게 크게 감동을 준 것으로 기재되었다.
졸저(2015)에 의하면 훈민정음의 제정은 세종과 그 가족들의 비밀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당시 몽고의 元에 귀화하여 雙城摠管府에서 몽골의 達魯花赤(daruγači)의 벼슬을 살았던 李子春의 後裔들이 고려를 易姓 혁명으로 뒤엎고 새로운 조선을 세웠으므로 明은 이들을 믿지 못하여 항상 감시의 눈을 뻔득였는데 이와 같은 明의 감시와 한문에 중독된 儒臣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한 때문이다. 조선을 세운 李成桂는 바로 이자춘의 아들이었으며 세종에게는 高祖父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세종인 信眉를 만났을 때에는 이미 훈민정음의 제정이 상당히 진척되었을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이미 중국 聲韻學에 의거하여 36聲母에서 우리 한자음 표기에 필요한 27字母를 추출하여 反切로 삼았고 이것으로 韻會를 번역, 즉 발음을 轉寫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에는 훈민정음이 우리말을 표기할 수준의 문자는 아니고 당시 한자의 동북방언을 반영한 宋·元代의 성운학자 黃公紹가 편찬한 『古今韻會』을 새 문자로 발음을 전사하는 수준의 표음 기호였을 것이다. 元의 파스파 문자가 담당했던 한자의 발음기호와 같은 수준이었다.
信眉는 悉曇의 半字論에서 말하는 摩多 12字에 맞추어 中聲 11자를 별도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초성 17자와 결합하여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였다. 애초에 중성 11자가 없었던 것은 崔萬理의 반대 상소에 언문 27자로만 되었으며 이것은 중국 聲韻學에서 말하는 大韻, 즉 反切上字의 초성만을 말한 것이다. 즉 훈민정음의 초성 17자에 全濁字, 즉 各字竝書의 6자와 脣輕音 4자를 더한 것이다. 이것은 反切 27자로도 불리었으며 反切上字의 초성을 표음하는 27개 자모를 말한 것이다(졸고, 2017b).
모음을 표기하는 中聲字의 제자는 신미 대사가 훈민정음의 제정에 관여한 후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초성, 중성, 종성의 구별이 생겼고 이를 결합하여 한 글자로 표기하는 방법은 梵字의 滿字論에 의거한 것이며 悉曇의 정서법에 맞춘 것이다. 信眉 대사로부터 비로소 자음과 모음, 그리고 음절 말 자음을 표기하는 받침의 글자들, 즉 초성, 중성, 그리고 종성이 완비되어 한자음만이 아니라 우리말 표기가 가능한 문자 체계가 이룩된 것이다.
5.2.4 信眉가 대장경의 불경을 힘들여 공부했다는 기록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그가 법주사에서 만나서 평생의 道伴이 된 동갑내기 守眉 대사를 기리는 전남 靈巖 道岬寺에 세워진 ‘妙覺和尙碑’에 “[前略] 月出山道岬寺出家, [中略] 抵俗離山法住寺, 遇沙彌信眉, 同歲同名與之俱, 琢磨磋切讀大藏習毘尼 [下略] - [전략] [수미는] 월출산 도갑사에서 출가하여 [중략] 속리산 법주사에서 사미(沙彌) 신미를 만났는데 나이가 같고 이름도 같아 더불어 대장경을 읽고 비니(毘尼)를 배우는데 절차탁마하였다”이란 기사가 보인다. 이를 보면 신미와 수미가 대장경을 읽고 毘尼, 즉 律藏을 배우는데 매우 열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미의 大藏經을 통한 학습은 그 속에 포함된 고대인도의 毘伽羅論과 그 이론의 음성학인 聲明記論을 불경에서 찾아내어 익히고 깨닫게 한다. 이것이 훈민정음을 비가라론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미가 梵語와 梵文을 익혀서 터득했다는 사실이다. 박해진(2015:36)에서 “신미는 梵書 悉曇章을 읽고 번역하기 위하여 梵語도 익혔다”라고 하였으며 그 근거로 이능화(2010, 권5:439, 444)의 「諺文字法源出梵天」의 주장을 들었다. 이는 졸고(2017b)에서 논의한 것처럼 신미가 고대인도의 半字論과 滿字論을 주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이용한 한자음의 反切 표기를 잘 알았음을 의미한다.
5.3 毘伽羅論의 聲明記論
5.3.0 고대인도의 毘伽羅論은 졸고(2016b)에서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한 것으로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梵語의 ‘Vyākaraṇa-분석하다’를 한자로 飜譯한 것이다. 불경 속에서는 ‘記論’으로 번역되었다. 天竺의 승려 竺佛念이 漢譯한 『菩薩瓔珞本業經』(하권)에서는 옛 佛道에서 배워야 하는 十二部經의 하나로 毘伽羅那를 들었다.
비가라론은 베다(Veda) 경전에 사용된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대한 문법론이며 梵文의 문장을 분석하여 각 요소를 찾아내고 그 요소들이 문장 안에서 어떤 문법적 특징을 갖는지 살펴보는 문법이다. 즉, 언어의 문장을 분석하여 節, 句, 단어, 形態, 音韻으로 나누고 그 각각의 단위에 대한 언어 규칙, 즉 문법을 살피는 분석문법이다. 따라서 통사론, 형태론, 음운론의 세 분야를 망라하게 된다. 이 가운데 음운론, 그리고 이의 바탕이 되는 음성학을 전술한 바와 같이 성명기론이라 하였다.
산스크리트어, 즉 범어는 屈折語임으로 비가라론에서는 이 언어에서 보이는 단어의 曲用(declension)과 活用(conjugation)을 포함하여 언어의 굴절을 문법으로 정리하였다. 梵語 문장의 性, 數, 人稱, 時制, 敍法에 따른 단어의 굴절에 대하여 『大般涅槃經』 등의 많은 불경에서 비가라론의 이론으로 설명하여 놓았다. 오늘날에는 비가라론이 파니니(Pāņini)의 『八章(Aṣṭādhyāyī)』에서 그 이론의 일부가 서양에 전달되어 19세기에 조음음성학을 낳고 20세기 후반에 미국의 언어학계를 風靡한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과 생성음운론이 이 <팔장>의 영향을 받았음은 앞의 2.1에서 언급하였다.
<팔장>의 毘伽羅論은 記論이라 漢譯하여 後漢시대 이후에 중국에 유입된 불경들에 의하여 학승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굴절적인 문법구조의 梵語에 적용하던 毘伽羅論의 통사론과 형태론은 孤立語인 중국어에서 적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음운론만은 중국어나 티베트의 西藏語, 몽골어, 그리고 조선어에서 그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비가라론에서 인간의 發話에 유용한 음성에 대한 연구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聲明記論이라 하였다. 즉, 언어음인 聲明에 대한 비가라론의 연구를 聲明記論으로 번역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고립어이기 때문에 형태론과 통사론보다 유독 이 성명기론을 받아들여 聲韻學을 발달시켰다.
5.3.1 성명기론은 佛家의 五明 가운데 인간의 언어음성인 聲明, 즉 南海寄歸內法傳(권4, 앞의 2.1에 보인 주1 참조)에서 언급된 攝拖必駄(śabda-vidyā)를 毘伽羅論의 방법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불가에서 5明(pañca-vidyā-sthāna)이란 다섯 가지 학문이나 기예를 발한다. 여기서 ‘明’은 배운 것을 분명히 한다는 뜻이다. 이를 다시 內五明(불교도로서의 학예)과 外五明(세속 일반의 학예)으로 나누고 첫 번째의 聲明은 언어와 문자를 연구하는 음성학으로 內五明에 속한다고 보았다. 五明의 두 번째인 工巧明은 모든 기술과 공업, 算數와 冊曆 등을 밝힌 것이고 세 번째인 醫方明은 의학을 밝힌 것이며, 네 번째의 因明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논리학이었다. 마지막 다섯 번째의 內明은 자기 종파의 종지를 밝힌 것으로 불교는 3장 12部敎가 내명이다.
毘伽羅論은 佛家에서 外智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外智(bāhyam̥ jnanam)는 外道의 지식이란 뜻으로 佛法 이외의 邪法에서 얻은 지식을 말한다. 世親과 관계가 있는 『金七十論』에 “何者名爲智? 智有二種: 一外智, 二內智。外智者, 六皮陁分: 一式叉論, 二毘伽羅論, 三劫波論, 四樹底張履及論, 五闡陁論, 六尼祿多論。此六處智名爲外。- 무엇이 지식인가?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외지(外智)요 둘은 내지(內智)다. 외지란 여섯의 피타경(皮陁經), 즉 베다 경전을 이해하는데 보조적인 학문이 있다. 첫째는 식차론(式叉論), 둘째는 비가라론, 셋째는 겁파론(劫波論), 넷째는 수저장리급론(樹底張履及論), 다섯째는 천타론(闡陁論), 여섯째는 니록다론(尼祿多論)이다. 이 여섯을 외지(外智)라 하다”라고 하여 비가라론(Vyākaraṇa)이 베다 경전을 이해하는 여섯 개의 보조 학문의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5.3.2 毘伽羅論의 聲明記論은 불경에 포함되어 중국과 고려, 조선에 전달되었다. 고려 때에 만들어진 소위 팔만대장경으로 불리는 大藏經은 조선의 學僧들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經典이었다. 특히 信眉는 스승인 涵虛堂의 뒤를 이어 경전을 읽고 이를 해석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계속해서 대장경에 포함된 비가라론 및 성명기론의 지식을 제대로 습득할 수 있었다.
불경 속에 포함된 성명기론의 조음음성학에 의거하여 梵字를 살펴본 내용이 『大般涅槃經』(권8) 「文字品」에서 소개되었다. 여기에 소개된 梵字는 모음인 摩多(mātr)와 자음인 体文(vyanjana)으로 나누었으며 이 중에 摩多가 기본 글자이고 이 각각을 半字로 보았다. 불경에서 보이는 ‘半字敎’, 또는 ‘半字論’은 梵字의 알파벳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滿字敎’, ‘滿字論’은 摩多와 体文이 결합하여 하나의 음절 문자, 즉 悉曇의 교육과 이론을 말한다.
信眉 대사가 悉曇의 摩多와 体文에 대하여, 그리고 이 각각을 半字로 이해하여 학습한 梵字의 지식은 훈민정음에서 初聲 중심에서 中聲을 독립시키는데 크게 기여한다. 실제로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제정에 관여하기 이전에는 27자의 初聲만을 글자로 만들어 反切 27자라 하였다. 원래 反切法에서는 聲과 韻으로 나누어 후자를 反切下字, 전자를 反切上字라 하였다. 앞의 [표]에서 보인 바와 같이 韻은 다시 韻腹, 紐躡과 韻尾로 나뉘는데 초창기 훈민정음에서는 아마도 자모로 불리는 反切上字만을 글자로 표시한 것 같다.
훈민정음이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문자를 제정한 것에 대하여 그동안 한국의 언어학계가 침묵하였지만 실제로 이것은 元代에 제정된 파스파 문자에서도 시도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자의 모델이 된 티베트의 西藏 문자로 소급될 수 있으며 결국 인도의 梵字에서 나온 것이다. 더욱이 훈민정음의 <언해본>에서 초성(初聲)은 “ㄱᄂᆞᆫ 牙音이니 君字初發聲ᄒᆞ니 並書ᄒᆞ면 如虯字初發聲ᄒᆞ니라, ㅋᄂᆞᆫ 牙音이니 如快子初發聲ᄒᆞ니라, ㅇᄂᆞᆫ 牙音이니 如業字初發聲ᄒᆞ니라”으로 시작하는 ‘ㄱ(君), ㅋ(快), ㅇ(業)’, 그리고 並書한 ‘ㄲ(虯)’의 순서로 시작하였다. 훈민정음의 /ㄱ[k], ㅋ[kh], ㅇ[ng], ㄲ[g]/의 글자 순서는 파스파 문자나 西藏 문자 , 그리고 梵字의 体文에서도 모두 첫 글자로서 유사하게 시작된다. 즉, 졸고(2016b)에 의하면 파스파 문자의 / [k], [kh], [ng], [g]/나 梵字 체문의 /迦[ka], 佉[kha], 誐[ga], 伽[gha], 哦[nga]/는 그 순서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글자의 증감이 있지만 /k/를 첫 글자로 그리고 /kh/를 둘째 글자로 하여 시작하는 것은 같다고 한다. 西藏 문자에서도 /k, kh, g, ng/의 순서로 동일하다.
5.3.3 그러나 梵字의 悉曇에서는 韻腹의 紐躡에 해당하는 摩多, 즉 모음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梵字는 漢字와 같이 음절문자이지만 자음과 모음이 결합한 개음절의 언어이므로 음절 말 자음은 변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大般涅槃經)』(권8)에는 迦葉 菩薩과 釋迦와의 대담에서 14 摩多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대반열반경』(권8) 초두에 “迦葉菩薩復白佛言: ‘世尊云何如來說字根本?’ [중략] 是十四音曰字本 - 가섭 보살이 부처의 말씀에 다시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글자의 근본입니까? [중략] 이 14음이 글자의 근본이다’라고 하다”(졸고, 2016b:139)라는 언급이 있어 모음을 14자로 표기하고 이것은 음절 단위의 문자에서 기본이 됨을 말한 것이다.
이 14개 母音인 摩多에 자음인 体文의 聲母 36자를 더 하면 50음이 되는데 이것이 일본의 가나문자에 사용하는 五十音圖라고 본다. 물론 일본어의 가나문자는 /ア[a]、イ[i]、ウ[u]、エ[e]、オ[o]/의 5개 모음에 /カ[ka]、サ[sa]、タ[t]a、 ナ[na]、 ハ[ha]、マ[ma]、ヤ[ya]、ラ[ra]、ワ[wa]/의 각행(行)에 5자씩 45자를 더하여 50자이지만 마지막의 ン[n]을 포함한 51개 假名를 五十音圖라고 한다. 실제는 51음이지만 마지막의 ン[n]을 빼고 悉曇의 五十音에 맞춘 것이다.
훈민정음에서 中聲字는 11개이나 실제로는 기본자 /ᄋᆞ, 으, 이/의 3자와 初出字 /오, 아, 우, 어/의 4자를 더하면 7자인데 여기에 再出字의 /ㅛ, ㅑ, ㅠ, ㅕ/를 더하여 11자 中聲으로 한 것은 唐 智廣의 『悉曇字記』에 보이는 梵字의 摩多 12음에 맞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모음자들은 당시 우리말의 모음체계에 맞춘 것이 아니고 파스파 문자의 喩母 7자에 맞춘 것이어서 훈민정음의 7개 단모음자는 당시 중세한국어의 모음과 잘 맞지 않는다. 지금가지 수많은 논저에서 이 7개 글자로 15세기 한국어의 모음체계를 수립하려고 했지만 아직도 새로운 주장이 나오는 것은 7개 중성이 당시 모음에 맞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3.4 『대반열반경』에서 자음인 体文으로 36자를 정한 것은 『悉曇字記』의 35자와 다르다. 즉, /로(魯, r1), 류(流, r2), 려(廬, l1), 루(樓, l2)/의 4자를 별도로 설정하여 자음을 증가시킨 것이다. 여기에 摩多 14音을 더하면 50音이 된다. 따라서 일본어의 가나문자에 보이는 五十音圖는 唐代의 『悉曇字記』보다 더 古形인 『대반열반경』의 悉曇章에 의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宋代의 <廣韻>에 보이는 36자모도 唐代 『실담자기』의 것이 아니라 『대반열반경』의 36 体文에 맞춘 것이다.
信眉는 대장경에 포함된 『대반열반경』은 물론이고 『실담자기』도 참고하면서 梵字를 학습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실담자기』의 12 摩多에 맞추어 11 중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대반열반경』에서는 14 摩多였다. 신미의 스승인 涵虛堂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梵字에 대하여 많은 공부를 한 것으로 보이며 대장경 안에서 이 문자에 대한 많은 지식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훈민정음의 中聲은 信眉에 의하여 梵字의 摩多와 같이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문자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부터 芝峰 李晬光의 『芝峰類說』(1624, 20권 10책)의 권18에 “我國諺書字樣, 全倣梵字 - 우리나라의 언서(諺書), 즉 언문은 범자에서 모두 모방한 것이다”라고 하여 諺文이 梵字로부터도 나온 것이라고 언급하기에 이른다. 요즘 재야학자들이 信眉 대사가 훈민정음 제정에 깊이 관여했다는 주장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박해진, 2015). 그동안 信眉대사가 훈민정음 제정에 관여했다는 가설은 분분했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그가 새 문자의 제정에 기여했는지 밝히지 못했다.
信眉대사에 의해서 훈민정음의 中聲 11자가 추가됐다는 주장은 그동안 졸고(2016b, 2017b, 2018a) 등의 연구에서 ‘諺文 27자’에 대한 새로운 연구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동안 『세종실록』(권103)이 세종 26년 2월에 게재된 최만리의 반대상소문에 보이는 ‘언문 27자’는 불과 두 달 전인 『세종실록』(권102)의 세종 25년 12월의 “上親制諺文二十八字 [中略] 是謂訓民正音”에 보이는 ‘언문 28자’와 상충되는 것이어서 논란이 되었으나 아무에게서도 이에 대하여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하였다.
세종 25년 12월의 세종이 친제했다는 ‘諺文’은 아마도 27자였을 것이니 불과 두 달 후에 임금에게 올린 최만리의 상소문에 ‘언문 27자’로 명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실록>이 후일 편집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이나 <언해본>의 ‘언문 28자’에 맞추어 고쳤지만 崔萬理의 상소문은 원문을 그래도 올린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자음의 표음을 위하여 만든 언문 27자는 ‘反切 27자’로도 불렸으며 『訓蒙字會』의 「언문자모」에서 副題인 “俗所謂反切二十七字”의 ‘반절 27자’가 바로 당시의 명칭이었을 것이다.
세종이 諺文을 親制한 것은 세종 25년(1443) 12월이고 <운회>의 번역은 다음 해인 세종 26년 2월 16일이며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는 그보다 4일 후인 2월 20일이다. 속리산 福泉寺에 있던 信眉 대사를 세종이 불러 올려 만난 것은 그 이후의 일로 보인다. 원래 세종은 가족들과 언문 27자를 제정했기 때문에 최만리의 상소문에는 그렇게 적었으나 후일 신미에 의해서 중성 11자가 추가되고 우리 한자음, 즉 東音 표기에 불필요한 全濁의 6자와 脣輕音의 4자를 제외하여 모두 28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훈민정음의 <해례본>과 <언해본>으로 세상에 알린 것이다.
6. 結語
6.0 이상 우리가 오늘날 한글이라 부르지만 역사적으로는 正音, 訓民正音, 諺文, 國文으로 불려왔던 세종이 창제한 새 문자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고찰하였다. 그리하여 세종은 훈민정음이 새로 만든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기하는 기호로서 이 한자음이야말로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올바른 한자음으로 생각한 것이다. 또 중국의 표준음, 즉 漢音도 이 기호로 표기할 수 있었는데 이를 ‘正音’이라 한 것이다.
6.1 그러나 貞懿공주가 變音吐着을 해결하는데 훈민정음을 이용한 것을 보고 우리말을 이 기호로 우리말을 표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首陽과 信眉, 金守溫으로 하여금 『釋譜詳節』을 편찬하게 하여 시험하고 세종 스스로는 『月印千江之曲』을 지어서 이를 확인한다. 그리고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임으로 漢文에 대하여 諺文이라 불렀다.
6.2 貞懿공주는 아마도 「언문자모」를 지어서 새 문자의 보급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봤다. 어려운 성리학이나 성운학, 그리고 성명기론의 이론으로 설명된 훈민정음의 <한문본>, <언해본> 보다 널리 사용되는 이두, 구결의 한자로 ‘其役, 尼隱, 池*末, 梨乙, 眉音, 非邑, 時*衣, 異凝’(*표 한자는 석독)으로 초성과 종성의 음가를 보이고 ‘阿, 也, 於, 余, 吾, 要, 牛, 由, 應(不用終聲), 伊, 思(不用初聲)’의 중성 표기가 훨씬 알기 쉽기 때문이다.
6.3 훈민정음은 중국 聲韻學에서 한 음절의 한자음을 ‘聲’과‘韻’으로 나누는 反切法에 의거하여 우리 한자음의 聲, 어두 자음을 反切上字로 보고 17음을 분석해서 初聲 17자로 글자를 만들었다. 여기에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한 全濁字 5자와 脣輕音字 4자를 더 만들어 27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그동안 여기저기 史料에 등장하는 反切 27자, 또는 諺文 27자였다. 여기에 漢音, 중국의 漢語音을 표기하기 위하여 齒頭와 正齒(권설음)를 구별하는 5자를 더하면 32자가 된다. 이것이 <언해본>에서 正音의 初聲으로 소개된 32자다. 여기서 正音은 중국 漢語音의 표준음을 말한다.
6.4 모음의 표기를 위한 中聲字는 梵字의 摩多에 맞추어 11자를 제정한다. 이 발표에서는 고대인도에서 梵語 연구의 毘伽羅論과 그의 음성학인 聲明記論에 정통한 信眉 대사에 의해서 中聲이 제정되고 『悉曇字記』의 12 摩多에 맞추어 11자의 훈민정음 중성을 제정한 것으로 보았다. 중국 聲韻學에서는 음절의 모음에 해당하는 紐躡을 독자적인 단위로 인정하지 않고 小韻, 즉 反切下字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중국의 성운학과 고대인도의 성명기론에 의거하여 문자를 제정한 경우는 티베트의 西藏 문자와 몽골 元의 파스파 문자를 들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훈민정음 제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서장 문자와 파스파 문자, 그리고 한글의 첫 자가 모두 ‘/k/’이며 이것은 고대인도의 梵字에 소급된다. 梵字의 자음 글자인 体文은 /ka, kha, ga, gha, nga/의 순서로 시작되며 서장 문자는 /ka, kha, ga, nga/로 파스파 문자는 /k, kh, g, ng/의 순서로 글자를 제정하였다. 훈민정음은 /ㄱ[k], ㅋ[kh], ㆁ[ng]/과 /ㄲ[g]/를 만들었다. 모두 고대인도의 성명기론에 의거하여 음운을 분석하고 여기에 글자를 대응시켜 문자를 제정한 것이다.
6.5 몽골의 元代에 제정된 파스파 문자는 중국 전통의 <광운>과 <고금운회> 및 <동 거요>의 한자음을 표기하여 <몽운>, 즉 『蒙古韻略』, 『蒙古字韻』, {增訂}『몽고자운』을 편찬하였다. 훈민정음을 제정하고 <운회>를 번역하거나 『東國正韻』과 『洪武正韻譯訓』을 편찬한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파스파 문자로부터 많은 정서법을 공유한다. 예를 들면 파스파 문자에서 모음을 喩母에 속한다고 보고 모든 모음 글자를 단독으로 쓸 때에는 喩母 / , /를 앞에 붙이는 것처럼 훈민정음도 中聲字는 앞에 初聲이 없을 때에 欲母의 /ㅇ/를 붙여 쓴다.
6.6 파스파 문자를 만든 티베트 불교의 八思巴 라마나 훈민정음의 信眉 대사는 모두 불교의 僧侶로서 고대인도의 毘伽羅論, 聲明記論에 정통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문자를 제정할 때에 불경 속에 포함된 이러한 이론을 참고하였을 것이므로 이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훈민정음, 즉 한글 제정의 여러 문제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광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문학석사, 국민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문학박사,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정년퇴임.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출처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