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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로
- 14:33 용경협 출발
- 16:05 명십삼릉 도착
- 이동거리 : 65km
- 소요시간 : 1시간 32분
- 머문시간 : 1시간 12분
▽ 차창 밖으로 고속철도가 지나가고 있다.
중국의 고속철도는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 모택동이 고집하던 공산체제는 등소평이 집권하면서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들여오겠다는 黑猫白猫론이 그 효력을 발휘하며 세계를 놀라게 만들고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발전상이 눈에 보이고 있다.
2015년에 개통된 베이징에서 장저우, 광저우를 거쳐 홍콩까지 이어지는 세계 최장의 1300KM가 넘는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21시간 소요되던 시간이 8시간으로 단축되며 광활한 중국땅이 하루 생활권으로 들어오려는 천지개벽과도 같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공산국가이다.
개인의 재산을 인정은 하지만 국토는 대부분이 국가소유이다.
길을 내는데 보상을 하거나 사유재산권 침해 등의 이유로 데모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그 근본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와는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하여 등소평은 국가발전에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좋은 체제인지 사회주의 체제가 좋은지는 아직 결론을 내리기가 이르다는 말을 생전에 남겼다.
국가가 부자인 중국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 2008년에 고속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불과 8년만인 2016년에 2만 KM를 돌파하였는데 2013년까지 1만 KM에서 그 후 3년 만에 다시 1만 KM를 달성하는 기적과도 같은 성과를 내고 있다.
2019년 현재 고속철도의 총 연장거리는 2만 9000여 KM인데 그들은 2025년까지 3만 8천여KM, 2030년까지는 4만 5천 KM까지 달성한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내놓고 있다.
선진국 중에 일본이 가장 먼저(1960) 고속철도를 개발하였지만 그보다 거의 반세기가 늦게 시작한 중국의 고속철도는(2008년)는 현재 일본을 비롯 프랑스, 독일 등 모든 선진국의 고속철도 연장거리를 합한 것보다도 긴 철도노선을 보유하고 있다.
가난하고 못사는 것처럼 인식되었던 중국인민들의 생활은 이미 옛말이 되어가고 있으며 그들은 고속철도를 애용하는 부자로 행세하고 있다.
▽ 2019년 1분기 기준 지금까지의 누적 수송여객 연인원이 무려 100억명을 돌파했다는 통계가 있다.
2018년 한해동안에는 연인원 20억을 넘어섰고 철도 여객 총량의 60% 이상이 고속철도가 담당하고 있다.
▽ 4종 4횡 고속철도망 구축계획은 이미 달성하였고 현재 8종8횡의 고속철도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 고속철도 현황
▽ 중국의 철도 노선
▽ 과거 불과 100여년전만 해도 중국은 잠자는 사자였다.
아니 어쩌면 종이 호랑이 였는지도 몰랐다.
영국의 군함 한척으로 항복을 하고 홍콩을 100년 동안 내주었던 나라
그러던 나라가 대 도약의 나래를 펴며 세상의 중심부를 향하여 용트림을 하고 있다.
자유 민주국가에서는 감히 시도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시행하고 있지 아니한가.
땅의 주인이 국가이다보니 도로나 철도 기타 국가에서 하고자 하는 일들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아니하고 시행되고 있다.
▽ 정릉 도착
이곳 정릉의 주인인 만력제의 비석입니다.
그런데 비석에 글자가 없습니다.
만력제는 중국역사상 가장 무능한 황제였습니다.
재위 48년이라는 명나라 황제 중 가장 오랜 기간 집권을 했으면서도 한일이 없었다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는 자신이 죽어서도 호화를 누리고자 자신의 묘에 엄청난 투자를 합니다.
당시 2년치 국가 예산을 들여 자신의 묘를 만들고 묘지 내에서 연회를 베푸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진다.
자 그럼 지금부터 만덕제의 지하궁전으로 나들이를 떠나가 보자.
▽ 만력제는 명나라의 제13대 황제이다.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 휘는 익균(翊鈞). 융경제의 3남이다.
만력제는 암군들 중에도 특이한 축에 든다.
보통 암군으로 꼽히는 이들은 폭정을 저지르고 가렴주구를 일삼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무리수를 두며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잘못된 정책을 펼쳤다.
이런 일반적인 암군들은 어찌되었건 무언가 일을 하다가 그게 잘 안 풀려서 나라를 망쳤는데, 만력제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나라를 망쳤다.
그런 점에서 암군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황제라고 볼 수 있다.
명나라 황제들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어 48년에 달했는데, 30년 동안 황제 업무를 거부하는 사상 초유의 일을 벌였다.
▽ 쓰잘데 없이 소나무 한그루를 카메라 속으로 쑤셔 넣고
▽ 수표처로 향하다.
▽ 이곳은 명 13릉
▽ 박물관을 먼저 들르다.
▽ 명십삼릉(明十三陵)은 중국 베이징시 창핑구 천수산에 위치한 역대 명나라 황제와 황후의 능묘군이다.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이후의 황제 13명의 능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통칭되고 있다.
난징시의 효릉과 함께 2003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공개되고 있는 것은 장릉, 소릉, 정릉뿐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를 비롯하여 숭정제까지 총 16명의 황제 중 명십삼릉에 묻힌 황제는 13명이다.
▽ 정릉은 명십삼릉 중 유일하게 발굴된 황릉이다.
중국 국무원의 승인을 거쳐 1957년 9월 19일 정릉의 문을 열었다.
내부에는 전실, 중실, 후실, 좌배실, 우배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출토된 유물은 3,000점이 넘었다.
발굴은 1959년 9월까지 이루어졌다.
하지만 부족한 기술력 때문에 많은 유물이 보존되지 못하는 등 실책도 있었다.
이에 문화재국에서는 황릉 발굴을 중단할 것을 국무원에 요청했고 저우언라이 국무원 총리가 이를 승인했다.
정릉 발굴은 결국 중국 고고학사의 큰 비극으로 남았고 이후 황릉 발굴은 두 번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 왕대가 이 나무를 우산버드나무라고 카더라 논을 발한다.
백두산 여행시 수도 없이 마주쳤던 나무
네이버에게 물어보니 회화나무란다.
▽ 나무뿌리가 묘하게 생겼다.
나무뿌리가 아니고 조각품 같다.
▽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다
▽ 명십삼릉(明十三陵)은 중국 베이징시 창핑구 천수산에 위치한 역대 명나라 황제와 황후의 능묘군이다.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이후의 황제 13명의 능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통칭되고 있다.
난징시의 효릉과 함께 2003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공개되고 있는 것은 장릉, 소릉, 정릉뿐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를 비롯하여 숭정제까지 총 16명의 황제 중 명십삼릉에 묻힌 황제는 13명이다.
홍무제는 난징에 있는 효릉에 묻혔고, 건문제는 정난의 변으로 생사가 불가능한 채로 실종되었고 경태제는 탈문의 변으로 퇴위하여 사후 베이징 서교 금산에 묻혔지만 명십삼릉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이 3명의 황제를 제외한 13명의 황제와 각각의 황후들이 묻혀 있다.
또한 사후에 황제로 추존된 흥종과 예종의 능묘 또한 명십삼릉에 포함되지 않는다.
▽ 정릉(定陵)
무려 48년을 제위에 올라 명나라를 통치한 만력제의 무덤이다.
6년에 걸쳐 자신의 묘역을 조성했는데 당시 국가 예산의 2년 치에 해당하는 800만 냥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완성된 능묘가 마음에 쏙 들어서 지하 무덤 안에서 축하 연회를 열고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10세에 등극한 만력제는 장거정(张居正)이라는 훌륭한 대신의 도움으로 사회 발전을 이룩했지만, 장거정 사망 이후에 황태자 책봉 문제로 조정 대신들과 대립하면서 무려 25년 이상 공식적인 접견과 조회를 거부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 우리를 도왔으나 명나라 입장에서는 멸망의 물꼬를 터 준 인물로 평가받는다.
장릉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지하 궁전을 돌로 견고하게 쌓아 올렸다.
다량의 부장품이 발굴된 곳으로, 중전(中殿)에 대리석으로 만든 황제와 황후의 옥좌가 놓여 있다.
지하 궁전에서 나와 명루(明楼)를 돌아보고 아래로 내려가면 ‘명13릉 박물관(明十三陵博物馆)’이 나온다.
황후의 화려한 복식과 금으로 만든 주전자와 수저통, 청화백자를 비롯해 금실로 만든 익선관(翼善冠)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 만력제의 초상화와 첫째 부인 효서왕후 왕 씨, 둘째부인 효정왕후 왕씨
▽ 묘금운용옥패
▽ 청화매병
▽ 청화연지함
▽ 옥쇄
▽ 동전 (만통보)
▽ 금관 (복제품)
금으로 실보도 더 섬세하게 만들었다
금으로 실을 만든다?
금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1만분의 1mm 이하 두께의 금실로 가공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에 노란 물감을 칠한 가짜 금이 아닌 진짜 금으로 만든 왕관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진품들은 출토과정에서 대부분 훼손되었고 중국역사에 가장 흠으로 남아있는 문화대혁명 당시 훼손되어 남아있는 게 없다고 한다..
▽ 구룡 구봉관
왕비가 쓴 모자이다.
▽ 복수여의 곤복(복제품) 황후가 입던 옷이다.
▽ 명 13 릉 중 한 곳인 정릉
비록 주인공은 암군으로 역사에 불명예스런 이름을 남겼지만 정릉의 발굴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웅대하고 심오하며 문화재의 가치로 정교하고도 아름답다.
황실의 장례문화뿐만 아니라 명대의 과학기술 수준의 발전상을 알 수 있는 징표이기도 하다.
▽ 지로소석비
▽ 정릉 조감도
▽ 박물관을 빠져나와 우리는 지하궁전으로 향했다.
▽ 지하궁전은 이짜그로(?)
▽ 지하궁전 입구
▽ 숲 속을 걸어 한참만에
▽ 묘지가 아닌 지하궁전으로
▽ 지하궁전안전소산시의도
안전대피안내도란 말이다.
▽ 정말 이곳은 묘지라기보다는 지하의 궁전이었다.
정릉의 주인인 만력제 주익균은 가장 무능하고 가장 무식하고 평생 주색을 탐하고 국정을 소홀히 하여 '잔혹하고 음탕한 폭군'이란 별명을 얻은 대명 제국 쇠락의 주인공이다.
만력은 10세의 어린 나이에 황위를 이어받아 무려 48년간 재위했으나 22세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무덤인 정릉 제작에 몰두하여 6년간 2년 치 국가 총예산에 해당하는 800만 냥의 거금을 쏟아부으며 초호화판 지하 궁전을 건설하였다.
9층 높이의 계단을 내려가서 지하궁전 입구에 도착하면 피라미드 모양의 엄청난 두께의 돌벽돌로 막아두었던 금강벽을 볼 수 있다.
여기의 벽돌을 한 장 한 장 들어내고서야 비로서 지하궁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났다고 한다.
발굴 당시에는 한 사람만 겨우 드나 들정도로 좁은 입구였으나 지금은 관광객을 위해 넓혀 놓은 상태이다.
▽ 웬 휴지가
▽ 가까이 다가서니 휴지가 아니고 돈이 널브러져 있다.
돈이 어느 정도 쌓이면 수거해 간단다.
대리석으로 만든 관상(棺床)의 가운데에 네모나게 파인 곳이 있는데 풍수지리학상 행운의 혈자리로 사람이 죽으면 배꼽에서 영혼이 나와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는데, 금정이라는 이 자리가 바로 죽은 황제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관광객들이 그 자리에 여비를 주고 자신의 행운을 빌어 동전과 지전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해마다 이 돈을 모아서 불우 이웃을 돕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 옥좌
▽ 옥좌 뒷면
▽ 만력제의 첫째 부인인 효단황후(孝端皇后 )는 슬하에 자식이 없이 남편과 같은 해인 1620년 병사하였고, 둘째 부인인 효정황후(孝靖皇后)는 궁녀출신으로 만력제의 눈에 들어 아들을 낳았으나 신종이 곧 다른 정귀비를 총애하면서 박대를 받았고, 말년에는 눈까지 멀어 비참하게 살며 귀비밖에 못되었고 남편보다 앞서 1611년에 병사하여 능원내의 다른 곳에 묻히었다.
효정황후의 아들이 신종의 뒤를 이어 광종(光宗,태창제)으로 등극하였으나 재위 28일 만에 요절하였고 그 아들인 희종 (熹宗, 천계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할머니를 효정황후로 모시고 효단황후와 함께 할아버지인 신종의 묘에 합장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 당시 잇달은 황제의 서거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데다 비가 많이 오는 철이어서 황제의 관이 들어오는 입구로 3개의 관을 같이 모시고 들어왔으나 각각 들어가야 할 좌우배전으로 갈 통로가 좁아서 관이 통과하지 못하자 할 수 없이 3개의 관을 임시로 후전에다 모셔놓고 후에 원래 자리로 옮기려고 했으나 그때는 적군이 쳐들어와서 관을 못 옮기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훗날 이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고 지금까지도 옮기지 않고 3개의 관을 후전에 모셔놓고 좌우배전은 비어있는 상태다.
▽ 어렵게 발굴한 지하궁전 내에는 7개의 거대한 대리석 문으로 닫혀있었으며 문 한쪽의 무게는 2~8톤이라고 한다.
과학적 설계 덕분으로 힘들이지 않고 문을 여닫을 수 있었으나 발굴 당시에는 닫혀있었고 밖에서는 이를 열 수가 없었는데, 황제의 시신을 안치하고 지하궁전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7개의 문을 모두 통과한 인부들을 모두 죽이고 안쪽에서 두꺼운 대리석 기둥이 빗장처럼 걸리게 만들어서 도굴을 방지하도록 설계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발굴팀이 밖에서 대리석문틈 사이로 집어넣을 수 있는 ‘방향을 바꾸는 열쇠'(拐釘鑰匙)를 만들어 힘들게 문을 열 수 있었다.
▽ 이 문을 여는 순간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와 문을 여는 인부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가이드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모범생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수긍한다.
왕대가 찬물을 끼얹는다.
가이드를 하려면 이런 얘기가 학생들에게 먹혀들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헐~~~
▽ 밖으로 나오다.
▽ 비석에는 아무런 글씨고 쓰여있지 않다고 했는데
▽ 그래도 표지는 해야지 밀입니다.
신종현황제지묘
만력재는 시호가 신종이다.
그는 재위기간 중에 정말 한일이 없는 군주로 이름을 올렸지만 임진왜란시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여 조선을 구하는데 일조를 한 조선으로 보면 은인이다.
그런데 변방에 금나라가 세력을 키울 때 그를 방치하여 결국은 명나라를 망하게 만든 단서를 제공하였고 청나라가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 만들었으며 청나라는 그 후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 자금성에서 잠깐소개했던 신종을 제사 지내는 만동묘가 화양서원에 있다고 했었다.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과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도와준 의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704년(숙종 30)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지은 사당인데, 송시열이 사약을 받으며 남긴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지었다.
대부분의 집이나 사찰. 사당. 서당을 햇볕이 잘 드는 동향이나 남향 또는 동남향으로 짓는 것에 비해 화양서원과 만동묘 사당은 굳이 북향 하여 지었다.
명나라를 향한 사대의식의 발로였는데, 단순히 국가 존망의 위기에 도움을 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의미로 북쪽을 향해지었다고 전한다.
노론선비들의 집합소이자 송시열이 은거하였던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있는 화양구곡을 들어서는 화양동 입구 하마소(下馬所)부터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다.
이곳의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던지 흥선대원군이 초야에서 몸을 낮추고 지내던 시절 이곳에 들렀다가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 하여 문지기한테 봉변을 당했을 정도였다.
1864년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서원 철폐가 시작되었는데, 가장 먼저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철퇴를 맞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 지하궁전에서 나와 밖으로
멀리 산꼭대기에 붉은 글씨로 무언가 써 놓았다.
아무리 눈의 초점을 맞추어도 무슨 글자인지 분간할 수 없다.
▽ 줌으로 땡겨봤다.
약간 흐릿하지만 동지( 东池)? 아니면 천지(天池)?
▽ 지하동굴 내에도 박물관이 있었다.
아니 들를 수 없지비
금그릇과 금 주전자
▽ 지하궁전에서 나온 부장품들인데 하나하나 취재하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한꺼번에 싸잡다.
진품은 출토과정에서 많이 훼손되었고 문화 대혁명 당시 소각처리되어 대부분 모조품이라고 한다.
▽ 옥패
▽ 금정, 은정
▽ 순장은 죽은 지도자가 사후에도 그 지위를 누리며 살기를 기원하며 다른 사람을 같이 묻는 장례를 말한다.
같이 묻는 사람은 시종, 궁녀, 노예라든가 무덤의 주인공이 왕 등 높은 사람이면 그 신하나, 심지어 생전의 가족까지 같이 묻기도 한다.
기본적으로는 생매장이기도 하지만 같이 묻을 사람들을 먼저 살해한 다음 시신을 묻기도 했다.
이러한 순장제도는 명나라의 경우 5대 황제 선덕제까지 시행되다가 그 이후 사람대신 용(俑)이라는 인형을 묻기 시작했다
순장제도의 극치는 춘추전국시대 진목공의 경우 무려 177명을 생매장하기도 했다.
진목공 영임호(秦穆公 嬴任好, ? ~ 기원전 621년, 재위 :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21년)는 진나라의 군주이다.
▽ 이 문을 나설 때는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먼저 왼발이 나가고 다음으로는 오른발이 나가야 합니다.
▽ 선상님(?)의 지시에 한 사람도 어기는 사람이 없이 실행에 옮기는 모범생들
▽ 그런데 독불장군 아모스가 뒤에 쳐졌다가 문 앞으로 다가온다.
모두의 시선은 그에게로 쏠린다.
왼발이 먼저일까? 오른발이 머저일까?
순간 그는 문지방에 도달 후 왼발먼저 내딛는다.
▽ 차량에 탑승 후
□ 이동로
- 17:17 명십삼릉 출발
- 18:41 식당(노폭삼) 도착
- 이동거리 : 50km
- 소요시간 : 1시간 24분
- 머문시간 : 1시간 9분
▽ 식당으로 출발하다.
왕대의 못된 버릇 주위풍광 낚시
낚시에 걸려든 풍광
하늘을 향하여 솟아있는 아파트 군과 쭉쭉 뻗은 도로가 시원스럽다.
▽ 풍광 2
▽ 풍광 3
▽ 풍광 4
▽ 식당 도착
▽ 노폭삼<식당>
▽ 염화고육
불고기라는 뜻일께다.
▽ 오늘 저녁식사가 근사하다.
신선로 요리잖아...
이 요리는 한국요리인데.
하기사 우리가 찾는 중국음식점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한국음식으로 나오곤 했다.
궁중요리의 대명사 신선로(神仙爐)는 열구자탕(悅口子湯), 구자탕, 탕구자라고도 한다.
여러 가지 어육과 채소를 아름답게 돌려 담고 장국을 부어 끓이면서 먹는 음식이다.
하지만, 신선로는 궁중요리가 아니라 원래 조선 전기 문신 정희량의 청빈정신에서 유래되었다.
정희량은 무오사화를 겪은 다음 속세를 피해 산중에 은둔하여 살았는데 이때 대접 모양의 그릇 가운데에 숯불을 담고 주변에 채소를 담아 익혀 먹었다고 한다.
정희량이 죽은 뒤 이 화로가 세상에 알려졌는데 정희량이 신선의 기풍이 있었다고 하여 그가 사용한 화로를 ‘신선로’라 불렀고, 이것이 궁중에까지 전해졌다.
이후 채소만이 아닌 고기와 생선에 육수를 넣고, 갖가지 고급 양념을 사용해 호화스러운 요리로 변했다
□ 이동로
- 19:50 식당 출발
- 20:32 호텔 도착
- 이동거리 : 18km
- 소요시간 : 42분
▽ 못 말리는 짱구 왕대나무의 쓰잘데(?) 없는 손버릇이 계속되고 있다.
▽ 호떼루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