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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일행거사
우리 시대의 가장 긴급한 불공(佛供)은 ?
" 먹는 것을 주면 힘을 주는 것이요, 입을 것을 주면 고운 얼굴을 주는 것이다. 탈 것을 주면 안락을 주는 것이요, 등불을 주면 눈을 주는 것이다.
살 곳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주는 것이요, 법(法)을 가르치는 사람은 영원 생명을 주는 것이다. " - 남장 12 -
쌍용리 마을을 불교마을로
강원도와 충청도의 접경지역인, 태백산맥이 내려와 멎은 오지 마을 강원도 영월군 서면 쌍용리. 이곳의 아침맞이는 경이롭다. 어느 집에선가 예불송이 흘러나온다. 더러는 목탁 소리도 들린다. 고사리 손 모아 합장하고 아빠 엄마, 어른들 곁에 선 아이들의 낭랑한 염불 소리가 아침기운을 더욱 상큼하고 활기차게 만든다.
꼭 같은 시간대는 아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다. 마을 인구 60%가 불자인 이곳 쌍용리의 불자들 중에 가정에서 부처님을 모신 집이 60 여호가 된다. 그렇지 못한 집에선 거의 부처 불자 [佛]를 모셔놓고 신행생활을 한다. 아침밥을 짓는 주부의 손길은 먼저 자비와 감사로 시작된다. 매일 아침 첫 손에 덜어내는 쌀은 부처님께 공올릴 공양미다. 주부의 입에선 쉴 새 없이 정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매일 아침, 이렇게 덜어내 모은 쌀은 법회날 부처님께 올려진다. 그 공양미는 다시 불우한 이웃에게 전달된다.
이 땅이 본래 그러한 곳은 아니었다. 불법(佛法)은 물론 '부처님'이란 단어조차 낯설기만 했던 곳이다. 그랬던 이곳에 15년전, 스물 두 살의 한 젊은 청년이, 그저 평범한 한 시골 청년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삭막했던 오지의 마을은 자비의 땅으로, 부처님 말씀이 넘실거리는 마을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 서른 일곱의 장년에 들어선 이 동성(李東星) 법사가 그 주역이다. 그는 고등학교 1 학년 때 불교를 만났다. 울산에서 태어났으나 강원도 영월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영월 보덕사 불교학생회에 참석, 곧 회장직을 맡는다. 이 동성 법사가 불교와 맺은 인연의 첫 매듭이었다. 스스로 '끝을 보고 마는 성격'을 지녔다고 말하는 이 동성 법사는 이때 탄허 스님께 수계를 받고 자승(自勝)이란 법명을 받는다. 이후 제천불교청년회에 가입, 구도부장을 맡아 집전·교리지도 등 신행의 핵심 부분을 담당한다.
도무지 충족되지 않았다. 뭔가 허전하고 안타까움만 더했다. 그랬다. "법사가 없구나. 있는 법사는 게으르고 체계가 없으며 회원에게 충족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는 결심했다. 스스로 다짐을 받듯 회원들에게 약속을 거듭했다. '나는 재가 법사가 되겠다.'고
쌍용리에 와보니 탑골이라는 곳이 있었다. 다 쓰러져 폐허가 된 초라한 절터였다. 탑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또 하나 용운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단지 '절이 거기에 있을 뿐' 아무 노릇도 하는 게 없었다. 마을엔 교회 6 개가 있었고 그들은 이미 전도의 뿌리를 탄탄하게 내리고 있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곳이었다.
'쌍용리'란 이 지역은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국이라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그러니 지금은 '쌍용양회'로 더 유명한 마을이 됐다. 곳곳에 하얗게 깎여 내려진 절벽진 산들이, 제천에서 들어올 때와는 달리 희뿌연 공기가, 오지의 순박한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대형 벌크 시멘트 차들이, 이곳이 국내 최대 양회 생산지역 임을 직접 말해주고 있다. 자칫 오지다운 정서마저 잃고 척박해져 갔을지도 모를 쌍용리였다. 그러니 이곳이 자비심이 넘치는 부처님 땅이 될 줄은 더욱 아무도 몰랐다.
'77년 3 월, '불교마을 건설'을 서원하며 '쌍용양회공업(주) 영월공장'에 입사하는 이 동성 법사. 지금은 108 가구가 살고 있는 쌍용3리로 그는 아주 이사를 한다. 그리고 영월 보덕사 주지스님(서운 스님)을 찾아갔다. 그가 처음 불교와 인연을 맺었고 주지 스님의 신뢰와 사랑을 두터이 받았던 곳.
"스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힘드시더라도 쌍용지역을 일으켜 보시자구요. 저는 재가운동을 펴ㅍ테니까 스님께선 사찰불사를 중심으로 불교를 일으켜 보자구요. 어려우셔도 현대적인 포교를 해보시자구 말씀드렸죠."
스물 두 살 청년의 당돌한 제안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65세였던 서운 스님께선 쾌히 응낙하셨다.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었고 멋진 화합이었다. 실로 가슴이 탁 트이신 어른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스님과 이 동성 법사는 한뜻으로 움직였다. 이 동성 법사는 곧 청년회를 모아 탑골에 천막을 치고 법회를 시작한다. 청년회원은 어린이 법회의 지도 법사가 됐고 이어 연화 부인회를 결성했다. 직접 찬불가를 부르고 교리를 가르치며 때때로 인근 외지에 나가 스님이나 법사님을 모셔오기도 했다.
이 동성 법사는 부지런히 신도를 모아들였고, 서운 주지스님께선 사찰 재건 불사를 땀흘려 하셨다. 폐사지나 다름없던 탑골은 '서곡정사'로 다시 일어섰다. 7 개 리(里)로 구획되어 있는 상용리 지역 인구는 약 7백여 세대에 2천 5백여명. 서곡정사는 이 쌍용지역 450여 세대 신도의 귀의처거 되었다. 격의 없는 불심이 피워낸 장거가 아닐 수 없다.
쌍용리에 들어와 동서분주하기 5년. 이제 막 일어서려는 찰라였다. 원력이 부족했던 탓이었을까. 너무 무리를 한 탓이었을까. 갑자기 간염으로 쓰러져 2년간 투병생활을 한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절망적이엇다. 그는 서원을 거듭한다.
"부처님, 이 몸을 일으켜 주시면 목숨을 바쳐 전법하겠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그러고 보니 그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 부처님의 것이었다.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약 한 첩 달여 마시며 <천수경> 한 번 읽고 찬 번의 절을 올리기를 거듭했다. 그렇게 추스려진 몸. 지금도 병원에선 염려가 크다. "최대한 휴식을 취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성 법사는 아랑곳 없다. 어떤 건강한 사람보다도 활동량이 많고, 수면과 휴식시간이라곤 최소한이다. 그저 시간이 부족한 게 안타까울 뿐이라니 원력이 깊으면 그리 되는 모양이다.
이때 극진히 간호해준, 제천불교 청년회 시절 만난 자비행 보살(이 동호씨)을 부인으로 맞았다. 이 인연이 지중했다. 자비행 보살은 이 동성 법사의 하는 일을 하늘 아래 으뜸으로 아는 진짜 보살이다. 부처님께 바친 남편, 시어머니와 1남 1녀의 자녀를 건사하며 이제 더이상 쪼들릴 수 없어 두 달 전부터 부업에 나섰다. = 대중불교의 빛 100 인 p404 ~ 410 =
인재(人材)불사가 가장 급한 일
"불공하십시오. 부처님께 공양 올리십시오. 가난한 형제들과 우리 교단을 위하여 희사하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아마 많은 친구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나는 가진게 없는데 - 내 한 몸, 한 가정 돌보기도 힘든데, 무슨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서 공양하고 희사할까?'
벗이여, 그러나 이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아직도 공양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벗이여, 저 이 동성 법사를 보십시오. 그가 재산가입니까? 쓰고 남는 재산으로 불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는 가난한 청년에 불과합니다. 강원도 산골의 한 공장에서 노동하고 월급 받아 겨우 살아가는 가난한 청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장 훌륭한 공양을 올리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불사를 훌륭하게 펼치고 있습니다. 벗이여,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가장 중요한 불사입니까? 무엇이 우리 시대의 가장 긴급한 불공이겠습니까?
'인재(人材) 불사, 인재 불공.'
옳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인재를 키우는 인재불사야말로 지금 이 시대가 우리 불자들에게 요구하는 가장 급한 일입니다. 부처님 법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전법포교야말로 부처님께서 지금 이 땅의 불자들에게 명하시는 가장 급한 불사입니다.
목이 잘린 불상들, 절도 없고, 스님도 없는 실크로드의 황량한 벌판, 금촌 마을에서 쫓겨나는 사람들 -. 큰 절이 없어서 저렇게 된 것입니까? 동양 최대의 범종이 없어서 저렇게 된 것입니까? 세계 최대의 미륵불상이 없어서 저렇게 된 것입니까?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불교 집안에 사람이 없어서 저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 불교 집안에서 사람 기르는 인재 불사, 교육 불사, 전법 포교 불사를 소홀히 하고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 된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밥을 주고 옷을 주는 것은 반드시 해야할 불사입니다. 장애자를 돌보고 노인네들을 보살피는 것은 반드시 해야할 불공입니다. 좋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는 일, 꼭 해야할 불사입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가장 먼저 할 일은 전법 포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정법을 선포하고 전파하고 가르치며 함께 실천하는 것입니다. 유치원을 짓고 학교를 만드는 것입니다. 전법사를 양성하고 법사를 배츨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참된 법사는 이 땅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강원도 산골 마을을 부처님 마을로 만드는 개척자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도리를 설하십니다.
" 먹는 것을 주면 힘을 주는 것이요, 입을 것을 주면 고운 얼굴을 주는 것이다. 탈 것을 주면 안락을 주는 것이요, 등불을 주면 눈을 주는 것이다.
살 곳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주는 것이요, 법(法)을 가르치는 사람은 영원 생명을 주는 것이다. " - 남장 12 -
나 하나 진흙 수렁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평생 번 재산을 헌납하는 장 경호 거사· 스물 두 살 젊은 인생을 강원도 산골 마을에 바치는 이 동성 법사. 저 분들을 보고, '아, 참 강한 분들이다.' '참 좋은 일 하였군.' 이렇게 지나친다면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일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저 분들은 타고난 분들이야.' 이렇게 지나친다면 더욱 불행한 일입니다.
왜? 무엇 때문인가? 저렇게 사는 것이 참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사는 것이 참된 인생의 행복이고 영원 생명을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사는 것이 나와 당신이 마땅히 걸어야 할 인생 행로이기 때문입니다.
벗이여, 이 혼돈의 세상에서 진정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불안과 공포를 뛰어넘어 정녕 영원 생명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의 삶을 진실로 맑고 향기로운 연꽃으로 피우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단언코 저와 같이 살기를 발원하십시오.
'나도 저 장 거사, 이 법사 같이 살기 원합니다.'
지금 곧 부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맹세하십시오. 부처님께서 빙그레 미소 띠우며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것입니다.
연못에 연꽃이 피어 있습니다. 붉고 힌 연꽃들이 찬란한 봉우리를 터트리며 향기로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행인들은 연못가에 서서, '아, 아름다운 연꽃' 하며 감탄합니다. 그러나 행인들은 저 연꽃이 진흙 수렁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꽃은 의당 진흙에서 피는 법이라고 가볍게 지나치고 맙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복된 인생을 갈망합니다. 성공한 이들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성공이 기나긴 희생과 인고(忍苦)의 수렁 속에서 결실된다는 사실을 깊이 관찰하지 않습니다. '운이 좋았다.' 라고 가볍게 지나치고 맙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언제까지나 지나치는 구경꾼의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그들은 방관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나와 당신은 발심한 보살입니다. 보살은 언제 어디서나 주인으로 살기를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연꽃 피우기를 맹세한 수행자들입니다.
벗이여, 한 번 명상해 보십시오. 우리 스스로 진흙 수렁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공양 봉사하지 않는 다면, 무슨 수로 향기로운 정토를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설하십니다.
" 선남자 선여인아, 큰 보살은 본원(本願)의 힘으로 깨끗하고 묘한 나라를 취하지 않고, 본원의 힘으로 부정(不淨)한 국토를 택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 선여인아, 큰 보살은 대비(大悲)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이 악하고 부정한 국토를 취할 뿐이니라. " - 비화경 대시품 -
벗이여, 우리가 선택한 예토의 진흙 수렁은 어느 곳입니까?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마을 , 이 거리.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들이 뛰어들어갈 진흙 수렁입니다.
벗이여, 우리가 실현할 보실의 본원은 무엇입니까? 전법 포교, 인재 불사, 교육 불사.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급히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될 우리들의 본원입니다.
먼저 작은 일부터 착수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린이 학교의 지도교사로 나서고, 한 달에 몇 천원씩 우리 학생회 육성회비를 내고, 직장에서 조그맣게 신행 모임을 만들어 함께 공부하고, 불교 책을 사서 친한 이웃에게 선물하고, 병원 환자를 찾아가 함께 기도하고, 상가를 찾아가 밤 새워 지켜주고, 아파트의 아이들을 모아서 한자를 가르치고 불교 동화도 들려주고.
벗이여,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한 발 들여 놓으십시오. 우리 부처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료출처 : 은혜 속의 주인일세 / 불광출판사/ 김 재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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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배로운 사람, 보배로운 인생 ...
감사합니다...
한 사람의 참된 법사는 이땅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영원 생명을 주는 것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