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이나 새 출발을 앞둔 이에게 우리가 흔히 건네는 덕담이 있다. “꽃길만 걸으세요.” 이 한 문장에는 어떤 가시밭길도 없이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열망이 담겨 있다. 우리는 그 평탄함을 축복이라 부르고 행복이라 정의해왔다.
여기서 구별해야 할 영적 진실이 있다.
‘바람’(Wish)과 ‘소망’(Hope)의 차이다. 우리가 말하는 꽃길은 성경의 소망이 아니라 인간의 바람에 가깝다. 바람은 환경에 집중한다. 상황이 어긋나면 곧장 절망으로 바뀐다.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환경이 아니라 대상에 집중한다.
원하는 결과가 일어나리라 믿는 낙관론이 아니라, 어떤 결과 가운데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확신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꽃길만 걷게 해달라는 기도에 그대로 응답하실 수 없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목자가 양을 기르는 길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산에서 산으로 가려면 골짜기를 지나야 풀이 있는 자리에 다다른다. 꽃길만 주신다면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선한 목자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때로 우리의 환도뼈를 치시는 상황을 허락하신다. 야곱의 삶이 그렇다. ‘라반의 착취’라는 악은 야곱을 자기 신뢰의 감옥에서 풀어낸 목자의 훈련이었다. 하나님은 그 거친 환경을 지팡이 삼아 야곱의 자기 신뢰를 꺾으시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이스라엘로 세우셨다.
환도뼈의 부러짐이라는 악은 자아의 왕좌를 허물고 참된 예배자로 세우시는 목자의 지팡이질이었다. 제힘으로 똑바로 섰을 때가 아니라 지팡이에 기대 절뚝일 때,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이 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젊은 시절 승승장구하여 상위 몇 퍼센트의 부를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의 건강을 치셨고 그는 심장마비로 생사의 경계를 오갔다. 사업도 닫아야 했다. 다시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며 그가 아내에게 건넨 한마디가 있다.
“여보, 오히려 예전보다 더 잘된 것 같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해주신 것 같소.
그런 고난이 아니었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못했을 거요.”
부와 명예를 누려본 사람의 입에서 나온 정직한 말이었다.
야곱이 겪은 요셉을 잃은 상실이라는 악도 이스라엘 가문을 구원하기 위한 목자의 거대한 섭리였다. 피 묻은 채색옷을 본 순간 야곱의 인생은 멈추어버렸다. 그는 22년 동안 악의 터널에 갇혀 위로받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목자는 쉬지 않고 일하셨다.
형들의 시기라는 악을 재료로 온 가문을 살릴 생명의 길을 닦고 계셨다. 훗날 요셉은 형들 앞에서 하나님이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선언한다(창 50:20).
이것이 소망의 진짜 의미다.
소망은 고난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 인생의 찢어진 마디마디를 다시 엮어 길러내실 선한 목자를 신뢰하는 일이다.
앞서 나눈 그리스도인의 고백으로 돌아가보자. 그는 그 참혹한 사고 앞에서 처음에는 비명을 질렀다. 하나님은 그의 험악한 세월을 단번에 걷어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는 고통 중에도 예배했다. 한 주간 주님의 뜻을 묻는 가운데 받은 마음은 이러했다.
“이번 일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곧장 주지 않으셨다.
다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순간순간을 평안과 감사로 보낼 수 있도록 권면해주셨다. 회사가 망할 수밖에 없던 자리에서 주님의 전적인 일하심으로 회생케 하셨던 시간이 떠올랐다. 이 일터가 하나님의 것임을 이미 경험했기에, 이번에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마무리하실 것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과정 자체가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는 자리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마음의 평안이 회복되었다. 내 인생의 편집권을 온전히 주님께 넘겨 드린다.”
하나님은 사고를 막아주는 보험사가 아니다.
사고의 한복판에서도 우리를 끝까지 길러내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그는 사고의 이유 대신 목자 하나님이라는 소망을 붙들었다.
- 믿음의 DNA, 김다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