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연안 이씨 문중 후손들은 부모에 대한 효, 그리고 나라에 대한 충성이 남다르다. 입향 시조부터 근대까지 변함없는 가풍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더불어 정사에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다양한 전설들도 전해 오고 있다. 이 중 대가 끊겨 잃어버릴 뻔했던 문중의 소중한 보물을 조상의 영혼 현몽(現夢`꿈에 조상이나 신선이 나타나 미래를 알려줌)을 통해 다시 수습하게 된 전설,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실천한 연안 이씨 문중의 열혈지사와 부모를 위해 헌신한 후손들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
◆후손의 꿈속에 나타난 이숭원의 영혼
1578년(선조12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정시(庭試)를 준비하며 글공부에 여념이 없던 젊은 선비 오봉(五峰) 이호민(李好民`1553~1634)은 지난밤 꿈속에서 만난 어른이 생생하게 기억나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지난밤 꿈속에서 먼지가 쌓인 조그만 정려각 안에 앉아 있는 사모관대 쓴 어른을 만난다. 어른의 풍채가 맑고 깨끗한지라 조정의 중신처럼 보여 공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 절을 하니 그 어른이 "나는 이 아무개인데 이처럼 곤경에 처한 지 몇 년이 되었으니 그대는 나를 구해달라"고 했다. 생면부지의 어른인지라 어디 계신지 물어보려 하다 깨어나 보니 이른 아침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글공부를 하려 해도 꿈속에서 본 어른의 얼굴이 너무 생생해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던 차에 마침 노복이 양근 (현재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 사는 이담이라는 이가 찾아왔다고 한다. 책을 덮고 이담을 만나보니 충간공의 서증손(庶曾孫)이라고 한다. 차를 나누며 찾아온 연유를 물었더니 "충간공(忠簡公`이숭원`1428~1491)의 장증손(長曾孫) 이뢰가 아들이 없어 그 조카 이충남이 신주를 모시다가 전북 익산으로 이사한 후 후사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어젯밤 꿈 때문에 고민하던 이호민은 때맞춰 찾아온 이담과 함께 명례방 (지금의 서울 명동 일대)에 있는 사당을 찾아갔다. 사당은 관리가 되지 않아 낡고 먼지가 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어젯밤 꿈에 본 어른을 만났다. 다름 아닌 예종과 성종 양대에 걸쳐 하사받은 충간공의 영정 2본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연안 이씨 어른들이 사는 상좌원에 연락해 영정을 수습해 1본은 익산 이충남의 집에 모시고 1본은 상좌원 집에 안치했다. 더불어 사당 안에 방치돼 있던 공신록과 회맹록 등 서책도 함께 보존할 수 있었다.
현재 김천 구성면 상좌원리 경덕사에 소장된 충간공 이숭원의 초상화(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는 1471년 좌리공신 3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을 때 이를 기념하고자 제작된 공신도상이다.
1648년 지례의 도동사(도동서원)에 배향되었으나, 1870년 도동사가 철폐되자 이듬해 충효당을 건립해 옮겼다. 그러고 나서 1897년 후손인 학계 이규성이 경덕사를 건립해 영정과 신위를 모시게 되었다. 현존하는 초상화 가운데 조선 전기 공신도상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숭원 초상화'는 오른쪽을 바라보는 전신 좌상으로 중종 임금을 비롯해 공신들의 초상을 주로 그렸던 노비 출신 학포 이상좌의 작품으로 전한다.
◆천석꾼 재산을 조국 광복을 위해 바친 이명균
일제강점기 많은 이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노력했다. 영남의 명문으로 자리매김했던 연안 이씨 문중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들이 많다. 이경균(1850~1922)과 이석균(1855~1927), 이명균(1863~1923) 등이다. 이 중 대표적인 이로 일괴 이명균을 들 수 있다. 그는 1910년 국치일 이후 항일운동으로 평생을 보냈다.
대한 광복회 활동 당시 애사 편강렬(1892~1928)과 함께 해인사를 방문할 예정이었던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해인사 방문이 취소되면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57세 때인 1919년 3`1운동 당시 경북 일대를 순회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나 동료가 '만명탄원서'를 제출해 석방됐다. 또한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는 가운데 영남지역의 면우 곽종석(1846~1919)`심산 김창숙(1879~1962), 호서지역의 자산 김복한(1860~1924) 등이 중심이 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낼 때 이명균은 '파리장서'에 서명하고 유림단대표로 활동하다가 체포돼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출옥 후 58세 되던 해인 1920년 3월 문경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도산 신태식(1864~1932) 등 2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운동 후원 의용단을 결성했다. 이명균은 군량총장으로서 재정관리 및 군자금 조달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군자금 모금이 부진하자 자신의 재산을 매각해 5회에 걸쳐 10여만원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으며, 이를 계기로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후원의용단장 및 재무총장(현 재무부 장관)에 추대받기도 했다. 이후 조선독립운동 후원의용단은 1922년부터 경산`청송`안동`영일`군위`영덕 등지의 부호들에게 군자금 57만원을 요구하는 '군자금 모금서'와 이에 불응할 때는 사형에 처한다는 '사형 선고서'를 보내 독립자금을 징수했다.
1922년 11월 이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일본 경찰에 의해 단원 대부분이 체포되었으며, 군자금 8만3천원도 몰수당했다. 이명균은 대구지방법원 예심 중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1923년 5월 2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6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1963년에 대통령 표창, 1968년에는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초목에까지 미친 효성
연안 이씨 문중에는 학문과 효성으로 이름을 알린 인물들이 유난히 많다. 충간공 이숭원의 후손 이장원(1560~1649)은 8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소 옆에 움막을 지어 3년 동안 흰죽만 먹으면서 지낼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끼니마다 아버지의 식성에 맞는 음식을 드렸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업고 삼성암으로 피신했다. 또 부친상을 당했을 때 시묘살이를 하는 이장원의 효행에 감동해 묘소 근처의 소나무가 3년 동안 잎이 나지 않다가 시묘가 끝나자 새잎이 돋아났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효성이 초목에까지 미쳤다고 감탄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양공 이숙기의 후손 이수함(1739~1809)은 동생 이수호와 함께 이효(二孝)로 불렸다. 이들 형제는 남다른 효성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는데, 9세 때 홀로 된 모친이 중풍으로 몸져눕자 형제가 6, 7년에 걸쳐 밤낮으로 번갈아가며 극진히 보살폈다. 형제의 효성에 감복한 선인이 꿈에 나타나 약이 있는 곳을 알려주자 그 약으로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고 한다.
정양공 후손 이구(1730~1774)는 30세 되던 해(1759년)에 화적들이 형의 집에 침입해 불을 지르고 노략질할 때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가 어머니를 등에 업고 나왔다. 그런데 당시 도적이 어머니를 해치려고 하자 자신의 몸으로 어머니를 감싸면서 "나는 죽이더라도 노모에게는 절대 손대지 말아달라"며 울면서 매달렸다. 이에 도적이 이구의 몸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칼을 휘둘러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가족들의 간호로 겨우 목숨을 구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참고문헌>
김천시사
김천 종가문화의 전승과 현장(민속원)
김천 정양공 이숙기 종가(경상북도`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정양공 참정사(정양공 종중)
디지털김천문화대전
조선왕조실록
영세청풍(永世淸風)의 사람들(延星會)
<자문>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이철응 연안 이씨 정양공 문중 19대 봉사손
이석화 연안 이씨 충간공화수회 사무국장
이현돈 연안 이씨 연성부원군종회 초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