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228. 묵상글 들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 하느님 사랑 밖에 있는 일은 없다. 등 )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 사랑 밖에 있는 일은 없다.
오늘 복음은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됩니까?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말입니까?
예언이 어긋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 안 좋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고,
오늘 복음의 말씀도 그런 뜻이어서는 안 되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예언이란 미래를 내다보는 말이긴 하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고,
권력의 속성이란 자기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남을 죽이기에
권력 주변에서 이런 살상은 언제고 일어날 거라고 얘기하는 식이지요.
그래서 헤로데도 아기 예수가 미래 자기 권력에 위협 요소라고 생각하여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이고, 죄 없는 아기들을 죽인 것이며,
복음은 그런 뜻에서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 오늘 복음에서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말 안에는
더 중요한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참혹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에 대해 신앙적으로 아무런 얘기 없이 지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아기 예수 때문에 애꿎은 아기들이 죽은 사건에 대해
그것을 어떻게 주님을 위한 순교라고 얘기하느냐고 생각이 되고,
그러니 이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하지 않고 건너뛰고 싶습니다.
그러나 복음이나 우리 전례는 이런 곤란한 문제에 대해
피하지 않고 성실히 답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리고 하느님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하느님과 무관한 일인 양 얘기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해 좋은 일도 예언하시고, 안 좋은 일도 예언하시며,
인간이 죄를 지을 것이라는 예언도 하시고,
그 죄를 씻으실 구세주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도 하시며,
그 죄를 씻어 주시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도 하십니다.
죄 없는 아기들이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헤로데에게 죽임당한 예수님 당시의 아기들뿐 아니라
지금도 철없이 임신하고 비정하게 버리는 부모들 때문에 죽임당하는
아기들도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 아기들이 죽음이
하느님마저도 무관심하고 아파하시지 않는 죽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호 아이들이 죽었을 때 교회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도 얘기해야 하고,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는 여성들에게도 피임이나 낙태 같은 문제는
어려운 문제이고 그래서 피하고 싶은 주제지만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세상의 폭군들이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어미마저 제 젖먹이를 버려도,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 밖에 있지 않다고,
혹 어미는 버릴지라도 하느님은 버리지 않으신다고 예언해야겠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야 49, 15)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사실, 죄 없는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겉으로는 헤로데의 잔인한 학살을 드러내지만, 실상은 메시아가 태어났음을 알려줍니다. 곧 그들의 죽음은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메시아가 나타나심에 대한 지상의 왕의 두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죄 없는 아기 학살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이는 예레미야가 아들을 잃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통곡을 들어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보다 앞서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모세가 히브인들을 억압하면서 저질렀던 어린 사내아기들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사실, 파라오와 헤로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고자 빛을 두려워한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완고함과 자기중심적인 폭력과 독선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왕국의 지키기 위해 사랑의 왕국을 저버리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확고하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4)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는 구원의 역사는 그 어떤 어둠에도 방해에도 아랑 곳 없이 반드시 이루지리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을까?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분명,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소리”가 훨씬 더 컷을 것입니다. 아기들의 슬픔은 한 순간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슬픔의 끝이었겠지만,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죽은 모든 아기 어머니들의 아픔을 통째로 짊어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가 희생되어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그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아 고통을 받아야 했던 마리아는 또다시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죄 없으면서도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써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 아기 예수님도 훗날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무죄하면서도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일을 순교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지셨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를 희생시켜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어머니 마리아처럼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교자의 피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죄 없는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며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아기를 모조리 죽여서(마태2,16).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이런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낙태 건수는 정부 추정치만 년 40여만 건에 이릅니다. 출생아는 2020년 30만 건을 밑돌았으니 소리소문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과 인간의 이기심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를 방치하고 방치를 넘어 학대를 일삼은 부모 이야기가 종종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모성과 부성을 잃어가는 세태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 보다,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이라는 사실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질투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2,14). 온갖 어려움을 마다않고 지체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던지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어떤 처지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악인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는 하느님
오늘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던 헤로데의 못된 계략에 희생된 아기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구세사에서 이런 일은 또 있었습니다. 아주 먼 옛날 이집트에서도. 못된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이 두려워서 태어나는 히브리인 사내 아기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산파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장차 히브리인들의 해방을 이끌 지도자요 일꾼으로서 모세를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께서는 그 어머니로 하여금 갓 태어난 아기를 왕골 대나무로 짠 상자에 태워 나일강에 띄워 보내려는 지혜를 주셨고, 파라오의 공주로 하여금 마침 그 시간에 나일강가에 나와 있다가 그 아기를 구하게 하셨습니다. 공교롭게도 결혼 후에 아들이 없는 채로 남편까지 사별했던 그 공주는 그 아기에게 ‘물에서 구한 아기’라는 뜻으로 ‘모세’라는 이름을 짓고는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길렀습니다. 그리하여 죽임을 당할 뻔 했던 모세는 이집트 왕실이 제공한 최고의 환경에서 극진한 보호를 받으며 왕자로 자라났습니다. 악인의 계략을 보기 좋게 하느님께서 역이용하시어 물리치신 역사적 사례입니다. 왕자로서 리더십 훈련을 받은 모세는 후에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로 있다가 하느님께서 동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라는 소명을 받고 이를 죽을 때까지 성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파스카 과업은 이렇게 악인의 계략과 하느님의 개입, 그리고 부르심 받은 이들의 성실한 순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지속되어야 할 새로운 파스카 과업의 요체도 이 최초의 파스카 사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시대의 사회악을 역이용하는 전략이요, 사회악의 구조와 에너지를 공동선의 시스템과 기운으로 활용하는 작전입니다.
사실은 모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집트를 숙주로 삼아 기근을 피해 인구를 불리고 억압을 피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 난 운명을 겪었습니다. 이집트로 들어가게 된 계기는 어이없게도. 야곱의 아들들이 동생 요셉을 이집트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일이었고, 요셉은 그 이집트에서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했으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가 거기서 만난 파라오의 고위 관리의 꿈을 해몽해줌으로써 파라오에게 추천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집트의 재상 자리에까지 올라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들과 동생은. 물론 아버지 야곱까지 이집트로 불러들임으로써 이스라엘의 이집트 이주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일가족을 정착하게 한 땅은 이집트에서 가장 비옥한 곳 중의 하나인 나일강 하류의 고센이었습니다. 그 고센 땅에서 450여 년 동안 열세 명의 일가족이 60여만 명이 넘는 큰 무리로. 인구가 불어났습니다.
그러자 겁이 난 후대의 파라오가 요셉의 선정과 공헌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요셉의 일가 후손들을 노예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악한 처사를 하느님께서 역전시키십니다. 모세를 극적으로 살아남게 하여 이집트 왕실에서 지도자 훈련을 받게 한 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가 되어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게 하시고는, 드디어 시나이 산으로 불러들여 동족을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지도자 훈련에 사십 년,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는 데 또 사십 년이 걸렸고, 히브리인 동족들을 빼내어 시나이 광야에서 하느님 백성으로 훈련시키는 데 또 사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집트 생활에서 몸에 배인 노예근성을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서 자라기까지 그만한 세월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죄 없는 아기들을 무차별 학살한 헤로데의 끔찍하고 잔인한 계략을 피해서 천사가 요셉에게 알려준 계획도 역시 이집트로 피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가 죽고 나서야 천사는 다시 요셉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갈릴래아로 돌아가도록 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아기 시절부터 민족이 겪었던 파스카 경로를 압축하여 학습하신 셈입니다. 그리고 공생활 내내 더욱 보편적인 규모로 그리고 더욱 영적인 깊이를 더해서 모든 민족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사도로 양성하시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여받은 본연의 사명인 파스카 과업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시대의 사회악을 역이용하고 사회악의 구조와 에너지를 공동선의 시스템과 기운으로 변화시키는 기본 전략은 유효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악인들은 잔머리를 굴려서 하느님의 계획에 맞서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악인들의 계략은 천사들의 개입으로 멋지게 역이용당하고 악인들이 세워놓은 사회악의 틀이 오히려 공동선을 키우는 요람이 됩니다.
알을 밴 두꺼비는 먹이가 부족하면 독사에게 일부러 잡아먹힙니다. 그 두꺼비는 독사의 독으로 죽지만, 독사도 두꺼비가 죽으면서 내뿜은 독으로 죽게 되고, 두꺼비가 품고 있던 알들이 독사의 사체를 양분 삼아 새끼 두꺼비로 태어난다는 파충류 먹이사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내듯이 빛이 밝음을 드러내기만 하면 어둠은 꼼짝없이 물러나갑니다.
가정에서도 궂은 일은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가정은 세상의 한 조각이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가정은 시초부터 이런 끔찍한 일을 당했지만 요셉의 기지어린 신앙과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이집트로 가서 안전하게 아기 예수를 기를 수 있었습니다. 나자렛으로 돌아와서도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의 출생 비밀과 관련한 사생아 시비가 늘 따라 다녔지만, 이번에는 마리아의 한결같은 믿음과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예수님은 하느님 아들로서의 자의식을 지닌 청년으로 자라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네 가정들에서도 새옹지마와 같은 사정은 어김없습니다. 안 좋은 일들은 더 좋은 일을 위한 예방주사입니다. 교우 여러분! 바라지 않았던 일들이 닥칠 때, 오늘 복음과 제 강론을 상기하시고 힘과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얇은 A4 용지 한 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의 절반을 접고, 또 절반을 접고 또 절반을 접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절반을 접어 나간다면 몇 번까지 접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10번은 접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해보니 7번까지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 A4 용지 접기의 기록이 기네스북에 있습니다. 몇 번일까요? 9번이었습니다. 저보다 단 두 번 더 접을 수뿐이었습니다.
종이접기도 이렇게 어렵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마음 접기가 과연 쉬울까요?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네가 참아!”라고 말합니다.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요? 물질적인 욕심이 커지는 상황에서 “돈이 전부는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요?
마음을 접는 것은 종이접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딱 한 번을 접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포기하면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한 번만 접을 수 있다면, 이것이 커다란 경험이 되어 접어야 할 것들을 계속해서 접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접는 것은 특별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접는 것입니다. 그래야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나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헤로데 대왕은 점령군인 로마 정부가 정책적으로 세운 유다인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짜 유다인이 아니었고 혼혈 유다인 취급을 받던 이두메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유다인들에게 자기도 유다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부서진 성전을 다시 짓는 등의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행동이 권력을 유지하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헤로데 대왕의 나이는 70세였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70세이면 젊다고 말하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많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도 권력욕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가 말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난 아기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에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여버리는 악행을 합니다.
잘못된 마음을 접지 못했던 헤로데 대왕이었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진정한 겸손의 삶으로 자신을 낮추지 못했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해서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천 년 넘게 욕을 먹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쓸모없는 마음은 과감하게 접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가리는 마음은 모두 필요 없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접어야 합니다.
--------------
당신이 걱정해야 할 유일한 한계는 마음속에 그어놓은 한계다(스킵 프리처드).
--------------
N 잡러는 어때요?
저의 책 읽는 모습을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더군요. 책 한 권을 끝까지 다 읽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7권을 각각 50페이지 정도씩 읽기 때문입니다. 책 내용이 헷갈리지 않느냐고 묻지만, 각각 다른 장르의 책을 보기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부분을 매워가면서 풍요로운 독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하다가 이도 저도 안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여러 개의 우물을 파는 사람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회사원이면서 작가인 사람, 유튜버이면서 웹툰 작가 그리고 전혀 다른 일까지 하는 요즘 말로 소위 ‘N 잡러’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 52시간제 도입으로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면, 또 주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이렇게 여러 일을 함께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매우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삶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도 듣습니다. 회사에서는 근로자의 성실 의무를 지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본업에 지장을 주고 직장 질서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를 듭니다.
너무 구태의연한 생각이 아닐까요?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일이면 부르클린 한인성당으로 가고 있습니다. 성당 근처에는 오랜 된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일찍 도착하게 되면 묘지를 둘러보고 있습니다. 200년 전에 조성된 묘지입니다. 묘지를 둘러보면서 라틴어 격언이 생각났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게, 내일은 네게!)" 웅장하게 잘 차려진 묘비도 있었습니다. 낡아 알아 볼 수 없는 묘비도 있었습니다. 최근에 누군가 다녀갔던 흔적이 있는 묘비도 있었습니다. 잡초만 우거진 묘비도 있었습니다. 90세가 넘게 장수한 묘비도 있었습니다. 40대에 세상을 떠난 묘비도 있었습니다. 장난감이 있는 묘비를 보니 아직 어린 죽음도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겠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순서가 없다는 것도 새삼 느낍니다. 묘비의 모습이 다양하듯이, 다양한 삶이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삶의 최종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천상의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록하였고, 그분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는 교회를 세웠고, 성지를 조성하였습니다. 교회가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우리는 신앙의 신비로 믿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의 신비를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 홀로 외롭게 죽은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 또한 천상의 별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편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닌 때도 있습니다. 설탕이 달다고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면 몸에 해로운 것과 비슷합니다. 반면에 지금 힘들고 어렵지만, 꾸준히 하면 삶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꾸준히 하면 삶의 ‘나침판’이 되어 줍니다. 예전에 ‘전체와 부분’에 대한 집합을 배웠습니다. 작은 것에 얽매이면 큰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아무리 큰일을 하여도 작은 것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세부적인 내용에는 때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결국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향해 나가는 배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여정의 기록이 성서입니다. 제 몸에도 삶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연탄재에 맞아서 난 상처도 있습니다. 뜨거운 물에 덴 흔적도 있습니다. 다리의 골절로 수술을 받은 자국도 있습니다. 얼굴을 보면 이제 조금씩 세월의 흔적들이 묻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있음에도 매일 아침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인간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는지, 고통과 시련은 왜 다가오는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이것이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깊은 묵상 중에 ‘신앙의 원리와 기초’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냐시오 성인이 보았던 ‘원리와 기초’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산다면 억만년을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국립현충원에는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을 위한 탑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조국을 지키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주님을 기리나이다.”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빛 속에서의 삶
- 절망은 없다 -
어제 우여 곡절 끝에 결혼하게 된 예비부부의 카톡 메시지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형제가 어제 축일인 ‘사도 요한’ 세례명으로 이번 성탄에 세례를 받았으니 축하해달라는 내용과 더불어 부부가 정했다는 부부 십계명이었습니다.
“둘이 부부 십계명 정했어요.”
1.바람을 피지 않기.
2.휴일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지내기.
3.간섭하지 않고 반복하여 잔소리 않기.
4.싸울 수 있으나 즉시 둘이 해결하기.
5.서로 존중하기.
6.거짓말 않기.
7.서로 건드리지 않기.
8.가족을 지켜주기.
9.함께하지 못할 때 미리 전화하기.
10.10시 통행금지 시간 지키기.”
특히 오랜 고뇌 끝에 결단하여 결혼하게 될 자매는 한결같은 믿음으로 빛 속에서 살아 온 분입니다. 결혼하게 될 형제도 참 사연이 많지만 전에 자매와 함께 부산에서 수도원의 저를 방문했을 때 양말 세 켤레를 선물한 가난하나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분입니다.
예비부부 얼굴이 웬지 닮았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마침내 형제는 사도 요한으로 세례를 받았고, 5월에는 결혼식을 갖고 신혼 여행은 수도원 피정으로 대체하여 예약한 예비부부입니다. 새삼 빛 속에서 한결같이 살아 온 자매에게 절망은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죽음이 절망의 마지막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새 삶의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주님을 떠나서 죽음의 의미는 해결 난망難望임을 깨닫습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초대송과 세 후렴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의 화관이신 그리스도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초대송 후렴)
“1.어린이들은 마치 어린 양처럼 뛰놀며 그들을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였도다.”
2.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이며, 아무런 흠없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 있는도다.
3.영원한 그리움이 그들 위에 있고, 기쁨과 즐거움이 따르겠으며, 걱정과 한숨은 사라지리라.”-
이어지는 본기도 역시 이들 영혼을 위로하며 우리 모두 한곁같이 믿음의 삶을 살도록 격려합니다.
“하느님, 죄 없이 살해된 아기 순교자들이 말도 배우기 전에,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으니, 저희도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이미 이집트에서 모세의 탄생시 파라오 임금에 의해 살해된 무수한 죄없는 히브리인 아기들에 이어, 오늘 예수님에 앞서 무죄한 이들이 순교하였고, 무죄하신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죄한 순교자들의 피로 점철된 교회 역사인지요!
이런 악순환의 반복되는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빛속에서 하루하루 빛이신 주님의 인도하에 사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우리만이라도 악순환의 반복되는 역사에서 탈출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앞서 소개한 예비부부가, 또 오늘 복음의 성 요셉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악의 어둠 속에 하느님 빛의 인도 따라 악의 질곡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결코 절망은 없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 장면이 선과 악의 싸움 같습니다. 요셉과 헤로데 임금의 대결이지만 요셉의 배경에는 늘 빛이신 하느님이 계시니 실제는 하느님과 헤로데의 대결입니다. 그러니 악이 선을, 악마가 하느님을 결코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암흑속의 빛처럼 하느님은 주님의 천사를 통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구출해 주십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이미 하느님의 구원 섭리의 역사 안에 있는 요셉과 그 성가정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한결같이 하느님 빛에 따라 충실히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가장 성 요셉의 믿음의 삶이 감동적입니다.
바로 여기서 아기 예수님으로 인해 죄없이 죽은 아기 순교자들은 존재의미는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궁극의 원인은 인간의 무지에 있습니다. 무지한 탐욕의 인간들에게 악순환의 반복되는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 인한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에게는 물론 하느님의 구원이 뒤따르겠지만 우리가 무지속에 있는 한 무지의 악순환 중에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알게 모르게 계속될 것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무지의 질곡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사는 일이 화급하고 절실한 과제로 부과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빛 속에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을 통한 주님의 가르침이 고맙습니다. 인간 무지의 어둠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빛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이 해 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실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만이 무지의 죄와 악에 대한 근원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과 일치되어 빛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며 살게 하십니다.
빛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 평생 삶의 인도자가 되시어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코 무지로 인한 악순환의 반복의 삶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제 제가 가르쳐 드린 ‘오소서, 주 하느님!’ 기도문을 자주 바치시기 바랍니다. 무지로 인한 악순환의 반복의 질곡에서 하느님 은총으로 벗어난 이들의 오늘 화답송 시편을 통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사냥꾼의 그물에서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의 도움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네.”(시편124,7-8). 아멘.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였다."(마태2,16)
'첫 순교자들!'
오늘은 헤로데의 탐욕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순교자'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입니다.
헤로데에 의해 살해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은 '죄의 물듦이 없는 첫 순교자들'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만 바라보면 죄 없이 죽어간 아기들의 죽음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전체 안에서 바라보고, 무엇보다도 신앙 때문에 스스로 기쁘게 목숨을 던진 수많은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로데의 탐욕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곳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엄마 뱃속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낙태아들'입니다.
분명 하느님 앞에서 헴 바쳐야 할 '인간의 큰 죄'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1요한1,9: 2,1c-2)
이것이 바로 '성탄의 본질이며, 성탄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분께로 나아가,
우리의 큰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다시 태어나, 생명을 지키는데 일에 앞장섭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사가는, 하느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예수님 안에서 계속하시고 그것을 완성하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중요한 체험들에 참여하시어 새로운 ‘모세’로 제시됩니다.
파라오가 히브리 사내아이를 죽이는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살리시고, 피신시키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서
예수님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시고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로 보내 주십니다.
이어서 복음사가는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로
말미암은 아픔과 비탄을 전합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통한 울음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예레 31,15).
라마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 유배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던 출발지로, 라헬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유배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식을 잃은 모든 어머니의 눈물과 통곡을 대변합니다.
이 울부짖음은 하느님을 향한 외침이면서
아직 주어지지 않은 위로에 대한 요청입니다.
‘사실 하느님만이 이에 응답하실 수 있는데, 말을 능가하는
유일한 참된 위로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주며,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 유년기』, 157-158면 참조).
어느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죄한 이의, 한 아이의 죽음, 상처와 아픔 앞에서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면
도대체 뭘 하셨나?’ 하고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묻다가 ‘사랑만이 전능하다고 믿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힘이 아니라 ‘상처받는 사람 곁에서 더 힘들어하시고,
더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문제를 풀어 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보다 더 아파하시면서
내 곁을 지켜 주시는 아름다운 분을 만났습니다.
그 아름다운 분을 외면한다면 인간이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처럼 아름다워지려고 발버둥 칩니다.”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큰 신비를 본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곁에 머물지 않은 이유와 성가정이 베들레헴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만남의 기쁨을 누린 뒤 모두 다 도망자처럼 서둘러 달아나야 했다. 박사들은 페르시아로, 성가정은 이집트로 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 헤로데의 손에 잡히셨다면, 그분의 육신의 삶은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섭리로 마무리되었다.
헤로데는 구세주를 없애려고 베들레헴으로 전갈을 보내, 박사들에게서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 명령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미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사악함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신다. 베들레헴의 아이들과 인근 마을의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 대신 죽은 이 죄 없는 아기들은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 아기들과 젖먹이들이 그리스도 대신 죽임을 당하며 순교자의 완전한 찬미를 바쳤지만, 하느님의 임금님을 거슬러 자신을 지키려고 아이들을 죽인 헤로데는 파멸했다. 이 아기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자격을 지녔던 첫 순교자들이었다.
이 아기들이 죽은 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기 때문일까? 이 아기들의 죽음은 앞으로 오랜 기간 이어질 인간 사악함의 시작이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18절) 라마는 사울 왕의 도성이었고 사울은 벤야민 지파였다. 벤야민은 라헬의 아들이며 베들레헴 가까이 라헬의 무덤이 있다. 아기들이 라헬의 묘비가 있는 베들레헴에서 학살당했기 때문에 라헬이 운다고 하는 것이다(창세 35,16-20).
마태오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를 표현한다. 아기들이 우는 것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우는 것은 마치 내장이 뜯겨 나가듯이 아기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아기들보다 남겨진 어머니들의 슬픔이 더 큰 것이다. 아기들의 슬픔은 죽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니, 한순간의 슬픔이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들의 슬픔은 갑절이었다. 그들은 아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는 이제 아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에게는 그들의 슬픔에 복된 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아기를 잊지 못해 슬픔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흔히 “왜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이런 일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하며 불평을 하고 신앙도 버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분명히 인간의 잘못이다. 인간이 욕심이 저지르는 잘못이기에 인재이다. 우리 인간의 회개가 필요한 것이지 하느님께 탓을 돌릴 수가 없다. 나의 잘못으로 우리 가운데 나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 16)
생명은
그냥 생명이
아니다.
모두가
소중한
하느님의
생명들이다.
하느님의
생명들이
오늘
종잇조각처럼
구겨지고
찢어지고
뭉개진다.
우리가 사랑한
생명을 우리가
죽이고 있는
모습이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아픔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같이
처참한 날에도
죽음을 위로하는
성탄이 있다.
절대자의
성탄 앞에
우리가
내놓는 것은
언제나 죄 없는
아기들의 비통한
죽음이다.
부질없이
깨어지는
헤로데의 권력과
헤로데의 욕망을
멈추어야 한다.
인간의 욕망으로
희생된 죄 없는
수 많은
아기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참된 생명의
동반자는
언제나 참된
생명이었다.
욕망과 욕심에
눈이 먼
우리들을
일깨워주는
아기 순교자들의
아픈 희생이다.
짧은 행복
긴 고통의
악순환을 이제
멈추어야 한다.
욕심을
내려놓는
성탄이다.
생명을
들어올리는
성탄이다.
생명의 길을
다시 찾게하는
생명의 처절한
통곡소리를
들어야한다.
비참과
참혹 사이에서
통곡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통곡에서
만나게되는
우리들의
아픈 현실이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하느님을
죽이는 것이다.
생명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하느님의
성탄이다.
우리는
성탄 앞에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반성한다.
잔인한
욕망이 아닌
맑은 사랑의
기쁨을 나누는
오늘이길
기도드린다.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정의>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3-18)”
헤로데는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 어디인지 묻는 동방박사들에게
그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려 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마태 2,8).”
아마도 헤로데는 처음부터 ‘그 아기’를 죽이려고 생각했을 것이고,
동방박사들이 배반자 유다와 같은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박사들은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라는 헤로데의 말을 믿었을 텐데,
만일에 그들이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천사의 지시를’(마태 2,12)
받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계신 곳을 헤로데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고,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라는 것도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죽게 되었을 것이고,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학살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로데에게 가는 것을 막은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헤로데가 하려는 일을 미리 막지 않으셨을까?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막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사를 헤로데에게 보내셨거나,
또는 누군가를 보내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도 천사의 말을, 또는 사람들의 충고를
따르거나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신한 일과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구약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사후 해석’일 뿐이고,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한 것은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분명히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거스르는 범죄를 저지른 일입니다.
인간의 범죄가 하느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천사는 왜 헤로데의 계획을 요셉에게만 알려 주었을까?
그리고 요셉은 왜 헤로데의 계획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그냥 떠났을까?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성가정만 구하시고 다른 아기들은 죽게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또 ‘의로운 사람’인 요셉이(마태 1,19)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그냥 가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의 결과만 보고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천사가, 또는 요셉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지만,
어떤 이는 그 말을 믿고 피신하고, 어떤 이는 안 믿고 그냥 가만히 있고......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어떻든 베들레헴의 아기들은 예수님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 억울한 죽음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로도 마다한다.” 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들의 부모들처럼 끔찍한 불행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
위로가 될까?
하느님(예수님)께서 힘들어하는 사람들보다 더 힘들어하시고,
아파하는 사람들보다 더 아파하시고, 슬퍼하는 사람들보다 더 슬퍼하시면서
함께 울고 계신다는 말이 위로가 될까?
야고보서 저자의 다음 말은 ‘말로만 하는 위로’에도 해당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6)”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빈말’로 위로하는 것으로 그치는 종교는
아무 소용이(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독재자(살인자)를 법으로 재판하고 처벌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서
그런 독재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막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다고 모든 원한이 풀리고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빈말로 위로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경우에도 사적인 복수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평화의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사탄을 짓부수시어
여러분의 발아래 놓으실 것입니다(로마 16,20).”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나라이고,
동시에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정의 구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일은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만일에 이 세상에 사랑만 있고 정의가 없다면, 그 사랑에는 힘이 없고,
금방 약육강식의 짐승들 세상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회개와 용서를 인정하지 않는 무자비하고 차가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함께 지고 가는 고통과 죽음♣>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1요한 1,7)
오늘은 예수님 때문에 헤로데의 손에 죄 없이 죽은 아기 순교자들의 기념일입니다. 헤로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다인들의 최고회의를 없애려고 300여명의 원로들과 법령위원들을 살해합니다. 그 뒤 자신의 아내 마리아와 장모 알렉산드라, 두 아들까지도 죽이고, 자신이 죽기 전에는 예루살렘 귀족들도 죽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다음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하고 묻습니다. 이에 잔인한 폭군 헤로데는 왕권에 위협을 느껴 아예 화근이 될 씨까지 말려버릴 결심을 합니다.
결국 그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2,16)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의 등장이었습니다. 헤로데는 그 정반대편에 있었고 둘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 없는 아기들은 이 충돌로 악과 탐욕의 희생제물이 된 셈입니다.
자신이 주인이라는 엄청난 착각에 빠진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조차 자기 권력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죄없이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1요한 2,2) 오늘의 헤로데들은 돈과 권력, 탐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폭력의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죄없는 아기들의 죽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한 아기들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죽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과 죽음은 곧 예수님의 고통이요 하느님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은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과 인생사 자체가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일부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인간다운 삶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이어져갑니다.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 억울하게 탄압당하고 일자리를 잃은 이들, 헐벗고 굶주린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과 희생을 통해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죽은 아기들의 순교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다른 이들의 죽음까지도 사랑으로 끌어안고 살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 혼자만의 행복을 찾지 말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빛 속에 계신 하느님처럼 빛 속에서 살아가면서 서로 친교를 나눠야겠습니다(1요한 1,7).
아울러 혹시 내 안에도 헤로데와 같은 교만과 탐욕, 잔인함과 폭력성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소유욕, 자기 힘을 극대화 하려는 야망, 사랑의 섬김과 무관한 힘의 행사와 지배, 선과 정의를 외면하는 태도 등은 결국 또 다른 죄없는 아기들을 죽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도 죄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태아, 전쟁의 희생자들, 의롭고 이타적인 일을 하다가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합시다.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 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폭력이나 편법으로 권력을 차지한 부당한 권력자들, 그도 아니면 통치자로서의
자격 여건을 전혀 갖추지 못해, 그 자리에 앉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치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자리에 대한 일상적 불안감, 위기감입니다.
헤로데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안에 큰 수치요 오점으로 남은 군사정권 시절의 독재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로데의 경우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안 그래도 부실하고 불안불안한 자신의 왕권이 크게 흔들림을 느낍니다.
그 결과 인간의 탈을 쓴 자로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악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 결과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잔혹한 악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죽임을 당한 아기들의 운명이 참으로 가련합니다.
가문의 미래요 희망이던 아기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던 부모들의 마음을 예레미야 예언자가 미리 예언했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오 복음 2장 18절)
유다인들도 과거 우리나라 백성들처럼 남아선호사상이 유별났습니다.
그런 금쪽같은 아기들, 가문의 대를 잇고, 가계를 이어야 할 아기들, 보물 같고 목숨 같던 아기들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잃었으니 고을 전체가 깊은 슬픔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거룩하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 그 이면에 무수한 아기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지극한 선인 앞에는 그에 맞서는 반드시 극악무도한 악인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악한 인간 존재의 강한 시기 질투심과 극단적 이기주의로 인한 피해자가 속출합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지만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아기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 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정권욕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지도자들,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정신 나간 지도자들, 인간미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야수 같은 지도자들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참 정의, 참 진리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 다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문제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 축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로데에게 대신 죽은 순교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헤로데는 그때 아기 예수님이 죽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위해 희생된 어린 영혼들은 교회에서 순교자 지위에 오릅니다.
제일 문제 되는 것은 아기들이 자기 의지로 순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공경받을 만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만약 내가 산길을 차를 몰고 가다가 웅덩이를 피하려고 차를 비트는 바람에 길가에 있던 어미 새를 치어 죽였습니다.
내려보니 둥지에 새끼 새들이 있습니다.
어미가 없으니 이들은 다른 동물들에 잡아먹힐 것이 확실합니다.
이때 나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 새끼 새들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어야 했고 그들의 영혼을 주님께서 책임져주셔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약 어미 새가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고 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 독사는 새끼들도 잡아먹을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는 하느님께서는 사랑도 있고 능력도 있으십니다.
그러니 당신 아드님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을 당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십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 죽음이 누구를 위한 죽음이어야 그 보상을 받게 되는지 잘 깨닫게 해줍니다.
나에게 사랑을 지닌 분이시고 그 보답을 해줄 능력을 지니신 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 내 죽음이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 대신 죽어주고 싶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여러분 방 안에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사 놓은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반드시 여러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매트릭스’(1999)란 영화에서 네오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 밤에는 해커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에게 모피어스란 자가 나타나 빨간 약과 파란 약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합니다.
파란 약을 먹으면 그냥 이전처럼 침대에서 깨어나겠지만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알게 되리란 것입니다.
네오는 진리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빨간약을 먹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떴을 때 믿지 못할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는 기계에 의해 프로그램된 조작된 세상이었고, 기계들이 인간들이 그렇게 허상의 세계에서 사는 동안 인간을 빨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오는 이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자아라는 기계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것을 저지하려는 기계의 세력과 맞서 싸웁니다.
나를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착각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모두 누군가를 위해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과연 나의 생명을 바치는 값을 되돌려줄 대상인지 명확히 아는 게 중요합니다.
자아는 나를 이용할 뿐 나에게 자신을 위해 일한 값을 쳐주지 않습니다.
어차피 누군가를 위해 죽어야 한다면 내 죽음의 값을 되돌려줄 수 있는 분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분이란 나를 만드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딸이 무덤에서 외롭지 않도록 무덤 속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국 아빠의 사연이 있습니다.
중국 쓰촨성에 사는 장 리용씨와 딸 신레이의 사연입니다.
리용씨 딸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지중해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중해빈혈’은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적혈구 내 헤모글로빈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질병으로 중증의 경우 적극적인 수혈 요법이 필요하고, 15세가 되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리용씨는 가난한 농사꾼이었지만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가며 딸의 비싼 치료비를 감당해 왔습니다.
그간 치료비로만 10만 위안(약 1680만원)을 사용했지만, 딸의 병세에는 차도가 없었습니다.
리용씨 부부는 의사에게 “제대혈(탯줄혈액) 이식을 통해 딸을 살릴 수 있다”라는 소식을 접하고 둘째 아이를 뱄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비싼 수술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모든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엄마 뎅민 씨는 “우리에겐 이제 어떠한 선택도 남아 있지 않다”라고 토로했습니다.
부부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용씨는 딸의 묏자리를 알아보고 직접 무덤을 팠습니다.
이후 리용씨는 딸과 함께 이곳을 매일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딸이 죽은 후에도 이 장소를 무서워하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덤 속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리용씨는 “궁지에 몰린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 더 이상 돈을 빌릴 곳도 없다”라며 “2살 딸아이가 묻힐 이곳에 데려와 같이 놀면서 익숙해지게 하는 일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매일 같이 딸과 함께 이곳을 동행하는 것”이라며 “딸이 무덤을 편안하게 느끼도록, 죽는 순간이 다가오면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리용씨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은 피어 비디오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온라인에서 퍼졌고 사연을 접한 중국 네티즌들은 신레이의 치료비를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딸의 병이 낫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가 죽을 때 그 책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 무덤에 함께 들어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지닙니다.
그 마음을 지니신 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누구나 누구를 위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나라를 위한 죽음일 수도 있고, 내가 믿는 신조를 위한 죽음을 수도 있으며, 가족을 위한 죽음일 수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내 목숨을 바치는 대상이 나에 대한 사랑도 없고, 비록 사랑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보답할 능력이 없는 대상이라면 나의 삶과 죽음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세상에 나의 죽음에 대한 보답으로 영원한 삶으로 되돌려줄 사랑과 능력이 있는 분이 하느님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심장이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심장을 하느님을 위해 썼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혀와 성대가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주님 말씀을 전하는 데 썼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오른손과 발이 썩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선교하기 위해 그것들을 희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온몸이 썩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심장에 받아들여
온몸이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찮은 새 한 마리를 어쩔 수 없이 죽였어도 그 새끼들에게라도 보답을 해준다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나의 목숨을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해 볼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묵상과 기도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습니다. 예수 아기의 동방박사 방문 이후, 그는 자기 왕권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교회는 이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오래전 부터 순교로 기억해 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아기 예수님 때문에 죄 없는 가운데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많은 어린 아기들이 의도적인 행위로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존엄한 아기들입니다. 인간의 무자비한 폭력에 죽임을 당하는 현실에서 이런 위기의 아기들을 구원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기들을 위한 구원에 대한 노력이 축일과 기억의 완성입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1요한 1,5―2,2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3-18
실천
인근에 교회에서 설립한 입양원이 있습니다. 최근에도 이곳에 어린 아기가 들어왔습니다. 이 아기는 미혼모가 낳은 아기 입니다. 비록 미혼모가 아기를 키울 수 없어서 이곳에 들어왔지만, 이 아기는 미혼모에 의해서 인간 존엄성과 하느님의 자녀로서 귀한 생명을 보장받았습니다. 미혼모의 인간 생명에 대한 고귀한 결정 때문이었습니다. 그 미혼모를 존경합니다.
태중에 있던 아기에 대한 염려와 기도, 아기에 대한 희망과 희망과 그리움, 아기의 미래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미혼모의 아기이지만 우리의 사랑과 관심과 돌봄으로 잘 자라기 바랍니다. 우리도 부모의 자식들이지만, 그들도 엄연히 부모의 자식들, 인간의 존엄을 가지고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우리 모두의 가족이고 자녀들입니다.
강 건너 불 보듯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한 부모 가족 자녀들이라는 믿음과 뜻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도록 도전과 의지와 전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부모들의 무지, 세속적 필요, 도덕과 윤리의 미숙, 원하지 않은 임신의 도전에서 그런 악행을 물리치도록 노력합니다. 그런 도전을 물리치는 것이 하느님의 가족과 자녀로서 가야할 길입니다.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
21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제1독서 (1요한1,5-2,2)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6)
앞선 요한1서 1장 5절에서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티끌만한 어둠도 없으신 완전한 빛이시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전혀'로 번역된 '우데미아'(udemia)는 '어떤 종류의 ~도 없다'는 부정의 뜻으로서,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종류의 어둠도 없다는 뜻이다.
특히 사도 요한은 '우크'(uk)와 '우데미아'(udemia)라는 부정어를 같이 사용함으로서 부정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고 있다.
즉 빛이신 하느님 안에는 빛이신 하느님의 속성에 어떤 손상이나 흠집을 낼 만한 어떠한 종류의 어둠도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둠'으로 번역된 '스코티아'(scotia)는 사도 요한의 전용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저서에 절대적으로 많이 쓰였다.
즉 신약의16회 용례 중에서 요한의 저서에 14회가 쓰였다. 그중의 12회가 모두 자연적 어둠이 아닌 죄와 불의 등 상징적 의미로 쓰였으며 (요한1,5; 8,12; 12,35.46; 1요한2,9.11), 요한1서 1장 5절에서도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것을 통해 사도 요한은 하느님과 친교하는 모든 사람은 친교의 대상이신 하느님의 속성을 바로 알아야 됨을 보여주고 있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신 하느님과 친교하려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그 자신도 철저히 거룩함에 머물러야 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A.D.1세기 말 교회에는 빛이신 하느님과 친교한다고 하면서도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살아간다면'으로 번역된 '페리파토멘'(peripatomen)은 '둘레', '근처','주위'를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pari)와 '밟다'(루카10,19)란 뜻의 동사 '파테오'(pateo)의 합성어로서 '이리저리 거닐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페리파테오'(peripateo)의 현재 가정법이다.
현재 가정법은 현재의 반대적이고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므로 본문에서 이것은 빛보다도 어둠을 사랑하는 습관적인 방식을 가리킨다.
특히 요한의 편지에서 이 단어는 윤리적인 의미를 포함하며, 한 인간의 개인적인 삶의 스타일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었다(1요한2,6.11; 2요한1,9.6; 3요한1,3.4).
한편,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1요한2,22)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하느님과의 친교는 영적 진리를 깨닫는 지적인 측면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하느님과 친교는 단순히 지적인 깨달음과 동의가 아니라 행위를 동반한 윤리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거룩한 영을 소유한 자들은 어떠한 죄로부터도 자유롭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거룩한 영적 지식을 선물받은 사람은 육체의 죄가 자신을 더럽히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는 놀라운 영지(靈知)를 가진 자에게는 더 이상 죄의 원리가 지배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의 본성과 경험은 죄가 하느님과의 영적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가르쳐준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을 수 없고,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을 수 없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한3,20-21)
빛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구세주로 모신 자는 진리를 실천하는 실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의 공로가 모든 허물을 깨끗하게 하므로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머물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친교한다고 고백하는 이가 계속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참된 회심과 죄의 보속은 인간을 더 이상 어둠 속에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안에 머무시는 거룩한 성령께서 속성상 어둠을 싫어하고 어둠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시는 하느님의 자녀는 진리의 영의 속성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빛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12월 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를 줄 수 없다.
(마태2,13-18)
13 동방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 하느님께서 야곱과 그의 손자들에게 양식을 찾아 이집트로 들여보내실 때의 일이다. 그것은 이집트의 양식은 종살이 하게 하는 양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 교육, 사랑이셨다. 그러나 야곱은 그 이집트로 가는 것이 두려웠다.
(창세46,3-4) 3 그래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4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 큰 민족, 하늘의 참 양식을 먹게 될 민족이라는 것, 그래서 그들을 종살이에서 불러내실 때, 참 양식인 어린양의 살을 먹고, 피로 구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하느님으로) 그들의 그 길을 그대로 걸으시기 위해 이집트로 들어가신 것이다. 이집트는 세상을 뜻한다.
그 세상 양식에 취해 종살이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늘 이 세상으로 내려와 들어오신 예수님이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살과 피로 구출 되었듯이 말이다. 우리도 그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그 대속의 죽음을 먹고 구원 받는 것이다.
(1요한2,2)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왜, 두 살 이하 아이들을 죽였을까? 먼저 숫자 둘은 분리를 뜻하는 것으로 선악의 그 인간의 두 마음을 뜻한다. 그 두마음은 뱀의 유혹을 먹은 아담의 원죄라는 것이다.
(로마서5,12) 1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외 창세8,21시편51,7 58,4)
= 그러니 모든 인간은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이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두 살 이하 어린아이의 죽음으로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무엇이 위로가 될까~ 그 어떤 것도 위로가 수 없다. 죽은 자식이 돌아오지 않는 한 위로는 없다. 성경은, 그 여인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아들이 살아 돌아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곧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아들들(죽을자들)을 살리시려, 구원자로 위로하려 오신다는 것이다.
(2코린1,3)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독서로~
(1요한1,5-10) 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 우리는 얼마 전 하느님께서 어둠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들었다.(이사45,7) 그런데 어둠이 전혀 없으시다는 말씀은, 전에 묵상했듯이 ‘어둠과 빛은 하나’라는 것이다. 저녁(밤)을 지나야 아침(빛)이 오듯, 죄(악)를 통해 용서(선)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선이 악을 품고 대신 죽어 생명을 주는 십자가의 원리, 구원의 진리인 것이다.(요한14,6참조)
그 진리를 아는, 그 진리의 하느님을 안다는 이가 어둠에 멈춰 있다면, 곧 선악의 그 어둠의 법, 그 세상의 법으로 스스로를 단죄하며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는 하느님의 사랑도, 진리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1코린4,3-5) 3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 십자가의 대속, 그 하늘의 진리를 안다면 어둠은 빛으로 가는 통로이기에 어둠에 멈추는 그 삶(어둠)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시편139,12) 12 암흑인 듯 광명인 듯 어둠도 당신께는 어둡지 않고 밤도 낮처럼 빛납니다.
7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 그 인간의 열심, 의로움은 구원의 진리가 아니기에 그 자기 의로움에 속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씻겨지지 않는 것이다. 죄는 흠없는 깨끗한 피로만 씻겨 지기 때문이다.(히브9,22참조)
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 죄란, 하느님의 말씀을 거짓되게 하는 것이다. 곧 인간의 뜻으로 계명으로 받는 것이다. 그 죄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다.(창세2,17)
그래서 어린양의 피, 그리스도의 대속이 꼭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아담처럼 스스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열심을 부렸던 그 자기 의로움의 그 가치를 부인하는 그 죽음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내 생각, 뜻을 죽이는 머리가 잘리는 순교인 것이다.
(에페1,7.10)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에페4,15) 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 그래서 하늘에는 하느님의 뜻으로 사는 그 머리(뜻)가 잘린 순교자만 있는 것입니다.
(묵시4,10-11) 10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금관을 어좌 앞에 던지며 외쳤습니다.
= 자기부인, 곧 자신의 생각, 뜻(머리)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 자신의 머리에는 금관을 쓸수가 없다는 것이다.(머리이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이들만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가 있다.
11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 하고 찬양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그것이 구원의 최종 목적인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다.
☨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창조된 것을 인간의 뜻으로 말하고 듣는 그 모든 죄에서 구하여 주소서~아멘.!!!
2021년 12월 28일 화요일 [아기 순교자 축일] 사제의 묵상 (서철 바오로 신부)
마태오 복음사가는,
하느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예수님 안에서 계속하시고 그것을 완성하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중요한 체험들에 참여하시어 새로운 ‘모세’로 제시됩니다.
파라오가 히브리 사내아이를 죽이는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살리시고,
피신시키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서 예수님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시고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로 보내 주십니다.
이어서 복음사가는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로 말미암은 아픔과 비탄을 전합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통한 울음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예레 31,15).
라마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 유배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던 출발지로,
라헬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유배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식을 잃은 모든 어머니의 눈물과 통곡을 대변합니다.
이 울부짖음은 하느님을 향한 외침이면서 아직 주어지지 않은 위로에 대한 요청입니다.
‘사실 하느님만이 이에 응답하실 수 있는데,
말을 능가하는 유일한 참된 위로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주며,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 유년기』, 157-158면 참조).
어느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죄한 이의, 한 아이의 죽음, 상처와 아픔 앞에서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면 도대체 뭘 하셨나?’
하고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묻다가 ‘사랑만이 전능하다고 믿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힘이 아니라 ‘상처받는 사람 곁에서 더 힘들어하시고,
더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문제를 풀어 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보다 더 아파하시면서 내 곁을 지켜 주시는 아름다운 분을 만났습니다.
그 아름다운 분을 외면한다면 인간이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처럼 아름다워지려고 발버둥 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마태 2,13-18)
예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죠? 그리고는 헤로데의 칼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을 하세요. 성경은 그 사건이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라는 구약의 예언 성취라고 합니다.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삶을 그대로 사실 것임을 암시하는 사건임과 동시에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로 자신들의 힘과 가치를 숭앙하는 이스라엘 자체를 힘의 세상인 이집트로 선언해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로 가셨는데 성경은 하느님의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고 그런단 말예요. 졸지에 유대주의의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걸 부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베들레헴 지역의 두 살 미만의 남자아이들이 모두 도륙을 당하는 일이 발생해요.
(마태복음 2:15~18)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에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6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18 '라마 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 구나!'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으세요? 하느님이 분명 요셉에게 그 자리를 피하라고 말씀 하셨죠? 그러면 그때에 다른 어미들에게도 전갈을 보내서 그 자리를 피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요? 왜 다른 얘들은 다 죽게 놔두세요? 예수님만 살짝 들어서 이집트로 보내신단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하느님은 성경의 독자들에게 뭔가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어린아이들을 다 죽여 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하늘에 뜬 별이 동방박사들을 일부러 헤로데에게 데리고 간 거예요. 죽이라고요. 아니 그 별이 미쳤지, 바로 그냥 예수님 태어나신 구유로 갔으면 될걸, 왜 헤로데에게 동방박사들을 데리고 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게 하냐구요? 죽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라는 호세아의 예언이 인용된 곳에 ‘라헬의 통곡’ 이라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을 주의하여 보셔야 해요.
지금 성경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그 율법주의 자체를, 힘의 원리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그 이집트로 규정을 해 버리시고 그래서 예수님을 거기서 빼내는 거예요. 예수님이 첫 번째 엑소더스를 하고 그 뒤를 따라 하느님의 백성들이 엑소더스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정작 뭐였냐면, 이스라엘의 유대주의, 율법주의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 와서 죽으시는 거예요. 이집트는 바로 교회 안에 그러한 율법주의, 유대주의의 모형으로 등장했던 거지, 이집트가 쳐 죽일 놈들이 아니라니까요. 그게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 ‘옛 자아’ 그 모습이란 말예요.
그렇게 성경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 자체를 힘의 원리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이집트로 규정해 버리고 그곳에서 사는 모든 자들은 모두 다 죽어야 할 자들임을 어린아이들의 죽음으로 주지시키는 거예요. 다 죽어야 되는 거라는 거예요. 이집트니까.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은 어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자의에 의해서 내어 놓기도 전에 죽어야 할 자로 분류가 되는 거예요. 이걸 원죄라고 해요.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으면 다 죽어야 할 존재예요. 나면서부터 죽어야 할 자로 분류가 되는 자들이 자라면서는 오죽하겠어요?
그러니까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건...... 거기에 사는 모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할 자들이라는 선언이란 말입니다.
마태오는 그걸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통곡하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어요. 이 예레미야의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대의 멸망과 관계있는 예언이죠? 라마라는 곳은 남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 집결된 곳이에요.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죠? 여호수아 18장에 보면 나오죠.
그 라마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샐사 부근이에요. 예라미야 예언자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남 유대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라헬이 그 무덤 속에서 자기 자식들이 끌려가는 걸 보고 통곡하는 것으로 묘사를 한 거예요.
라헬의 두 아들이 누구죠? 요셉과 베냐민, 요셉의 큰 아들은 에브라임, 북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에브라임이죠? 망했잖아요? 남유다는 베냐민. 라마가 또 베냐민의 땅이고, 요셉과 베냐민, 두 아들을 다 잃은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라헬을 이스라엘의 어미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이스라엘 전체가 다 멸망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하느님의 백성으로 택해진 그자들도 원래 다 죽어야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렇게 다 죽어야 되는데, 그래서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는데, 라헬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죠? 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죽은 자식이 돌아오는 것 이외에 다른 건 절대 위로가 안돼요.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예수가 바로 그 죽은 아들을 살리러 왔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거란 말입니다. 한 아기가 와서 죽음에 던져져야 할 하느님의 아이들을 선택하여 살려 내는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렇게 예수는 죽어야 할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이 죄악의 세상에서 그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그런 복을 주어서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태복음 1: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자기 백성, 모든 백성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만. 어디에서? 죄에서. 그게 메시아란 말예요. 그렇게 구약적 이스라엘의 율법주의를 폭로한 성경은 역사적 이집트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 내시죠? 예수님께서 출애굽 이스라엘의 여정을 그대로 밟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집트에서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게 지금 마태복음의 흐름이에요.
세례라는 건, 애굽의 이스라엘이 죽고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새롭게 창조되는 구원의 모형이에요. 그래서 물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의식을 행하는 거죠. 그것도 하느님의 주권과 능력에 의해 성취될 새 창조의 모형이에요.
첫 창조 때 무대 배경이 어땠죠? 수면 위에 하느님의 영이 운행을 하시고 '빛이 있으라'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창조가 시작됐잖아요? 예수님의 세례 현장은요? 저주 받을 구약이 빠져 죽을 물이 있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이 계시고 직접 하늘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또 떨어져요. 그리고 그 위에 하느님의 영,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한단 말입니다. 이게 새 창조라는 거예요. 새 창조,
첫 창조에서 모형 되었던, 그리고는 광야로 나가셔서 40일 시험을 받으세요. 그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이제 12제자를 모으시죠. 그건 교회입니다.12제자, 하느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12제자를 모아서 그들을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도를 전하는 어떤 산으로 끌고 올라가시는 거예요. 그게 산상수훈의 산이란 말입니다.
이건 정확하게 출애굽 이스라엘의 삶을 회복시키고 완성시키며 가는 모습이에요. 어린 양의 피의 공로로 살아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너죠? 그걸 사도 바오로가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그래요. 고린도전서 10장 2절에서, 그 홍해에서 이집트군대가 다 빠져 죽죠?
그 이집트 군대는 뭐라고 그랬어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건져내면서 이스라엘을 자주 군대라고 부르시죠? 이집트 군대가 빠져 죽었다라는 건, 애굽화된 이스라엘의 육적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