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3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10. 사람의 선악 결정, 반목의 시작 》
창 3:12
〈 정통사극-퓨전사극 〉
한국인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를 K-드라마라고 합니다.
요즘 K-드라마가 세계를 휘어잡고 있습니다. 그 드라마 중에 사극이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에서 사극은 소재가 풍성합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려 27명의 왕들이 있습니다.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광인효현 숙경영 정순헌철 고순(종)
아마 이들 왕 중에 사극의 주인공이 되어보지 않은 왕은 없을 겁니다.
조선시대 말고도 또 있습니다. 고려 시대입니다.
얼마 전 강감찬 장군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연속극이 있었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입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제작되는 사극을 “정통사극”이라 합니다.
싫컷 울궈 먹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역사에 기초하지 않은 창작 사극이 등장했습니다.
2012년에 방영한 “해를 품은 달” 시청률이 무려 42%에 달했습니다.
“해품달”로 줄여부르는 이 사극은 역사를 기초로 하지 않은 순수창작 사극입니다.
이러한 사극을 “퓨전사극”이라고도 합니다.
정통사극이든, 표전사극이든 대부분 주인공은 왕입니다. 임금님, 왕!
어린시절 “나는 왕이 될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사극드라마를 보거나, 또는 만화 웹툰을 보면서도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다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번쯤 하고, 왕의 카리스마, 왕의 권위, 왕의 세도를 부러워합니다.
“당신이 왕이 되어주십시오!” 이런 꿈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부인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만큼 왕은 누구나 동경하는 최고의 권좌에 앉아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요즘 정통사극이든, 퓨전사극이든 주제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의 달콤함을 누리는 왕의 외척, 세도가의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요즘 사극의 주제가 이러한 흐름입니다.
이런 사극에서, 왕이라는 캐릭터는 가장 불행한 인물입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어떤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합니다.
☞ 그럼에도 왕이라는 지위에 사람들은 최고의 부러움을 표시합니다. 왜일까요?
〈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 〉
사람들은 누구나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싶어합니다.
최고의 자리로 ‘왕’을 지목합니다. 그래서 왕이 되고싶어합니다.
왕의 자리에 오르면 뭐가 좋을까요?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모든 사람이 자기 말 한 마디에 순종합니다.
말 한 마디에 산천초목이 벌벌 떱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립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왕이 되고 싶은’ 심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디에 도달할까요? ~ 최초의 인류 아담 하와까지 가게 됩니다.
아담 하와에게도 이렇게 ‘왕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습니다.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가 하고싶은 대로 다 하고싶다!” 이 욕구입니다.
이 욕구는 달리 말하면, ‘내가 왕이되어야 한다.’ ‘내가 왕이다.’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① “하나님,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왜 이런 교만을 심어두셨습니까?”
최초의 인류 아담 하와를 지으실 때, 겸손한 마음만 주셨더라면 교만하지 않았을 터인데요?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떤 답을 갖고 계신가요?
하나님은 창조 엿새째 사람을 지으시면서 분명 사람의 마음 속에 교만도 심어주었습니다.
겸손과 교만, 순종과 불순종, 사랑과 미움, 용서와 보복 등등의 마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상반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잠재의식 속에 넣어주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지요?
이러한 마음을 신학적으로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자유의지는 말 그대로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겸손할 수도 있고 교만할 수도 있습니다.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할 수도 있고 보복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면서 이러한 마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의지”입니다.
② “하나님! 애초부터 자유의지, 안 주셨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담 하와를 창조하면서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인간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 사랑에는 자유의지가 필수입니다. 자유의지로서 사랑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자유의지와 사랑 〉
자유의지가 없다면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서 자유의지를 지닌 피조물은 오직 사람이 유일합니다.
식물은 물론 동물들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본능만이 있을 뿐입니다.
본능만 가지고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포용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감싸고 서로 부비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반대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상대를 무시(無視)하는 겁니다.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 사랑의 반대입니다.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무관심하거나 관심을 갖거나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의 파트너로 삼으셨습니다.
“네가 이럼에도 나를 사랑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럼에도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겠나이다!”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제외한 동물이나 식물은 이렇게 못합니다.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셨으니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셔야 합니다.
선택권이 없는 자유의지는 결코 자유의지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나를 이 땅에 보내시어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좋은 부모를 주시고, 좋은 가정을 주시고, 좋은 자녀와 환경을 주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배하게 하시니 사랑합니다!”
물론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도 사랑이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자가 아닌 남자로 보내주셨지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부모님이 가난하여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좋은 직업이 없어도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두 자녀를 모두 장애인으로 주셨지만 하나님 사랑합니다!”
“한 녀석은 먼저 데려가시고 또 한 녀석은 이혼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사랑합니다!”
☞ “그럼에도”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사랑이 더 진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 자유의지와 선택 〉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매순간 양단간에 선택을 해야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선택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피해갈 수 없는 것은 첫째, 죽음입니다. 둘째 선택입니다.
선택, 사실은 인간에게 굴레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오래 전 가전제품 광고 카피입니다.
사실은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때 내가 이 길을 선택함으로써, 지금 나는 이 길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선택의 속성은 무엇일까요?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선택한다는 뜻이 됩니까?
순간순간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옳은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를 쓰고, 안간힘을 다 하여 옳은 길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대부분 옳은 선택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후회를 아예 하지 않습니다. 후회라는 개념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습니다.
뒤돌아보고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고 후회라는 개념을 말끔히 없앴습니다.
그러다보니, 언제나 “나는 옳았다!”가 되었습니다.
“그때 너는 틀리고 내가 옳았어!” 이런 생각이 고착화 되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당당합니다. 우리의 당당함 이면에는 사실은 이와 같은 아집이 있습니다.
후회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으니 당당하게 끝까지 밀어부친다!
참 뻔뻔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생관을 가지게 된 것도 선택입니다.
내 선택으로 나한테도 손실이 오지만, 주변 사람에게도 손실을 끼쳤습니다.
그런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후회한다고 달라지지 않으니 후회나 반성, 사과는 안 합니다.
참 뻔뻔해졌습니다. 이것이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봅니다. 《 사람의 선악 결정, 반목의 시작 》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하나님 앞에서 한 말을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창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선악과를 따 먹은 선택, 이제와서 후회해봐야 돌이킬 수 없습니다.
후회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으니 후회를 안합니다.
후회를 안하다보니 후회 개념이 없어졌습니다.
일단 선택하고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뻔뻔해지기로 이미 작정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담의 대답, 얼마나 뻔뻔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제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후회스럽습니다. 후회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도 선택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사건을 돌이키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친 김에 뻔뻔하게 나갑니다.
참 인간들 뻔뻔합니다. 그렇지요?
〈 하나님을 향한 질문들 〉
선택의 본질은 선악에 대한 결정입니다.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 깜냥에 늘 옳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았을까요?
오늘 설교 중에 나오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 왜 사람의 마음에 교만, 불순종의 마음을 주셨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 왜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까?”
대답은 하나님의 사랑의 파트너가 되어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자유의지를 갖는 순간 교만, 불순종은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세 번째 질문은 “하나님, 왜 사람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주시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본디 선악에 대한 절대 기준은 오직 한 분이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선악을 결정하셔야 합니다.
피조물 인간이 선악을 결정하게 되면 중구난방이 됩니다.
도무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혼돈이 되어 분간할 수 없습니다.
요즘 세상의 모습입니다.
☞ 선악의 기준을 세우고 판단하는 일은 오직 한분 하나님만이 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도무지 이 진리를 깨우치지 못합니다.
각자가 선악을 결정하고, 각자가 선택하고, 각자가 책임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 맺음 〉
그렇지 않다는 것부터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선악을 결정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선악은 절대자 하나님의 소관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지 못하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
불신자들은 이 진리를 끝내 깨닫지 못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악을 각자가 결정하는 방법 말고는 알지 못합니다.
서로 선악을 결정하고, 힘 센 자의 결정에 힘이 약한 자가 따르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이것이 세상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확신을 바울 사도가 무어라 합니까?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견고한 진(고후 10:4~5)”이라고 선포합니다.
세상 사람들, 평생 살면서 옳고 그름을 자기가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을 세상이라고 합니다.
옳고 그름, 선악을 자신이 아닌 다른 분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이 결정하셨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결정했습니다.
사회에서는 선배, 직장에서는 상급자가 결정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충분히 학습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럼에도 종국적 선악 결정은 자신이 하는 것이라는 “견고한 진”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모든 결정은 자신이 해야 한다는 고집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견고한 진을 무느고, 선악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는 바로 이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앞에 나온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결정해 주심을 믿는 이들이 크리스천입니다.
선악 결정을 내가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내어주는 우리, “복되도다!”
시 33: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