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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6.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
- 윤영선 작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
출 생 1809년 서울
순 교 1839년(30세) 서소문 밖 네거리 / 참수
신 분 동정녀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얻다
2월 5일은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이다. 동정의 삶은 순교만큼이나 경이롭다. 하느님을 믿고 천국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성공과 부귀영화는 의미가 없다. 그들은 세상에서 미리 천국을 살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수도자를 부르심은 누구보다 초대된 이에게 영예이겠지만, 세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천국을 보여주는 선물이다. 아마도 교회가 동정 생활을 순교만큼이나 귀하게 여긴 이유일 것이다. 아가타 성녀의 일대기는 극적이다. 스스로 정결을 서원하고, 그 서원을 거스르려는 총독의 강요에 순교로 응답했다.
“주님, 저의 창조주시여, 당신은 제가 어릴 때부터 저를 언제나 보호해 주셨나이다. 당신은 세상의 사랑으로부터 저를 택하시고, 고통을 견딜 인내를 주셨습니다. 제 영혼을 받으소서” 동정의 서원을 지키려고 순교를 택한 성녀는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얻은 것이다.
동정 서원 지키며 주님의 나라 선택
수도원이 있을 리 없던 우리 박해기에도 동정을 서원하고 천국을 살아간 선조들이 있었다. 순교자 이영희 막달레나도 그중 하나다. 외교인 아버지가 막달레나에게 혼인하기를 강요했다고 한다. 그녀는 동정 서원을 지키려고 몰래 집을 나와 교우였던 고모의 집으로 피신했다. 다른 여교우들과 함께 천주의 가르침 대로 살았다. 이후 박해가 일어나자 스스로 붙잡혔다.
“만일 천주님을 배반하고 우리 교를 버릴 생각이었다면 스스로 자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포장님 앞에서 제가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내일은 저렇게 말하겠습니까? 저의 결심은 변함이 없으니 나라 법대로 죽여주십시오.”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동정을 서원한 성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님의 나라를 선택했다. 동정과 순교의 월계관을 함께 얻은 것이다. 성녀의 동정과 순교는 나에게 강한 영감을 주었다.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기억하고, 그분과 멀어지게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박해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옛날같이 강렬하지는 않지만, 성녀들의 모범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동정과 순교의 영예를 소박하게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향기로운 백합 들고 서 있는 성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미사에 참여하였다. 이곳은 동정 순교자 이영희 막달레나가 순교한 곳이다. 지하에 있는 성당과 기념관에서 지상의 야외 공간으로 올라오면 주민 쉼터 공간과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이 있다. 둥근 성체 모양의 돌 위에 새겨진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 5,6)이라는 말씀이 잔잔한 감동과 함께 우리들의 나약한 마음을 위로해준다. 그 뒤로 이영희 막달레나 성녀가 맑디맑은 얼굴로 두 손에 동정을 상징하는 향기로운 백합을 들고 영원한 빛을 향하여 서 계신다.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7.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
‘으뜸 사도’ 베드로 성인 닮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
- 윤영선 작 ‘성 베르뇌 시메온’
출 생 1814년 프랑스 르망(Le Mans)
순 교 1866년(52세) 새남터 / 군문효수
신 분 주교 (제4대 조선대목구장)
한국이름 장경일(張敬一)
사도의 후예인 조선 주교 탄생
2월 22일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 베드로를 으뜸 사도로 세우셨다는 것과, 그와 그 후계자인 교황에게 세상 구원을 위한 교회의 최고 권위도 계승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도좌’는 곧 교황의 자리이고, 교황님을 이르기도 한다. 이날뿐 아니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이나 교황 주일, 여러 기도 끝에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것은 지상에 맡겨진 으뜸 사도의 소명이 얼마나 크고 힘겨운 지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성 베드로의 ‘사도좌’처럼 사도들의 후계자에게 계승된 우리네 ‘주교좌’ 역시 인류 구원을 위한 힘겹고도 영예로운 소명이다. 우리나라는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처음으로 사도의 후예인 조선 주교가 탄생했다. 박해받던 조선에는 1898년 명동에 성당이 세워지기까지 사도적 권위의 상징인 ‘주교좌’가 없었다. 하지만 ‘주교좌’의 거룩한 권한이 끊긴 적은 없었다. 순교하거나 지쳐 쓰러질지언정 백성의 구원을 위한 봉사의 권한을 포기하지 않았다.
10년간 한국인 영혼 구원에 헌신
첫 주교좌 명동대성당 미사에 참여했다. 성당 안 ‘주교좌’를 보며 베르뇌 성인을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에 온 목적은 오로지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그가 감옥에서 한 고백 때문이다. 2000년을 이어온 사도의 소명이 다시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10년 동안 조선의 주교로 이 땅을 샅샅이 누볐다. 주교는 화려한 제의 대신 거친 상복을 입었다. 모관 대신 방갓을, 목장 대신 죽장을 들고 수십 수백의 공소와 교우를 찾아 잠든 영혼을 일깨웠다. 사도의 후예 베르뇌에게 구원의 소명이 실현되는 조선의 영토는 이미 당신의 ‘주교좌’가 아니었을까.
베드로 사도처럼 당당하게 순교
베르뇌 주교는 한강 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형장으로 향하던 그는 “우리가 조선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사도의 소명이 완성되고 있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바랐던 으뜸 사도 베드로를 사도 베르뇌 역시 닮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바라던 대로 ‘다행히’ 조선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의 발걸음이 이 땅을 생동하는 주교좌가 되게 했듯이 그의 피가 대한민국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었다. 성인은 오늘도 수많은 양 떼를 위해 당신의 주교좌인 이 땅에 착좌하고 계신다.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8. 성 손자선 토마스
감옥에서도 주님 수난에 동참하고 부활 전날에 순교
- 윤영선 작 ‘성 손자선 토마스’
출 생 1839년 충청남도 당진시 신리
순 교 1866년(27세) 공주옥 / 교수
신 분 농부
사순 시기 희생과 극기는 거룩한 전통
사순 시기이다. 교회의 아주 오랜 전통은 사순 시기 참회와 보속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를 갈망해왔다. 성실한 신앙인들 중에는 좋아하는 취미나 기호품을 절제하며 사순 시기의 보속과 참회의 의미를 되새기는 이들도 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주님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삼가고 가난한 이웃에게 애긍을 실천했다. 빈궁한 처지에 초라한 끼니마저 아껴가며 단식을 했다. 사순 시기의 희생과 극기는 우리 신앙의 오래된 유산이고 거룩한 전통이다. 박해에 쫓겨 은신해 있거나 심지어 옥에 갇힌 몸으로도 교우들은 단식과 희생으로 보속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사순 날짜 헤아려가며 감옥에서 단식
성 손자선 토마스에게 병인년 사순 시기는 때와 장소의 구분 없이 순결한 보속의 현장이었다. 충청도 내포의 신리에서 태어난 손자선은 이미 3대째 천주교 신자였다. 다블뤼 주교를 비롯하여 여러 선교사들이 전교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도 그의 집이었다. 1866년, 손자선은 지역의 포교에게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갖은 협박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받았다. 하루는 형리들이 자신의 얼굴에 끼얹은 오물을 보며, 천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신 쓸개와 초를 대신하는 보속과 같다고 말했단다. 주님 수난에 동참하려는, 아니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토마스의 순결한 고백이었다. 열악한 조선의 감옥에서, 혹독한 추위와 수인들의 초라한 음식은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주님께서 유혹을 받은 시련의 광야라 해도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손자선은 감옥의 누추한 음식으로조차 사순절 날짜를 헤아려가며 단식을 했단다. 1866년 부활 전날에 허락하신 그의 순교는 아마도 일생 동안 동참했던 수난에 대한 천주의 응답이 아니었을까.
손자선 성인 기념하는 황새바위성지
7년 전에 방문했던 공주 황새바위성지를 다시 찾았다. 황새바위성지는 손자선을 기념한다. 첫 방문 이후로 지금도 그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뭐랄까, 애잔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교우들의 공개 처형을 보기 위하여 흰옷을 입은 구경꾼들이 옛 모습을 간직한 공산성의 언저리에 둘러선 게 생생하게 상상되었다. 옛날 제민천에 흐르던 핏빛의 고운 냇물도 오늘의 맑은 하늘과 어우러져 천변을 걷는 내내 가슴 속에서 교차되었다. 가파른 계단 하나하나를 오를 때마다 성인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때마침 봉헌된 야외 미사에는 각지에서 온 신자들이 마당을 가득 채웠다.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거행되는 야외 미사다. 코로나는 모두를 외롭게 만든 시련의 광야이자 사순 시기 보속이라고 해도 좋겠다. 한태호(미카엘, 대전교구 황새바위성지 담당) 신부님과 신자들 모두 환희에 가득 찬 모습은 긴 광야와 보속의 시기를 이겨낸 영광 같았다. 제대 위로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수난의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부활의 기쁨으로 환하게 웃고 계신다.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9. 성 전장운 요한
배신의 길에서 돌아선 전장운, 교회 서적 출판하다 순교
- 윤영선 작 ‘성 전장운 요한’
출 생 1811년 서울
순 교 1866년(55세) 서소문 밖 / 참수
신 분 상인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우리는 인간적인 나약함에 굴복하여 끊임없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엇길로 나갔다가 되돌아가는 일도 다반사다. 오류가 크면 클수록 지나간 삶의 자취를 성찰하게 하는 사순 시기가 고마운 이유이다. 사순 주간에 복음은 ‘회개’를 선포한다.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주어진 숙명적 굴레가 아무리 단단해도 ‘회개’가 선사하는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극심한 고문으로 넘어졌다가 신앙 되찾아
‘회개’는 헬라어 신약 성경에 기록된 ‘메타노에오(μετανοω)’라는 단어의 번역이다. 본래 뜻은 ‘뒤에(후에) 깨닫다’라고 한다. 잘못을 깨닫고 개선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새롭게 각성해 마음을 바꿔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다는 ‘회심(悔心)’의 의미가 훨씬 강하다. 진정한 회개란 생각과 마음에서 비롯된 전인격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전향적 삶의 태도를 묵상하면서 전장운 요한을 기억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오류를 바로잡은 신앙,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배신의 길에서 돌아선 그의 ‘메타노에오’ 때문이다.
전장운은 1839(기해)년 박해 때 체포된 적이 있다. 극심한 고문에 못 이겨 천주를 저버리고 이른바 배교자가 되었다. 고통을 못 이겨 넘어졌다고 하나, 그게 평범한 우리의 나약함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그가 천주께 돌아온 계기는 첫 사제 김대건과의 만남이었다. 1846년 김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신앙의 활력을 되찾았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는 말씀처럼 큰 오류는 깊은 참회와 더불어 은총으로 맺어지기 마련이다. 참회자의 진실한 삶은 베르뇌 주교로 하여금 교회 일을 맡기도록 인도되었다. 교회 서적을 출판하는 사명이 전장운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 거룩한 소명에 생명을 바쳤다.
“내가 어디에 간다 하더라도 천주님이 부르시면 나는 체포될 것입니다. … 그러나 여기에는 교우들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귀중한 물건들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 ‘목판’이 교회에 매우 유익하다고 믿기에 어떠한 불행이 닥친다 하더라도 달게 받으며 여기를 지키렵니다.”
병인박해 때 ‘목판’ 지키다 순교의 월계관
회개한 전장운의 삶은 교우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고, 진정한 신자로 거듭난 배교자에게 마침내 1866(병인)년 박해 때 순교의 월계관으로 화답되었다.
성인을 만나러 서울 중림동약현성당 옆에 있는 가톨릭출판사에 갔다. 이곳은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출판사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이 목숨과 바꾼 소명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 건물 위로 전장운 요한 성인이 지켜낸 ‘성교요리문답’ 목판을 들고 계신다. 그의 손으로 엮어진 지혜와 진리의 말씀이 가릴 수 없는 밝은 빛처럼 세상천지로 뻗어 나가고 있다.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10. 성 황석두 루카
성 황석두 “지상의 과거 대신 천상(天上)의 과거에 급제하겠다”
- 윤영선 작 ‘성 황석두 루카’
출 생 1813년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
순 교 1866년(53세) 갈매못 / 군문효수
신 분 회장
1866년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
주님 수난 성금요일은 주님 부활 대축일 직전의 금요일이다.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이다. 이날은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하신 주님의 십자가 무게를 다시금 묵상하게 된다. 박해 중의 교회는 어쩌면 매일이 수난절이고 일상이 골고타였다. 신앙 선조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살기도 죽기도 했다. 그들은 기왕에 따라나선 십자가의 길에서 죽음마저 예수님을 닮고자 했다. 마침내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우리 주님처럼 순교하게 해달라는 그들의 염원이 이루어졌다. 십자가 위 주님께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하신 초대의 말씀이 장엄한 순교로 화답된 것이다.
다블뤼 주교 순교길에 끝까지 동행
성 황석두 루카는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남짓에 과거를 보러 갔다가 돌아와서는 지상의 과거 대신 천상(天上)의 과거에 급제하겠다고 선언했다. 대노한 부친이 작두까지 들이대며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성인은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벙어리처럼 지내며 모진 핍박을 견디어 냈다. 말없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처럼 성인의 침묵은 소리 없는 외침이자 복음 선포였다. 결국 부친과 가족들까지 모두 입교하였기 때문이다.
시련을 영광으로 바꾼 황 루카는 전교 회장이 되어 전국을 다니며 선교 사제들을 도왔다. 사제들의 손과 발이 되고, 얼굴과 입이 되어 그들의 선포가 빛을 발휘할 수 있도록 소명을 다하였다. 1866년 사순 시기, 이미 체포된 다블뤼 주교는 황 루카에게 피신을 권하였다. 하지만 ‘황 루카는 떠나기를 거절하고, 자기의 스승인 동시에 아버지인 분을 따라가겠노라’(달레, 「한국천주교회사」下, 429쪽) 선언하며 주교님의 순교길에 끝까지 동행했다. 하느님 나라까지 회장의 소명을 다한 것이다.
하느님 사랑을 향한 황소 같은 열정
눈 덮인 겨울, 성인의 고향인 충북 괴산의 연풍성지에 도착하였다. 너른 대지에 산을 병풍처럼 두른 연풍은 재 너머 펼쳐지는 일출과 일몰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었다. 올 때마다 정갈하고 좋은 분위기인데 눈 쌓인 연풍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성인의 묘소를 참배하고 갈매못에서 함께 순교하신 성인들의 성상도 만났다. 성모님 앞에서는 초에 불을 켜면서 간절한 기도를 담았다. 그리고 미사 중에 가족과 이웃을 기억했다. 그리스도와 그를 닮은 순교자와 우리 자신을 떠올리며,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어느 사제의 말씀처럼 더 사랑하지 못했음을 뉘우쳤다.
미사를 마치고 성전을 나서니 황석두 루카 성인이 오로지 하느님 사랑을 향한 황소 같은 고집과 열정으로 우뚝 서 계신다. “아 성인이시여 올바른 일(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당신만큼 온전히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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