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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읽는 단편 교리] 거룩하시도다(Sanctus)
미사 중 감사송(Praefatio)이 끝나면 ‘거룩하시도다’(Sanctus)가 이어집니다. 라틴어 원문의 첫 단어를 따라서 [상투스]라 불리는 이 노래는 공동체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환호송입니다. 거룩하시도다는 감사송의 후반부(“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와 감사기도의 시작 부분(연결기도)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특히, 감사기도 제2, 제3, 제4 양식은 “거룩하신 아버지”라는 말로 시작되기에, 이점이 더욱 부각됩니다.
거룩하시도다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
후반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거룩하시도다의 전반부는 이사야의 소명 환시에서 사랍 천사들이 부른 노래에 기원을 둡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이사 6,3). 거룩함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반복하여 강조하는 하느님의 대표적 본성입니다. 세 번의 반복은 거룩함의 최상급을 나타내며 점차 그 강도를 높이는 표현법입니다. “호산나”는 아람어로서 직역하면 ‘도움을 주십시오.’라는 의미인데, 일반적으로는 크게 기뻐하며 바치는 공동체의 외침이었습니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하신 구원 업적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환호입니다.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짧습니다. 이 부분은 시편 118,26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와 루카 19,38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영광,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을 따온 것입니다.
거룩하시도다는 그 위치나 내용으로 보아 공동체 전체가 함께 부르는 성가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동방교회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방교회에서는 16세기 이후 다성 음악이 발전하면서 성가대 또는 사제만의 몫이 된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전반부는 감사송에 이어 불렀으나, 후반부는 성체성혈 축성 이후 불렀습니다. 그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과거의 전통으로 돌아가 공동체 전체가 함께 부르는 성가로 회복되었습니다. 「미사 경본 총지침」은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회중 전체가 하늘의 천사들과 성인들과 일치하여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한다”(79항ㄴ).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6) 인류의 빛, 「교회헌장」의 이름
지금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의 형성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공의회는 제4회기를 마치면서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그리고 3개의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공의회의 문헌이 헌장, 교령, 선언으로 구분되는 것은, 문헌의 중요성 곧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문헌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을 ‘헌장’(Constitutio)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국가로 치면 ‘헌법’에 해당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발표한 4개의 헌장은 「전례헌장」 「교회헌장」 「계시헌장」 「사목헌장」입니다. 따라서 「교회헌장」을 공부하고 있는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 중에서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고, 앞으로 ‘전례’와 ‘계시’ 그리고 ‘사목’에 관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나누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의 원래 제목은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입니다. 제목 앞부분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은 일종의 부제(副題)인데, 여기서 “교의”(敎義)란 라틴어 [도그마] (Dogma)를 번역한 것으로 성경(聖經)과 성전(聖傳)에 기초를 둔 ‘믿을 교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신자들이 믿도록 가르치는 교리를 가리킵니다.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이 가르침이 ‘믿을 교리’ 곧 ‘교의’임을 ‘헌장’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제목 뒷부분에 “인류의 빛”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헌장」의 원제목으로서,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의 이름이 「인류의 빛」이란 것입니다. 이는 교회 문헌의 이름을 본문의 첫 두 단어로 정하는 교회의 관습에 따라, 「교회헌장」 본문 처음에 나오는 두 단어 ‘인류의 빛’(Lumen빛 Gentium인류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헌장을 「인류의 빛」, 라틴어로는 「루멘 젠시움」이라고 부릅니다. 약어는 첫 두 글자를 따서 LG로 표기합니다. 이 모든 표현이 지금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의 이름이니, 교회 서적을 읽을 때 어떤 것이 사용되더라도 모두 「교회헌장」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면 지금까지 공의회에 관한 이야기에 상당히 많은 외국어, 특히 라틴어가 나와서 어려움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요즘 많이 듣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가리키는 용어인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도 라틴어입니다. 모든 외국어를 한글로 잘 번역하면 좋겠지만 어떤 경우는 번역(飜譯)이 반역(反譯)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번역이 어려운 교회 용어에 대해서는 뜻을 충분히 새기면서 직접 외국어로도 익혀보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아멘’이나 ‘알렐루야’처럼 말입니다.
[교회사에서 희년을 보다] 교황 보니파시오 9세와 마르티노 5세의 희년
1400년의 희년은 교황 보니파시오 9세 재임 중 두 번째로 거행된 희년으로, 서방 교회의 대분열(1378-1417년)이라는 혼란 속에서 기념되었습니다. 1400년이 다가올 때 아씨시에 있던 보니파시오 9세는 이미 1390년에 희년이 거행되었음을 고려하며, 로마 시민들이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하기 전까지는 1400년에 희년을 기념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교황이 1400년의 희년에 대해 공식적으로 칙서를 공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게다가 아비뇽과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한 프랑스 국왕은 프랑스인들이 로마로 순례를 떠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순례자가 로마를 찾았고, 이들 중 대부분은 프랑스 교황주의자들(Ultramontani)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순례길은 중부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에서 발생한 전염병과 강도들의 극심한 만행으로 인해 방해를 받았습니다. 또한 전염병에 대한 공포로 ‘백의(白衣)의 참회자들’이 흰색 옷을 입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자비(misericordia eterno Dio)”를 외치며(Laudi de’Bianchi), 이탈리아 도시들을 행렬했습니다. 이는 흑사병 시대의 편타고행(鞭打苦行)을 연상케 했으며, 이러한 행렬이 우려스러운 결과를 초래하자, 교황은 이를 금지했습니다.
그 후, 서방 교회의 대분열을 종식한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에서 선출된 교황 마르티노 5세(1417-1431년)가 1425년에 희년을 기념했습니다. 이는 대분열 이후 통합된 로마 교회에서 처음으로 열린 희년으로, 우르바노 6세 교황의 결정에 의해 1390년을 시작으로 한 33년 주기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주기에 따르면 1423년에 희년이 열려야 했지만, 1425년에 기념된 것은 준비 기간의 필요성이나 일정 조정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희년에도 수많은 순례자가 로마를 방문했으며, 교황사를 집필한 루드비히 폰 파스토르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포조 브라치올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년)는 당시를 회고하며, ‘야만인들’이라 불렸던 비(非)이탈리아인 순례자들이 로마를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 채웠다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425년 희년은 상징적으로도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라테라노 성 요한 대성당에서 “거룩한 문(Porta Sancta)”을 여는 예식이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며, 이는 이후 희년의 주요 의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의식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교회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을 상징하며 전대사를 얻게 합니다. 벽으로 막혀 있던 성문을 열 때 무너진 벽돌을 순례자들이 신성한 유물로 여겨 집으로 가져갈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교회의 언어] Abstinentia(압스티넨시아)
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우리들은 절제와 희생으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합니다. 대표적 절제로는 단식과 금육을 실천합니다. ‘절제’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는 “Abstinentia”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반대를 의미하는 “abs”와 ‘잡다’, ‘소유하다’를 뜻하는 “tenere”가 합쳐져 생겨난 말입니다. 따라서 금육이나 단식과 같은 절제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붙잡고 있는 것을 내어놓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단식이나 금육을 실천하며 아끼게 된 것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놓게 될 때, 비로소 절제의 참된 의미가 실현됩니다. 주님의 희생과 수난의 의미가 고통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사랑에까지 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가 지내게 되는 사순절은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사랑의 시간입니다. 사순 시기에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자발적 절제(Abstinentia)가 사랑으로 마무리되어 완성에 이르기를 희망합니다.
[“저 여인은 누구실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저희 본당은 미사 전에 항상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고 함께 기도하면 다들 마음이 차분해지고 시선이 주님께 맞춰집니다. 어르신들은 나지막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기도하시는데 주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학생 미사 전 묵주기도 드리는 어린이들의 목소리도 낭랑하기 그지없습니다. 입을 오물거리며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하는 모습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참 예쁘기도 합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면 교우분들이 아주 경건하게 미사에 참여합니다. 미사 주례자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면 미사 드리는 정성이 훨씬 더해집니다. 성모님께서 이렇게 우리들의 마음을 모아 주시는구나, ‘은총이 가득하신 분’께서 우리들의 마음에도 은총이 가득하도록 인도해 주시는구나,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분’은 성모님을 부를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호칭 가운데 하나입니다. 묵주기도를 드리면 하루에도 수십 번 성모님을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하고 성모송을 시작하니 “은총이 가득하신” 이 낱말을 수식어로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루카 복음 1장 28절에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님께 드린 호칭으로 사용된 용어입니다. 가브리엘은 성모님을 찾아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하며 인사했습니다. 희랍어 원문은 “카이레, 케카리토메네”(Chaíre, Kecharitōménē)입니다. 희랍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카이레”(기뻐하십시오) 하고 인사했고, 그다음 호칭을 불렀습니다. 가브리엘 또한 성모님께 “카이레” 하고 인사하며 성모님을 “케카리토메네”(은총이 가득하신 분) 하고 부르는 겁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은총이 가득하신 분’
천사는 성모님을 왜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했을까요?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바로 이 때문입니다. 천사는 계속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 “총애”라고 하니 다른 말인가 싶지만, ‘은총’(chárin)을 말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분’인 까닭은 주님께서 함께 계신,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을 배경으로 천사의 인사말을 살펴보면 더 깊고 풍요로운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씌었는데, 기원전 3세기 희랍어 번역본이 나왔고, 여기 “카이레”가 몇 차례 등장합니다.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 3,14);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요엘 2,22);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즈카 9,9). 예언자들은 “카이레” 하고 외치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고, 주님께서 오시어 환난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실 거라고 위로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하는 천사의 찬송을 전하면서 구약의 예언이 성모님에게서 실현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마리아는 개인의 자격이 아니라 “딸 시온”의 자격으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모님은 하느님 백성을 위해 주님을 맞이하는 분, 하느님 백성에게 주님을 전하는 분, 하느님 백성이 주님을 맞이하도록 돌보는 분이 되었습니다.
성모송 전반부는 천사의 찬송과 엘리사벳의 찬송으로 이루어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하며 기도하는 성모송의 앞부분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는 천사의 찬송 그대로입니다. 성모송을 바치는 이는 가브리엘 천사의 찬송을 기억하는 동시에 천사와 함께 성모님을 찬송하는 겁니다. 성모송의 다음 구절은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입니다. 이 구절은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이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하며 성모님을 찬송한 데서 유래합니다.
성모님은 당신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받아들인 후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엘리사벳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루카 1,39) 길을 떠났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엘리사벳은 하느님 아드님께서 성모님 태중에 현존하심을 알아보며 성모님을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십니다.” 하며 찬송했습니다. 엘리사벳의 찬송은 그대로 성모송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렇듯 성모송의 전반부는 천사의 찬송과 엘리사벳의 찬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모송을 드릴 때 천사의 찬송과 엘리사벳의 찬송을 떠올리며 기도하면 성모송이 숨을 쉽니다. 천사와 함께 또 엘리사벳과 함께 성모님을 ‘은총이 가득하신 분’, ‘여인 중에 복되신’ 분으로 찬송하면 성모송을 더욱 생생하게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어 성모송은 구절을 엇갈리게 편성하여 천사의 찬송과 엘리사벳의 찬송이라는 본래 면모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이렇게 연결하고 숨을 들이마셔야 천사와 함께 찬송하는 건데,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고 나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하며 천사의 찬송 뒷 구절과 엘리사벳의 찬송 앞 구절을 합쳐 버리니, 기도문의 의미는 통한다고 하더라도, 본래 찬송의 면모가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 대부분 언어권에서는 성경의 증언을 충실히 따라 천사의 찬송과 엘리사벳의 찬송을 구별하며 성모송을 바칩니다.
한국어 성모송을 바칠 때 너무나 오랫동안 두 찬송을 섞어 기도하다 보니, 찬송의 고유한 역동성이 퇴색되어 그냥 뜻만 통하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장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조금씩 변화를 시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당의 신자 재교육을 통해 성모송을 어떻게 바쳐야 하는지 교우분들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함께 기도하며 몇 차례 교정해 나가니 금방 찬송의 면모를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천사가 성모님을 찬송하는 모습,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찬송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찬송을 이어가면, 성모송은 생생하고도 입체적인 기도가 됩니다.
주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분’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니 우리도 정성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을 찬송합니다.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가톨릭 교리] 그리스도인 행복의 길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세계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첫 문장으로 손꼽히는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의 시작입니다. 이 대목은 해석에 따라 다양한 함의가 있지만, 제 생각엔 행복하기 위해 우리가 지닌 조건들이 모두 평균값 이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건강, 재산, 현재와 미래, 가족과 자신이 맡은 일 등의 조건들이 모두 평균 이상일 때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는 말 같습니다.
반대로 거의 모든 것을 갖췄지만 단 한 가지라도 결정적 문제가 있다면 인간은 행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풍요로울지라도 갖지 못한 한 가지가 큰 고통을 준다”(괴테, 「파우스트」 제2부 5막).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고통을 느끼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다른 무언가를 갈구하게 됩니다.
삶은 행복하기도, 유지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삶은 고해(苦海)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거나 만만하지 않음을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인생에서 고통을 줄이고, 행복 가득한 삶은 가능할까요?
‘석복’(惜福), 이 단어는 ‘복을 아낀다’라는 뜻입니다. 즉 행복을 발견하고 누리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깨달아서, 절제하고 검박하게 삶으로써 일상의.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일상의 신비 안에 하느님 은총이 가득함을 깨닫고, 이 신비를 향유할 수 있다는 그리스도교 가르침과 상통합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잘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을 잘 보고, 잘 듣고, 잘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빛은 여전히 빛나는데, 신비롭게도 어둠도 여전히 짙습니다. 인간 삶 안에는 매일 낮과 밤, 빛과 어둠이 공존합니다.
행복을 밝게 보여주는 빛, 즉 ‘말씀’(Verbum)이라는 빛은 침묵 중에 고요해야만 들을 수 있고,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주변이 어두워야 더 잘 보입니다.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미사 드리면, 세상은 너무나 평온하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꽃이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을 알지만, 자주 인내하고 포기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 삶은 때로 버겁습니다. 석복, 즉 고달픈 일상과 현실에서 우리 각자 의미를 찾고 발견한다면, 행복(行福)을 통해 행복(幸福)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의미를 끄집어내고, 거기서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살아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날 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우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시편 89,10 공동번역). ‘날 수 셀 줄 알아야’ 인간은 지혜와 슬기를 얻는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날 수 센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젊고 힘 있고 즐거울 때 사람들은 하느님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별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날과 앞으로 남은 날을 헤아린다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나에게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삶은 앞으로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뒤쪽으로 가는 것이고, 보통은 이를 죽음 앞에서 깨닫게 됩니다. 누구나 생로병사를 겪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죽음이 가까우면 인간은 철이 들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지고,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삶의 목적은 결국 죽음입니다. 결국엔 다 죽기 마련입니다. 동시에 죽음의 의미는 삶입니다. 삶 없이는 죽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날 수 셀 줄 아는 것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는 것입니다. 날 수 셀 줄 아는 사람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기쁘고 성실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작고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않고, 작은 손해에 맘 상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 하느님이 누구신지 깨달을 수 있기에, 지금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삶의 길은 가깝고도 멀게 느껴집니다. 어떤 때에 행복하다고 느끼는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두 가지 행복한 상황이 있습니다. 첫째, 거의 모든 사람은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을 먹을 때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분위기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둘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할 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한다면, 우리 역시 눈물 나게 행복할 것입니다. 자식을 둔 부모님은 쉽게 공감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도 그러시지 않을까요?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게 산다면, 우리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웃으면서 하느님께 기도하며 희망한다면, 하느님께서 행복해하시지 않을까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탁하여 얻는 평화가 참된 평화
이탈리아 아씨시의 산타 마리아 성당 광장에는 ‘Pax et Bonum’(평화와 행복)이라 적혀 있습니다. 아마도 평화와 행복은 함께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평화를 통한 행복, 행복을 통한 평화! 행복을 가져다주는 평화란 무엇일까요? Pax, pace, peace,... 이 단어의 라틴어 동사형은 pacificare 입니다. ‘pacificare’의 대표적인 뜻은 ‘평정하다’입니다. 즉, Pax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평화란 본래 남을 정복해서, 상대방을 굴복시켜 얻는 것입니다. Pax Romana, Pax Americana 등의 예처럼 힘에 의한 평화가 바로 Pax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평화(Pax)란 절대자에게, 즉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 순종하여 얻는 평화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탁하여 얻는 평화가 참된 평화입니다. 믿는 이에게 행복의 길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진리이신 예수님께 순응하는 것이 평화의 지름길이고, 행복한 삶의 과정이고 핵심이며 결론입니다.
Dona nobis pacem!(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구역반장 월례연수] 그 얼굴에서 그리스도가 빛나는 교회
‘교회’하면 맨 먼저 어떤 단어가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맨 먼저 떠올리는 말은 ‘하느님’, 다시 말해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생겨난 것도, 교
회의 사명도, 그리고 교회가 향하는 목표도 모두 삼위일체 하느님 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던 하느님께서는(히브 1,1-2 참조), 마지막 시대에는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이 아드님은 우리 가운데에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말씀과 행적, 당신 자신의 현존을 통해 하느님을 알려주셨으며, 결정적으로는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성부께 청하여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심으로써, 당신의 말씀과 행적,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속에 드러난 구원의 진리를 이해하고 또 그것을 선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그들 간의 일치 안에서 종말에 있을 구원의 충만함을 향해 걸어갑니다. 이 제자들의 공동체가 곧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로 인해 생겨났고 살고 있으며, 또한 궁극적으로는 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며 인간 역사 안에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자 공동체가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특히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교회헌장」 9항)
하느님이 인간을 개별적으로 구원하려고 하지 않고 서로 연결된 백성으로 구원하기를 원하셨다는 이 말씀은 구원의 길은 ‘나 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구원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없는 구원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을 불러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 또 하느님을 거룩하게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4,6 참조). 교회는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그런데 복음 선포는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은 사실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그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는 필립보의 요청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으로서, 우리와 함께 사셨으며(요한 1,14 참조),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고, 당신을 ‘보고, 듣고, 만져볼 수 있게’(1요한 1,1-3 참조) 하심으로써 하느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1,1-2)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도 사람들이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즉, 말과 삶을 통한 증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여주고, 들려주고, 체험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과 누리는 친교, 우리 사이의 친교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1요한 1,3)이것을 가리켜 「교회헌장」은 교회가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요 도구”, 한 마디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교회헌장」 1항)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교회가 7성사와 같은 그런 성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방식인 성사를 통해 주어지는 것처럼, 교회는 구원의 진리, 친교를 사람들이 보고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 ‘표징’이요, 이로써 다른 사람들을 이 친교로 초대한다는 의미에서 ‘도구’이며, 이를 ‘성사와 같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할 것은, 교회 자신이나 개인의 무엇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보았을 때, 또는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수도자이든, 교회의 어떤 구성원을 보았을 때, 그 얼굴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모든 사람을 비추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교회헌장」 1항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