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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4-8 그들이
본문에서 모세는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 명령을 들은 야곱의 자손들과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이방 신상들과 그들의 보물들을 야곱에게 내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것들을 땅에 묻고 출발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므로 두려움 없이 벧엘에 도착하였다고 말합니다
1. 본문 4절은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입니다.
1) 이 때에 성자 야곱께서는 자기 집을 적당히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식구는 자기들이 소유한 우상을 버림으로써 야곱이 내린 명령에 신속히 따랐습니다. 그의 식솔들도 모두 자기들이 처한 위험한 상황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라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한편 미신이 얼마나 끈덕지고 패역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만약 평화롭고 즐거운 상황에서 야곱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면 적지 않은 가족이 자기 우상을 숨기고 야곱을 속였을 것입니다. 아마 더러는 우상을 내어놓는 일을 완강히 거부하는 자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그들에게 우상과 결별을 촉구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준비된 마음으로 신속하게 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대해 그들에게 설교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려 했을 것입니다. 야곱이 그들에게 ‘자신을 결정케 하라’고 명령할 때에 마치 ‘너희는 지금까지 여호와 앞에서 자신을 더럽혀 왔다. 이제 주께서 우리를 이토록 자비로우신 성품으로 돌아보시니 그분께서 다시 그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이키지 않으시도록 이 더러움을 씻어내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우상들을 산산조각으로 내어 불에 태우지 않고 상수리 나무 아래 묻는다는 것은 불합리하게 보입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불살라 가루로 만들었습니다(출32:20). 히스기야는 놋뱀을 파쇄 해 버렸습니다(왕하18:4). 또 이 같은 사실들이 기록된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야곱은 미래에 대한 선견지명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의 약점이 지적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마 그에게서 슬기나 용기를 어느 정도 박탈하였을 것입니다. 이로써 야곱이 이전에 지나치게 묵인하고 강인성을 결여한데 대해 벌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행한 순종을 용납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순종에 결점이 다소 남아 있었지만 자기 가족에게서 우상을 제거하고 우상을 혐오한다는 표시로 그것들을 땅에 묻으려는 것이 성자의 의도였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귀걸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당시에 미신과 관련된 표식물이었습니다.
2) 본 절을 다시 요약 정리하겠습니다.
야곱의 말을 들은 그의 모든 가족들은 즉시 순종하여 “모든 이방 신상”과 “귀고리”를 야곱에게 주어서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 버리도록 하였습니다. 귀고리는 그 당시에 점치는 것 같은 미신적 행위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회개에 있어서 이렇게 보물도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 던졌습니다. 행19:19-20절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서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는 말씀과 같습니다.
2. 본문 5절은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입니다.
1) 여기서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신 구원이 헛된 약속이 아니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무수한 적들의 칼 사이로 야곱은 안전하게 나아갑니다. 또 방해받지 않고 진행합니다. 세겜인의 멸망으로 인근 모든 민족들은 야곱의 가족에게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복수하려고 나서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를 모세가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에 눌려서 그들은 격렬한 공격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원래 약한 자에게서도 강인한 성격을 불러일으키실 수 있으십니다. 또 그분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무쇠같이 단단한 자의 마음도 부드럽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때때로 많은 자들이 교만한 거품을 쌓아올리도록 허용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 권능으로 그들의 교만을 대적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종종 사자처럼 담대한 자들을 두려움으로 약하게 만드십니다. 야곱을 백 번이라도 능히 삼킬 수 있었던 거인들이 공포에 질려서 혼비백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 맹렬히 날뛰는 악인을 볼 때마다 우리는 불안과 절망에 떨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이런 두려움을 상기해야 합니다. 온 세상의 분노가 맹렬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두려움 앞에서는 쉽사리 진압되기 때문입니다.
2) 그러니까 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택한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특별하신 방식으로 간섭하시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하시어서 공포심을 가지게도 하십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큰 실수는(34장), 당장 세겜성과 주변 사람들의 해를 받을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회개하고 자기를 섬기려는 자들을 특별히 붙들어 주십니다.
3. 본문 6절은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자들은 이제 벧엘에 이르렀습니다.
모세는 이미 1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고 준행 한 것처럼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 기록된 대로 야곱은 그곳으로 올라가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면서 올라가야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어떤 분의 면전에서 거하며 보호하심과 위로와 격려를 받았는지를 알고서 이 모든 일들을 준행 한 것입니다. 또 벧엘에서 그와 함께 한 모든 권속들과 함께 단을 쌓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자기가 속한 교회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얼마나 거룩하고 복된 일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일생동안 자기와 또 함께 한 권속들이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 또 이런일들이 자기에게 해당되는 일이요 또 모든 권속들에게 해당되는 일로 알았습니다(3)
그래서 야곱은 자기 권속들에게 “버릴 것은 함께 버리자 취할 것은 함께 취하자”하였습니다 “함께 올라가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벧엘로 함께 가자. 바로 그곳에서 함께 단을 쌓자. 그리고 거기서 함께 예배하자” 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것이 국보급의 유물이든지, 가보로 취급될 수 있는 보물이든지, 개인의 귀중품이든지 모든 것을 야곱에게 내어놓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온 권속들이 심령에서부터 생활 모든 여건에 이르기까지 성결케 하고 벧엘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4).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가장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방식으로 임재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으로써 사면 고을들로 두려워하게 하심으로써 친히 야곱 일행에게 안전보장이 되셨습니다(5). 이렇게 해서 마침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6). 한 사람도 유실되거나 낙오자가 없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4. 본문 7절은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입니다.
거룩한 조상들이 가는 곳마다 타 민족들 제단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단을 쌓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여러 신들을 예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세계는 어디를 가나 잡다한 신을 섬기는 관습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룩한 열조들은 특별한 신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제단 건립으로 나타냈습니다. 물론 살아 계신 하나님은 마음으로 예배되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밖으로 드러내는 고백행위는 신앙과 떼어놓을 수 없는 동반자입니다. 더욱이 모든 사람은 외형의 보조 수단이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드리는 정신을 고취하는 일에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만약 어느 누구라도 야곱의 제단이 외형상으로는 다른 제단과 다른 점이 전혀 없다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다른 자들이 무모하고 몰지각한 열성으로 알 수 없는 신들을 위해 단을 쌓았던 것에 반해서 야곱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굳게 지켰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봉헌된 제단 이외에는 합법적 제단이 하나도 없습니다.
야곱의 예배가 훌륭한 것은 별다른 표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가 하나님 명령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시행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곳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대해서 너무 격식을 차리지 않는 듯한 감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칭은 야곱이 간직한 신앙을 칭찬해 줍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영역 안에 자신을 그대로 두기 때문에 그 칭찬은 정당합니다. 카톨릭 교도들이나 외식자들은 세속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겸비한 체 하면서 그 겸비에 대한 칭찬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극히 타락된 겸비입니다. 때문에 불신자들보다 더 엄중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신앙은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범위 이상으로 알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칭찬 받을 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오실 때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낮추십니다. 또 우리와 함께 말을 더듬거리시듯 우리가 그분과 함께 말을 더듬는 것도 허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모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수용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키시듯이 그분께서 친히 내신 그 방법대로 하는 것이 참으로 지혜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예리한 논란을 벌이지 않고 자기가 받은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자기에게 친숙한 분으로 표현합니다. 그는 자기 의식을 계시에 맞추기 때문에 이런 어눌한 표현과 소박성도 하나님께 열납됩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보다 분명한 광채를 발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 가운데에서 양육하는 아버지 성격을 가지시므로 우리는 힘써 마음을 그분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내려 오시는 것은 우리를 주께로 올리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분은 우리를 하늘에서 멀리 떼어 놓으시기 위해 세상 방법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친히 가까이 오셔서 말씀하시는 그 수단으로 우리를 그리로 이끌어 올리려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규칙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 제단 이름은 하나님 말씀으로 명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단 건립은 신앙의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는 설사 아무리 화려한 것을 내놓더라도 그것은 유령이나 그림자 같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카톨릭과 타락한 교회에서는 바람만 가득 찬 풍선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뒤로부터 변함 없는 신앙 행로를 보여줍니다.
5. 본문 8절은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긋이라 불렀더라” 입니다.
이것은 드보라의 죽음에 대한 짤막한 기사입니다. 우리는 드보라가 경건한 부인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야곱 가족은 그녀를 어머니처럼 존경하였습니다. 그녀의 매장지에 영원히 붙여진 이름은 굉장한 애곡과 명예로 장사된 사실을 증명합니다. 얼마 뒤에는 라헬의 죽음과 장례도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드보라에 대한 애통의 표적이 후손에게 전해졌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드보라는 모두에게 조모같이 간주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아직 그 아버지에게 도착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드보라가 일행이 되었으며, 그녀는 고령으로 장거리 여행에 적합했겠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아마도 드보라가 야곱을 길렀으므로 어려서부터 그를 사랑했고 그의 추방 이유를 알게 되자 신앙에 대한 존중심에서 그를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모세가 그처럼 괄목할 만한 찬사로 그녀의 죽음을 공연히 찬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야곱의 유모까지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4절 초두에 나타난 “그들이”라는 말의 귀중성도 알려집니다. 그리고 이런 기록은 지상에 남기신 하나님 자신의 교회 관한 말씀이라는 사실이 충분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도 야곱과 또 그와 함께 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갑니다.
또 우리는 함께 무엇을 버리며 묻어 버리고 가야할 자들입니다. 또 누구를 바라보며 동행해 주심을 바라며 나아가야 할 것인가? 를 깊이 상고해야 합니다. 어떤 생활 방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생각하며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신 하나님과 함께, 또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이 길을 가십시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