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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부흥의 역사
우리나라의 역사
1. 고조선 (기원전 2333년경 ~ 기원전 108년, 왕검성)
2. 부여 옥저 동예 삼한
3. 고구려 (기원전 37년 ~ 기원후 668년, 졸본성→국내성→평양성)
4. 백제 (기원전 18년 ~ 기원후 660년, 위례성→웅진성→사비성)
5. 신라 (기원전 57년 ~ 기원후 935년, 금성)
6. 가야 (42년 ~ 532년, 562년)
7. 발해 (698년 ~ 926년, 상경)
8. 고려 (918년 ~ 1392년, 개경)
9. 조선 (1392년 ~ 1897년, 한성)
10. 대한제국(1897년 ~ 1910, 한성)
11. 일제강점기 (1910년 ~ 1945년)
12. 미군정 (1945년 ~ 1948년)
13. 대한민국 (1948년 8월 15일 ~ 현재, 서울)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
제1장 초대 한국 교회가 처한 시대적 상황
1.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
가. 시대적 개관
기독교가 이 땅에 선교의 문을 열기 시작한 때는 조선 왕조가 외세에 못 이겨서 몰락(沒落) 과정에 있을 때였다. (1876년 강화수호조약이후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으며, 1882년 6월에는 조영수호 통상조약이 제물포에서 체결되었고, 같은해 6월에 독일과도 수호조약을 맺었고, 1884년 6월에는 러시아와 1886년에는 프랑스와 조약을 맺음으로 조선은 구미 제국에 널리 문호를 개방하였다.)
문호의 개방으로 외세에 위기의식이 짙어지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론 근대적 제도, 서양의 기술을 섭취(攝取), 채용해야겠다는 개화신조가 더욱 고조 되었다. 내부적으론 개화(開化)와 수구 두 세력이 대원군과 민비의 대립에 얽혀서 정계는 혼란을 빚어지게 되었다. 경제적으론 국가의 재정적인 궁핍이 심하였다. 그로인해 농민의 세금이 증가되므로 양반 관료에 대한 불평이 높았으며,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나. 종교적 상황
한국의 역사를 통해 한 대 전성했던 선이나 불교나 유교의 정신적 차원이 고갈되고 그 형식과 명분만으로 무게 없는 반복만 되풀이 하던, 종교적 신앙과 정신생활의 전례없는 진공기로 근대 한국은 종교적 생활에서 심한 허탈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때에 유교는 현실적인 윤리기강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종교적 국면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불교는 너무 신비주의에 흘러 한국인의 정신에서 소외되었다.
그러므로 근대 한국은 새 종교에 대한 일종의 갈망이 현상적으로 널리 펴져있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68. 1993) 내외의 관찰자들에게 한국은 비종교적인 인상을 짙게 풍기었다. 1953년 하멜(Hendrik Hamel)은 한국은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이들은 종교에 관하여 전혀 논란하지 않는다”고 평한 일이 있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69. 1993)
외형적인 종교의 부재와 함께 국내외 혼란이 곁들여 있었다. 운양호를 몰고온 일본과 1876년 2월 26일 강화 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와 같은 구미 제국과 수호 조약을 맺음으로 은둔국의 고립은 세계 무대앞에 깨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황막한 새 정세의 전개에, 기댈 곳이 없는 서러움을 안은 둣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가 선교되기 직전의 근대 한국의 모습이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70. 1993)
2. 복음의 수용
가. 선교사들의 선교이전 시대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카톨릭을 통해 들어와 있었다. 1866년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B.A)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하므로 한국 초최의 순교자가 되었다.
토마스는 북경에서 조선인 동지사(冬至使-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를 만나, 조선 내에 카톨릭의 수난을 알게 되었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 만주 주재원인 월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주선으로 1865년 9월 4일 중국 지프를 떠나 조선 서해안 자라리에 도착했다. 거기서 카톨릭 교인과 접촉을 하여 우리말 지식을 습득하면서 성서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서울에 가서 전도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작은 범선을 타고 한강을 향했지만, 심한 폭풍을 만나 구사일생로 만주 피즈우에 표류하여 북경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 갈 것을 결심하고 1866년 한국이 필요하리라는 상품을 실고, 통상 개시의 유무를 시탐하기 위하여 파견된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널 서먼호를 타고 한국을 향하였다. 이 상선이 대동강 입구에 들어서자 평안도 감사가 문정서를 보내어 온 까닭을 묻자 한국과 통상을 개시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자 감사는 크게 놀라 거절을 하였다.
그러나 이 상선은 대동강을 따라 평양시까지 올라갔다가 때마침 내린 홍수와 바닷물의 만조로 사주(沙柱)를 넘어왔다가 물이 빠지자, 배가 모래와 진흙 속에 빠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한국 병사의 포화에 배는 불타게 되었고, 토마스 목사도 다른 일행과 함께 살해 되었다.(백 낙준 한국 개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9. P48) 그러나 개척 선교사의 한 사람인 모페트(Samuel A. Moffett) 목사에 의하면 1893년 11월에 학습 교인반을 조직 할 때에, 토마스 목사에게 중국어 신약 성서를 받은 사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초기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구도자(求道者)적인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한국교회가 대부분 모르는 최초 기독교 복음 전도자
이수정 선교사
불꽃같은 믿음의 사람 이수정 선교사
조선 (1392년 ~ 1897년, 한성) 대한제국(1897년 ~ 1910, 한성)
고종황제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기독교를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기독교를 믿는자나 서양 종교를 전하는 자는 가차 없이 사형에 처 하므로 이수정 선교사도 기독교를 한국에 전하고 싶었지만 함부로 복음을 전할수 없는 시대 였으므로 문서 선교로 미국에 선교사 파송 편지를 통하여 아펜젤러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를 통하여 한국에 복음의 씨앗이 오게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도 처음부터 복음을 전할수가 없었으므로 의료선교와 교육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다가 같다, 그러다 고종황제로 부터 신뢰를 얻고부터 기독교 복음을 전할수 있게 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예수를 믿게된 동기도 아펜젤러가 배제학당을 개설하고 이승만이 예수를 알게 되었고 이승만은 한성 감옥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체험을 하고 우리나라 국민이 살길은 기독교 교육만이 장래 희망이다. 뜻을 품고 전국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전세계에서 에디오피아 다음으로 가난한 나라 문명이 전혀 들어 오지 않는 보잘것 없는 대한민국 나라 였다. 그러나 1885년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로 부터 기독교 복음이 들어 오고부터 많은 국민들이 하나님을 믿고부터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전세계 경제 10위권이 되는 축복이 되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지 불과 4년 만에 자기 나라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며, 선교사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면서 불꽃같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순교까지 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사람을 본받고 나도 그런 삶을 살도록 소망을 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다. 조선의 마게도니아인으로 불리는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이 바로 그 사람이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최초의 공식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항에 입국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은 이미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한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있었다. 선교사가 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갖고 입국하는 것은 세계 선교 역사상 한국이 유일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손에 들고 온 성경은 누가 번역한 것일까? 그 사람이 이수정이다. 이수정은 전남 곡성 출신으로 학문에 뛰어난 조선의 관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1881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이수정은 농부로 변장하고 명성황후를 충주까지 피신시켰다. 그 공로로 그는 민영익을 비롯한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1882년 10월 신사유람단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문물 탐방과 학술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이때 선진 농업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이수정은 일본의 대표 농학자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츠다센(津田仙) 박사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의 대화 도중에 츠다센 박사는 이수정에게 성경책을 보여주면서 의미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이 방에 켜진 불빛이 공자의 불빛이라면, 이 책 속에는 태양과 같이 온 누리를 밝히는 분이 계십니다”
이 말에 이수정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것이다. 츠다센에게 한문성경을 선물로 받은 이수정은 그때부터 성경을 연구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7개월 후인 1883년 4월 29일 부활절에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성경을 번역을 사명으로 알고 정진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제물포항에 들어올 때가 1885년 4월 5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수정은 세례 받은 후에 아무리 넉넉히 잡아도 불과 2년이 못되어서 마가복음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계속해서는 열정적으로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신약성경 전체 그리고 여러 가지 기독교 문서와 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믿은 지 1년도 안 되는 초신자가 미국교회에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는 간절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수정의 선교요청 편지는 미국성서공회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소개되었다. 그때 선교지를 결정을 위해 기도하던 한 신학생이 이수정의 편지를 읽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는 이수정의 편지를 자신을 조선으로 부르는 마게도니아인의 음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조선 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했고,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그를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한다. 그 청년이 바로 언더우드이다. 그래서 이수정에게 ‘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이수정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 수개월 동안 그들에게 한국어 교육도 시키기도 했다.
또한 그뿐 아니라 이수정은 동경 YMCA에 유학 온 조선 학생들에게 열정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때 이수정에게 복음을 들었던 유학생들이 후에 1919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사람들이 되었다. 이수정은 동경에 유학생들과 함께 주일학교를 개설하고 교회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동경한인교회의 시작이다.
이수정은 1886년 5월 귀국명령을 받고 귀국했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견해들이 있지만, 기독교 역사가들은 순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얼마 안되서 그가 그토록 혼신의 힘을 쏟아 번역한 한글 신약성서 전체가 출판되어 마침내 성도들의 손에 쥐어졌다.
지금도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교(同志社大學校)의 니지마조(新島襄) 기념관에 가면, 이수정의 신앙고백적인 시(詩)가 남아 있다. 이 시는 이수정이 도시샤대학의 설립자이자 목사인 니지마조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그에게 써 준 것이다. 이 싯구 속에서 이수정의 잔잔한 신앙고백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한국교회가 대부분 모르는 최초 기독교 복음 전도자
이수정 선교사 동영상
불꽃같은 믿음의 사람 이수정 선교사
한국최최 기독교 선교사 이수정 제1편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nROIuJFdE6c
한국최최 기독교 선교사 이수정 제2편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SQxsPfdzjLk
한국최최 기독교 선교사 이수정 제3편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W--qMNAfL9c
한국최최 기독교 선교사 이수정 제4편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kNcQuAIMdHw
나. 초기 선교사들의 내한
실제로 한국 최초의 선교사는 북미 장로교의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라는 의사였다. 알렌은 갑신정변 우정국 사건 때에 개혁파에 칼에 맞은 보수파의 중추인 민 영익을 치료해 주므로 그 의술을 인정받아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을 받게 되었고, 고종과 민비에 총애를 받게 되었고, 미국인에 대한 인상이 우호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미국 선교사의 전도에 밝은 전망을 보여 주게 되었다.
1885년 4월 5일에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처 세 사람이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달후인 5월 3일 감리교 월리암 스크랜턴(Wm B. Scranton)과 그의 모친 스크랜튼(Mrs. M. F. Scranton) 여사가 함께 입국하였다.
다. 선교의 운허 과정
1890년 이후 갑신정변,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을 한국 사회는 일대 변동을 겪게 되었다. 이때부터 개화기의 학술지나 언어지에서는 유교사상의 극복을 위한 철저한 유교 비판의 소리가 높아갔고, 기독교에 대하여는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유교나 불교를 신봉하는 개화파 인사들마저도 기독교야 말로 쇠약해 져가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고, 선교 단체들은 곧 개화의 힘이 될 것이라 공헌하게 되었다.
(심 일섭 “한말사상과 기독교에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 (신학 사상) 제28집 (서울 신학 연구소 1980) p.171 그러나 고종은 종교의 전파는 허락지 않았고, 기독교는 금교되고 있었다.
그후 조선 정부는 1898년 6월 10일에 스왈론 선교사에게 호조 (護照;외국인에게 내주던 여행권)를 발행함으로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 젤러 목사가 입국한지 13년만에 선교의 윤허가 내려 졌다. 이로 인하여 선교의 자유가 부여되었다.
3) 초기 선교 정책과 대 부흥 운동
가. 초기 선교 정책
1). 장로교 정책
미국의 감리교와 장로교를 비롯해서 캐나다, 호주, 영국 그리고 간접으로 일본을 통하여 새 선교지 한국에 여러 계층의 선교사들이 몰려들고 아울러 한국 교회 내에 간혈적인 수난도 있고 하여, 뚜렷한 선교 방법의 설정을 서두르고 피차 경쟁하는 잘못을 피하는 방법을 구하며, 더 나아가 한국교회 수난에 대용할 선교사들의 입장을 밝히는 정책 설정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국 주재 선교사들의 초청에 의해 1890년 존 네비우스 박사(Dr. John Nevius)가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그들은 네비우스 박사의 저서≪선교 사업의 방법≫(Methods of Mission Work)에 제시된 원리에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7명의 젊은 장로교 선교사들을 데리고 두 주일 동안 체류하게 된 그의 한국 방문은 선교정책에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선교사들의 하나하나의 복음 전도와 광범위한 순회 전도 (2) 자립 선교 (3) 자립 정치 (4) 자립 보급 (5) 체계적인 성서 연구와 모든 활동에 거의 성서의 중심성을 관철하다. (6) 성서의 교훈에 따라서 엄격한 생활훈련과 처리를 한다. (7) 다른 교회나 기관과 협력 및 일치의 노력을 계속하며, 최소한도 다른 기관과는 지역을 피차 뜻에 맞게 분활하여 전도한다. (8) 지역과 프로그램 분활 이후에는 피차 절대 간섭은 하지 않 는다.
(9) 그러나 경제나 그 이외의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넓게 피차 돕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대개 요약된 그 원칙이다. 강력한 자립성과 광범위한 순회선교, 성서에 대한 압도적인 강조가 그 기초였다. 그러나 또 한가지 이 원칙의 핵심에서 차세적 생활과 의무에서의 둔퇴(遁退)가 종교의 본분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통상의 생활을 하면서 교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 모습이라고 설파하는 정신도 깔려있었다.
2). 감리교의 선교정책
감리교는 장로교의 경우처럼 도식화된 문서상의 일정한 정책 규정이 따로 없기 때문에 그 윤곽을 더듬어 살펴볼 수밖에 없다. 감리교는 탐색, 순회전도를 원칙으로 했다. 이것은 실제로는 장로교와 별 차이가 없는 정책이었으나 이러한 방법이 옛적 감리교 전도사들과 부흥사들의 순회전도와 꼭 같았기 때문에 감리교의 생리에 들어맞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감리교는 교육분야의 있어서 장로교의 경우보다 훨씬 차원 깊은 집착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한국에 온 지 꼭 넉 달만에 두 사람의 학생을 가지고 학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장로교가 젊은이들을 교육해서 후에 각각 출신 교회로 보내어 힘있는 전도자적 크리스챤을 양성 힘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았는데 반해서, 감리교는 교육 일반에 주력함으로써, 그것으로 복음전도의 한 수단으로 삼는 폭넓은 방법을 원용하고 있었다. 두 교회는 이 교육 정책에 있어서 후에 그 간격을 더 넓혀갔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에의 치중은 복음사업의 부진을 자초할 수박에 없었다.
나. 교회의 폭발적 증가와 부흥운동
1895년과 1896년에는 교회의 세례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선교사들도 역시 이 놀라운 성장의 대해서 알고 격려를 받고 있었다. 서울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의 실정은 변해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랫동안 무관심하던 백성들은 이제 각성의 징조를 나타내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895년에 평양으로부터의 연례보고에 의하면 “평양에서의 활동은 이제 개척 전도의 단계를 지나서 확고한 기반을 닦기 위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교회는 발전하고 팽창하기 시작하였으며, 평양과 그 변두리 지방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한 요인으로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는 계속해서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의 주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세례교인과 초신자들이 모두 열렬한 복음전도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전도활동을 하고 우리 선교사들은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어야 했다.”
이처럼 초창기에 벌써 교회는 선교사들보다 앞장을 섰는데, 선교사들은 초인간적인 노력으로 세례 지원자들을 가르치며 신앙이 약한 자들을 훈련시킴으로써 “후원”의 책임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1900년 한 해 동안에 세례교인수는 3할 이상이나 증가되었다. 사람들은 놀라운 수효로 교회에 몰려들었으므로 선교본부의 연례 보고가 “이 사람들이 너무 빨리 증가되고 있지나 않은가?” 하고 반문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재빠른 성장은 아무런 영적 근거도 없이 수효만 많이 모아놓은 것이었던가? 여러 가지 증거는 그것이 영적 근거 위에 확고하게 기초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당시의 선교사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위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헌신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많은 수효를 모아놓는 데만 유혹을 받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신자들”(adherevts)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 “공동체”(Community)라는 말은 주한 장로교 선교사회(Presbyterian Council of Mission In Korea)의 정의에 의하면 세례교인,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 학습
과정의 구도자, 정기적인 출석자,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옛 생활로부터 떠나 기독교의 감화 밑에 있는 또는 그 밖의 사람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세례교인들”(Communicants)이라는 말은 교회의 기둥이 되는 세례 받은 성인 신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급속도로 성장하는 교회에는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과의 비율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어느 한 해 동안에 교회 공동체는 크게 늘어났는데 세례교인수는 조금밖에 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양적으로만 크게 늘어나고 새로운 신자들의 훈련은 빈약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100퍼센트 완전한 교인으로 만들 수 있는 교회는 없지만, 초기의 주한 선교사들은 훈련시키는 소임을 훌륭하게 감당하였던 것이다.
1898년에는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과의 비율이 36 : 1이었다. 1907년부터 1942년까지의 평균 비율은 2.6 : 1이었는데, 이것은 한 사람의 세례인이 매주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모든 비기독교적 종교 행사를 걷어치운,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신자로 인정될 만큼 충분히 훈련을 받지 않은 다른 2.6 사람에 해당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초기 선교시대는 앞으로 올 놀라운 영적인 대 부흥을 위한 태동의 시기였다.
앞서 말한 놀라운 성장이 영적 근거 위에 기초해 있었다는 더욱더 신빙할 만한 증거는 급속도로 성장하는 한국 교회로부터 “1907년의 대부흥”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이 대 부흥은 전혀 영적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서술되어왔다.
4) 대부흥운동의 태통
가. 부흥운동의 원류(源流)
한국 교회의 부흥 운동의 패턴은 영미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의 복음이해와 신앙형태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것들의 특징은 경건주의적(개인의 회심과 구원의 내적 확신을 위한 것)이고 주관주의적(회심과 확신은 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얻는 것)이었다. 19세기 말엽 미국의 부흥 운동가 찰스 피니와 무디에게 감화를 받은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에 들어와 부흥 운동을 일으킴으로 미국 교회를 닮게 되었다.
1903-1907년간에 일어난 대 부흥운동은 원산에 모였던 남 감리교의 선교사들이 선교 사업에 성과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모여서, 성경 연구를 하고 기도하였을 때 강원도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하디 목사가 참석하여, 성령의 체험을 하므로 써 같이 참석한 선교사와 한국인 신도들도 성령을 받아 큰 부흥운동에 불길이 일기 시작하였다. 다른 하나의 부흥운동의 흐름은 사경회를 통한 부흥이었다. 1909년에는 북 장로교회 선교 구역에는 모두 5만 명에 달하는 참가자를 가진 약 8백번의 사경회가 있었다.
나. 1907년 대 부흥운동
1907년 부흥운동은 정월 장대현 교회에 유력한 장로인 길 선주 가 기도중에 큰 소리로 “나는 도둑과 같은 인간이 올시다”라고 자기 죄를 자백함으로 발단(發端) 되었다.
이로 인하여 집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고 눈물과 감격으로 밤새워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이 감동의 기류가 며칠 계속되므로 시작되었다.(길 선주 장로가 설교를 하였다고 함) (한국기독교사 연구(김 양선. 기독교문사.1981,p87))
5) 대 부흥운동의 양상과 성격
가. 대부흥운동의 양상
1907년에 일어난 대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큰 파문(波文;어떤 일의 영향)을 일으켰고, 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운동은 숭실대학교, 장로회 신학교, 성경학교와 중학교에서도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1907년 길 선주장로가 서울에 와서 경기도 지방회의 사경회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서울 지방 교회가 대 부흥을 일으켰다.
이 부흥운동은 장로교 중심의 평양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감리교에도 급격한 부흥을 일으켰다. 이 부흥운동은 성경공부와 심령부흥운동(기도 중심적)이었다. 그리고 전도운동이었다. 이 부흥운동은 성경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막대한 기독교인들이 생겼고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는?
①비기독교인 친척들에게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고, 사경회를 더욱 왕성히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②많은 사경회와 사경회의 목표를 철저히 성경에 두게 하였다. ③한국 교사들에게 사경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④이러한 사경회는 1907년 대부흥회에 확고한 성서적 근거를 제공했다. ⑤사경회는 항상 복음 전파운동과 관련되었다.
나. 대부흥운동의 성격
1)신자가 된 사람들을 영적 소생시키려는 부흥운동이었다. 2)회개운동이었다. 3)사경기도회 적인 것이었다.
4)통성기도였다. 5)전도위주였다. 가가호호를 심방 전도하였다.
6) 대부흥운동의 결과
가. 긍적적인 면
1).한국에 기독교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기독교회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였다. 2).신도와 신도들 사이에 화해를 가져왔다. 교회의 연합정신을 강하게 하였다. 3).한국인 신자와 선교사들간에 이해 증진에 기여하였다. 한국인의 신앙지도력과 목회자들의 실력을 인정받게 하였다. 4).교인들 사이에 새로운 도덕관념이 생겨 종래의 봉건주의적 사상을 타파하였다. 높은 윤리 수준을 유지하였다.
5).성경 공부와 기도생활을 신앙의 기초가 되게 하였다. 새벽기도를 정착시키었다.(길 선주 목사와 박 치록장로가 장대현 교회에서 처음 시도함)
6).경이적인 교회 성장을 초래하였다.
(장로교는 1906년 교인수-54,987명에서 1907년 73,844명(34%)로 증가함. 감리교는 1906년 교인수-18,107명에서 1907년 39,613명(118%)로 성장.(송길섭. 한국 신학 사상사.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7.4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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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부흥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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