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입학하여 1974년에 졸업한 우리 48회는 5.6대1(기계과는 13대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하였다. 경쟁률로만 친다면 부산 시내에서 가장 높았던 학교가 부산공고였다.
당시 학과는 토목 건축 기계 전기 주물 자동차 6개 과로 한 사람이 3개 과를 지망할 수 있었다.
나는 기계 건축 자동차 순으로 지망하였는데, 1지망한 기계과에 합격했다. 그때 합격자 발표를
기계과 실습장 문에 붙여 놨었는데,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같이 갔던
이종사촌 형은 좋아서 팔딱팔딱 뛰고, 나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그렇게 어렵게 입학한 학교였지만, 막상 다녀보니 공과 계통이 나와는 전혀 적성이 맞지 않았다.
학교를 그만둘까 말까 수없이 망설이다가 그래도 내가 선택한 학교이니 다녀 보자는 생각으로
버텨낸 결과 48회로 졸업할 수 있었고 자랑스러운 부공 동문이 될 수 있었다.
졸업 후 11년간은 전공과 관련 있는 일로, 그 이후론 전혀 관련 없는 일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사회 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부공 출신이라면 알아주는 분위기였기에 자부심 하나로 학교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다.
재학시절을 돌아보면 참 재미 있는 일도 많았고 평생 기억에 남을 일도 여럿 있다.
우리 48회는 문현동 가교사에 입학하여 2학년 겨울방학 때 지금의 대연동 교사로 옮겼는데,
지금은 타계하고 안 계신 홍금술 교장 선생님의, 자기가 쓰던 책걸상은 자기가 옮겨야 한다는
지침에 따라 무거운 책걸상을 메고 대연동고개를 넘었던 일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
홍금술 교장 선생님은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로 수학이 전공이셨는데, 수학 교사 자리가 빌 때면
교장 선생님께서 수업에 직접 들어오곤 하셨다. 선생님은 조용하고도 열정적인 분으로
항상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을 가꾸고 하셨는데, 학교를 찾아오는 학부모들이 학교 경비인 줄로
알 정도였으니 학교에 대한 그분의 애착을 알고도 남았다.
문현동 시절은 가교사였으니 모든 것이 열악했다. 시설로 치면 부산에서 가장 뒤쳐진 학교가
아니었나 싶다. 운동장도 한쪽 구석에 조그맣게 있었는데 할 수 있는 체육 활동이라고는
핸드볼 경기 정도였다. 그 좁은 운동장을 천육칠백 명이 같이 써야 했으니 한창 내달리고
싶었던 시기의 혈기를 안으로 잠재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선후배 위계질서가 확실한 때여서 운동장은 선배들 독차지였다.
한 해 선배가 하늘 같은 존재였고 2년 선배에게는 말도 잘 못 붙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 전통에 영향 받아 사회에 나가보니 선후배 위계질서가 가장 확실한 학교가 우리 부공이었다.
교실 바로 옆에는 동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우리 부공 가교사 출신들은 동천을 흑룡강이라 불렀다.
산업화로 동천이 썩어 물이 새까매서 붙여진 이름인데, 선배님들이 그렇게 불러 우리도 흑룡강으로
부르며 그렇게 추억을 쌓았다. 그 당시 인근에 대선소주 공장이 있었는데 점심 시간이 지나면 주정
냄새가 코를 찔러 학생이었지만 술 마시고 싶은 유혹을 느꼈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도 학교 한쪽 모퉁이에 음악실이 있었고 음악실 가는 길엔 장미가 심겨져 있었다.
그때는 학교에 사진사가 있었는데 그 길이 우리들의 단골 포토존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음악 시간은 우리들에게 잠자는 시간이었기도 하지만, 약간
노랑머리에 베토벤 같이 머리가 곱슬곱슬하셨던 김종태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클래식 음악들은
우리들의 정서 함양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지금에서야 느낀다.
그런 가교사 시절을 마감하고 대연동 신축 교사로 갔을 때, 완전 별천지였다. 드넓은 운동장과
곳곳에 지어진 교실과 실습장들, 당시만 해도 우리 학교를 동양 최대의 맘모스 학교라고 자랑하곤 했다.
꿈에 그리던 신축 교사였지만, 우리 48회는 겨우 1년, 그것도 여름방학 전부터 현장 실습을 나가니
6~7개월밖에 다닐 수 없었으니 아쉬움이 컸고, 대연동 시절의 추억은 그리 많질 않다.
지금의 대연동 교사는 그동안 많은 건물이 지어져 대학 캠퍼스를 연상케 하지만, 갓 지었을 때만 해도
청운관 자리는 테니스광이셨던 당시 민관식 문교부장관이 만들어준 테니스장이 있었고,
공동실습장 자리 주변은 야산처럼 돼 있어 민방공 훈련장으로 애용되곤 했다.
내가 처음 부공에 입학했을 때, 교실 왼쪽 벽에 걸어놓은 교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위하라 이 계레 / 일하라 지성껏 / 앞서라 기술로"가 아닌가.
이렇게 웅대한 교훈도 있구나 싶어 감탄을 했다.
그런 교훈 밑에서 공부한 우리는 애국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선 기술로 겨레 위해 지성껏 일하였으니 우리는 감히 조국근대화의 기수라 자부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런 학교를 졸업한 우리는 모교를 더욱 사랑해야 하고, 내가 모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한 번쯤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다시 강조하지만, 이 자랑스러운 모교 사랑의 첫걸음은 동창회비부터
내는 것이고, 이 숭고한 대열에 꼭 동참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문현동 시절의 학교 정문>
<실습장과 교실들>
<홍금술 교장 선생님 훈시 모습>
<전체 조례 광경>
첫댓글 Yesterday once more!
추억의 그때 그시절
아니벌써 52년전이구나~~
수구초심이라 했던가.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을수록 고향 생각과 학창시절 생각이 많이 난다.
졸업한 지가 벌써 50년이 다 됐으니 참 많이 살긴 살았다.
어젯밤 또 제대로 잠을 못 이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쓴 글을 오늘 동창회 밴드에
올렸더니 동문들의 반응이 뜨겁네.
학창시절을 그리워 하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나 보다.
고향(?)이 그리워 지는것은
우리가 익어간다는것
그때 그시절이 자꾸만 그리워지고 다시 돌아간다면 하고 생각을 자꾸 한답니다
훈 씨, 벌써 일어났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학창시절을 더욱 멋지게 장식할 수
있을 것 같네.
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