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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삼상17장45-47)
성경본문:사무엘 상 17:45-47]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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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인이 제일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할까요?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그 뜻을 알기 원하나요? 아니면 내가 살아가는 길이 뭔가 잘 안 풀려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지 궁금해 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 하나의 물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잘 풀린다.”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모든 물음이 아주 근본적인 신앙의 질문입니다.
지난 신년 말씀집회를 지나며 아주 인상적인 설교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라고 말했을 때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뜻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뜻이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뜻이란 우리가 우겨서 행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악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하나님의 허락을 받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결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면 힘든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참아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는 길이 악한 길은 아니지만,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갈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오려면 어려움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발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왜 그런 길을 그냥 놔두셨나요?”라고 불평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가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 길은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 마치 바닷가에서 서핑을 하는 사람처럼. 파도를 탄다는 것은 우리가 파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파도에 우리의 몸을 맡기는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아주 적절한 예가 될 듯합니다.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뜻에 우리의 몸을 맡기면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징은 순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상할 수 없는 삶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 - 온 땅이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다윗에게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다윗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자신이 행하는 의지적 행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일 때 일어난 놀라운 기적의 사건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절)
다윗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일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46절)
다윗의 위대함은 소년 시절부터 드러났습니다. 더욱 그가 위대한 것은 삶의 실수가 있었지만, 끝까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겸손해서 쓰임을 받았으나 자신의 고집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면 다윗은 죄를 범했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사람이라는 것이죠.
다윗이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파도를 탑니다.
그리고 신이 나게 말을 합니다.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이런 상상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두 손을 높이 들고 선포합니다. “야호! 너희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될 거야!”
분명히 그의 앞에는 거대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신 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이 칼과 창과 단창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서 있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무기를 들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이 신 나게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온 땅이 무엇을 알게 될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간 이 전쟁, 골리앗과의 싸움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올 초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대박’이라는 말을 써서 세간의 논쟁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통일이 무슨 로또에 맞아 횡재하는 것이냐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통일은 가만히 앉아서 떨어지는 대박이 아니라 지금부터 진지하게 통일을 준비할 때 우리 민족에게 축복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죠.
마치 우리가 신앙을 그런 ‘대박’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진지하게 믿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대로 된다면 그것이 신앙일까요?
적어도 다윗에게서 일어났던 놀라운 신앙의 승리는 다윗의 기도와 기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전쟁터에 있었던 수많은 이스라엘 군대 역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식과 믿음이 골리앗을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있었음에도 떨면서 숨어 있었을 뿐입니다.
다윗의 승리는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선포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또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제일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들이 돈거래입니다. 성경은 돈거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줄지언정 꾸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비즈니스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나왔는데 비즈니스의 유혹을 받는다면 이겨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앉아서 기도하는 열심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믿은 좋은 사람의 기준을 얼마나 뜨겁게 기도하느냐로 생각했던 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믿음이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기도한 대로 응답을 많이 받을수록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기도가 이런 것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참 이상하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며, 하나님의 손을 잡고 믿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았기 때문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신앙의 잣대로 보면 다윗은 무슨 믿음이 있습니까?
그가 부흥회에 참석한 것도 아니고, 새벽예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금요 철야를 끝나고 난 다음도 아닌데 말입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용기를 가지게 했고, 그 용기가 그로 하여금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하게 한 것이죠.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게 된 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평소에 그가 쌓았던 실력이 뒷받침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좀 더 상상을 하면 좋을 듯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성경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이 믿음을 가지고 물맷돌을 던졌더니 골리앗이 쓰러져 죽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17장 4~7절에 골리앗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는데, 그의 키는 2m 93cm 정도 됩니다. 몸을 두른 갑옷의 무게는 57kg이고 놋 단창의 창날만 7kg 정도 됩니다.
이스라엘의 용사였던 사울의 키가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 컸다고 했는데, 그도 싸울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골리앗을 향해 나간 다윗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가서 이겼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다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을 만났을 때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의 전후 맥락을 보면 다윗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실력이 있었다는 것이죠.
저는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가장 놀라운 게 ‘양궁’입니다.
가끔이기는 하지만 과녁 가운데 심어놓은 카메라의 렌즈를 맞추는 것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녁 정 가운데 gold에 맞추는 것이 어쩌다 나오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50% 이상이 나와야 우승을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재능과 더불어 연습이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 성남시청에서 쇼트트랙을 지도하는 손세원 집사님이 있습니다. 안현수 선수를 지도했던 분이기도 하지요. 안현수 선수에 대하여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재능도 있는데 정말 열심히 연습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나아갈 때 골리앗은 온몸을 갑옷으로, 그리고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가진 무기는 오로지 물맷돌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요? 던져서 맞춰야 합니다.
골리앗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이 있다면 얼굴입니다. 만일 다윗이 실수한다면 큰일입니다. 방패로 얼굴을 가리면 다윗이 이길 가능성은 없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물맷돌 다섯을 집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굉장히 돌을 빨리 던지는 기술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전쟁의 순간입니다.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삼상17:40,48,49)
또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다윗이 그 전쟁에 나가기 위해 쌓았던 실력입니다.
사무엘 상 17장 34~37절에 다윗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말씀에 보니까,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면서 많은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자와 곰이 나타나서 양을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싸웠고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양들을 구해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싸울 때마다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셨을까요? 어떻게 싸웠을까요?
어린 다윗이 막대기만 가지고 사자와 곰을 물리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매 돌을 던져서 맹수의 급소를 맞춰야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골리앗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움직이는 맹수를 돌로 잡기 위해서는 아주 정확하고 빠르게 돌을 던져서 맞춰야 했을 겁니다.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르는 솜씨였을 것입니다.
그 정도의 기술이 있으니, 무거운 무장을 한 거인이 어기적거리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움직이는 표적도 맞힌 다윗에게 골리앗은 쉬운 표적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골리앗이 얼마나 방심했겠습니까? 갑옷도 입지 않고 무기도 들지 않은 다윗을 바라보며 방어준비조차 하지 않은 골리앗과의 싸움, 어쩌면 이미 승부가 갈린 상태가 아니었을까요?
다윗의 고백은 단순히 믿음으로 이 싸움을 이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 단련한 실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의 기적과 다윗의 위대함은 ‘싸움에서 이긴 기적’이 아니라 이러한 실력을 가지고 잘 자신을 훈련해 왔던 다윗의 삶에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싸움이 있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은 벌판에서 양을 치는 다윗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오늘의 싸움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예비하셨고, 다윗은 그렇게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준비된 자에게 강력한 믿음이 더해질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죠.
믿음의 역사는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드러나고 증명되는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오늘 본문 47절의 다윗의 고백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간절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 다윗이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았던 다윗이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준비된 자는 믿음을 만나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물맷돌이 될 때…
오늘 말씀의 마지막으로 이런 영적 의미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에서 다윗이 사용한 ‘물맷돌’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물맷돌이 하나님의 사람의 손에 들려질 때 위대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가끔 우리는 자신의 삶을 하찮게 볼 때가 있습니다. 시냇가에 흩어져 있는 허다한 물맷돌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 돌이 다윗의 손에 들려졌습니다. 잘 훈련받은 믿음의 사람 다윗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역사 가운데 들어갈 때,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물맷돌이 되는 순간입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7절)
다윗이 선포한 것이 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이제 그가 어떤 무기를 들고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어떻게 돌로 그 큰 적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 돌을 강력한 무기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이 들고 있는 무기가 무엇입니까?
칼과 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은 자신의 무기를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견된 싸움에서는 하나님께서 준비된 것을 쓰신다는 것이 참 놀랍지 않습니까?
김범곤 목사가 쓴 [생명의 떡 오직 예수: 낮은 곳의 작은 예수 마당쇠 이야기]에 나오는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노숙인들을 위한 사역을 하면서 취사 장비를 실은 차가 노후 되어 큰 사고가 날 뻔한 사건이 있은 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서울역에서 술이나 먹고 인생을 허송세월하는 노숙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러 왔는데 교통사고로 누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되겠습니까?예수님 안 믿고 지옥 갈 사람들도 저렇게 좋은 차들을 타고 다니는데요?”
그런데 긴급 구호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00 양담배 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기도했던 대로 승합차와 냉동차를 가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식구들 가운데 일부는 우리 공동체가 술 때문에 망한 사람들을 돌보는 단체이고 금연을 하는 기독교 단체인데 담배 회사에서 주는 차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 받아서 선하게 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식구들에게 며칠 동안 기도해 보고 결정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도 중에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사무엘 상 17장에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나옵니다. 다윗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기절시킨 후 골리앗의 칼을 빼앗아 골리앗의 목을 벱니다.
골리앗의 칼이 골리앗 손에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고 괴롭히는 칼이었지만, 다윗의 손에 있을 때에는 골리앗의 머리를 자르고 블레셋을 물리치는 칼이 되었습니다.
또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교수대를 세웠지만, 그 교수대를 세웠던 하만이 매달리게 되었고, 마귀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세웠던 십자가는 마귀가 정죄를 받고 심판받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라고 정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다윗의 이야기가 몇 개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그리고 이스라엘을 평정한 통일왕국의 왕이 되어 밧세바와의 불륜을 저지른 다윗,하지만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회개한 다윗,죄의 씨로 말미암아 엄청난 비극을 겪으며 도망자가 되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하던 다윗.분명한 것은 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실력만으로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때 실력이 쓰임을 받습니다.
첫 번째 왕 사울 역시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의 실력은 자신을 높이는 교만의 도구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끝까지 붙들어야 할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의 삶에서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신년말씀집회 때 홍민기 목사님의 이야기가 뇌리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가 있었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복음을 전하라고 할 때도.
“하나님이 잘 모르시는데, 비행기를 안 타보셔서 모르시는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나에게도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그런데 어느 날 공항에서 비행기가 연착해 기다리고 있을 때 한 신사에게 말을 걸었답니다. 너무나 강력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라고 하셔서.
“죄송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라고 하십니다!”
그때 영국 신사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더랍니다.
40년 동안 하던 사업이 망하고 죽음을 생각하며. 어릴 적 믿음이 생각나 “하나님께서 나를 잊지 않았다고 하는 사인을 보여주시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겠다고.”
그런데 그때 홍 목사님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라고 하십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입니다.
그때 홍 목사님의 마음이 너무 무거웠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어를 하게 하시고, 비행기를 타고 다니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과 계획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