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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 기독교의 핵심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신구약 성경의 핵심을 한 문장만 찾으라 한다면 바로 이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르다’는 말의 영어 표현은 ‘Calling’입니다. 이 ‘Calling’이라는 단어속에는 구원으로 부르시는 ‘Calling’과 사명을 알려주시며 부르시는 ‘Calling’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두 번 부르십니다.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에서 구원받으라고 부르시고 그 다음 또 한 번은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이 땅에서 주님의 일을 행하며 살아갈 주의 일꾼을 부르시는 것, 즉 사명으로 부르십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부르심을 깨닫고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며 그리스도인이 반응해야 할 두 번째 부르심, 즉 “사명의 Calling”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아포스톨로스’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파송받은 자’,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대통령이 해외 여러 나라의 대사관에 한국정부의 권한을 부여하며 대사를 파송하듯이 주님의 뜻을 받들어 파송을 받아 천국권한을 이 땅에서 행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을 사도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예수님의 사도라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부여하여 명령하신 그 사명을 이제 우리가 이 땅에서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목회자뿐 아니라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전도의 일에 헌신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인 전도의 일을 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부르심, 전도에로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우리가 경험하게 될 유익을 누리시고 기쁨이 충만한 인생, 은혜충만한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명에 순종할 때 첫째로, 우리의 존재 의미를 발견합니다.
마태복음 10장 2~4절입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우리가 성경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구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리’라고 표현하고 다른 한 편의 사람들은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관련된 책 두 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권은 카일 아이들먼(Kyle Idleman)의『팬인가 제자인가』, 또 한 권은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의『제자입니까』라는 책입니다. 먼저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의 책『팬인가 제자인가』에서 ‘그리스도인은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나는 제자인가”라고 물으면서 살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부활절을 앞둔 어느 날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은 텅빈 예배당에 앉아있었습니다. 돌아올 주일, 즉 부활주일예배에 몰려올 수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스스로 “예수님이시라면 이 수 많은 무리 앞에서 무엇을 가르치셨을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묵상했습니다. 그는 그 기적이야기를 통해 “누가 팬이고, 누가 제자인가” 구분했다고 합니다. ‘팬’은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과 떡을 원했지만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팬’은 예수님으로부터 더 이상 먹을 거리를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제자’는 떡이 사라지고 물고기가 없어져도 여전히 우리의 영원한 떡, 영원한 포도주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은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성도의 숫자가 아니라 헌신의 깊이다”라며 정말 “제자가 누구일까?”를 묵상했다고 합니다. “참 제자는 예수님을 위해 손해 볼 준비가 되어 있고 또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손해를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책에서 외칩니다. 또『제자입니까』라는 책에서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성장 경험을 얘기하며 교회 성장과정에서 깨달은 것을 책에서 설명합니다. “교회는 성장은 했는데 부흥하지 않았고 교회는 커졌는데 성숙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이 시대 교회가 다만 건강하지 못한 채 살만 쪄 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후안 까를로스 목사님은 어느 순간 이런 성령님의 음성을 느꼈습니다.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느낌 이후에 그가 깨달은 것은 “교회 안에 믿는 자의 수는 많아졌는데 제자가 없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시대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많이 채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많아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책이 가진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는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닌 주의 구원으로 부름받은 사람은 모두 제자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모두 제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열 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만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를 제외하고는 다른 제자들이 성경 다른 부분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들중 대부분은 부르심을 받기 전 갈릴리바다에서 이름 모를 어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제대로 없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세리와 같은 전문직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당시 그런 직업은 삶에 대해 자부심을 찾기 힘들고 인생의 의미를 찾은 행복한 생활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고 이제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변화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5,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우선적으로 내 형제, 이웃에게 먼저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마치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팔레스타인지역의 목초지는 척박했습니다. 험준한 계곡과 황무지가 대부분인 땅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목자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하루 종일 풀을 뜯게 하였다가 저녁에 양 떼들을 우리에 몰아넣을 때,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다면 그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먹지 않고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될 것입니다. 한 마리 양을 잃은 목자의 관심은 바로 잃어버린 양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잃어버린 양은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입니다. 하나님안에서 은혜를 누리다가 이제는 하나님을 떠나버린 양입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유명한 전도사역자는 분명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했습니다. 특히 ‘이방의 빛’이라는 이름으로 부름받아 이방인을 위해서 선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더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은 자기 동족, 형제였다는 것을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로마서 9장 3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동족과 형제를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선교의 시작, 전도의 시작은 자기 가족, 자기 민족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의 마음을 품고, 우리가 선교 의지를 가지게 될 때 그것이 주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깨닫고 헌신하게 될 때 우리는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발견한 사람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나 허무한 일을 경험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역경이 찾아와도 소명감으로 인해 그 상황을 빨리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목적이 분명하기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그 일을 묵묵히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세상의 일에 소망을 둘 때 우리는 좌절과 낙담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 주신 사명을 깨달아서 살아갈 때 보람과 기쁨을 느끼고 하루하루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17절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가 소명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도 보람이나 기쁨이 없는 이유는 자꾸 세상의 잣대로 살아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세상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는 절대 참된 기쁨과 보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적 부러움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조그마한 역경과 고난이 찾아와도 좌절하고 낙담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이 땅에서의 소명을 깨닫고 의미있는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이 땅의 성도들, 그리고 이 땅의 교회들이 팬이 아닌 제자로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제자로서의 소명을 깨닫고 바른 교회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명에 순종할 때 둘째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0장 7,8절입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에 예수님의 3대 사역에 보면 ‘교육과 복음전파와 치유’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병자를 고쳐주는 일을 했습니다. 사도들이 전도하며 다닐 때 병자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 기도를 통해 병자들이 치료받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천국을 선포한 것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시며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이 능력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능력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 전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전도자에게는 수많은 기적과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한 헌신, 교회와 성도를 위한 수고를 할 때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전도, 선교, 구제, 봉사등을 은사로 오해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전도 또한 주님의 명령이고 우리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을 은사있는 사람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찬양부르는 것을 은사있는 자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은사받은 사람만 해야 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전도’와 ‘선교’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교하고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로마서 1장 16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을 먹고 움직이면 우리 하나님이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는 인간의 지혜와 경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수 많은 전도훈련단체들이 매뉴얼을 가르치고 전도노하우를 가르치지만 그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왜냐면 전도는 기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은혜가운데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하며 순종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논리적인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가 깨달은 것, 즉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살아나셔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면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외치는 것입니다.
1863년 12월, 23세의 청년이었던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갔다가 그 곳에서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습니다. 홀로 된 선교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옆 나라 조선에는 아직 예수믿는 사람이 없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선교사역에 낙담했던 것을 회복하고 아직 문이 열려지지 않은 복음불모지, 선교불모지 조선을 향해 떠납니다. 그는 중국어로 된 성경을 배에다 싣고 대동강 쪽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러자 관군들이 그 배에 불을 질렀고 그는 강변으로 끌려 왔고 그 곳에 칼을 맞아 순교하게 됩니다. 그가 칼에 찔려 죽기 전 한 조선 사람에게 성경을 건내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부하고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쳤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보면서 갑자기 큰 고통이 그 병졸에게 찾아왔고 그제서야 그 선교사가 죽어가면서 자신에게 내밀었던 성경책이 보였습니다. 그는 동료들 몰래 흩어진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예수를 영접했고 훗날 평양 영주교회 최초의 영수, 지금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박춘권이라는 사람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무기력하게 대동강 변에서 피 흘리며 순교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첫 단추가 꿰어졌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을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면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십니다. 소명에 헌신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소명을 주실 때 하나님이 능력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일은 우리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완전히 불가능한 사명입니다. 그래서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내가 할 수 있으면 그건 소명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치 못할 일을 하나님 필요에 의해 우리에게 주셨다면 그 일을 감당할 능력마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을 고민하기 전에 우리에게 주신 이 일이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명인 지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24절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전도는 어느 그리스도인에게 부어진 명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든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셨으면 내가 할 일은 순종밖에 없습니다. 내가 순종하면 예수님이 권능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내 입을 열어 예수를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가운데 임하여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간증거리를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실함을 가지고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면 그 사명에 합당한 은사를 주실 것입니다. 특히 전도는 믿는 자라면 어느 누구에게나 주신 사명이기에 이 일에 합당한 능력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제 전도를 위해 헌신할 때 능력을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명에 순종할 때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0장 9, 10절입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전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 필요를 채우는 것을 경험하는 귀한 수단입니다. 마태복음 10장 9절에서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러 다닐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금, 은, 동’은 귀금속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당시 물건구입을 위한 화폐입니다. 지금식으로 이 말씀을 번역하면 지갑에 돈을 들고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 뒤 10절에서는 ‘여벌 옷이나 신발, 지팡이도 소유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전도를 위해 헌신하며 이 곳 저 곳을 돌아 다니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항상 여행할 때 필요한 재정이 있어야 우리는 뭐라도 준비해서 돌아다니는데 아무것도 챙기지 말라고 말씀하시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왜 그런 지에 대해 10절 후반절에 말씀하십니다.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도를 위한 여행을 하면서 돈, 의복, 각종 필요한 물건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일꾼이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당연하기에 이 사명을 위해 일꾼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다 해결하신다”고 가르치십니다. 일반 직장에서도 일을 시키면 사용자가 돈을 줘야 합니다. 기타 여러 가지 숙식에 관련된 혜택도 다 준비해야 합니다. 요즘은 각종 복지혜택까지 챙기지 않으면 제대로 된 직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일을 시키면서 다 책임지는 것이 사용자입니다. 직장오너는 본인이 채용한 사람의 생계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기시면서 하나님께서 채용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일꾼들은 먹을 것과 거할 곳을 어떻게든 공급받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대사로써 이 땅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사역과 생활에 대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채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 맡겨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할 때에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우리가 개척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주의 일에 헌신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최근 저희 부부와 갑자기 친해져서 자주 만나는 목사님 내외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최근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이 분들을 붙여주셨는 지 기도해보니 제게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곳에 와서 지내며 깨닫게 된 것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시켜 주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진행하고 이뤄주시는 일들이 있고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명이 있어 우리가 지금까지 고주리사역을 해왔구나”라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니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결국 저와 제 아내가 이 일을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이 부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목회자 가정에서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은혜목회, 은혜사역,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다 부어주시며 함께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필요를 채우려고 너희들이 심부름을 하는 거니까, 너희들의 필요는 내가 채워줄 거다”. 소명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것, 그것은 바로 생계에 대한 염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명을 따라 살다보면 아무래도 생계에 대한 걱정, 자녀교육에 대한 염려, 각종 일들로 인해 필요한 재정들에 대한 염려가 생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주님의 소명을 확신하며 믿고 맡기며 살아간다면 재정에 대한 걱정이나 자녀 학업, 자녀 양육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놀라운 결과를 경험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소명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 생계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채우신다는 것이 오늘 말씀에서 우리 주님께서 주신 약속입니다. 힘들어도 어려워도 복음 전도를 위해서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신령한 복을 누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33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주님 주신 사명과 이 땅에서의 참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주님이 부르신 소명을 느끼며 살아갈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나라 상급뿐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생활속에 함께 하시며 필요를 채우시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런 복을 받으려고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과 함께 하시며 생계를 책임져 주시며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 주신 사명에 합당하게 항상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때 은혜를 체험하는 인생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워주시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모두 제자처럼 살아가야 할 명령을 주셨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명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이런 사명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말씀처럼 인생의 가치를 깨닫고 살아갈 능력을 얻고 때마다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해야 할 일이 오늘 본문 제일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2,13절입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전도하는 사람은 내 의지와 내 방식대로 하지 않습니다. 참된 전도자는 항상 누구를 만나든지 평안을 빌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복을 받을 사람은 영접할 것이고 그 복을 받지 못할 사람은 영접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구원 권한은 우리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우리의 간증과 전도에 대한 거부가 있을 때 흔들리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저 우리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대로 항상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 사랑을 알려주며 살아갈 뿐입니다.
에스겔 2장 7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목회하면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암환자와 현대의학기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 환자를 위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임종이 가까웠다고 의사가 판정해서 환자가족이 임종기도를 부탁했고 그 환자를 위해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정말 걱정되고 두려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몇 번 그런 기도를 한 이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내가 기도해서 치료되지 않으면 어쩌지? 내가 기도했는데 바로 좋지 못한 결과가 나타나면 어쩌지?’라고 생각할 때 기도하는 것이 두렵고 떨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몇 번의 그런 경험이후에 깨달은 것은 ‘내가 기도해서 낫고 낫지 않고는 내가 알 바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병의 치유와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단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라,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며 기도하라”는 것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저는 단지 그 도구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부여된 권한은 ‘순종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결정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도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될 때 그것이 우리 소명, 우리 사명인 것을 깨닫고 항상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평안을 빌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고 우리가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며 항상 복음전파의 열정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을 모두 받고 은혜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