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여자, 가을을 품다
가을은 나를 늙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소녀를 깨웠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호숫가에 차를 세웠다. 오래된 자동차의 검은 차체 위로 햇살이 흘러내렸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은행잎이 날렸고, 호수는 나무들의 황금빛을 고스란히 받아 안았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자동차 앞에 걸터앉아 모자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갈색 모자 아래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걸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젊은 날에는 나이에 어울리는 옷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생각을 버렸다. 옷에도 나이가 있다면 마음에는 왜 없겠는가. 오늘의 나는 조금 자유롭고 싶었다.
오래된 자동차가 좋다. 유행에 밀려났어도 제 모습을 잃지 않는 당당함이 있다. 둥근 전조등과 묵직한 차체, 세월이 남긴 흔적까지 하나의 멋이 된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얼굴에는 이야기가 쌓이고, 눈빛에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깊이가 생긴다.
문득 거울 속 내 얼굴이 떠오른다. 언제부터인가 웃을 때마다 눈가에 작은 주름이 잡힌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싫지 않다. 많이 웃고, 때로는 울면서 살아온 흔적이다. 그 주름 사이에 아이를 키우던 날도 있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밤도 있다. 지나온 세월을 지울 수 없다면 다정하게 안아 주고 싶다.
호수 건너편에도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물속에 또 하나의 가을이 펼쳐졌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바람이 멎으면 제 모습을 되찾는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생각한다. 마음도 저 물과 닮았다. 삶이 흔들릴 때는 모든 것이 일그러진 듯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잔잔해진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바람을 건너왔던가.
모자에 손을 얹고 고개를 들었다. 노란 잎 사이로 하늘이 눈부시다. 문득 오래전의 내가 떠오른다. 별것 아닌 일에도 웃음이 많았고, 작은 여행 하나에도 며칠씩 설레던 여자.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줄 알았는데 오늘 이 호숫가에서 다시 만났다. 여전히 예쁜 것을 좋아하고, 낯선 길 앞에서 가슴이 뛰는 여자였다.
나이가 들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욕심을 내려놓을 필요는 없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 아름다운 곳을 찾아 떠나고 싶은 욕심,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멋지게 살고 싶은 욕심만큼은 오래 간직하고 싶다. 그런 욕심이 있어야 사람은 늙어 가면서도 시들지 않는다.
햇살이 기울자 자동차의 검은 몸체에 붉은빛이 감돈다. 한 시대를 풍미했을 저 자동차도 이제는 속도보다 품격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나 역시 빠르게 달려야 했던 시절을 지나왔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길가에 피어난 꽃을 놓친 적도 많았다. 이제는 조금 느리게 가도 좋다. 목적지에 늦게 닿더라도 가는 길의 풍경을 충분히 누리고 싶다.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노란 잎들이 자동차 지붕에도, 내 발끝에도 내려앉는다. 가을은 떠나는 순간까지 저토록 찬란하다. 나는 떨어진 잎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저마다의 계절이 있고 저마다 빛나는 때가 있다. 남보다 늦게 물들었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제 다시 길을 떠날 시간이다. 자동차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키며 호수를 돌아본다. 물 위에는 아직 황금빛 나무들이 서 있다. 오늘의 이 풍경을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고 싶다. 언젠가 삶이 무료해지는 날이면 이곳을 떠올릴 것이다. 갈색 모자를 쓰고, 청바지 차림으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웃음을 지었던 가을날을. 나는 여전히 길 위의 여자다. 다만 예전처럼 어디론가 서둘러 가는 여자는 아니다. 길 위에서 잠시 멈출 줄 알고, 작은 풍경 하나에도 마음을 내어 줄 줄 아는 여자가 되었다.
가을이 깊어 간다. 내 삶도 가을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서운하지 않다. 봄에는 봄의 꽃이 있고, 가을에는 가을의 빛이 있으므로. 젊은 날에는 세월을 붙잡고 싶었다. 이제는 세월과 나란히 걷고 싶다. 은행잎 하나가 바람을 타고 자동차 앞유리에 내려앉는다. 나는 그것을 떼어 내지 않는다. 오늘, 가을이 내게 남겨 준 작은 편지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