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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언(淸言)
이동식 백남준 문화재단 이사
"내가 청언(淸言)을 하는 까닭은 근심겹던 이를 금새 기쁘게 하고, 답답해하던 이를 시원하게 해주기 때문이니, 이를 읽으면 시원한 바람을 쐰 듯, 단 이슬을 마신 듯한다."
명나라 말기 도륭(屠隆, 1543~1605))이라는 사람이 한 이 말은 정말로 한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우리의 머리와 마음을 씻어준다.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 곧 우리나라의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의 지식인들은 변방의 민족이 중원에 쳐들어오는 험한 세상이 되자 선비로서의 유유자적한 삶의 자세나 세상에 대한 맑은 상념을 짧은 글 속에 담아 놓았는데, 이런 글을 "청언(淸言)"이라 했다.
이런 풍조를 따라 뒤에 조선에서는 이덕무(李德懋,1741-1793) 같은 이가 청언을 즐겼다.
“모름지기 벗 없음을 한탄하지 말고, 책과 더불어 노닐 일이다. 책이 없더라도 구름과 노을이 내 친구요, 구름과 노을이 없을진대 허공 밖으로 날아가는 갈매기에 내 마음을 실어 보낼 수 있으리라. 나는 갈매기조차 없거든 남쪽 마을의 느티나무를 바라다보며 친할 수가 있다.” <청언소품/淸言小品>중에서
내가 청언이란 말을 들은 것은 KBS의 기자생활을 시작한 지 10여년 쯤 된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청언회(淸言會)라는 모임이 있는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사람들 가운데 언론계에 진출한 사람들의 모임이란다. 당시 작은 엽서로 모임이 공지가 돼 처음 나가고 보니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모임을 가지며 언론계의 동향을 들으며 정보를 나누는 고급사교의 자리였다. 서울대 캠퍼스가 관악산으로 모이기 이전, 사범대학이 있던 곳은 제기동인데 크게 보면 옛날의 청량리이고, 이 사범대학에서 나오는 잡지가 청량원(淸凉苑)으로서 이름 그대로 청량한 내용이 많은 잡지였기에 그래서 청량리 출신의 언론인이란 뜻으로 청언회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들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언론 3사’가 있었으니.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삼사의 관원은 서열은 높지 않았지만, 과거급제 후 이 자리를 거쳐 고위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명예직이면서도 동시에 재물과 인연이 없는 청요직(淸要職)이었다. 따라서 당시 이 자리에는 학식과 덕망이 높은 가장 깨어있는 관료들이 등용됐고, 또 그들은 공평무사하고, 평등하게 일 처리를 하는 지성과 행동을 겸비한 살아있는 관료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맑은 말을 청언이라고 했다. 그러니 청언(淸言)이라는 말은 “맑은 말”, “맑은 소리”를 뜻하는 것은 옛날과 오늘이 같지만 단순히 세상을 떠나 고고한 삶을 찾기 위한 지식인들의 도피성 소리를 넘어서서 조선시대 언론의 역할을 담당했던 청요직의 관원들이 펴내는 맑은 소리, 곧 정론(正論)이 곧 청언인 셈이니, 언론인들의 모임으로서 청언회라는 이름은, 본래 그런 뜻을 담았던 것은 아닐지라도, 참으로 잘 지은 사례라 하겠다.
4년 여 전 CBS의 사장이었던 이정식 동문으로부터 느닷없이 청언회의 회장 자리를 넘겨 맡은 뒤 온통 근심이 많았다. 이 휘황한 전통의 청언회를 어떻게 살리고 키워야 할 것인가? 그런데 변명이지만 세상은 복잡해졌고 언론환경은 나빠져 도대체 현역에 있는 후배들이 모임을 참여하는 것이 여간 어렵게 되지 않은 환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또 더구나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다보니 우리 동문이 보도국이나 편집국의 책임간부가 되어도 그 “제가 후뱁니다” 라며 나서기보다는 동문이나 후배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려는 경향도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젊은 기자들이 바쁜 업무 때문에 모임에 나오지 않다가 이를 이유로 더 나오지 않으려는 악순환의 조짐도 보였다.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것은, 회원들의 연배가 높아지고 젊은 기자들의 참석할 공간이 더 좁아져 모임이 위축된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에 이르게 한 데 대한 자기 참회이자 고백인 것이다.
그동안 바쁜 방송 쪽에서 회장을 몇 사람 이어왔는데 다행히 새롭게 회장을 맡은 분은 신문 쪽이고, 또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문이 엄청나게 많아 갑자기 모임이 떠들썩 할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경험을 하였다. 가장 신나는 것은 총무를 맡은 후배의 활동성이 탁월하다는 것. 이 때문에 청언회가 아마도 중흥의 호기를 맞는 것이 아닌가 성급하게 기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모임을 갖는 것이 친목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정말로 이 사회에 맑은 소리를 들려줄 수 있도록 회원 사이의 결의를 다지고 정보 교환을 통해 언론활동을 더 잘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집행부를 중심으로 이러한 활동이 새해 들어 활발해지기를 소망해본다. 청언회가 단순히 동문들이 만나는 모임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청언을 만들어내기 위한 결의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곧 청언회라는 모임에 대해 사범대 총동창회라던가 각 방면의 동문 선후배들이 관심을 갖고 지지해주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은 명말청초 중국 지식인들의 세상을 피하기 위한 청언이 아니라 조선시대 관직사회를 맑게 해주었던, 세상을 맑게 해주는 청언이다. 새해에는 그런 청언을 쏟아내는 청언회가 우리 앞에 당당하게 나타날 것이라 믿고 기대를 건다.
한국한문학회
조선 중후기 청언소품(淸言小品)의 향유와 창작
A Study of Cheongeon Sopum from the Mid-to Late-Joseon Period
안대회 ( Dae Hoe Ah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59권0호
간행물구분 : 연속간행물
발행년월 : 2015년 09월
청언 淸言 청언소품 淸言小品 소품문 小品文 이수광 『옥호빙 玉壺氷』 CheongeonSerene Words Cheongeon sopum Short Compositions of Serene Words SopummunShort Compositions Literature YI Su-gwang Okhobing Jade Jar Ice
초록 보기
그동안 주로 신흠과 허균, 이덕무와 유만주, 조희룡을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淸言小品을 연구해온 학계의 현황에서 탈피하여 연구대상이 되는 작가와 작품을 확대하고 논의를 심화시켰다. 조선 중후기 청언소품의 전체적 양상과 사적 전개를 개괄하여 종합적으로 파악하였고,『玉壺氷』과『菜根譚』같은 明淸의 작품을 새롭게 찾아 조선에서 널리 향유한 청언소품의 목록에 추가하였다. 또한 이수광과 윤흔을 비롯한 다수의 청언소품 작가를 새롭게 발굴하여 주목함으로써 그 외연을 확장하였다. 자료를 조사하고 분석한 결과, 청언소품의 향유와 창작이 기왕에 알려진 것보다 활성화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문학사에서 그 비중을 더 확장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The present situation on the study of cheongeon sopum(淸言小品, short compositions of serene words) is that it has been carried out sporadically focusing mainly on works by SIN Heum, HEO Gyun, YI Deok-mu, YU Man-ju, and JO Hui-ryong. This paper moves away from this situation and adds the names of the writers and works that should be included in the list for the study and deepens the discussion of the study. In examining the overall extent of cheongeon sopum, in terms of its readership and literary production, and its historical development in the Mid-to Late-Joseon period, this paper takes a comprehensive approach to understanding its influence and practice during this period. Thus, works such as Okhobing 玉壺氷, Jade Jar Ice and Chaegeundam 菜根譚, Vegetable Stalks Discourse from the late Ming period have been newly found and added to the list of the widely-read cheongeon sopum from the Joseon period. The paper also discovers a number of cheongeon sopum writers for the first time, including YI Su-gwang and YUN Heun, and thus broadens the study boundary. The result of this study shows that readership and literary production of cheongeon sopum were much more extensive in scope than was previously known, and that more weight should be given to its study in literary history.
淸言모음
꽃을 심으면 나비를 맞이할 수 있고,
돌을 쌓아 구름을 맞이하며,
솔을 심어 바람을 맞이하고,
물을 가두어 부평을 맞이하며
대를 쌓아 달을 맞이하고,
과초를 심어 비를 맞이하고,
버들을 심어 매미을 맞이한다.
藝花可以邀蝶
累石可以邀雲
栽松可以邀風
貯水可以邀萍 (萍: 부평초 평)
築臺可以邀月
種蕉可以邀雨
植柳可以邀蟬 (蟬 :매미 선) -(유몽영)- p54
눈의 아름다움은 잘 쌓이는 데 있고,
구름의 아름다움은 머물지 않는 데 있으며,
달의 아름다움은 둥글었다 이지러졌다 하는 데 있다.
雪之妙在能積
雲之妙在不留
月之妙在有圓有缺 (유명속영) -80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보통 때의 기운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일을 되돌아 본 뒤에야 전날에 시간을 허비했음을 알았다.
문을 닫아 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예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다.
정을 쏟은 뒤에야 평일에 마음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다.
靜坐然後知平日之氣浮
守默然後知平日之言躁
省事然後知平日之費閑
閉戶然後知平日之交濫
寡欲然後知平日之病多
近情然後知平日之念刻 (안득장자언) -97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남을 알기보다 어렵고,
스스로를 믿기가 남 믿기보다 어렵다.
自知難干知人,
自信難干信人 (사암연어)
옷이 낡으면 새것으로 바꾸려 들면서도
나이가 들어서는 제 한 몸 버리려 하지 않으니,
물건을 쓰는 데는 통달하였으면서 나 자신을 씀에는 인색한 것이다.
천지가 나를 봄은 또한 해진 옷의 종류일 뿐임을 알지 못하는 구나.
衣敝則欲新之,
年頹則不欲舍之 (敝: 해질 폐)
達于用物, 吝于用我, (吝: 아낄 린)
不知天地視我, 亦敝衣之類耳 -(회심언)- 131
밤에 창가에 홀로 앉아 그림자를 돌아보면 처량하기만 해서 함께 얘기 나눌 좋은 벗이 없는 것이 괴롭다. 그러다 문득 크게 깨달아 말하였다. 하늘은 맑고 땅은 드넓어 아득하고도 망망하니 모두 나의 벗이다. 저 하늘은 말없이 내 마음과 눈을 비춰주어 문득 현묘함을 더해주니 이는 선우(禪友)이다. 저물녘 바람이 성난 듯 소리를 내며 댓잎을 치고 연잎을 때리더니, 답쌓인 낙엽을 불어가 내 구슬픈 휘파람을 북돋우니 이는 호우(豪友)이다. 눈썹달은 활과 같은데 근심겨워 뜰 밖을 거니노라면 그림자는 산산이 마치 말을 건네려는 것만 같고, 맑은 빛은 내 가슴에 안기는 것만 같으니, 이는 규중우(閨中友)이다. 담장 밑에는 찬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풀 이슬 속에서 울어 마치 한 곡의 맑은 곡조를 들으며 서창에 기대어 한가로이 애기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근심을 나눌 만한 벗이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천지자연의 좋은 벗들이 온통 내 집 가운데 모여 있으니 이보다 즐거운 것은 없다. 게다가 저선생(楮先生: 종이)과 중서군(中書君:붓)을 얻어 맑은 이야기를 끝없이 펼치며 새벽까지 지샐 수 있다면 어찌 적막함을 근심하겠는가.
夜窓獨坐, 顧榮凄凉, 苦無良友共話. 忽大悟曰: 天淸地曠, 浩乎茫茫, 皆我友也. 如太空無言, 照人心目, 輒增玄妙, 此禪友也; 夕風怒號, 擊竹碎荷, 敗擁葉颼飅 助我悲嘯, 此豪友也: 眉月一彎, 哨然步庭外, 影珊珊如欲語, 淸光投我懷抱, 此閨中友也; 墻根寒蛩, 啾啾草露中, 如一部淸商樂, 佐西窓閑話, 此言愁友也. 審是天地自然良友, 悉集堂中, 莫樂于此矣. 再得楮先生中書君諸公, 淸談娓娓, 直可破曉, 何愁寥落. (산화암청어)156
[輒 : 문득 첩 碎 : 부술 쇄 擁 : 안을 옹 颼 : 바람소리 수 飅: 바람소리 류 嘯 : 휘파람 소 蛩 : 귀뚜라미 공 矣 : 어조사 의 娓 : 유순할 미 曉 : 새벽 효 寥 : 쓸쓸할 료]
少年讀書, 如隙中窺月 ;
中年讀書, 如庭中望月 :
老年讀書, 如臺上玩月.
皆以閱歷之淺深,
爲所得之淺深耳.
젊은 시절의 독서는 틈 사이로 달을 엿보는 것과 같고,
중년의 독서는 뜰 가운데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며,
노년의 독서는 누각 위에서 달 구경하는 것과 같다.
모두 살아온 경력의 얕고 깊음에 따라
얻는 바도 얕고 깊게 될 뿐이다. (184) (隙 : 틈 극 窺 : 엿볼 규 閱 : 검열할 열)
욕망은 사람의 기운을 미혹하게 한다.
애증은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한다. 221
嗜欲使人之氣淫,
好憎使人之精勞.
덕행은 언제나 곤궁 속에서 이루어지고,
몸을 망치는 것은 대부분 뜻을 얻었을 때이다. 249
成德每在困窮,
敗身多因得志
열린 문으로는 나가려 하지 않고 창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이여.
백 년 간 문 종이를 두드려본들 언제나 나가볼 기약 있을꼬.
空門不出去 投窓也大痴
百年鑽古紙 何日出頭期 (鑽 끌 찬)
옛사람은 말했다.
“한 마음으로는 만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지만,
두 마음으로는 함 가지 일도 처리할 수가 없다.”
나는 말한다.
“한 마음으로는 만 명의 벗과 사귈 수 있어도,
두 마음으로는 한 사람의 벗도 사귈 수 없다. (P15)
昔人云 : 一心可以處萬事, 二心不可以處一事
余 云 : 一心可以交萬友, 二心不可以交一友
옳다 그리다 싸우는 도가니 속에서 사람들은 입을 쓰지만
나는 귀를 쓰면서 얼마간 참아내며 생각해보고 나서 다시 말한다.
그러면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없고 재앙이나 근심이 미치지 않는다. (p18)
是非窩裏, 人用口,
我用耳, 忍耐幾分, 想想再說,
則事無差謬, 禍患不及 [窩 : 움집 와 ]
배우는 사람은 얼마간 조심하여 삼가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또한 약간은 시원스런 흥취를 지닐 필요가 있다.
만약 한결같이 조심하고 삼가며 청고하기만 하다면
이는 가을날의 매서움만 있지 봄날의 생기는 없는 것이니
무엇으로 만물을 발육시키겠는가? (p28)
學者有段競業的心思,
又要有段潚洒的趣味 (潚: 빠를 숙, 깊고 맑을 축 洒: 씻을 세, 뿌릴 쇄, 엄숙할 선, 험할 최)
若一味斂束淸若, [斂 : 염할 염(렴)]
是有秋殺無春生
何以發育萬物
나를 망하게 하는 사람은 바로 나이다.
사람이 스스로 망하지 않는데
뉘 능히 그를 망하게 하라. (p30)
亡我者我也,
人不自亡,
誰能亡之
일이 없을 때일수록 언제나 마음을 잘 간직하여 조심조심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는 듯이 해야 한다.
일이 있을 때는 도리어 이 마음을 놓아두어 태평하게 아무 일 없는 듯이 해야 한다. (p33)
無事時常照管此心, 競競然若有事,
有事時却放下此心, 坦坦然若無事
산이 고요하매 한낮에도 밤과 같고,
산이 담박하니 봄인데도 가을 같고,
산이 텅 비고 보니 따뜻해도 추운 것 같고,
산이 깊으니 개었어도 비 오는 듯하다. . (p72)
山靜晝亦夜, 山淡春亦秋
山空暖亦寒, 山深晴亦雨
사람이 벽이 없으면 더불어 사귈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심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흠이 없으면 더불어 사귈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진기가 없는 까닭이다. (p114)
人無壁, 不可興交, 以其無深情也
人無疵, 不可與交, 以其無眞氣也 疵: 허물 자, 노려볼 제, 앓을 새
달팽이가 벽을 타고 올라감은 체액이 마르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는다.
탐욕스런 사람이 이익을 구함은 제 몸이 죽기 전에는 그치지 않는다. (p126)
蝸牛升壁, 涎不干不止, (蝸: 달팽이 와, 蝸: 침 연)
貪人求利, 身不死不休
눈에 티가 들어가서는 견딜 수 없고,
이 사이에 조그만 것이 끼어도 참을 수가 없다.
내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음속에 그 많은 가시를 지니고서도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단 말인가? (p132)
目不容一塵,
齒不容一芥 非我固有也,
如何靈臺內 許多荊蕀, 却自容得
■ 선서(善書)
초록 보기
조선 후기에 성행한 민간도교의 선서는 당대 사회의 동요에 대응하는 사상계·종교계의 대안의 하나였다. 경기도 양주 불암사에서 간행된 한문본 『增訂敬信錄』(1795)과 언해본 『경신록언셕』(1796)은 청나라에서 가장 유행한 선서인 『경신록』을 저본으로 간행된 조선 최초의 선서이다. 『증정경신록』은 역대의 중요한 선서와 권선문을 찬집한 선서의 종합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여기에는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교리를 비롯하여 생명윤리와 생활의학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경신록언셕』은 『증정경신록』에서 민간에서 요긴하게 쓰일 만한 내용을 뽑고, 여기에 「행불비전공덕례」와 「공과격찬요」 등 功過格 계통의 선서를 補入하여 언해한 책이다. 『경신록』이 사찰에서 간행된 것은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라는 주제가 불교와 합치되기 때문이며, 특히 조선 후기 사찰의 주요 독서 대상이었던 『명심보감』과 내용상 공통점이 있어 『경신록』 수용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경신록』속의 靈驗記는 선악 응험의 경험담을 敍事文 형식 속에 담아내 독자들에게 오락성과 신뢰성을 동시에 주고 있어, 이것이 선서의 민간 파급에 영향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증정경신록』과 『경신록언셕』은 선서가 대단히 성행한 고종 대1880년에 왕명으로 다시 간행·유포되었는데, 이로써 이 책들이 조선 후기 유통된 선서 중에서도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The Goodness Book of Folk Taoism was widely read during the late Joseon was one of the alternatives to thought and religion to cope with the social unrest of the time. JeungjungGyeongsinrok(增訂敬信錄, 1795) published in Bulamsa, Yangju, Gyeonggi-do and the Korean annotation version, Gyeongsinrokeonseok(1796) was the first Goodness Book in the Joseon based on Gyeongsinrok, Goodness Book that was most popular in the Qing dynasty. Gyeongsinrok has its high value as a collection of Goodness Books compiling cardinal chronicles of Goodness Books with didactic writings. Various contents of living ethics and living medicine as well as doctrines of `encouraging good and punishing evil` and `retributive justice` are in Gyeongsinrok. Gyeongsinrokeonseok is a book that has the content educed from Gyeongsinrok and requisite to the folk with Korean annotations supplemented with Goodness Book from the realm of Gongguoge(功過格) including Hangbulbijeongongdeokrye(行不費錢功德例) and Gongguoge-chanyo(功過格纂要) The reason that Gyeongsinrok was published in Buddhist temples was because of the subjects of `encouraging good and punishing evil` and `retributive justice` were in good accord with Buddhism, and especially for the adoption of Gyeongsinrok, helpful was the content of Gyeongsinrok common with Myeongsimbogam, one of primary reading objects in Buddhist temples in the late Joseon. In the mean time, Yeongheomgi(靈驗記) in Gyeongsinrok presented stories of experiences from `virtue and vice and retribution` in a narrative form which evoked amusement and confidence to readers, all of which are found to be an influence in far-reaching effects of Goodness Book to the folk. Gyeongsinrok and Gyeongsinrokeonseok were re-published and distributed in King Kojong in 1880 when the Goodness Book were much prevalent, and thus these books were found to be regarded as important among the Goodness Books in circulation in the late Joseon.
19세기 善書 제작과 간행 보급에 있어 조선의 편찬자들은 대중들에게 널리 읽히게 하기 위해 諺解本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삽화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초월적 존재를 경배하는 차원에서 聖像으로서 활용하기도 하며, 선악 행위와 그에 따른 인과응보를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의 일화로 기록하는 한편, 그 일화들을 한 장면 속에 묘사한 삽화를 적절하게 활용하였던 것이다. 19세기 중후반에 활발하게 제작 보급되었던 善書들에는 각종 삽화들을 풍부하게 수록해 놓음으로써 그 사상적 내용들을 보다 다양한 계층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였다. 善書의 간행 보급에 있어 삽화의 활용은 서지학, 도상서사학, 출판문화 등의 관점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19세기 선서에 수록된 삽화는 인물도상, 서사도상, 문양도상, 기타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삼강행실도류의 삽화들이 일화 중심의 서사도상에 치중되었던 반면에, 善書 수록 삽화는 경배 대상으로서의 신적 존재를 초상화의 형태로 활용하기도 하고, 민간신앙의 기복적 성향을 반영한 부적 등의 문양을 활용하기도 하였으며, 그밖에 사당 건물, 대나무, 도장 등 다채롭게 도상을 활용하였다. 또한 중국 서적에 수록된 삽화를 복각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판각한 삽화들을 다수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삽화들은 문자 텍스트와 결합하여 조선의 토착화된 선서 제작 및 보급 유통을 더욱 촉진시켰다고 생각된다. 고종 연간 無相壇 소속 구성원들에 의해 편찬된 신형 善書는 그 제작 과정의 신이함을 여러 삽화를 통해 드러내 보임으로써, 조선에서 자체 제작한 경전으로서의 권위와 신성성을 확보하는 한편 종교적 신비 체험의 진실성을 보강해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many application methods of illustrations was appeared in goodness book(善書) in the 19th century. Goodness book focused on encouraging to do good. These books actively utilized the illustrations. I investigated goodness books which was included illustrations in late Joseon dynasty. And I had studied application method of illustrations. Application method of illustrations fall into four categories. Four categories is character, narration, pattern and etc. Until the 19th century narration illustration was usually used. But new illustrations of character and pattern was used in various ways. Some publishers of goodness book made the best use of illustrations to adore God and to pay their respects. And they utilized talisman illustrations from a religious point of view. Especially they made goodness book and illustration native to Joseon instead of reprinting Chinese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