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을 정리하다 말고 창고에 들어 있던 상자 중 하나를 열었다.
수백 통의 편지와 일기장, 그리고 빛바랜 작은 상자가 들어 있다. 작은 상자를 열었다. 끈이 없는 금메달과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아, 이것이 있었지.’
고향 집을 떠나온 지도 벌써 사십 년이 되었다.
아버지가 마흔의 중반이던 때, 육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자식이 바로 나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인 아버지는 오빠와 언니에게는 무섭게 대했지만 나는 언제나 예외였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아버지의 손에는 항상 군것질거리가 들려 있었다. 아무리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오더라도 오빠들 몰래 고사리 같은 내 양손에 왕방울 사탕을 하나씩 쥐여주셨다.
아주 가끔 어머니는 김치를 넣고 끓인 해장라면을 아버지에게만 드렸다. 라면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아버지의 것을 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곁에 유일하게 앉을 수 있었던 나는 아버지가 라면을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막내라는 특권도 있었지만, 유독 몸이 약했다. 밥 먹는 시간이 싫었고, 억지로 먹으면 바로 배탈이 났다. 달래고 어르고 해야만 몇 숟가락 먹는 게 고작이었다.
유채가 세상을 노랗게 피워내는 봄이었다. 나는 쉴새 없이 기침하였고, 고열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읍내 병원에 갔지만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던 아버지는 그 길로 택시를 불러 도시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 다섯 살이었던 내가 기억하는 거라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영화 속 한 장면뿐이다. 눈을 떴을 때 하얀 커튼이 바람결에 나풀거렸고, 누군가 건네준 우유를 맛있게 먹었었다. 바람이 참 상쾌하고 달다고 생각했다. 동네 어른들이 왜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오만원’이라고 부르는지를 시간이 꽤 지나서야 알았다. 아버지는 딸의 병원비로 논을 오만원에 팔아야만 했고, 그 후 살아난 딸을 위해 몸에 좋다는 약초를 캐서 달여 먹였다.
아버지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건강하면 좋았을 텐데 야속하게도 나는 환절기 때마다 감기를 달고 살았고, 조금만 잘 못 먹으면 며칠씩 배가 아팠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업고 동네 약방에 가서 주사를 맞히거나 약을 타서 먹였다. 딸은 주사 맞기를 엄청나게 싫어했다. 하지만 생각뿐 밖으로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히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등은 따스하고 포근한 침대처럼 달콤한 잠을 불러오는 마법 같았다.
농촌의 겨울은 휴지기(休止期)다. 아이들에게 겨울방학이 있듯 어른들도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바로 겨울이다. 농촌의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리거나 얼음이 어는 경우가 다반사다. 눈사람을 만들고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 준 썰매를 냇가로 가져가 얼음 위에 신나게 탈 수 있는 것도 겨울이 주는 선물이다.
긴 겨울이 떠나가면 보드라운 햇살이 마당에 깔린 멍석으로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 자리는 아버지와 나만의 것이었다. 아버지는 멍석 위에 가마니틀을 두고 가마니를 짰다. 아버지 옆에서 짚을 건네주며 아버지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멍석 위에 엎드려 달력으로 만든 공책에 아버지가 써 준 내 이름 석 자와 숫자를 따라 썼다.
아버지한테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매년 농한기 때마다 읍내에서 마을경연대회가 열린다. 매번 동네 어른들이 한번 나가보라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만 했던 아버지가 그 해는 가마니 짜기 대회에 나갔다.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고 오셨고, 그날 우리 집에서 동네잔치가 열렸다. 어른들 잔치는 곧 아이들 잔치다. 쉴 새 없이 부엌에서 나오는 부침개를 먹고 사카린을 탄 막걸리를 우리는 어른들 몰래 따라 마셨다. 달콤한 것이 왜 그리 잠을 몰고 오는지 마루에 큰 대자로 뻗었다. 마당에서 어른들이 장구 소리에 맞춰 춤추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날 아버지의 목에는 태양 하나가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태양이 떠오를 줄 알았다. 열 살이 되던 봄에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읍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지만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에, 그 길로 엄마는 진주시로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한 달이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집에 오시지 않았다. 어쩌다가 들리는 엄마는 무척이나 바쁘셨다.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셨다. 그러고는 황급히 병원으로 돌아가기가 바빴다.
몇 개월 후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두 다리가 없었다. 발목의 시작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끝내는 두 다리마저 절단하는 수술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엄청난 혼란과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우리는 예전처럼 돌아갔다. 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버지의 말벗이 되어 주는 것과 대소변 용기를 치우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그날도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숙제하였다. 안방에서 누워있던 아버지는 그런 딸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숙제가 끝나길 기다리던 아버지는 녹음기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빈 테이프를 카세트에 넣은 아버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집안일을 엄마와 오빠들에게 부탁하고 마지막으로 막내딸이 걱정이라는 말만 몇 번이나 되풀이하셨다. 녹음종료 버튼을 가까스로 누른 아버지는 다시 자리에 누우셨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깊은 샘물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당신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을 아셨나 보다. 거짓말처럼 며칠 후, 귀뚜라미 소리만 들리는 밤에 아버지는 조용히 떠나가셨다. 아버지가 떠나간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아버지의 입원과 몇 번의 수술로 인해서 전답은 남의 손에 넘어갔다. 오빠와 언니는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 식구들이 떠난 집에는 덩그러니 엄마와 나만 남겨져 더욱더 쓸쓸하고 허전한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혀 걸었던 신작로와 봄날 마당에서 함께한 따뜻함도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을 가장 많이 나누었던 가을도 모두 기억 속 한 장면으로 남아야만 했다.
아버지와 산 시간은 10년 하고도 몇 개월이 전부다. 갓난아이 때의 기억이 없으니 5~6년 정도다. 고향 집을 떠나면서 제일 먼저 챙긴 것이 아버지의 메달과 아버지의 음성이 들어있는 테이프였다. 삶이 고달프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꺼내 보았던 아버지의 메달은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갈 힘을 주었다. 그래서 자취방을 전전하면서도, 결혼하고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도 메달이 담긴 작은 상자는 늘 함께였다.
하얀 종이봉투에 들어있는 테이프를 꺼내 서재로 갔다. 가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노트북에서 바로 들을 수 있게 테이프를 MP3로 전환했다. 테이프는 다시 봉투에 담고, 헝겊을 가져와 메달을 닦아 상자에 도로 넣었다. 열어 둔 창문 틈으로 햇살 한 줌이 상자 위로 나비처럼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