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죽음'과 '삶'의 경계는 순간적으로 바뀌었다.
여태까진 어떻게든 산마루에 오르는 게 절실한 목표였고, '이러다 이 산중에서 혹시 죽는 거 아닌가?' 했었는데,
이제 산마루에 올라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다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는 여태까지의 고통과 불안이 훨훨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난 거니,
'이제부터는 이 상황을 즐기는(?) 일만 남은 거겠지.'
상황은 반전되고 있었다.
아직 오후 시간도 여유 있게 남은 데다 이제는 내리막이니, 나는 이 특별한(?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즐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아직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조금 전까지의 그 절박함과 비교한다면... 이제는 상황이 180도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니까.
그러다 보니, 그 무겁고 위태로웠던 발걸음도 갑자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이 높은 산에서 정말 이대로 날아갈 것 같기도 했던 것이다.
저 위에 산꼭대기가 보이지만, 그건 지금의 나에겐 그저 하나의 '높은 산' 그림의 풍경에 불과했다. 더 높다 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오르지 않으면 되니......
물론 지금까지는 산의 남쪽으로 올라왔다면 앞으론 북쪽 산자락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 길이라, 눈의 깊이가 조금 더 했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그리 위험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리고 반대편보다 발이 눈속에 깊이 빠지기도 했지만, 그건 눈길을 걷는 즐거움이었을 뿐... 이젠 공포감은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아직은 푹푹 빠지는 눈길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있는데,
엥?
까 악 까 - 악....
가까운 어디선가 갑자기 까마귀 소리가 들려왔다.
결코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둘러보니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가더니 나무 가지에 앉는 것이었다.
'저놈이 '죽음의 냄새'라도 맡은 건가?'
"야, 이놈아!"
'아무리 니가 미물이라지만, 지금 내가 죽을 것 같냐? 이제 사경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온 사람이다. 이제는 두려움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란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까짓 까마귀 소리에 그리 예민할 일도 없었겠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좀 기분이 남 달랐다.
그리고도 나는 계속해서 내리막을 걸어 내려갔다.
'근데, 누가 이런 경험을 하랴?' 하는 생각이 스쳤고,
'경험?'
나는 실소를 하고 있었다.
'내가 경험을 하고 싶어서 이런가?'
그건 아니었다.
이런 예상을 하고 시작했던 일이 아니니까.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그저 발길 따라, 맘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긴 거니까.
'어쨌거나 이제 죽을 일은 없으니, 마음껏 느껴보고 즐겨나 보자.'
어차피, 인생만사 '세옹지마'......
응달진 산의 뒤편이라 역시 눈은 덜 녹아서, 반대편보다 그만큼 더 쌓여있었다. 그렇지만 두렵다는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넘어왔던 산을 다시 바라보기도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내가 이 겨울 날에, 저 산을 올랐다가 지금 내려가고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걸어 내려오는데, 한 차가 이 눈길을 오르려다가 포기하고 돌아선 흔적을 만났다.
그 사람도 이렇게 눈이 쌓여있을 줄은 모르고 올랐다가, 중간에 겁이 나서 돌아갔을 터였다.
그런데 그것도 나에겐 하나의 안심할 수 있는 긍정적인 표시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흔적과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거니까.
그래서 다시 뒤돌아보니, 내가 넘어왔던 산은,
아, 역시 덩치가 컸다.
'참내! 겁도 없이, 저런 산을 올랐다니......'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을 여유도 생겨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눈의 양도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리고 저 아래 멀리에 민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직은 제법 거리가 남아있는 모습이라, 줌으로 잡아당겨 사진을 찍어보았는데,
그러고도 내리막길은 한참 이어졌다.
이제 눈은 길에서 사라졌고,
민가의 흔적도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내리막의 막바지엔 또 하나의 난 코스가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아무런 이정표가 없어서 능선 쪽으로 택했더니, 그게 새로 뚫어놓은 길이었던지, 땅이 굳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길이 녹아... 진흙탕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저 아래로 민가가 보이는데, 돌아갈 수도 없었다.
눈길을 걸어오느라 흠뻑 젖어서 물이 찍찍 나오던 신발엔, 황토 흙이 범벅이 돼 있었다.
'에이! 무슨 '장애물 경주(?)'하는 것도 아니고...... 좌우간 내 팔자(?)도......'
그렇게 나는 마침내 '승부'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좀 이상했다.
'그게 뜻도 그런진 몰라도, 무슨 '승부'? 이곳에 오려면 뭔가 커다란 '승부'를 위해 온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렇지만 나에겐, 마치 인생의 한 승부를 위해서 넘어온 기분이었던 것이라... 감회가 깊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태백선 기찻소리도 들려왔고, 아마 '승부역'도 가까운가 보았다.
4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리막길이기도 한 데다, 이쪽이 저쪽 올라오는 길보다는 짧은가 보았다. 아니면 지금 이곳의 해발고도가 저쪽보다 훨씬 높은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나는 산을 다 내려온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아래로 기차가 달려가고 있는 모습도 포착됐다.
깊은 계곡이었다.